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프볼=양준민 기자] 이 선수를 보고 있자면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다. 바로 ‘희생정신과 겸손함’이다. 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임에도 그는 항상 팀을 먼저 생각한다. 실제로도 팀을 위해 벌써 여러 차례 자신의 연봉삭감을 감수하기도 했다. 또 팀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포지션 변경도 마다하지 않는 등 팀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는 오늘의 주인공이다.(*스크롤 압박이 심하니 사전에 양해를 구합니다)
이뿐이 아니다. 심지어 겸손하기까지 하다. 후배들을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는 것은 물론 자국 내의 유망주들을 위한 농구캠프개최도 마다치 않는다. 최근에는 자신의 후계자로 주목받고 있는 크리스탑스 포르징기스에게 올 여름 함께 훈련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런 겸손함과 희생정신 때문에 구단 프런트들은 물론, 아직까지도 많은 팬들은 그를 향해 열렬한 환호를 보내고 있고 또, 그가 오랫동안 코트 위에 남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쯤 되면 모두가 알았을지도 모르겠지만 필자가 소개하려는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댈러스 매버릭스의 심장, 독일병정 더크 노비츠키(38, 213cm)다.
노비츠키는 213cm의 장신임에도 탄탄한 기본기와 정확한 외곽슛을 바탕으로 리그를 호령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노비츠키의 슛타점은 274cm다. 이런 높은 타점에서 나오는 슛이다 보니 웬만한 장신선수들도 수비에 어려움을 겪는다. 또 돌파능력까지 좋아 수비수들이 붙는다면 돌파를 통해 득점을 만들기도 하는 전천후 포워드다.
이를 바탕으로 노비츠키는 지난 19년이라는 시간 동안 정규리그에서만 평균 21.8득점(FG 47.3%)을 기록할 정도로 리그 내에서 손꼽히는 득점원이다. 노비츠키는 5일 현재, 커리어 통산 29,962득점을 기록, 이는 NBA 역대 통산 득점 6위이자 현역 선수 중 1위다. 아직 정규리그 종료까지 비교적 많은 시간들이 남아있기에 올 시즌 안으로 3만 득점을 돌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NBA 역사상 3만득점 이상을 기록한 선수는 여태까지 단, 6명밖에 없었을 정도로 이는 쉽지 않은 대기록이다.
#더크 노비츠키 커리어 평균 정규리그 경기기록(4일 기준)
1,375경기 평균 35.1분 출장 21.8득점 7.8리바운드 2.5어시스트 1.8턴오버 FG 47.3% 3P 38.1%(평균 1.3개 성공) FT 87.9%(평균 5.1개 성공)
#더크 노비츠키 커리어 평균 플레이오프 경기기록(4일 기준)
145경기 평균 40.6분 출장 25.3득점 10리바운드 2.5어시스트 2.3턴오버 FG 46.2% 3P 36.5%(평균 1개 성공) FT 89.2%(평균 7.4개 성공)
이런 폭발적인 득점력과 다재다능함을 바탕으로 노비츠키는 2010-2011시즌 소속팀 댈러스를 우승으로 이끎은 물론, 노비츠키 개인은 생애 처음으로 파이널 MVP를 수상했다. 더불어 이전 2006-2007시즌에는 정규리그 MVP를 수상, 세계의 최고의 선수가 되기도 했다. 이에 많은 전문가들과 팬들은 노비츠키를 리그 역사상 최고의 스트레치형 포워드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올 시즌도 노비츠키는 5일(이하 한국시간) 현재 개막 후 32경기에서 평균 13.7득점(FG 42.9%) 6.4리바운드 1.7어시스트를 기록, 선수생활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다.

▲노비츠키의 운명을 바꾼 게쉬바인더와의 만남
독일 출신의 노비츠키는 가족들 모두가 운동가족으로 유명하다. 그의 어머니는 독일에서 농구선수로써 프로생활을 했고 그의 아버지 역시 핸드볼 선수로 활약, 세계적인 수준의 실력을 뽐내며 독일 국가대표로 활약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노비츠키의 누나도 육상선수와 야구선수로 활약한 경력이 있을 정도로 노비츠키의 가족은 타고난 운동집안이었다.
이런 유전자를 물려받은 탓에 노비츠키 역시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운동능력을 뽐냈다. 다만, 그가 처음부터 농구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노비츠키는 어린 시절 테니스와 핸드볼 그리고 축구를 좋아했다고 한다. 지금도 종종 독일 프로축구리그 분데스리가의 경기장 카메라에 잡히는 등 노비츠키의 축구사랑은 팬들 사이에서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그 예로 노비츠키는 2013년 독일 축구국가대표팀의 주전 골키퍼이자 세계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인 마누엘 노이어가 주최한 자선축구대회에 참가, 노비츠키 올스타의 주장으로 팀을 이끌기도 했다. 이날 경기는 노이어와 친구들과 노비츠키 올스타가 맞붙는 콘셉트로 열린 경기였다. 또, 노비츠키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아스널 FC의 팬인 것으로 알려졌다.(*당시 노이어는 독일 출신의 포뮬러 원의 황제, 미하헬 슈마허의 쾌유를 기원해 자선축구대회를 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또래들에 비해 큰 키를 자랑했던 노비츠키는 농구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결국, 친구들 사이에서 괴물이라 불릴 정도 갑작스럽게 키가 자랐던 노비츠키는 뢴트겐 김나지움의 농구클럽에서 농구를 시작, 1994년 2부 리그 소속이던 DJK 뷔츠부르크 입단한다. 이는 노비츠키에 있어 인생의 또 다른 전환기였다. 바로 그의 스승이자 인생의 멘토인 홀거 게쉬바인더를 만난 때가 이때였기 때문.(*김나지움은 독일의 중등교육기관으로 대학에 진학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학생들을 지도하는 곳이다)
처음 구단에 입단했을 당시, 노비츠키는 외곽보다는 인사이드에서 하는 플레이들을 주로 지도받았다. 그때는 지금처럼 슛 연습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일찍이 스트레치형 포워드로써 노비츠키의 재능을 알아봤던 게쉬바인더는 노비츠키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일주일에 적게는 2번에서 많게는 3번, 노비츠키를 따로 불러 개인훈련을 진행했다. 게쉬바인더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훈련을 진행한지 단 5분 만에 그가 얼마나 대단한 재능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노비츠키의 재능은 어마어마했다”라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당시, 게쉬바인더는 우선 노비츠키의 슈팅폼을 잡아주는 것부터 훈련을 시작했다. 이후에는 패스와 볼 핸들링 그리고 웨이트 트레이닝 등까지 농구선수로써 갖춰야 할 기본적인 자질을 모두 지도, 사실상 지금의 노비츠키가 있을 수 있었던 데는 게쉬바인더의 공이 컸다고 할 수 있다.(*물리학과 수학을 전공한 게쉬바인더는 자신이 배운 이론들을 훈련에 접목, 체계적인 훈련방안을 마련해 NBA 사무국 측에 전달하기도 했다)
농구뿐만 아니라 게쉬바인더는 이른바 중2병에 접어든 사춘기 소년 노비츠키의 바른 인격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게쉬바인더는 이를 위해 게쉬바인더는 노비츠키에게 음악 연주와 함께 문학책들을 많이 읽어볼 것을 권장하기도 했다. 또한 학업 역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노비츠키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게쉬바인더는 노비츠키가 NBA에 데뷔한 후에도 노비츠키와 함께 슛에 관해 연구하는 것은 물론, 훈련까지 함께 해왔다. 노비츠키의 전매특허인 사기더웨이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게쉬바인더의 공이 컸다. 또, 노비츠키가 부진에 빠져있을 때마다 게쉬바인더가 직접 노비츠키를 찾아가는 것은 물론, 전화로도 조언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 여름에도 게쉬바인더는 노비츠키의 부탁으로 포르징기스를 지도할 예정이다.(*사기더웨이는 노비츠키의 시그니쳐 무브로 다른 이름으로 학다리 웨이라 칭해지기도 한다)
▲유럽출신의 유망주, 유럽을 넘어 NBA 무대로 뛰어들다
이렇게 게쉬바인더의 지도 아래 성장하기 시작한 노비츠키는 독일 자국리그에서 보낸 프로 첫 시즌의 대부분을 벤치에서 보냈다. 노비츠키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비록 독일에서의 프로 첫 시즌을 벤치에서 시작했지만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던 시기였다”라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노비츠키는 이후 2년차 시즌부터는 팀의 주전 포워드로 성장, 팀의 1부 리그 승격을 이끄는 등 서서히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려가기 시작했다.(*노비츠키는 1997년 9월부터 1998년 6월까지 병역의무를 이행하며 농구공을 잠시 놓기도 했다)
독일의 현지 언론들도 연일 노비츠키의 활약상을 조명했다. 독일 국가대표팀 코치도 노비츠키의 경기를 지켜본 후 “노비츠키는 10년 혹은 15년 후 독일을 대표하는 슈퍼스타로 성장할 것이다”라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노비츠키의 활약은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실제로 스페인의 명문구단 FC 바르셀로나 리갈은 노비츠키의 영입을 추진. 하지만 노비츠키는 소속팀과의 계약은 물론, 학교교육을 마쳐야한다는 이유로 바르셀로나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후 나이키에서 주최한 농구캠프에 참가한 노비츠키는 찰스 바클리와 스카티 피펜이 보는 앞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며 두 사람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노비츠키는 바클리를 상대로 원-핸드 덩크를 성공시키기도 했다. 이에, 바클리는 캠프가 끝나고 가진 언론과 인터뷰에서 “그 소년은 농구에 관해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가 만약 NBA에 올 생각이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도울 준비가 돼있다. NBA로 올 생각이 있다면 나에게 꼭 전화주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이뿐이 아니라 1997년에는 독일 국가대표로 발탁, 국제무대에서도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노비츠키는 마침내 1998년 NBA 무대에 발을 들여놓았다. 노비츠키는 1998년 NBA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9순위로 밀워키 벅스에 지명됐다. 하지만 당시 노비츠키의 영입을 강력히 원했던 댈러스는 6순위 지명권을 밀워키에 넘기고 노비츠키를 받아오는데 성공했다. 댈러스는 6순위로 지명했던 로버트 테일러를 밀워키로 보내고 노비츠키와 함께 19순위로 지명했던 팻 게러티를 받아왔다.
당시, 노비츠키의 지명을 위해 댈러스뿐만 아니라 보스턴 셀틱스 역시 활발한 물밑작업을 벌였다. 보스턴과 댈러스 모두 감독들이 직접 발 벗고 나설 정도로 노비츠키의 리쿠르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보스턴의 경우, 릭 피티노 감독이 직접 노비츠키와 워크아웃에 참가해 노비츠키와 대화를 나눴고 그의 기량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피티노 감독은 그 자리에서 보스턴의 전설, 래리 버드와 노비츠키를 비교해 극찬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노비츠키 리쿠르팅 전쟁의 최후승자는 댈러스였다. 당시 댈러스 감독이었던 돈 넬슨의 발 빠른 수완이 노비츠키의 입단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8년 댈러스의 감독을 맡기 전까지 밀워키에서 코치생활을 했던 넬슨은 자신의 인맥들을 이용해 직접 밀워키 프런트를 설득, 결국 이와 같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10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었던 보스턴은 댈러스의 선택을 보고 노비츠키의 지명을 확신했다. 하지만 댈러스의 깜짝 트레이드에 고개를 숙여야했다.

▲스티브 내쉬와 노비츠키의 만남, 노비츠키에게 날개를 달아주다
또, 이 과정에서 넬슨 감독은 밀워키뿐만 아니라 피닉스 선즈를 트레이드에 끌어들여 삼각 트레이드를 완성, 스티브 내쉬의 영입마저 성공한다. 피닉스 시절, 제이슨 키드 등 다른 선수들에 밀려 벤치만을 달구던 내쉬였다. 하지만 이런 내쉬의 재능을 알아봤던 넬슨 감독은 부임과 동시에 그의 영입을 강력히 원했다. 내쉬 역시 자신의 입지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던 터라 내쉬의 댈러스행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댈러스는 내쉬의 영입을 위해 버바 웰츠, 마틴 무레삽, 팻 게러티를 피닉스로 보냈다)
2000년대 초반 댈러스의 공격농구를 이끌었던 노비츠키와 내쉬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고 모두가 알다시피 두 선수는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절친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두 선수가 처음부터 시너지효과를 내면서 댈러스의 공격농구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노비츠키의 경우, 댈러스에서의 첫 시즌 47경기에 출장해 평균 8.2득점(FG 40.5%) 3.4리바운드를 기록, 비교적 무난한 데뷔시즌을 보냈다.(*1998-1999시즌은 직장폐쇄로 인해 50경기 단축 시즌으로 치러졌다)
반면, 내쉬는 댈러스에서의 첫 시즌 40경기 출장 평균 7.9득점(FG 36.3%) 2.9리바운드 5.5어시스트를 기록,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시즌인 1999-2000시즌에도 부상으로 시즌 초반 25경기에 결장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댈러스의 농구 시스템에 녹아드는 모습을 보였다. 내쉬는 1999-2000시즌 56경기 출장 평균 8.6득점(FG 47.7%) 2.2리바운드 4.9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넬슨 감독은 부임 첫 시즌 노비츠키의 활용을 두고 계속해 고민을 거듭하던 모습이었다. 넬슨은 데뷔시즌 노비츠키를 파워포워드로 두고 인사이드에서만 활용하는 등 실험을 거듭했다. 잦은 포지션 변경 때문에 적응에 애를 먹었던 노비츠키는 당시에 대해 “NBA에서 첫 시즌은 매일 매일이 좌절이었다. 심지어 독일로 돌아가고픈 마음만 가득했다. 전과 달리 나의 슛은 계속해 막혔고 나를 상대한 모든 선수들은 점핑기계같이 탄력이 좋았다”라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넬슨은 2번째 시즌부터는 본격적으로 노비츠키를 스트레치형 포워드로 활용하기 시작, 스트레치형 포워드로써 노비츠키의 재능 역시 두각을 나타냈다. 노비츠키가 외곽슛뿐만 아니라 패스에도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넬슨은 이와 같은 조치를 내렸고 넬슨의 전략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댈러스 구단 역시 이때부터 노비츠키의 성장을 위해 개인과외를 붙이는 등 열과 성을 다해 노비츠키의 성장을 도왔다.
결국, NBA에서의 2번째 시즌 노비츠키는 82경기 평균 35.8분 출장 17.5득점(FG 46.1%) 6.5리바운드 2.5어시스트를 기록, 한 눈에 봐도 데뷔시즌에 비해 실력이 일취월장한 모습이었다. 데뷔시즌 평균 20.6%에 그쳤던 3점슛 성공률도 평균 37.9%(평균 1.4개 성공)로 껑충 뛰어올랐다. 이때부터 노비츠키는 매 시즌 평균 +35%의 3점슛 성공률을 기록, 3점슛을 자신의 공격옵션으로 장착했다.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노비츠키는 당해 시즌 기량발전상 후보 투표에서 2위에 그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1999-2000시즌 기량발전상은 제일런 로즈가 수상했다)
데뷔 초의 노비츠키는 지금과 달리 뛰어난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득점을 올리던 선수였다. 물론, 그때도 노비츠키는 코트 어디에서든지 슛을 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선수였다. 하지만 노비츠키는 포지션 대비 뛰어난 볼 핸들링과 운동능력으로 슛보다는 돌파 위주의 공격을 주 무기로 삼았다. 당시 노비츠키의 운동능력은 4번 파워포워드부터 3번 스몰포워드 포지션까지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같은 포지션의 케빈 가넷과 함께 리그 정상급을 자랑했다.
그리고 2000-2001시즌 그간 부진을 거듭했던 내쉬가 마침내 부활을 알리기 시작, 댈러스는 스티브 내쉬-마이클 핀리-더크 노비츠키의 빅3를 앞세워 10년 만에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다. 댈러스는 2000-2001시즌 53승 29패를 기록, 서부 컨퍼런스 5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1라운드 유타 재즈를 물리치고 세미파이널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무엇보다 댈러스의 구단주 마크 큐반이 구단과 선수들을 위해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댈러스의 공격농구가 빛을 낼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원인이었다. 큐반은 선수들이 야간훈련을 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는 것을 물론, 심지어 훈련이 끝난 선수들을 자신이 직접 운전을 해 집에 데려다주기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그가 얼마나 끔찍이 댈러스를 사랑하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많은 언론보도들을 통해 익히 잘 알려져 있다.
다시, 노비츠키의 얘기로 돌아와 내쉬가 지휘하는 공격농구 아래에서 노비츠키는 내쉬와의 환상적인 2대2플레이는 물론, 속공 시에는 언제나 맨 앞에서 달려주던 돌격대장이었다. 노비츠키는 2000-2001시즌 82경기 평균 38.1분 출장 21.8득점(FG 47.4%) 9.2리바운드 2.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또한 151개의 3점슛과 101개의 블록슛을 기록, 로버트 오리 이후 두 번째로 3점슛 +100개, 블록슛 +100개를 기록한 선수에 그 이름을 남겼다. 이런 활약으로 바탕으로 노비츠키는 생애 처음 올-NBA 써드팀에 선정됐다.
그리고 노비츠키의 활약은 플레이오프에서 더 두드러졌다. 노비츠키는 플레이오프 10경기에서 평균 23.4득점(FG 42.3%) 8.1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댈러스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 존 스탁턴과 칼 말론이 이끄는 유타에게 내리 2경기를 내주며 탈락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3차전과 4차전 2경기 연속으로 33득점을 기록한 노비츠키의 활약에 힘입어 시리즈를 원점으로 돌렸고 마지막 5차전, 33득점을 기록한 핀리의 활약에 힘입어 댈러스는 대역전극을 만들어 냈다.
이어진 텍사스 라이벌, 샌안토니오 스퍼스와의 세미파이널에서도 노비츠키는 마지막 5차전에서 42득점(FG 36.8%) 18리바운드 6스틸을 기록하는 등 전천후의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댈러스와 노비츠키는 데이비드 로빈슨-팀 던컨의 트윈타위를 막지 못해 시리즈 내내 인사이드에서 약세를 보였고 세미파이널 진출에 만족해야했다. 댈러스는 시리즈가 치러지는 동안 단 한 번도 리바운드 숫자에서 우위를 가져가지 못했고 결국 시리즈 전적 4-1로 패배했다.

2001-2002시즌에도 노비츠키의 활약은 계속 이어졌다. 노비츠키는 2001-2002시즌 개막에 앞서 댈러스와 6년간 9,000만 달러에 재계약을 맺었다. 노비츠키의 성장세는 멈출 줄 몰랐고 2001-2002시즌 76경기에서 평균 23.4득점(FG 47.7) 9.9리바운드 2.4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또, 생애 처음으로 NBA 올스타전에 초대받았고 올-NBA 세컨드팀에 선정되기도 했다. 소속팀 댈러스도 빅3가 여전한 활약을 이어가며 57승 25패를 기록, 서부 컨퍼런스 4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2시즌 연속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노비츠키는 전 시즌 말론, 던컨이라는 리그 최고의 파워포워드들과 맞대결을 펼친 데 이어 이번에는 가넷과 크리스 웨버, 두 명의 정상급 파워포워드와 맞대결을 펼쳤다. 댈러스는 2001-2002시즌에도 플레이오프 1라운드를 넘어 또 다시 세미파이널에 진출했지만 다시 한 번 서부 컨퍼런스 결승문턱에서 좌절했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 노비츠키는 가넷을 맞아 3경기에서 평균 33.3득점(FG 52.6%) 15.7리바운드를 기록, 노비츠키의 활약에 힘입어 댈러스는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를 시리즈 전적 3-0으로 가볍게 물리치고 세미파이널에 진출했다. 가넷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평균 24득점(FG 42.9%) 18.7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두 선수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 매 경기 불꽃 튀는 맞대결을 펼쳤다.
이렇게 가넷을 물리치고 세미파이널에 입성한 노비츠키와 댈러스는 당시 화려한 공격농구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밀레니엄 킹스, 새크라멘토 킹스를 만났다. 앞서 언급했듯 새크라멘토와 댈러스의 대결은 노비츠키와 웨버의 대결로도 큰 관심을 모았다. 무엇보다 두 팀 모두 화끈한 공격력을 앞세우던 팀들이었기에 시리즈 시작 전부터 많은 팬들은 재밌는 시리즈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속담처럼 예상과 달리 시리즈는 새크라멘토의 우위로 끝이 났다. 댈러스는 새크라멘토에 시리즈 전적 4-1로 패배, 2시즌 연속으로 세미파이널 진출에 만족해야만 했다. 두 팀 모두 1차전을 제외하고 매 경기 +100득점을 기록하는 화끈한 점수쟁탈전을 벌였다. 결국 이때의 플레이오프는 새크라멘토의 더 날카로웠던 창이 댈러스의 창을 제압한 시리즈였다.
그러나 댈러스와 달리 노비츠키 개인은 빛이 났다. 노비츠키는 1차전과 2차전 각각 23득점(FG 33.3%) 15리바운드, 22득점(FG 46.7%) 15리바운드를 기록, 웨버의 1대1수비를 농락했다. 이에 당시 새크라멘토의 감독을 맡고 있던 릭 아델만은 웨버의 1대1수비가 아닌 히도 터코클루를 도움수비수로 붙이면서 노비츠키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비츠키는 2001-2002시즌 플레이오프 세미파이널 5경기에서 평균 25.4득점(FG 40.2%) 11.6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실제로 3차전 노비츠키는 19득점(FG 40%) 5리바운드를 올리며 비교적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경기 종료 후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오늘 터코클루의 수비는 너무나도 짜증났다. 포스트업을 시도하는 즉시 터코클루가 내 곁으로 다가왔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오늘 경기였다"라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블라디 디박을 노비츠키의 수비수로 붙이는 등 새크라멘토는 노비츠키를 막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이어진 4차전과 5차전, 노비츠키는 두 경기 모두 +30득점을 올리며 새크라멘토의 수비를 농락했다.
이렇게 그를 막는데 도움수비가 필요할 만큼 노비츠키는 고속성장을 거듭, 내쉬를 밀어내고 점점 더 팀의 중심으로 거듭났다. 그 예로 댈러스는 노비츠키의 인사이드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수비가 좋은 센터진들을 영입하기도 했다. 노비츠키는 2002-2003시즌 80경기에서 평균 25.1득점(FG 46.3%) 9.9리바운드 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또, 2002-2003시즌 노비츠키는 유럽 선수로는 최초로 2,000득점 이상을 기록한 선수로도 이름을 남겼다.(*2002-2003시즌 노비츠키는 총 2,011득점을 기록했다)
노비츠키의 활약에 힘입어 댈러스는 정규리그 60승 22패를 기록하며 서부 컨퍼런스 3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1라운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져스를 물리치고 3시즌 연속으로 세미파이널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2전3기 끝에 전 시즌 자신들에게 좌절을 안겨줬던 새크라멘토를 물리치고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 오르기까지 두 번의 시리즈 모두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치렀던 댈러스는 선수단의 체력고갈로 인해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기지 못했다.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던컨이 이끄는 샌안토니오를 만난 댈러스는 시리즈 전적 4-2로 패배했다. 노비츠키는 2002-2003시즌 플레이오프 17경기에서 평균 25.3득점(FG 47.9%) 11.5리바운드 2.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렇게 아쉬움 속에 시즌을 마친 노비츠키는 2003-2004시즌 77경기에서 평균 21.8득점(FG 46.2%) 8.7리바운드 2.7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댈러스는 시즌 개막을 앞두고 앤트완 제이미슨과 앤트완 워커 등을 영입, 전력을 보강했다. 그러나 내쉬의 예상치 못한 부진이 이어지며 댈러스는 흔들리는 듯 했다.
하지만 노비츠키가 팀을 위기에서 구했고 결국 댈러스는 2003-2004시즌 52승 30패를 기록, 서부 컨퍼런스 5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세 시즌 연속으로 새크라멘토를 만났던 댈러스는 무기력한 경기들을 이어가며 시리즈 전적 4-1을 기록,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댈러스로선 끝끝내 내쉬가 부활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아쉬웠다.
▲홀로서기 시작한 노비츠키, 댈러스의 프랜차이즈로 우뚝 서다
그리고 2004년 여름, 댈러스는 팀의 미래를 위해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바로 내쉬와의 재계약을 사실상 포기하고 노비츠키를 새로운 팀의 중심으로 내세우는 결정을 하게 된다. 당시 댈러스는 내쉬와의 재계약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내쉬의 마음을 상하게 했고 결국 내쉬는 친정팀인 피닉스로 돌아갔다. 이에 대해 내쉬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만약, 댈러스와 큐반이 나와의 계약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나는 아마 댈러스에 남았을 것이다"라는 말로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댈러스와 큐반이 노비츠키를 팀의 미래로 낙점지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노비츠키의 가능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2003-2004시즌 내쉬의 부진을 보고 큐반이 곧 내쉬의 노쇠화가 올 것이라 전망한 것이 내쉬와의 재계약을 포기한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이는 모두가 알다시피 큐반의 실수였다.
큐반은 내쉬와의 결별 직후 곧바로 노비츠키를 중심으로 팀을 재편했다. 이에 댈러스는 노비츠키의 짝으로 수비형 센터로 주가가 높았던 에릭 뎀피어를 영입하기도 했다. 다만, 뎀피어는 부상으로 인해 2004-2005시즌 59경기에 출장하는데 그쳤다. 그럼에도 노비츠키는 이런 댈러스의 믿음에 성적으로 보답, 댈러스는 노비츠키의 활약에 힘입어 58승 24패로 서부 컨퍼런스 4위를 기록하는 등 내쉬가 없이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줬다.
노비츠키는 2004-2005시즌 78경기 평균 38.8분 출장 26.1득점(FG 45.9%) 9.7리바운드 3.1어시스트를 기록, 팀의 고공행진을 이끌었다. 수비에서도 평균 1.2스틸과 1.5블록을 기록하는 등 엄청난 존재감을 보였다. 이를 바탕으로 노비츠키는 2004-2005시즌 정규리그 MVP투표에서 내쉬와 샤킬 오닐에 이어 3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2005년 1월 19일 휴스턴 로켓츠와의 경기에서는 10,000득점을 돌파하기도 했다.
또, 노비츠키는 2004-2005시즌 총 2,032득점을 기록, 유럽 선수로는 또 한 번 +2,000득점을 기록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노비츠키는 2004-2005시즌 생애 첫 올-NBA 퍼스트팀에 선정되면서 리그를 대표하는 파워포워드로 자리매김했다. 무엇보다 노비츠키의 올-NBA 퍼스트팀 선정은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선수로는 처음 있었던 사례로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을 주기도 했다.
이어진 플레이오프에서도 노비츠키는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 노비츠키는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와 야오밍이 이끄는 휴스턴을 물리치고 세미파이널에 진출, 내쉬가 이끄는 피닉스와 만났다. 당시 내쉬는 피닉스로 돌아온 첫 시즌에 평균 15.5득점 11.5어시스트를 기록, 정규리그 MVP의 주인공이었을 정도로 댈러스에서의 모습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두 절친의 만남으로 양 팀의 대결은 큰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댈러스와 노비츠키는 피닉스에게 시리즈 전적 4-2로 패배, 아쉽게도 세미파이널에 진출에 만족해야만 했다. 노비츠키는 2004-2005시즌 플레이오프에서 평균 23.7득점(FG 40.2%) 10.1리바운드 3.3어시스트를 기록했었다. 댈러스로선 노비츠키 시대의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큰 수확을 거두며 2004-2005시즌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그리고 2005-2006시즌 노비츠키는 그토록 바라던 NBA 파이널에 진출, 생애 처음으로 우승에 도전할 기회를 갖게 됐다. 2005-2006시즌 81경기에서 평균 26.6득점(FG 48%) 9리바운드 2.8어시스트를 기록한 노비츠키는 소속팀 댈러스를 서부 컨퍼런스 4위로 이끌며 플레이오프에 진출, 플레이오프에서 멤피스 그리즐리스, 샌안토니오, 피닉스를 차례로 물리치고 NBA 파이널에 진출했다.(*2005-2006시즌 득점기록은 노비츠키의 커리어-하이기록이다)
파이널에서 샤킬 오닐과 드웨인 웨이드 콤비가 이끄는 마이애미 히트를 만난 댈러스는 첫 2경기를 승리로 장식, 우승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댈러스로선 오닐을 효과적으로 막아낸 것이 큰 효과를 봤다. 오닐은 1차전과 2차전 모두 단 5득점을 올리는데 그치며 부진했다. 반면, 댈러스는 노비츠키를 비롯해 제이슨 테리, 조쉬 하워드 등이 힘을 내며 마이애미에 우위를 가져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승리의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부진한 오닐을 대신해 웨이드가 힘을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웨이드는 3자천 42득점(FG 53.8%)을 올린 것을 시작하며 이후 6차전까지 4경기 연속 +35득점을 기록, 댈러스의 수비진을 완벽히 무너뜨리며 대역전극을 만들어 냈다.
웨이드의 득점력이 폭발하면서 견제에서 자유로워지자 오닐 역시 힘을 내기 시작했다. 댈러스도 테리-노비츠키-하워드의 삼각편대를 앞세워 넘어간 분위기를 가져오려 안간힘을 썼지만 실패, 우승의 꿈을 다음으로 미뤄야했다. 노비츠키는 생애 첫 파이널에서 평균 22.8득점(FG 39%) 10.8리바운드 2.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렇게 2004년 여름부터 댈러스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거듭난 노비츠키는 2006-2007시즌 정규리그 MVP에 선정, NBA 역사상 유럽 선수로는 최초로 MVP수상이라는 역사를 썼다. 또, 이는 2년 전 올-NBA 퍼스트팀 선정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오지 않은 첫 순수 외국인 MVP라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는 수상이었다. 그간 하킴 올라주원, 내쉬 등 非 미국출신 선수들의 MVP수상 사례가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미국에서 학업을 마친 선수들이었다.
노비츠키의 2006-2007시즌 활약상을 살펴보자면 노비츠키는 2006-2007시즌 78경기에서 평균 36.2분 출장 24.6득점(FG 50.2%) 8.9리바운드 3.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소속팀 댈러스를 서부 컨퍼런스 1위로 이끌었다. 댈러스는 2006-2007시즌 정규리그에서 67승 15패를 기록, 서부 컨퍼런스 1위에 올랐다. 이는 노비츠키를 중심으로 하워드, 테리 등 선수단이 똘똘 뭉친 결과물이었다.
이뿐이 아니라 노비츠키는 필드골 성공률 50.2% 3점슛 성공률 41.6% 자유투성공률 90.4%를 기록, 슛터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180클럽에도 가입했다. 정규리그 MVP 투표에서도 3시즌 연속 MVP에 도전하던 내쉬를 100표 차이로 따돌리는 등 노비츠키는 2006-2007시즌 정규리그를 자신의 데뷔 후 최고의 시즌으로 만들었다. 올-NBA 퍼스트팀의 한 자리 역시 당연 노비츠키의 차지였다.
다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노비츠키와 댈러스의 행복은 정규리그가 끝이었다. 1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댈러스는 8번 시드인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를 만나 시리즈 전적 4-2로 탈락, 8번 시드의 팀이 1번 시드의 팀을 잡은 첫 사례로 NBA 역사에 오명을 남겼다. 댈러스는 시리즈 내내 배런 데이비스를 막지 못하며 이와 같은 굴욕적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노비츠키도 골든 스테이트와 6차전 13개의 야투를 시도해 단 2개만을 성공시키는 등 시리즈 내내 극심한 부진에 빠졌었다. 실제로 노비츠키는 2006-2007시즌 플레이오프에서 평균 39.9분 출장 19.7득점(FG 38.3%) 11.3리바운드 2.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정규리그에서 야투성공률 50.2%를 기록한 것과 극명히 대비되는 경기력이었다. 팀의 중심인 노비츠키가 흔들리자 다른 선수들 역시 부진에 빠지는 도미노 효과가 나타난 댈러스였다.
이후에도 댈러스와 노비츠키는 꾸준한 모습을 보이며 플레이오프의 단골손님이 됐다. 댈러스는 계속해 +50승을 달성, 서부 컨퍼런스의 강호로 군림했다. 노비츠키 역시 꾸준히 평균 +20득점을 기록, 리그 정상급 파워포워드의 자리를 지켜나갔다. 올-NBA 팀의 한 자리도 항상 그의 차지였다.
그러나 정규리그의 강세와 달리 플레이오프에만 가면을 힘을 못 쓰던 댈러스와 노비츠키였다. 댈러스는 이후 세 시즌 동안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 진출한 것이 딱 한 번뿐이었을 정도로 플레이오프만 가면 작아지는 모습이었다. 이로 인해 노비츠키는 언론들로부터 새가슴이라는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생애 첫 우승, 노비츠키 댈러스의 별이 되다
하지만 결국 노비츠키는 자신의 커리어에 NBA 우승이라는 타이틀 하나를 추가했다. 바로 2010-2011시즌 소속팀 댈러스를 파이널 우승으로 이끌었던 것. 2010-2011시즌 이전의 세 시즌 동안 댈러스는 많은 변화들을 가져갔다. 우선, 팀을 파이널로 이끌었던 에이브리 존슨을 팀에서 내보내고 릭 칼라일 現 감독을 신임 감독에 앉혔다. 이에 그치지 않고 베테랑 포인트가드 제이슨 키드를 트레이드로 팀에 합류시키는 등 댈러스는 꾸준히 변화를 가져갔다.(*키드는 2007-2008시즌 도중 댈러스에 합류했다)
우승 직전 시즌인 2009-2010시즌에도 션 메리언과 카론 버틀러를 영입, 팀 로스터를 두텁게 했다. 여기에 더해 2010-2011시즌을 앞두고 타이슨 챈들러, 페자 스토야코비치를 영입, 전력보강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무엇보다 수비력이 좋은 챈들러의 영입은 댈러스의 인사이드를 두텁게 해줬을 뿐만 아니라 노비츠키에게도 공격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
물론, 댈러스가 2010-2011시즌 매번 꽃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시즌 중반 노비츠키가 부상으로 빠지며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던 댈러스였다. 하지만 결국 위기를 이겨낸 댈러스는 2010-2011시즌 57승 25패를 기록, 서부 컨퍼런스 3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이는 키드, 메리언, 스토야코비치 등 노장 선수들이 똘똘 뭉친 결과물이었다. 여기에 더해 어느덧 33살의 나이로 리그의 고참이 돼가던 노비츠키 역시 평균 23득점(FG 51.7%) 7리바운드 2.6어시스트를 기록, 여전한 기량을 과시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댈러스와 노비츠키의 진격은 계속 됐다. 댈러스와 노비츠키는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져스, LA 레이커스, 오클라호마시티 썬더를 차례대로 꺾고 마침내 파이널에서 마이애미와 또 다시 조우한다. 당시의 마이애미는 이전과 달리 르브론 제임스-드웨인 웨이드-크리스 보쉬의 빅3를 앞세워 우승을 노리고 있었다. 두 팀 모두 파이널에 올라오기 전까지 단 3패만을 기록하는 등 큰 체력소모 없이 올라왔기에 더욱 맞대결이 기대됐다.
많은 이들의 예상처럼 두 팀은 시작부터 일진일퇴의 공방을 이어갔다. 첫 경기 댈러스는 65득점을 합작한 빅3를 막지 못하고 패했다. 노비츠키도 27득점을 올렸지만 야투성공률이 38.9%에 그치는 등 효율적인 면에서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2차전 노비츠키를 비롯해 대부분의 선수들이 쾌조의 컨디션을 뽐낸 댈러스는 공방전을 이어간 끝에 마이애미에 95-93으로 승리,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노비츠키는 2차전에서 24득점(FG 45.5%) 11리바운드 4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후 다시 3차전을 내준 댈러스였지만 이들의 사전에는 더 이상 패배라는 단어는 없었다. 이어진 4차전부터 6차전을 내리 승리로 장식한 댈러스는 결국 시리즈 전적 4-2로 우승, 2005-2006시즌 준우승의 한을 풀었다. 노비츠키는 파이널 6경기에서 평균 40.4분 출장 26득점(FG 41.6%) 9.7리바운드 2어시스트를 기록, 생애 처음으로 파이널 MVP의 영광을 안았다. 특히, 노비츠키는 파이널에서 4쿼터에만 총 62득점을 기록하는 등 해결사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댈러스의 우승은 그 당시 리그의 트렌드를 전면적으로 반박했기에 많은 팬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당시의 NBA는 보스턴의 빅3와 마이애미의 빅3를 보고 알 수 있듯 리그를 대표하는 스타들이 우승을 위해 한 팀에 모여드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댈러스의 우승은 노비츠키를 비롯해 키드, 메리언 등 노장 선수들이 모여 이룬 결과물이었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물론, 이들이 전성기였다면 댈러스도 엄청난 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키드나 메리언의 경우, 이미 전성기를 지나 은퇴를 바라보고 있던 선수들이었다. 또, 노비츠키는 파이널 시리즈 내내 독감에 시달리며 몸 상태가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이때 당시 제임스와 웨이드는 독감에 걸린 노비츠키를 조롱하는 늬앙스의 제스처를 취하며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는 노비츠키의 각성을 이끌었다. 노비츠키의 사기더웨이는 고비 때마다 림을 가르며 마이애미 선수들을 좌절시켰다.
다른 선수들의 활약상을 살펴본다면 키드의 경우, 안정적인 경기운영과 재치 있는 어시스트들로 팀원들의 득점을 도왔다. 폭발적인 운동능력으로 매트릭스라는 별명이 붙은 메리언 역시 끈질긴 수비를 펼치며 제임스를 괴롭혔다. 또, 슈팅가드 테리도 고비 때마다 폭발적인 득점력을 선보이며 마이애미의 추격에 찬물을 끼얹는 등 팬들로부터 악마 테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챈들러와 J.J 바레아 등 젊은 선수들의 에너지가 더해져 댈러스는 2010-2011시즌 최후의 승자가 됐다.
자신의 생애 첫 우승에 대해 노비츠키는 “우승을 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감나지 않는다. 올 시즌 우승을 이루기까지 많은 노력을 했고 또, 여기까지 오는데 수많은 역경들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나와 우리 팀은 세계 최고가 됐다. 이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다”라는 말로 생애 첫 우승에 대한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이후에도 댈러스와 노비츠키는 서부 컨퍼런스의 중위권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며 플레이오프의 단골손님이 됐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독이 됐다. 매 시즌 좋은 성적을 거둔 반면 신인드래프트에선 상위 지명권을 얻지 못했기 때문. 이렇게 리빌딩의 적기를 놓쳤던 댈러스는 우승에 도전하기도, 플레이오프를 포기하지도 못하는 애매한 상황에 놓여 버렸다. 올 시즌도 댈러스는 5일 현재 25승 36패를 기록, 서부 컨퍼런스 8위인 덴버 너게츠를 3게임차로 추격하고 있다. 다만, 팀의 미래를 위해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댈러스의 리빌딩은 시기를 놓친 것도 있었지만 실패를 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도 모른다. 좋은 신인의 수급 대신 FA대어의 영입으로 리빌딩 방식을 선회, 2015년 여름부터 FA시장의 문을 두드리던 댈러스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5년 여름, LA 클리퍼스의 디안드레 조던과 구두로 계약을 합의했었다. 그러나 정식계약을 앞두고 조던이 변덕을 부리며 댈러스와 클리퍼스 사이에는 조던을 두고 웃지 못 할 희대의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모두가 알다시피 D-통수 사건이다.
지난해 여름에도 하산 화이트사이드, 마이크 콘리 등 굵직한 FA대어들을 노리던 댈러스였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실패로 끝이 났다. 이 과정에서 노비츠키는 팀을 위해 자신의 연봉을 스스로 삭감하기도 했다. 노비츠키는 2011년 우승 이후 매번 댈러스와 계약을 논의할 때 자진해 연봉을 삭감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여름에도 FA대어 영입에 실패했던 댈러스는 프랜차이즈 스타의 자존심을 살려주기도 결심, 노비츠키에게 2년간 4,000만 달러라는 거액의 돈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외에도 팀을 위해 스스로 파워포워드에서 센터로 포지션을 변경하는 등 희생을 아끼지 않는 노비츠키다. 또, 후배들의 성장을 위해 조언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노비츠키는 댈러스에 있어선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이는 올 시즌 노비츠키가 부상에서 돌아온 직후 달라진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는 댈러스의 모습을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노비츠키는 유럽 출신의 유망주에서 NBA를 대표하는 스타이자 댈러스의 별로 발돋움했다. 댈러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통산 최다출전, 득점, 리바운드, 야투 성공, 3점슛 성공, 자유투 성공 등 대부분 기록들의 맨 위에는 노비츠키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큐반은 “노비츠키가 은퇴하기 전까지 팀 리빌딩은 없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최근의 행보들을 보면 서서히 노비츠키 이후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 댈러스 같다. 올 시즌을 앞두고 해리슨 반즈를 영입했고 최근에는 트레이드로 널린스 노엘을 영입한 댈러스다. 여기에 더해 백코트진에선 세스 커리, 요기 패럴 등 젊은 선수들의 성장세가 돋보인다. 어느 정도는 리빌딩의 기초 공사를 시작하고 있는 중이다. 만약, 올 여름 FA시장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낸다면 다음 시즌은 올 시즌과 달리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의 댈러스일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마 마지막 시즌을 맞이한 노비츠키가 함께 할 것이다. 최근 노비츠키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나는 지난해 여름 댈러스와 2년 연장계약을 체결했고 확실히 그 자리에서 이 계약기간을 채우고 싶다라는 말을 전했다”라는 것을 시작으로 “20년이란 숫자는 엄청난 숫자이다. 더욱이 한 팀에서 20년을 보냈다는 것은 엄청난 업적이다. 이는 NBA 역사상 코비만이 해냈던 일이다. 나 또한 코비처럼 20년이란 시간을 채우고 싶다”라는 말을 전하며 다음 시즌도 현역선수로 뛸 것임을 시사했다. 부상 등의 큰 변수가 없다면 다음 시즌도 노비츠키의 모습을 코트 위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노비츠키 이전에도 토니 쿠코치, 디박 등 많은 유럽 선수들이 NBA 무대를 누볐다. 하지만 노비츠키만큼 성과를 냈던 선수는 지금까지 없었다. 이전의 선수들이 NBA라는 항로를 개척한 선구자라면 노비츠키는 항로의 종점을 도착, 항로를 완벽히 개설했던 사례라 할 수 있다. 지금도 포르징기스, 니콜라 요키치 등 많은 유럽 출신의 젊은 빅맨들이 노비츠키의 발자취를 따라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또한, 위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유로바스켓 MVP, 피파 농구월드컵 MVP 등 노비츠키는 국제무대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선수였다.
이처럼 유럽을 대표하는 유망주에서 이제는 NBA를 넘어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한 노비츠키는 다음 시즌 유종의 미를 거두고 제2의 삶을 시작할 수 있을지 댈러스의 별, 노비츠키의 남은 시간들을 응원하며 이 긴 글을 마치려 한다.
바쁘신 와중에도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남깁니다.
#더크 노비츠키 프로필
1978년 6월 19일생 213cm 111kg 파워포워드 독일 출신
1998 NBA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9순위 밀워키 벅스 지명 후 트레이드
NBA 챔피언(2011) NBA 파이널 MVP(2011) NBA 정규리그 MVP(2007) NBA 올스타 13회 선정 올-NBA 퍼스트팀 4회 올-NBA 세컨트팀 5회 올-NBA 써드팀 3회 선정 180클럽 가입(2007)
커리어 통산 29,962득점 10,766리바운드 3,469어시스트 3점슛 성공 1,751개 기록 중(*4일 기준)
#사진-나이키, NBA 미디어센트럴, 김은기 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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