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10월호에 게재됐습니다.

신동파는 점프볼에서 이미 여러 차례 기획기사로 다룬 인물이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의 슈터 계보를 논할 때 빼놓아선 안 될 전설적인 존재다. 현역 시절 필리핀에서 신동파라는 이름이 복, 행운을 의미하는 신조어로 쓰이는 등 1960~70년대 한국 농구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휘문고 재학 당시 대표팀 상비군에 포함돼 화제를 모았고, 당시 최연소인 만 19세에 대표팀까지 선발됐던 신동파는 1967년 실업팀 기업은행에 입단해 1974년까지 실업팀과 대표팀을 오가며 활약했다. 1969 방콕 아시아컵에서 50점을 퍼부으며 필리핀에 충격을 안겼던 신동파는 1970 유고슬라비아 월드컵에서는 8경기 평균 32.6점으로 득점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월드컵이 끝난 후 이탈리아 프로팀으로부터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정부가 승인하지 않아 해외리그 진출은 무산됐다.
신동파가 3점슛이 없던 시절에도 높은 득점을 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단연 거리를 가리지 않고 림을 가르는 슛이었다. 당시 센터 못지않은 신장(190cm)을 지녔던 신동파는 자신만의 무기를 장착하기 위해 학창 시절 부단한 노력으로 슛 감각을 쌓았고, 이를 토대로 한국 농구 슈터 1세대로 이름을 알렸다.
“필리핀에서 나를 악착같이 막다 보니 3명이 파울아웃됐고, 그다음으로 나를 막은 선수는 센터였다. 센터는 외곽 수비가 약하니 나에겐 그때부터 중장거리슛 던지는 게 누워서 떡 먹기였다”라며 필리핀전 50점을 회상한 신동파는 “고교 시절 하루 500개씩 슛 연습을 했다. 100개를 던지면 평균적으로 90개, 컨디션 좋은 날은 99개가 들어갔다. 500개의 슛 연습을 하지 않았다면 국가대표 신동파도 없었다. 슈터에게 성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100이라면 55는 천부적인 자질, 45는 후천적인 노력에 달렸다. 사실 자유투 성공률이 70% 안팎에 머무는 KBL을 보며 답답했던 적이 많았다. 억대 연봉을 받는 선수가 자유투를 그렇게 놓친다는 건 연봉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라며 후배들을 향해 따끔한 한마디도 남겼다.
신동파는 현역 은퇴 후 여자 실업팀 태평양화학-여자대표팀 감독을 거쳐 실업 시절 SBS 농구단의 창단 감독을 지냈다. 해설위원 시절에는 3점슛 궤적을 보고 “길어요”, “짧아요”라며 귀신처럼 성공 여부를 맞히는 해설로 색다른 재미를 안겼다. 대한민국농구협회 부회장으로 재임하며 남자대표팀 단장을 맡기도 했다.

신동파의 뒤를 잇는 ‘슛도사’는 1980년대에 등장했다. 김현준과 라이벌 구도를 만들며 한국 농구의 인기를 끌어올렸던 이충희다. 이충희는 슈터로서 신장(182cm)이 큰 편은 아니었지만, 신동파 이상의 노력을 기울이며 신의 경지에 올라선 선수로 회자되고 있다.
학창 시절 하루에 1000개의 슛을 성공할 때까지 연습한 것은 물론, 스스로 성공한 슛에 점수를 매기는 훈련으로도 유명했다. 예를 들어 림을 스치지 않고 들어간 슛은 100점, 림을 스치며 들어간 슛은 70~80점이라고 자평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이처럼 피나는 노력 덕분에 1980년대 국내에서 보기 드물었던 페이드어웨이슛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많은 이들이 진짜 1000개 들어갈 때까지 연습했냐고 물어보는데 사실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1000개를 채워야 훈련을 끝냈다. 999개도 용납하지 않았다. 후배들에게 공을 받아달라고 하며 1년 정도 연습했던 것 같다.” 이충희의 회고다. 그는 이어 “슛이 잘 들어가니 갈수록 나를 막는 선수의 키가 커졌다. 스텝으로 물러나며 던지는 슛을 시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장착하게 됐다”라며 페이드어웨이슛 노하우(?)도 전했다.
현대전자 입단 후 6년 연속 득점왕, 농구대잔치 최초 통산 4000점 등 굵직한 기록을 세웠던 이충희는 국가대표팀에서도 존재감을 발휘했다. 1982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1986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브라질을 상대로 45점을 퍼부었다. 월드컵 평균 27점으로 득점 2위에 이름을 올리며 스페인 명문 레알 마드리드, NBA 댈러스 매버릭스로부터 제안을 받기도 했다. 다만, 1982 뉴델리 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에 따른 병역 특례기간(5년) 동안 해외리그에 진출할 수 없다는 규정으로 인해 뜻을 이루진 못했다.
“댈러스로부터 제의를 받았을 때 대한민국농구협회에서 규정을 풀어줬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충희의 회고다. 한국에서 은퇴한 후에는 대만에 진출, ‘신사수’라 불렸다. 이충희는 “대만 스포츠 역사상 별명에 신이 붙은 건 야구선수 1명 외에 내가 유일하다고 들었다. 신동파 선배가 필리핀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면, 나는 대만에서 영웅이었다. 택시 요금도, 음식값도 안 받을 정도였다”라고 회고했다.

삼성전자 시절 동료였던 강을준은 “자기관리가 워낙 투철했다. 승부욕이 강하다 보니 공격에 대한 욕심도 굉장히 많았다. 이충희, 허재를 능가할 수 있는 유일한 선수였다”라며 김현준을 회상했다.
김현준은 3점슛 제도가 도입된 이후 총 1407개의 3점슛을 넣으며 평균 5.9개라는 놀라운 수치를 남겼다. 돌파력도 겸비, 내외곽을 오가며 화력을 발휘한 것은 물론 거리를 가리지 않고 성공하는 뱅크슛은 김현준의 전매특허였다. KBL 역대 최다 3점슛의 주인공 문경은의 성장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광신정산고(현 광신방송예고)-연세대 직속 후배였던 문경은이 연세대 3학년 시절 일찌감치 삼성전자로 진로를 결정한 이유 역시 김현준이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고교-대학 선배인 데다 포지션도 같아서 많은 노하우를 알려주셨다. 삼성전자에 입단했을 때 선배들 눈치 안 보고 뛸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셨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라며 운을 뗀 문경은은 “사실 자유투를 뱅크슛으로 던진 것도 (김)현준이 형의 조언 덕분이었다. 슛 거리가 길다 보니 자유투 라인에 서면 거리가 짧게 느껴졌다. 현준이 형이 공에 스핀을 주면서 뱅크슛으로 던져보라고 하셨고, 100개 던져서 최소 99개 들어갈 때까지 연습한 후 뱅크슛으로 바꿨다”라고 돌아봤다.
KBL 출범 후 삼성 초대 코치, 감독대행을 맡았던 김현준은 1999-2000시즌 개막을 한 달 앞둔 1999년 10월 2일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경기도 용인 수지에 위치한 삼성 체육관으로 출근하기 위해 이용한 택시가 승용차와 충돌, 서른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짧았던 생을 마감했다. 삼성은 김현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등번호 10번을 영구결번했고, 이는 KBL 역대 최초의 영구결번 사례로 남았다(이전까지 10번을 사용했던 주희정은 1999-2000시즌에 한시적으로 30번을 썼고, 2000-2001시즌부터 줄곧 9번을 달고 뛰었다).

‘람보슈터’ 문경은은 3점슛이 도입된 이후 한국에서 가장 많은 3점슛을 성공한 인물이다. KBL에서 정규시즌 통산 610경기를 치르며 1669개의 3점슛을 터뜨렸고, 성공률은 39.5%에 달했다. 현역 2위 이정현(DB, 1168개)이 평균 2개 이상 넣으며 5시즌을 치러야 문경은의 기록을 넘어설 수 있다. 주희정의 1029경기, 5381어시스트, 1505스틸과 더불어 불멸로 남을 가능성이 높은 기록이라는 의미다.
문경은은 삼성-전자랜드(현 한국가스공사)-SK를 거치며 뛰었던 팀에서 모두 3점슛 1위에 오른 경험이 있는 등 총 5차례 3점슛 1위를 차지했다. 그만큼 오랜 기간에 걸쳐 최고의 슈터 자리를 지켜왔다. 특히 스크린을 활용해 찰나에 생기는 틈을 놓치지 않는 3점슛이 무기 가운데 하나였다.
“빅맨이 스크린을 잘 걸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드가 제 타이밍에 패스를 해주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대학 시절부터 프로에 이르기까지 좋은 가드, 빅맨들을 많이 만났다. 또한 당시 대표팀의 농구는 슈터의 찬스를 살려주는 공격이 많았다. 시대적인 혜택을 누린 세대였다고 생각한다”라고 운을 뗀 문경은은 “슈터는 배짱이 있어야 하고, 동료들로부터 신뢰를 받아야 하는 위치이기도 하다. 수비는 5명이 함께 하는 것이다. 어렵게 가져온 공격권이 슈터의 허무한 슛 시도에 날아가면 맥 빠지지 않겠나. 그래서 연습을 통해 끌어올렸던 건 슛 성공률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신뢰였다고 생각한다. 부담감도 따랐지만, 늘 슛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역할을 즐기면서 뛸 수 있었다”라고 돌아봤다.

부산 KT(현 수원 KT) 시절이었던 2013-2014시즌에는 문경은(52개)이 보유하고 있었던 자유투 연속 성공 기록(56개)을 새로 썼다. 2점 차로 뒤진 경기 종료 직전, 작전타임 도중 “3점슛 쏴도 돼요?”라는 패기를 보여준 후 3점슛에 이은 추가 자유투를 얻어내는 명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당시 “3점슛 OK! 괜찮아. 자신 있게 해!”라며 격려한 것은 물론, 전성기를 함께했던 사령탑이 전창진 감독이었다. 전창진 감독은 조성민에 대해 “이충희, 김현준 선배나 문경은과는 다른 스타일의 슈터였다. 슛 템포가 빠른 건 아니지만 돌파력도 겸비했기 때문에 상대 입장에서 수비하는 게 쉽지 않았다. 조성민의 최대 장점은 수비도 잘한다는 점이었다. 발이 빠른 건 아니지만, 많은 활동량과 위치 선정으로 약점을 보완한 선수였다”라고 평가했다.
2014년 뉴질랜드와의 평가전,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의 활약을 통해 ‘조선의 슈터’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슈터는 멘탈, 곧 자신감이 가장 중요하다. 1개 안 들어간 걸로 불안해하지 말고 ‘한 번만 걸려라’라는 마음으로 눈치 보지 말고 슛을 던져야 한다. 그다음은 슛 폼이다. 자세는 각각 다르지만, 좋은 슈터는 대부분 슛 폼도 좋았다”라며 ‘슈팅학개론’을 전한 조성민은 “대표팀은 경기가 지니는 무게감도 달랐지만, 잘하는 선수가 모여있었기 때문에 내가 잘할 수 있는 역할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뛰어난 선수들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도 빼놓을 수 없었다. 벽에 부딪히는 선수들도 있었지만, 나는 국제대회에서의 경쟁을 통해 더 성장할 수 있었다”라고 돌아봤다.

통산 3점슛은 역대 29위인 681개에 불과(?)하지만, 숫자 이상의 품격과 임팩트를 남겼던 슈터도 있다. ‘타짜’, ‘4쿼터의 사나이’라 불렸던 문태종이다. 미국인 아버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문태종은 노는 물이 달랐다.
리치몬드대를 NCAA 32강으로 이끌며 이름을 알린 문태종은 비록 NBA 입성에 실패했지만, 유럽 무대에서 최정상급 슈터로 명성을 쌓았다. 유로컵 통산 51경기에서 평균 11.6점을 기록하는 동안 3점슛 성공률이 48.3%에 달한 ‘명품 슈터’였다. 프랑스, 이탈리아, 튀르키예, 그리스 등 여러 해외리그에서 경력을 쌓는 동안 40% 이상의 3점슛 성공률을 8차례나 기록할 정도로 정교한 슛 감각을 뽐냈다. 빅맨 일변도였던 외국선수 2명 출전 시절 외국선수 자리에 문태종 영입을 추진한 KBL 팀들도 있을 정도였다.
문태종은 전성기가 훌쩍 지난 30대 중반 귀화혼혈 드래프트를 통해 KBL에 입성했다. 2010 귀화혼혈 드래프트 1순위로 전자랜드에 지명됐고, LG-고양 오리온-울산 현대모비스를 거치며 452경기 평균 25분 22초 동안 11.9점 3점슛 1.5개(성공률 37.2%) 4.1리바운드 2.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013-2014시즌 LG를 창단 첫 정규시즌 우승으로 이끌며 MVP에 선정됐고, 오리온과 현대모비스에서는 챔피언결정전 우승도 경험했다. 또한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대표팀의 마지막 퍼즐이 되어 12년 만의 금메달 획득에 공헌했다. 한국에서 쌓은 이 모든 커리어가 30대 중반부터 40대 초반에 걸쳐 만든 업적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클래스가 달랐다. 전창진 감독님이 동부(현 DB) 시절 외국선수로 영입을 추진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 정도로 전성기 시절 기량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라며 운을 뗀 조성민은 “슈터는 집중 견제를 받기 때문에 밸런스가 무너질 때가 있는데 (문)태종이 형은 코트 안팎에서 항상 차분했다. 경기에 임하는 몰입도를 보면서 왜 세계적인 레벨에서 뛰었던 선수인지 느낄 수 있었다. 말수는 적었지만, 행동으로 보여주며 인정을 받았던 선수다. 좋은 신체조건으로 스윙맨 역할을 했고, 전성기를 지나 KBL에 왔는데도 힘이 약한 게 아니었다. 슛 폼이 너무 좋았고, 상대의 타이밍을 빼앗으며 던지는 슛도 일품이었다”라고 견해를 남겼다.

포지션, 종목을 막론하고 내구성 역시 선수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에 중요한 지표로 꼽힌다. KBL 통산 3점슛 기록을 보유한 문경은이 “개인적으로는 방성윤이 참 아쉽다. 병역 혜택까지 받았기 때문에 은퇴할 때까지만 해도 내 3점슛 기록에 도전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배라고 생각했는데…”라며 아쉬움을 곱씹은 이유다.
방성윤은 외국선수와의 1대1에서도 밀리지 않을 정도의 공격력을 지녀 한때 NBA 무대까지 도전한 슈터였다. 평균 2.5개의 3점슛(성공률 38.7%)을 기록하는 등 통산 165경기만 뛰고도 3점슛 69위(433개)에 이름을 올렸다. 매 시즌 부상이 끊이지 않아 만 30세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했고, 은퇴 후에도 많은 굴곡을 거쳐 슈터 계보를 잇지 못한 사례로 꼽힌다.
전성현(정관장) 역시 슈터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지만, 최근에는 부상으로 인고의 세월을 보낸 사례다. 데뷔 초기 수비가 약점으로 꼽혀 출전시간에 제약이 따랐지만, 전성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3점슛 능력을 앞세워 정규시즌 베스트5의 자리까지 오른 슈터다.
조성원의 종전 기록(54개)을 훌쩍 뛰어넘는 76경기 연속 3점슛 성공 기록을 세우는가 하면, 통산 906개의 3점슛을 터뜨려 이 부문 11위에 올라있다. 빠르면 2025-2026시즌에 역대 9호 1000개를 돌파할 전망이다.
다만, ‘부상이 없다면’이라는 전제 조건이 따른다. 고양 소노 소속이었던 2023-2024시즌 30경기 출전에 그쳤던 전성현은 LG에서 뛴 2024-2025시즌 역시 37경기 평균 19분 23초에 머물렀다. 1.8개(성공률 34.6%)를 성공하는 등 코트에 있을 때만큼은 날카로운 면모가 여전했지만, 무릎부상 탓에 플레이오프에서는 자리를 비웠다.
전성현은 ‘불꽃슈터’라 불리며 성장했던 친정 안양 정관장으로 복귀,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전성현은 “몸은 많이 좋아졌다. 신인 시절부터 함께했던 트레이너 형들이 그대로 있고, 당시 국장님도 단장님이 됐다. 적응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환영을 받은 만큼 잘 준비해서 기대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라며 부활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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