[점프볼=손대범 편집인] 미 프로농구(NBA)는 폭풍 같던 트레이드 마감일이 지나고 이제 후반기를 준비하고 있다. 트레이드 기간에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 많은 변화가 일어난 만큼, 후반기 판도는 그 이상으로 요동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많은 트레이드 중 유독 잡음이 크게 일어난 곳이 있다. 바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다. 이들은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애틀랜타 호크스까지 개입된 대규모 4각 트레이드를 단행했는데, 마침 포틀랜드에서 골든스테이트로 돌아온 게리 페이튼 2세의 건강 문제가 이슈로 떠올랐다. 페이튼 2세의 코어 근육 부상이 심각해 결장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트레이드 직전까지도 경기에 출전했던 선수가 아프다니 골든스테이트 입장에서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두고 포틀랜드가 정말로 페이튼 2세에게 진통제를 투여해가며 뛰게 했는지, 그랬다면 왜 몸 상태를 정확히 알리지 않았는지를 두고 옥신각신했다. 결과적으로는 골든스테이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튼 2세를 받아들이며 ‘트레이드 취소’라는 최악의 사태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이번 일로 두 팀의 관계는 물론이고 리그 내에서 포틀랜드 구단 의료팀의 신뢰도는 심하게 금이 갔다. 그렇다면 NBA에서 트레이드 직후 메디컬 이슈로 거래가 취소된 사례는 정말 있었을까? 지난 30년간 리그에서 이슈가 됐던 ‘트레이드 취소’ 사례들을 정리했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3월 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1994년 션 엘리엇_에이즈설까지 대두됐던 건강이상설
션 엘리엇은 1990년대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해군제독’ 데이비드 로빈슨과 원투 펀치를 이루던 포워드였다. NBA 역사상 신장 이식 수술을 받고 복귀한 최초의 선수이기도 하다. 1989년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3순위에 지명된 엘리엇은 매 시즌 성장을 거듭했다. 첫 4시즌 동안 꾸준히 평균 득점이 상승했다. 1992-1993시즌에는 NBA 올스타에도 선정됐다. 하지만 수비 강화를 원했던 샌안토니오는 장고 끝에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 트레이드를 단행한다. 주가가 오른 엘리엇을 디트로이트에 내주고, 데니스 로드맨을 중심으로 선수 1명, 드래프트 지명권 2장을 추가로 받았다. 디트로이트도 로드맨이 막 엇나가기 시작한 시점이었기에 과감히 리빌딩 버튼을 누른 터였다. 그러나 엘리엇이 영 적응에 어려워하자 디트로이트는 1994년 트레이드 마감일에 그를 휴스턴 로케츠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휴스턴이 내준 대가는 로버트 오리, 맷 불라드, 그리고 2라운드 지명권 2장 등이었다. 그러나 이 트레이드는 취소됐다. 엘리엇이 휴스턴의 메디컬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검진 결과 엘리엇의 신장에 이상이 있음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사실, 트레이드가 취소됐다는 보도 이후 각종 억측이 나왔다. 그때만 해도 소셜미디어는커녕 인터넷도 없었기에 소식이 빠르지 않았다. 게다가 건강은 어디까지나 프라이버시에 해당 되어 공개도 빠르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엇이 에이즈와 같은 난치병에 걸린 것이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결과적으로 이 트레이드는 취소됐고, 엘리엇은 디트로이트에 남아 1993-1994시즌을 소화했다. 시즌 종료 직후, 디트로이트는 샌안토니오와의 ‘재거래’를 통해 엘리엇을 돌려보냈다. 일종의 ‘환불’이었던 셈이다. 엘리엇은 1995-1996시즌에 평균 20.0득점으로 커리어하이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이후 부상과 신장병으로 인해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은퇴 후 샌안토니오 스퍼스 전속 해설위원을 비롯해 대학농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편 휴스턴 입장에서는 이 트레이드가 결렬된 것이 천만다행이었을 것이다. 오리는 이후 NBA 파이널에서 ‘빅 샷’을 터트리며 팀의 2년 연속 우승을 도왔다. 공, 수에서 하킴 올라주원을 돕던 오리가 없었다면 휴스턴은 물론이고 NBA 역사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최근 NBA 드래프트를 취재 갈 때마다 가장 놀라웠던 것 중 하나는 비미국 국적 선수들의 영어 실력이었다. 마치 본인들이 언젠가는 이 무대에 설 것을 예상이라도 하고 준비해온 것처럼 영어 실력이 유창했고 발음에도 어색함이 없었다. 2015년에 만난 크리스탑스 포르징기스(현 워싱턴 위저즈)는 통역 없이도 라디오 생방송에 출연해 말솜씨를 뽐냈다. 최근 데뷔하는 선수들은 넷플릭스 드라마를 시청하고, 힙합 음악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미국화(?)가 되어 있었다. 이는 유럽 선수들이 막 NBA에 진출해 개척자 역할을 하던 시기와는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그 시기 진출했던 블라디 디박, 토니 쿠코치, 아비다스 사보니스 등은 세계무대에서 이룰 건 다 이룬 대스타였지만, NBA에서는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종종 NBA 스타들로부터 무시를 받기도 했다. 스카티 피펜과 쿠코치가 메인 볼 핸들러와 클러치 해결사 역할을 두고 자존심 대결을 펼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물론, 마이클 조던이 복귀하면서 상황이 한순간에 정리됐지만 말이다. 1993년 보스턴 셀틱스에 데뷔한 디노 라자도 쿠코치와 같은 처지였다. 유로리그 우승을 비롯해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 리그에서 MVP에 선정되고 올림픽에서도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라자는 211cm의 대형 포워드였다. 기동력 있고 슛 터치도 뛰어났다. 샤킬 오닐과 매치업됐을 때, 그를 하이포스트로 끌어내 1대1을 시도하던 기백있는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훗날 라자는 FIBA와의 인터뷰에서 “샤크는 무척 강한 선수였지만, 스피드는 내가 더 빨랐기에 적어도 그를 상대로 득점하는 것엔 자신이 있었다. 다만, 수비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동료들 도움 없이는 상대하기 힘들었다”라고 말했다)미국인은 아니지만 백인이었기에 래리 버드, 케빈 맥헤일 등 백인 스타들이 상징해온 보스턴의 스타 계보를 이을 것으로 기대됐다. 실제로 그는 NBA에서 뛰는 내내 두 자리 득점을 기록했는데, 주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맹훈련을 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본인 농구 인생에서 가장 몸이 잘 만들어졌던 시기라며 말이다. 그러나 늘 승자 입장에 있던 라자는 보스턴의 저조한 성적과 이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동료들의 루징 마인드가 못 마땅했다. 함께 미국에 건너온 토니 쿠코치가 같은 시기에 조던, 피펜과 ‘승자의 역사’를 써가는 것도 그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급기야 그는 1996-1997시즌이 끝난 뒤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강팀에서 뛰고 싶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보스턴은 그런 라자의 의도와 달리, 그를 필라델피아 76ers로 보내버린다. 필라델피아는 1991년 이후 6시즌 연속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던 약체였다. 보스턴은 라자의 대가로 ‘리틀 바클리’ 클라레스 웨더스푼과 ‘리바운드 머신’ 마이클 케이지를 받기로 했다. 그런데 트레이드가 결렬됐다. 라자의 왼쪽 무릎 슬개골이 불안하다는 이유였다. 실제로 라자는 1996-1997시즌 동안 무릎 부상으로 25경기 출전에 그쳤다. 필라델피아 팀 닥터는 라자의 부상을 염려해 테스트를 통과시키지 않았다. 결국 보스턴에 돌아오게 된 라자는 팀에 바이아웃을 요청했고, 그는 다시 유럽으로 돌아갔다. 아마도 NBA의 긴 스케줄과 계속된 패배에 지친 탓이었을 것이다. 라자는 그리스와 크로아티아를 오가며 수차례 우승컵을 더 거머쥐었다. 그가 유니폼을 벗은 것은 메디컬테스트에 불합격한지 6년이 지난 뒤였다. 훗날, 라자는 유럽 유턴에 대한 자신의 결정을 돌아보는 질문에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라며 “NBA에서 뛰고 싶다는 꿈은 이루었으니 됐다”라고 답했다.

디노 라자처럼 메디컬 테스트 불합격 후에도 승승장구한 케이스가 있는가 하면, 구단의 우려가 그대로 적중한 케이스도 있다. 은퇴한 센터, 스티븐 헌터가 그 불운의 주인공이다. 헌터는 2001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15순위로 올랜도 매직에 지명된 유망주였다. 그 시기 NBA는 신체 능력 좋고 기동력이 뛰어난 빅맨들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정통 포스트맨에 대한 로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현실적으로 그런 스킬을 지닌 종합선물세트가 부족했기에 한 살이라도 더 어리고 잘 달리는 선수들을 찾은 것이다. 헌터는 213cm이지만 포워드들처럼 빨리 달리고, 높이 뛰는 선수였다. 덕분에 블록슛과 속공-앨리웁 상황에서는 기가 막힌 장면을 남겼지만, 그 뿐이었다. 헌터는 2005년 필라델피아 76ers로 이적해 앨런 아이버슨으로부터 ‘꿀 패스’를 받으며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 그를 보며 뉴올리언스 호네츠(현 샬럿 호네츠)가 탐을 냈다. 2005-2006시즌의 일이었다. 뉴올리언스는 빅맨 뎁스가 얇아진 상황이었기에 2라운드 지명권 2장(2006, 2007)을 내주고 헌터 영입을 성사시켰다. 필라델피아는 헌터 같은 자원을 놓치는 것이 아쉬웠지만, 샐러리캡을 반드시 정리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발생한다. 뉴올리언스 의료진이 헌터의 오른쪽 무릎에 우려를 표한 것이다. 경기를 보면 속공이 발생하기 무섭게 아이버슨과 속도를 맞춰 달리고, 절묘한 랍패스를 받아 덩크를 때려 넣던 선수였기에 의아했다. 헌터와 필라델피아는 그 당시 뉴올리언스의 리포트를 받고 ‘엄청난 쇼크’를 받았다고 돌아보기도 했다. 상황은 이랬다. 뉴올리언스는 2002년 헌터가 ACL(전방십자인대)을 다친 병력을 두고 내구성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헌터는 ACL 부상으로 그시즌을 거의 소화하지 못했다). 그리고 적중해선 안 될 그 불행한 예감이 적중했다. 헌터는 2006-2007시즌에 70경기를 소화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내긴 했지만, 2007-2008시즌에 오른쪽 무릎 부상으로 19경기만을 뛰었고, 2008-2009시즌을 통째로 쉬었다. 헌터는 2009-2010시즌에 멤피스 그리즐리스로 트레이드 됐으나 이는 순전히 샐러리 덜기용이었다. 무릎 부상으로 더 이상 예년처럼 달리지 못했다. 무릎 이상으로 민감한 부분이 바로 심장이다. 심장은 생명과도 직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05년에는 로버트 트레일러, 2008년에는 쿠티노 모블리가 메디컬 테스트에서 심장 이상이 발견되어 트레이드가 취소됐다. 트레일러는 심장 문제 때문에 NBA에서 더 이상 받아주는 팀이 없어 그 이후 NBA 경력을 이어가지 못했다. 2011년, 34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모블리는 리포트를 받자마자 은퇴했다. 이처럼 메디컬 리포트는 때때로 선수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반면 예외적으로 아예 메디컬 테스트를 하지 않는 트레이드도 있다. 이미 부상을 당한 선수이고, 순수하게 샐러리 덤프용으로 트레이드를 진행했을 경우다. 2003년 데뷔한 마퀴스 다니엘스는 2011년 트레이드 마감일에 보스턴 셀틱스에서 새크라멘토 킹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당시 보스턴이 다니엘스를 내주고 받은 건 현금이었고, 새크라멘토는 그 직후 다니엘스와 계약을 해지했다. 이는 금전적인 이유로 발생한 트레이드였기에 다니엘스에 대한 검사가 필요치 않았다. 게다가 다니엘스도 심각한 목 부상을 입은 직후라 시즌아웃 된 상태였다.
케빈 듀란트, 러셀 웨스트브룩에 타이슨 챈들러? 극강의 공격력을 자랑하는 3인방에 최고의 수비 노하우를 지닌 베테랑이 합류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상상만 해도 무섭다. 2008-2009시즌 오클라호마시티 썬더는 2년째를 맞는 듀란트에 특급 신인 웨스트브룩을중심으로 팀을 빌딩하는 과정이었다. 제프 그린, 닉 칼리슨, 타보 세폴로샤 같이 궂은일에능한 자원도 많았다. 팀은 젊은 선수들을 이끌어줄 베테랑 자원으로 챈들러를 낙점, 뉴올리언스 호네츠(현 샬럿)와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조 스미스, 크리스 윌콕스, 데본 하딘 등 3명을 주고 챈들러를 받겠다는 것이다. 26살이던 챈들러는 ‘미래의’ 올-디펜시브 팀 자원으로 여겨졌던 선수였다. 매 경기 블록슛 1개 이상을 해낼 수 있었고, 두 자리 리바운드도 보장된 자원이었다. 다만 걱정거리가 하나 있다면 건강하게 한 시즌을 보낸 적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그 걱정거리가 결국 트레이드를 무산시켰다. 챈들러의 왼쪽 엄지발가락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언제든 부상 재발의 위험이 있다는 소견이 나온 것이다. 챈들러는 반발했다. 2007년에 엄지 발가락을 다쳐 수술한 적이 있지만 자신은 완쾌됐고 한 번도 통증을 못 느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트레이드는 끝내 성사되지 못했고 챈들러는 다시 팀으로 돌아왔다. 당시 뉴올리언스는 구단 사정이 썩 좋지 않았다. 트레이드도 전력 강화보다는 샐러리캡을 덜기 위한 목적이 강했고, 이를 알고 있던 크리스 폴도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챈들러는 다음 시즌, 샬럿 밥캐츠로 트레이드 되었고 이후 만개한 수비력을 앞세워 ‘올해의 수비’상을 수상하고 런던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거는 등 승승장구 했다. 만일 그가 예정대로 오클라호마시티로 갔다면 어땠을까. 팀의 성적이 달라졌다면, 제임스 하든이 뽑히는 일은 없었겠지만 더 막강한 수비를 앞세워 새로운 농구를 했을 지도 모른다.
한편 NBA에서는 만나지 못했지만 듀란트와 웨스트브룩, 챈들러는 2010년 튀르키예에서 열린 FIBA 세계선수권대회(현 농구월드컵)에서 다 같이 선발되어 금메달을 따냈다. 세 선수는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도 함께 했는데, 이때는 제임스 하든도 같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뉴올리언스는 메디컬 테스트가 아닌 NBA 총재 직권으로 트레이드가 취소되는 일도 있었다. 2011년 12월, 뉴올리언스는 라마 오덤을 받고 크리스 폴을 LA 레이커스에 내주는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이 트레이드에는 휴스턴도 관여해 케빈 마틴과 고란 드라기치, 루이스 스콜라를 뉴올리언스로 보내고, 레이커스로부터 파우 가솔을 받기로 했다. 세 팀간의 드래프트 지명권도 여러 장 포함됐다. 그러나 이 트레이드는 고인이 된 데이비드 스턴 총재에 의해 취소됐다. 스턴 총재는 ‘취소’라는 단어에 발끈했다. 애초 트레이드가 성사될 환경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정은 이렇다. 당시 뉴올리언스는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아 NBA가 일시적으로 운영에 관여하던 상황이었다. 전체 권한의 50%는 NBA가, 나머지 50%는 다른 29개팀이 갖고 있었다. 즉, 팀의 최종 의사 결정권은 스턴 총재와 29개팀 구단주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스턴 총재는 뉴올리언스가 아무런 상의없이 트레이드를 진행한 것에 격노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리그의 전력 불균형을 우려했던 구단주들이 압력을 넣었다는 뒷이야기도 있었다.

올해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가 게리 페이튼의 부상을 발견한 뒤, 내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있다. 트레이드 조건을 바꿀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 트레이드 마감일이 지난 뒤에는 불가능하다. 취소하거나 그대로 가는 수밖에 없다. 만일 취소된다면? 앞서 소개한 스티븐 헌터의 예처럼 다시 원 소속팀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무리 비즈니스 마인드가 우선이라는 NBA일지라도 선수의 서운함과 결정권자의 민망함은 존재하기 마련. 결정은 단장, 혹은 구단주가 할지라도 수습은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하물며 1대1 트레이드도 수습이 힘든데, 규모가 큰 트레이드라면 더 그럴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골든스테이트의 이번 트레이드가 완전히 취소됐다면? 그 뒤 밥 마이어스 단장과 스티브 커 감독의 입장도 애매해졌을 것이다. 트레이드 취소가 꽤 큰 파장을 일으킨 사례가 있다. 2016년 2월 18일, 휴스턴은 디트로이트, 필라델피아와 3각 트레이드를 진행했다. 휴스턴은 리투아니아 국가대표 출신 도나타스 모티유나스와 마커스 쏜튼을 디트로이트로 트레이드했다. 필라델피아는 디트로이트로부터 센터 조엘 앤서니와 2라운드 지명권을 받았고 휴스턴은 1라운드 지명권을 챙겼다. 그런데 이 트레이드는 며칠 지나지 않아 취소됐다. 모티유나스가 메디컬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던 것이다. 고질적인 등 부상 탓이었다. 디트로이트 의료진은 모티유나스의 상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대놓고 ‘프로농구선수를 오래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후문이다. 팀닥터가 이리 말하니 놀라지 않을 경영진이 있을까. 트레이드는 즉시 취소됐고, 선수들은 각자의 팀으로 돌아갔다. 진짜 스토리는 여기서 부터다. 필라델피아는 조엘 앤서니를 받기 위해 샐러리캡 정리까지 마친 상태였다. 이 과정에서 자카 샘슨을 방출했다. 201cm의 스윙맨이었던 샘슨은 애런 헤인즈처럼 가벼운 몸놀림을 바탕으로 한 미드레인지 게임이 능한 선수였다. 드래프트 되지 않은 선수였지만 바닥부터 치고 올라와 점차 비중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센터가 더 급했던 필라델피아는 앤서니의 샐러리캡을 위해 샘슨을 방출했고, 덴버 너게츠는 기다렸다는 듯 자유계약선수 시장에 나온 샘슨을 낚아챘다. 그런데 트레이드가 취소됐다. 과연 필라델피아는 샘슨을 환불(?)받을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다. 결과적으로는 필라델피아만 손해를 본 셈이었다. 이 트레이드 취소사건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당시 26살의 젊은 나이에 ‘선수 생활 불가’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 모티유나스는 놀랍게도 지금까지도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 NBA에서 받아주는 팀이 줄어들자 중국, 이탈리아 리그로 건너갔다. 2022년 1월, 모티유나스는 ‘유로리그’와의 인터뷰에서 “그들은 젊은 선수의 미래를 망쳐놨다”라며 여전히 서운한 감정이 남아있음을 밝혔다. 그는 “그로부터 6년이 지났지만 난 여전히 뛰고 있고 아직도 커리어가 더 남아있다”라고 말했다.
#사진_점프볼DB(유용우 기자), NBA 미디어센트럴,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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