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녀, 전설이 되다’ 박신자 여사가 한국 농구에 전한 진심

최창환 기자 / 기사승인 : 2025-10-02 06: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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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최창환 기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박신자컵은 창설 후 10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변화를 거듭했다. ‘제2의 박신자를 육성한다’라는 취지대로 유망주들의 성장에 힘을 쏟은 시절이 있었고, 2023년부터는 수준 높은 해외 팀도 출전하는 국제대회로 격상해 치러지고 있다.

박신자컵은 많은 변화를 거쳤지만, 한국 농구를 향한 박신자(84) 여사의 애정은 변함이 없었다. 10년 전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자신을 뛰어넘는 후배가 나오길 바란다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농구 이야기를 들려줬다.

※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10월호에 게재됐습니다.

오랜만에 부산을 방문한 소감이 궁금합니다.
부산에 처음 온 건 6·25 전쟁 때였어요. 전쟁을 피해 피난을 왔는데 9살 정도였을 거예요. 방을 구해서 살았는데 워낙 오래돼서 그 집을 찾긴 어려울 거예요. 당시 계셨던 모든 피난민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요. 이후 가족 여행 온 적도 있는데 그때와 지금의 부산은 너무 다르죠. 천국입니다.

박신자컵 현장을 찾은 건 2015년, 2023년에 이어 세 번째입니다. 앞선 두 차례 방문과 다른 점이 있다면?
부산에서 적극적으로 프로모션, 투자를 해주셨더라고요. 농구 부흥을 위해 노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유소년 농구 활성화를 위한 프로그램이 인상적이었어요. 앞선 대회에서는 이 정도 규모의 유소년 행사를 못 본 것 같아요. 5년, 10년 후 한국 농구가 아시아는 물론 세계 무대에서도 다시 경쟁력을 보여줄 수 있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굉장히 기뻤어요. 부산이 예전에는 야구로 (엄지를 치켜세우며) 이거였잖아요. 이제는 농구로 흥행하길 바랍니다.

트로피 디자인이 바뀌었습니다. 백발이었던 이전과 달리 여사님의 전성기 시절을 표현한 검은 머리가 인상적인데요.
소 해피(So Happy)! 나는 사진 보여주기 전까진 구별도 못 했는데 이렇게 보니 바뀐 부분이 확 눈에 띄네요. 젊은 시절 모습이어서 너무 마음에 들어요.

박신자컵이 10주년을 맞았습니다. 대회명을 박신자컵으로 구상하고 있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기분은 어떠셨나요?
영광이었죠. 어떤 운동선수든 그렇게 느꼈을 것 같아요. 내가 살아있는 동안 대회가 생겨서 남은 인생의 보너스를 얻은 기분이었죠. 사실 ‘정말 박신자컵이라고 쓸까?’란 생각에 반신반의하는 마음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미 대회 준비를 모두 마친 후였더라고요. 속초에서 직접 준비된 현장을 보니 정말 기뻤죠.

초창기 박신자컵은 ‘제2의 박신자를 육성한다’라는 취지에 따라 유망주들이 출전하는 대회였습니다. 2023년에 국제대회로 격상됐는데 바뀐 형식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대찬성이에요. 너무 좋은 변화죠. 이왕이면 가장 수준 높은 미국 팀도 초청하면 좋을 것 같아요. 물론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 정도로 외국팀과 경쟁하는 건 긍정적인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요. 다른나라 선수들의 경기를 보며 선수들뿐만 아니라 취재진, 팬들 모두 이 정도로 다양한 스타일의 농구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유망주들은 잘하는 선수를 흉내 내며 실력을 더 키울 수도 있겠죠. 물론 외국팀을 초청하려면 많은 분의 협조가 이뤄져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한국은 미국, 유럽에서 인기가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앞으로 더 좋은 팀들도 올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어요.

전반적인 경기력은 어땠나요?
솔직히 말하면 한국 팀은 연습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내가 선수로 뛰던 시절에 비하면 나아졌다고 해도 한국선수는 국제무대에서 신장으로 경쟁력을 가질 수 없어요. 갑자기 늘릴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그걸 메울 수 있는 건 무엇이냐. 훈련, 기술이에요. 특히 순발력이 중요해요. 내가 봤을 땐 스위치 디펜스가 더 조직적으로 이뤄져야 하고, 더블팀 이후 수비 로테이션도 더 짜임새를 갖춰야 합니다. 예를 들어 키 작은 선수가 큰 선수를 쫓아다닐 때는 어느 방향으로 패스가 나올지 예측할 수 있어야 해요. 그게 몸에 배려면 훈련을 많이 해야겠죠. 또 하나, 지금 농구는 쉽게 말하면 경제적인 농구가 아니에요. 추가 자유투 주는 상황은 만들지 말아야죠. 파울을 빠르게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스치는 듯한 파울을 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많이 했으면 합니다. 김추자, 김명자, 주희봉이 미리 공을 건드려서 차단하는 수비를 아주 잘했어요.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농구고, 그런 부분이 잘 이뤄져야 세계적인 팀들과 경쟁할 수 있습니다.

여사님은 현역 시절 어떤 플레이를 즐긴 선수였나요?

외곽에서 슛도 던지고, 패스도 할 수 있었습니다. 굳이 꼽자면 멀리서 슛 던지는 것보단 동료들 찬스를 살려주는 걸 더 좋아했어요. 피벗도 잘하고요. 패스하는 척하면서 슛하거나 자유투 얻어내는 능력도 좋았어요. 쉽게 말하면 머리 쓰는 농구를 했어요. 그래서 지금의 박신자가 됐나 봐(웃음).

농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1953년 정전(停戰) 이후 숙명여중에 입학했는데 농구가 뭔지도 몰랐어요. 아직 입학하기 전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친구랑 학교 구경 가자며 놀러 갔는데 마침 언니들이 체육시간에 슛을 던지고 있더라고요. 그러다 수업이 끝났는데 공을 두고 가서 골대 쪽으로 향했어요. 누구한테 걸리면 안 되니까 친구랑 요리조리 눈치 보면서 들어갔죠(웃음). 언니들 따라서 슛을 던졌는데 공이 그물을 가를 때 그 느낌이 너무 좋더라고요. ‘와! 너무 멋진데 이건 뭐지?’란 생각이 들었죠. 그 후 입학했는데 언니들의 우승 행사가 열렸어요. 강당에서 우승기 들고 교장선생님과 나란히 서 있는 걸 보며 나도 저기 서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죠. 농구부에 들어가려면 달리기를 잘해야 했어요. 그래서 연습을 굉장히 많이 했죠. 그전까지는 줄넘기, 공기놀이만 하던 소녀였는데 말이에요(웃음). 농구부 들어간 후에는 선생님 말씀을 굉장히 잘 따르는 선수였어요. 언니들도, 후배들도 힘든 훈련 싫증 나지 않냐고 했는데 저는 힘든 적이 없었어요. 농구가 재밌으니까 인터벌 달리기도 재밌더라고요. 뭐든 열심히 했습니다. 너무 순진한 바보였을지 모르지만, 그게 내 인생의 지침이었어요. 지금 돌아봐도 농구가 힘들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만약 농구를 안 했다면?
공부를 그렇게 했다면 뭐가 되어도 됐을지 모르지만, 공부 머리는 없었어요(웃음). 어디서 팥빵을 만들고 있을지, 부엌에서 불 때고 있을지 상상이 안 되네요. 아, 이 얘기해 드릴게. FIBA(국제농구연맹)에서 처음 명예의 전당 얘기가 나왔을 때 인터뷰를 했어요. 직접 만날 수 없어서 서면으로 진행했죠. 어떻게 하면 그렇게 농구를 잘할 수 있냐는 질문이 있었는데, 그때 전생에 둘 중 하나였을 것 같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어요. 하나는 노예. 왜냐면 노예는 다른 선택지가 없잖아요. 나는 선생님이 100번 하라고 하면 101번 훈련하는 선수였어요. 스톱이 없었죠. 또 하나는 장군, 워리어. 지는 걸 싫어했거든요. 훈련은 안 힘든데 지는 건 그렇게 속상하더라고요. 경기에서 지면 밤새 울었어요. 그렇게 비유하니 FIBA 관계자들도 웃더라고요. 거기에 부모님이 건강한 몸, 좋은 체력도 물려주셨죠. 그래서 농구를 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박신자컵 개막 전 공식 인터뷰에서 조카인 박정은 감독에 대해 “제가 봤을 때 농구는 못했어요”라고 말씀하셨던 게 화제가 됐습니다.
머리가 좋아서 힘든 건 하나도 안 하려고 했어요. 3점슛만 시도하고…(웃음). 농구는 맥이라는 게 있는데 그건 잘 짚었어요. 농구인 중 방열이라고 있잖아요.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그분이 대한민국 농구 역사에 대해 가장 많이 기록했고, 자료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을 겁니다. 나는 감독 역할은 못했어요. 잠깐 해봤는데 선수들이 꾀를 부리는 게 가장 풀 수 없는 문제였죠. ‘나는 농구하는 게 너무 재밌는데 얘네는 왜 10개 던지라고 하면 9개만 던지고 도망갈까?’, ‘이왕 30분 훈련하는 거 전력을 다해서 최상의 효과를 가져와야 하지 않을까?’ 결국 답을 못 찾았어요. 선수들이 시간만 때우려고 하는 게 너무 싫었어요. (감독은)나에게 안 맞는 자리였던 거죠. 주희봉, 이옥자가 체계적으로 잘 가르쳤다고 생각해요. 방열이 한 말도 그거였어요. 박정은 감독이 감독 역할은 잘한다고, 상대를 분석하고 작전을 짜는 건 잘한다고요. 물론 선수 시절은 비교할 수 없죠. 나는 세계선수권(현 농구 월드컵) 준우승, 그리고 MVP. 그 이상 설명이 필요할까요?(웃음)

가장 기억에 남는 후배를 꼽는다면?
솔직히 말하면, 나는 WKBL 경기를 많이 못 봐서 요새 뛰는 후배들에 대해선 잘 몰라요. 현역 시절 함께했던 동료들을 얘기할게요. 나에겐 김명자, 김추자가 최고의 동료였어요. 김명자는 작지만 굉장히 빨랐어요. 내가 리바운드해서 공을 어디에 던져주더라도 어떻게든 잡아서 레이업슛으로 연결했죠. 특히 점프 능력, 탄력이 어마어마했어요. 눈만 마주치면 내가 슛 던질지, 페이크하고 패스할 지도 다 알았죠. 김추자도 키는 작았지만 패스 능력이 대단했어요. 슛도 좋았고…. 끝내줬어. 물론 농구는 5명이 하는 거지만, 3명만 호흡이 맞아도 최고가 될 수 있거든요. 나는 운 좋게 그 선수들과 함께했어요. 주희봉도 좋은 선수였지만, 김명자와 김추자가 있었기에 박신자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덕분에 세계선수권 MVP도 받을 수 있었고요. 슈퍼스타 1명으로는 경기를 이길 수 없습니다. 아주 중요한 거니까 이 얘기는 꼭 잘 다뤄줬으면 해요.

박신자컵이 앞으로 더 발전하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결국 더 훌륭한 선수가 나와야죠. 언제 적 박신자예요. 나는 전생에 무슨 공을 세운 건지…(웃음). 나를 뛰어넘는 탑플레이어가 나와서 그 선수 이름으로 대회가 열린다면 그게 박신자컵이 생긴 것보다 더 기쁜 일일 것 같아요.

한국 여자농구와 팬들을 향한 한마디도 부탁드립니다.
내가 선수로 뛸 때는 일본에 진 적이 없어요. 딱 1경기만 무승부였죠. 그때 50대 팬들에게 팬레터도 많이 받았어요. 지금 시대에서는 말도 안 되는 얘기겠지만, “원수를 이겨줘서 고맙다”라는 내용이 많았죠. 30여 년 동안 얼마나 억압받았겠어요. 일단 이겨야 해요. 내가 좋아하는 팀이 지는 거 보러 오는 팬은 없어요. 이기는 농구를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선수를 계속 육성해야 하죠. 팬들, 관계자들 모두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에요.

박신자 여사는
숙명여중-숙명여고를 거쳐 숙명여대 영문학과, 이화여대 대학원 체육학과,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대학 대학원 체육학과를 졸업했다. 1959년 숙명여고 졸업 후 한국상업은행(우리은행 전신)에 입행했으며, 뛰어난 공적을 인정받아 종신 행원 칭호까지 부여받았다. 숙명여중 시절부터 ‘100년에 한 사람 날까 말까 한 농구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다. 1967년 세계선수권에서는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끈 것은 물론, MVP로 선정되며 세계적인 수준의 선수로 인정받았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석류장, 5·16 민족문화상도 받았다. 1982년 신용보증기금 여자농구단 창단 감독으로 지도자의 길을 걸었고, 1988 서울 올림픽에서는 조직위원회 농구 담당으로 행정과 외교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1999년 동양인 최초로 세계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2021년에는 FIBA 명예의 전당 선수 부문 헌액 대상자로도 이름을 올렸다. 현재는 미국 동부 지역의 로드 아일랜드에 거주하고 있다.

#사진_W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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