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라떼는 말이야’ 한국 농구도 아시아 최강이던 시절이 있었다

최창환 기자 / 기사승인 : 2025-08-04 06: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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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최창환 기자] 8888577. 프로야구 팬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암흑기 시절 롯데 자이언츠가 남겼던 비밀번호다. 한국 남자농구도 아시아컵에서 비밀번호를 써 내려가고 있다. 2005년 카타르 대회부터 2022 인도네시아 대회까지 43733636. 8차례 대회를 치르는 동안 한 번도 결승에 오르지 못했다.

최근 입문한 팬에겐 전래동화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한국도 아시아의 호랑이라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못해도 3위였는데 이제는 4강이 최대 목표가 됐다. 넋두리는 아니다. 과거에 비하면 한국의 전력이 약해진 게 사실이지만, 일본이나 중동 국가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것도 분명하고 그들의 노력 또한 존중받아 마땅하다.

한국이라고 못 할 게 있을까. 한국이 언젠가는 예전과 같은 위용을 되찾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를 준비했다.

※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8월호에 게재됐습니다.

“신에게 기도하는 것뿐”

1960년대 아시아 최강은 필리핀이었다. 1960년 열렸던 초대 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1967년 4회 대회까지 3차례 우승을 따냈다. 1965년 대회에서만 일본에 우승을 내줬을 뿐이다. 필리핀의 독주에 제동을 걸었던 팀이 바로 한국이었다. 초대 대회 4위를 시작으로 3위-3위-2위를 기록하는 등 대회를 거듭할수록 필리핀을 위협하는 국가로 성장한 한국은 1968년 1월, 1968 멕시코 올림픽에 대비한 캐나다 전지훈련을 다녀왔다.

1960년대 대부분의 스포츠 분야가 그랬듯 풍족한 지원을 받진 못했다(물론 지금이라고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니지만…). 당시 한국은 미국의 자선단체 ‘피플 투 피플’의 초청을 받아 전지훈련을 떠날 수 있었지만, 여객기가 아닌 미군 수송기로 이동해 ‘지옥의 전지훈련’이나 다름없었다.

“돈이 없었던 시절이라 여객기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선발대 10명은 샌프란시스코 공군 비행장에 도착했고, 나를 포함한 후발대 6명은 시애틀로 이동했다. 연락을 원활하게 주고받던 시절이 아니라 겨우 밴쿠버에서 모일 수 있었다.” 신동파의 회고다.

이동하는 데에만 사흘이 걸리는 강행군을 거친 한국은 전지훈련에서 6승 11패에 그쳤지만, 성과는 대단했다. 당시만 해도 이례적이었던 전지훈련을 다녀온 후 멕시코 올림픽에 출전,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추며 팀워크를 끌어올리는 과정을 거친 덕분에 아시아 정상에 도전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을 새길 수 있었다.

신동파는 “일본, 필리핀이 적수였지만 우리는 확실한 베스트5가 있었다. 벤치멤버들도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캐나다와 미국에서의 경험은 큰 자산이 됐고, 아시아에서의 경쟁은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라고 회고했다.

한국은 김인건, 유희형, 이인표, 신동파, 김영일로 베스트5를 꾸리며 1969년 방콕 대회에 출전했다. 당시 아시아컵은 9개국이 출전해 풀리그 방식으로 순위를 가렸다. 말레이시아(92-72), 홍콩(112-38), 파키스탄(115-49), 대만(94-69), 인도(78-15)는 한국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일본도 비교적 수월하게 무너뜨렸다. 후반 유희형, 김영일의 퇴장에도 75-66으로 승리하며 우승을 위한 9부 능선을 넘었다. 마지막 상대인 필리핀은 한국을 만나기에 앞서 일본에 77-78로 패했던 터.

태국까지 93-52로 제압한 한국은 자력으로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는 상황에서 필리핀을 상대로 최종전을 치렀다. 대회 내내 ‘신사수(신이 내린 슈터)’란 별명에 걸맞은 활약을 펼쳤던 신동파는 필리핀을 상대로도 괴력을 뽐냈다. 47-47로 맞이한 후반에만 무려 31점을 퍼부으며 한국에 95-86 승리와 함께 첫 우승을 안겼다.

신동파의 결승전 최종 기록은 50점. 한국의 사상 첫 우승은 KBS 라디오 중계를 통해 전국민에게 생생히 전달됐다. 당시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 김포공항에 박정희 대통령을 포함한 500여 명의 인파가 몰려 대표팀을 맞이했다.

신동파가 영웅 대접을 받은 나라는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국을 상대로 맹활약한 신동파를 보며 필리핀 팬들이 매료됐다. 필리핀 언론은 앞다퉈 신동파의 슛 자세와 수비하는 방법 등에 대해 다뤘고, 한 전문가는 “신동파를 막는 방법은 신에게 기도하는 것뿐”이란 표현까지 썼다.

신동파는 “지인으로부터 받은 필리핀 신문 기사 제목이 ‘누가 신동파를 막을 수 있나’였다. 필리핀 최고의 스포츠스타 설문조사 1위에 오른 적도 있었다. 필리핀에서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보다 더 영웅 대접을 받았다”라며 웃었다.

실제 신동파는 필리핀에서 2000년대까지 우리나라로 예를 들면 대박이라는 의미의 신조어로 쓰였다. “내 이름이 행운이나 성공이란 의미로 쓰인다고 들었다. 골프를 치다가 퍼팅이 들어가면 ‘신동파’, 일이 잘 풀려도 ‘신동파’라고 한다더라. 필리핀의 한 선수는 이름을 ‘신동파룡’으로 계명했고 이후 슛이 더 잘 들어갔다는 얘기도 들었다.” 신동파의 말이다.

신동파의 위용을 느낄 수 있는 일화는 최근에도 있었다. 2018 아시아 퍼시픽 챌린지에 참가했던 필리핀 농구 명문 데 라살 대학은 신동파에게 원포인트 레슨을 받기 위해 다른 팀들보다 일찍 입국한 것. 은퇴 후 약 50년이 흘렀다는 걸 감안하면, 신동파라는 이름이 필리핀에서 끼친 영향력은 상상 이상이었던 셈이다. 2021-2022시즌 울산 현대모비스에서 뛰었던 론제이 아바리엔토스가 “우리 세대에서는 모르는 이름”이라고 말해 기자를 머쓱하게 만들긴 했지만….

역대 최약체? 기적을 노래하다

“중국이 버티고 있는 한 한국 농구의 아시아 정상 탈환은 어려울지도 모른다.” 약 40년 전 한 신문에 실린 헤드라인에서 알 수 있듯, 1990년대 중국은 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실력을 지닌 ‘1황’이었다. 1987년을 시작으로 1995년에 이르기까지 5회 연속 아시아컵 우승을 차지했다.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달성한 4연패를 포함하면, 18년 동안 열린 10차례 대회에서 무려 9차례 우승을 따냈다. 5연패, 4연패는 중국 외에 어떤 팀도 아시아컵에서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다.

중국이 최전성기를 구가하는 동안 유일하게 우승에 실패했던 대회(1997년)에서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은 팀이 바로 한국이었다. 놀랍게도 당시 한국의 전력은 완전체가 아니었다. ‘한국 농구 GOAT’ 논쟁에서 여전히 허재와 함께 첫손에 꼽히는 서장훈이 귀에 생긴 이상 증세로 경기를 치를 수 없었고, 현주엽은 대회 전 연습경기 도중 코뼈가 부러지며 전열에서 이탈했다.

“아시아컵 역사상 최약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서장훈, 현주엽이 모두 빠져 190cm대의 전희철(198cm), 정재근(192cm)이 센터를 맡아야 했다.” 김동광 당시 대표팀 코치의 회고다.

실제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일본에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고, 1경기 더 패하면 토너먼트 진출마저 무산되는 위기 상황에서 대만을 만났다. “일생일대의 경기다. 지면 조별리그에서 떨어지는 건데 우리는 토너먼트에 못 올라간 적이 없었다. 만약 패하면 너희들의 선수 생활에 있어 최악의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김동광 코치의 한마디가 자극이 된 걸까. 한국은 96-71 완승을 거두며 토너먼트에 진출했지만, 앞서 일본에 패했던 탓에 4강에서 만난 상대는 중국이었다. 216cm의 신장을 지닌 왕즈즈, 후웨이동 등을 앞세운 최강팀이었다. TV 중계를 맡았던 故한창도 SBS 해설위원조차 “200cm 이상만 5명이 있는 팀이라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센터가 없는 한국으로선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어려운 경기가 될 것”이라는 코멘트와 함께 중계를 시작할 정도였으니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한국의 경쟁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중국이 유독 골밑 공격에 집착한 반면, 한국은 적극적인 협력수비를 통한 실책 유도와 속공을 주무기로 내세워 대등한 승부를 펼쳤다. 전반을 36-42로 마친 한국은 후반 들어 전희철과 정재근이 3점슛까지 터뜨리며 중국의 지역방어를 무너뜨렸고, 이상민과 강동희의 속공 전개를 더해 86-72 역전승을 거두는 이변을 연출했다.

김동광 코치는 “중국이 우리를 얕잡아봤다. 신장의 우위를 의식해서인지 그날따라 골밑을 고집했는데 강동희, 이상민 손이 좀 빠르나. 다 스틸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중국을 이겨 지도자 경력을 통틀어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남은 경기”라고 돌아봤다.

일본과의 결승 역시 드라마틱했다. 한국은 강동희와 이상민이 일본의 집중 견제에 꽁꽁 묶였지만, 예상치 못했던 게임체인저의 등장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결승 전까지만 해도 역할이 그리 크지 않았던 김승기가 교체 투입돼 21점으로 깜짝 활약한 것.

“강동희, 이상민, 문경은은 다 막히고, 서장훈이나 현주엽은 없고…. ‘큰일 났다’ 싶었는데 번뜩 생각이 났다. 내가 매일 아침 웨이트 트레이닝하러 갈 때마다 김승기가 있었다. ‘준비되어 있는 친구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투입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활약하며 우승의 주역이 됐다. 상대 입장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카드였다.” 김동광 코치의 회고다.

한국은 78-76으로 앞선 경기 종료 직전 일본에 자유투 2개를 내주며 마지막 위기를 맞았지만, 1구가 실패하며 한숨을 돌렸다. 일본이 고의로 2구를 실패했지만, 강동희가 리바운드를 따내며 접전에 마침표를 찍었다. 한국이 아시아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마지막 순간이었다. 대회 MVP로 선정됐던 전희철은 “2002 아시안게임 금메달, 동양의 우승과 더불어 선수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다”라고 돌아봤고, 김동광 코치도 지도자상을 수상했다.

“중국도 해볼 만한 상대” 자신감 찾았지만…

1999년 준우승, 2001년 3위에 그친 한국은 2002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극적으로 금메달을 획득하며 아시아컵 정상 탈환을 위한 채비를 마치는 듯했지만, 부상에 발목 잡혔다. 서장훈, 현주엽, 전희철 등 금메달의 주역들이 부상으로 이탈해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하지만 2003년 대표팀 주장을 맡았던 문경은은 “아시안게임 결승 못지않게 내용이 좋았다. 중국도 붙어볼 만한 상대였고, 우리 선수들도 노력한다면 언제든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2003년 대회를 돌아봤다.

최정예 전력은 아니었지만, 조별리그를 통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한국은 1차 조별리그에서 말레이시아(103-72), 쿠웨이트(95-71), 인도(121-76)를 완파한 데 이어 2차 조별리그에서도 이란(105-81), 카타르(87-80), 카자흐스탄(99-88)을 차례대로 제압하며 4강에 안착했다.

이 과정에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었다. 삼일상고(현 삼일고)에 재학 중이었던 하승진이 생애 처음으로 성인대표팀에 선발돼 치른 대회였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만 17세에 불과했다. 하승진은 인도를 상대로 치른 1차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기회를 받았지만 파울아웃됐다.

농구 경기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개최국 중국 팬들의 조롱 섞인 야유는 고교생 하승진이 받아들이기 힘든 무게로 다가왔다. 문경은은 “파울아웃된 후 20분 동안 수건 뒤집어쓰고 펑펑 울더라. 야유하는 중국 관중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가 무서웠던 게 아닐까. (하)승진이에게 ‘여기에 우리 편은 1명도 없다. 최선을 다했고, 잘하고 있다’라며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했다”라며 회상했다.

조별리그에서 6전 전승을 거두며 4강에 진출한 한국은 중국을 만나기 전 맞이한 마지막 위기도 무사히 넘겼다. 레바논과의 4강에서 김주성이 파울트러블에 걸리며 한때 역전을 허용했지만, 연장까지 가는 혈투 끝에 85-83 신승을 거두며 4년 만에 결승 무대를 밟았다.

1997년 결승에서 김승기가 빛났다면, 2003년 결승에서는 이규섭이 중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규섭은 7개의 3점슛 가운데 5개를 넣는 등 쾌조의 슛 감각을 뽐냈고, 한국은 이규섭의 활약을 앞세워 한때 격차를 1점까지 좁혔다.

끝내 전세를 뒤집는 한 방을 만들지 못하며 96-106으로 패했지만, 문경은은 “이길 수 있는 경기였다. 만약 경기가 한국에서 열렸다면 우리가 이겼을 것이다. 좋게 말하면 중국이 홈코트 이점을 잘 살렸다. 우리 선수들이 중국의 고의적인 파울을 피해 다닐 정도였지만, 1점 차까지 추격했을 때 중국 선수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패했지만 후배들이 ‘중국을 만나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가졌다는 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대회였다”라고 말했다.

결승에서 28점을 퍼부었던 이규섭 또한 과거 점프볼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 대회는 내 농구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다. 전창진 당시 대표팀 감독님이 나를 많이 배려해 주신 덕분에 속공이나 3점슛 찬스가 많이 생겼다. 농구하면서 그렇게 즐거워했던 적이 있었나 싶다”라고 돌아봤다.

‘만리장성’ 월담에 아쉽게 실패, 다음을 기약했으나 애석하게도 2003년은 한국이 치른 마지막 아시아컵 결승으로 남아있다. 아시아 농구는 점점 경계선이 허물어지고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변방이었던 이란이 2000년대 중반부터 약 10년간 중국과 우승을 양분했고, 일본과 중동 국가들의 경쟁력이 한국을 넘어선 지도 오래됐다. 여기에 호주, 뉴질랜드까지 아시아에 편입해 한국이 넘어야 할 산은 점점 많아지고 점점 높아지고 있다.

2022년 대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동아시아 국가 모두 입상을 못했으니 꼭 한국만 처한 현실은 아니지만, 이제 더 멀어져선 안 된다. 해외무대에서 도전 중인 이현중, 여준석이 가세한 이번 아시아컵은 그간 정상권에서 멀어졌던 한국이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다. 어쩌면 당분간 이만한 기회가 없을 지도 모를 일이다. 후예들은 ‘역대 최약체’라는 혹평에도 중국, 일본을 넘어 이변을 일으켰던 선배들과 같은 저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아시아컵은?
세계선수권대회, 올림픽 출전권을 가리기 위해 1960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초대 대회가 열렸다. 1960년부터 2003년까지 공식 대회명은 ABC(Asia Basketball Conference)였고, 2005~2015년 FIBA 아시아 챔피언십(아시아선수권대회)을 거쳐 2017년부터 아시아컵이 공식 대회명으로 자리 잡았다. FIBA가 새로운 형식을 도입, 월드컵과 올림픽 예선을 겸해 대회가 열렸던 건 2015년이 마지막이었다. 한국에서는 1967년, 1995년 2차례 개최됐으며 한국은 각각 2위에 올랐다.

#사진_점프볼DB(문복주 기자), 김영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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