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프볼=손대범 기자] 창간 16주년기획 역대 최고의 챔피언, 환골탈태를 이루다.
2001-2002 챔피언 대구 동양 오리온스
점프볼이 창간 16주년을 맞아 농구전문 기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역대 최고의 팀 설문에서 1위에 선정된 팀은 2001-2002시즌 대구 동양 오리온스다. 여러모로 상징적인 면이 있었다. 허재, 강동희, 이상민, 서장훈 등 ‘농구대잔치’ 세대들이 주도하던 프로농구 우승 판도를 처음으로 뒤집은 팀이기 때문이다. 물론 대구 동양에도 전희철과 김병철 등 오빠부대를 주도했던 선수들이 있었지만 그 중심에는 ‘루키’ 김승현-마르커스 힉스 콤비가 있었다. 또한 재치있는 패스와 화려한 덩크 등 빠른 공수전환에서 오는 화려한 농구로 팬들 시선을 사로잡은 것도 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요즘 말로 ‘노 답’이었던 그들의 챔피언 등극기를 다시 돌아보았다. (※ 현재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공식 명칭은 고양 오리온이나, 본 기사에서는 당시 팀명으로 표기합니다.)
2001년 3월 3일. 김진 감독대행의 표정은 어두웠다. 마지막만큼은 제대로 마쳐보고 싶었지만 팀 분위기는 그렇지 못했다. 그럭저럭 1쿼터를 잘 버텼지만 2쿼터부터 벌어지더니 110-131로 완패했다. 이 패배로 어느덧 6연패. 시즌 35번째 패배를 기록하게 됐다. 씁쓸하게 돌아서던 김진 감독대행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동양은 다음 날 1패를 더 추가하며 9승 36패로 시즌을 마쳤다. 그러나 다음 해 같은 날, 그는 더 이상 고개를 떨어뜨리지 않아도 됐다. 적진이지만 마음껏 환호하고 기뻐했다. 그들은 같은 상대에게 81-75로 이기며 정규리그 우승을 결정지었다. 1년 전 꼴찌가 챔피언이 되던 날이었다. 환골탈태. 그것도 아주 다이내믹한 변신을 일구며 KBL 판도를 흔들어 놨다.
정규리그
KCC는 4라운드까지만 해도 12승 21패로 9위에 머물던 팀이었다. 하지만 부상자가 돌아오고 팀이 맞춰지기 시작하면서 무섭게 10연승을 질주, 순식간에 9위에서 4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이른바 ‘토털농구’라 불리던 KCC의 저력에 모두가 무릎을 꿇었으나 단 한 팀만이 흔들리지 않았다. 대구 동양이었다. 동양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정규리그 우승까지 단 1승만을 남긴 상황이었기 때문. KCC가 당시 기준 KBL 최다연승 타이기록을 달성하느냐, 아니면 동양이 우승을 결정짓느냐. 그리고 최고 포인트가드였던 이상민과, 그에게 도전장을 내민 ‘풋내기’ 김승현을 두고도 매체의 관심이 집중됐다. 필자 역시 현장에 있었다. 관중석은 물론이고 취재석까지 꽉 차서 4쿼터 내내 출입구에 서서 경기를 봐야 했다. 옆 사람 말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그 시끌벅적했던 분위기도 기억이 생생하다. 결과적으로 웃으면서 코트를 떠난 팀은 대구 동양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기분 좋은 승리와 함께 정규리그 우승까지 결정지었다. 김진 감독은 눈물을 글썽였고, 한동안 하위권을 못 벗어나서 마음고생이 심했던 전희철과 김병철도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함께 농구를 해온 둘은 나란히 트로피를 들어 올린 채 그간의 설움을 씻었다. (김승현 데뷔 전까지, 동양의 승리와 패배 뒤에는 늘 두 선수에게 책임이 집중된 면이 있었다. 잘 하든 못 하든 말이다. 그 가운데 갖가지 억측도 따라다녔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2001년 3월과 2002년 3월, 동양의 그 1년 사이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김승현의 등장
동국대 김승현과 동양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김승현은 재능이 뛰어난 포인트가드였다. 하지만 그 해 1순위 후보는 아니었다. 신장이 작고 개인 공격에 있어 의문부호가 많이 붙었다. 2001년 드래프트는 누가봐도 중앙대 송영진이 1순위였다. 2순위 전형수(고려대)도 빼놓을 수 없는 자원이었다. “김진 감독이 1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었어도 김승현을 뽑았을까요? 그건 장담할 수 없었을 거예요.” 당시 프로농구에 몸담고 있던 관계자 A 씨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 부탁했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만약 김승현이 다른 감독을 만났다면? 마르커스 힉스가 아닌 다른 이를 만났다면? “알 수 없는 일이죠. (김)승현이가 그 정도 급으로 여겨진 선수는 아니니까요.”
그런데 이는 당시만 해도 많은 농구인들의 공통된 시각이었다. 원정에서 함께 방을 썼던 위성우 우리은행 감독도 그랬다. “쟤가 통할까? 그랬죠. 1라운드 때부터 소질을 보였고, 2라운드부터는 펄펄 날았어요. 그래도 생각이 빨리 안 바뀌었어요. 아무래도 상대로부터 파악이 되면 어떻게 될지 몰랐으니까요. 하지만 달랐습니다. 승현이는 자신에 대한 시각을 바꿔놨습니다. 저조차도요. 선수 생활을 하면서 벤치에 앉아있어도 즐거웠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그 친구 농구하는 걸 보면 정말 감탄사 밖에 안 나왔으니까요.”
김승현과 결승서 겨룬 석주일 해설위원(당시 SK)도 동의했다. “초반에는 ‘되겠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어요. ‘쫌 하네?’ 정도였어요.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고요. 하하.”
김승현은 코트 안팎에서 통통 튀는 스타일로 시선을 끌었다. “친화력이 좋았죠. 워낙 스타일이 자유분방하다보니 형들이 ‘군기’를 잡아보려 했는데 나중에는 결국 승현이 중심으로 돌아가더군요. 형들과 금세 어울린 거죠.” 동양 통역으로 일했으며, 지금은 안양 KGC인삼공사에서 몸담고 있는 문상운 과장의 회고다. 김승현은 과감했다. 패스 타이밍이 아닌 상황에서는 선배들의 패스 요구도 가볍게 무시(?)했다. 처음에는 답답해했던 김병철과 전희철도 김승현의
스타일에 적응한 뒤로는 수긍하기 시작했다.
“전날 자기 전에 그러더라고요. ‘형, 제가 줄께요. 저기서 기다리고만 계세요’라고요. 경기에서 그쪽으로 움직이니까 정말로 패스가 딱 맞게 오는 거에요. 패스가 귀신 같이 정확한 타이밍에 왔습니다.” 위 감독의 회상이다. 김승현은 그 시즌에 신인상과 MVP를 차지했다. 어시스트 타이틀도 김승현이 가져갔다. 신인 가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인기도 폭발적이었다. 귀여운 외모에 시원시원한 플레이에 전국이 열광했다. 점프볼도 2001-2002시즌 동안 무려 3번이나 그를 표지로 다루었다. KBL이 탄생시킨 첫 스타였다.
파트너 마르커스 힉스
“마르커스 힉스는 멤피스에서도 정말 작은 동네 출신이었어요. 가난했죠. 그래서 그런지 작은 것 하나에도 의미를 많이 부여했어요. 수훈선수에게 주는 상품권있죠? 그거 하나까지 꼼꼼하게 챙겼어요. (김진)감독님이 양복을 맞춰준 날이 기억나요. 그때 입이 귀에 걸렸어요. 어찌나 좋아하던지 그 표정이 아직도 기억나네요.” 문상운 과장의 회고다.
힉스는 김승현과 동갑이었다. ‘막내’로서의 동질감 덕분일까. 서로 잘 어울렸다. 코트에서도 서로를 필요로 했다. ‘붕붕’ 날아다니는 힉스는 김승현과 절묘한 팀워크를 보였다. 속공 상황에서 나오는 앨리웁 덩크는 동양 농구의 꽃과도 같았다.
“힉스는 IBA의 신인 선수였습니다. 거기서 신인상을 탔죠. 듀안 티크너(Duane Ticknor)코치가 힉스를 지도했는데, 그 분이 김진 감독에게 추천했어요. 사실, 그때만 해도 힉스는 기대가 그리 크지 않았어요. 조니 맥도웰 같은 선숙 득세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시즌이 시작되고는 달라졌지만 말입니다.” 힉스의 에이전트를 맡았던 비즈스포츠 서동규 대표의 말이다.
‘힉스를 추억해달라’는 질문에 많은 이들은 한결된 키워드를 내놓았다. 바로 ‘수비’였다. 팬들이 기억하는 ‘덩크왕’이 아닌, ‘블록왕’ 힉스가 더 무섭게 다가왔다며 말이다. KBL 역사를 돌아볼 때, 힉스는 블록슛을 포함한 트리플더블을 기록한 몇 안 되는 선수이기도 하다.
“딱히 수비를 잘 알고 하는 선수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블록슛이 끝내줬죠. 힉스는 돌파하는 선수를 수비자가 따라오는 것을 정말 싫어했어요. 막 화를 냈죠. ‘왜 따라와? 뚫리면 그냥 오게 둬. 내가 블록할거니까!’라고 했지요.” 위성우 감독의 말이다. 일명 ‘떡블락’ 사건의 희생양이 된 석주일도 인정했다. “1~2번 당하면 전체적으로 위축이 되는 현상이 일어나요. 워낙 탄력이 좋으니까요. 그게 바로 속공으로 연결됩니다.”
힉스 옆에는 라이언 페리맨도 있었다. 김승현과 힉스가 화려한 변신을 앞에서 이끌었다면, 페리맨은 뒤에서 궂은일로 묵묵히 공헌한 선수였다. 부친이 대학교수였던 페리맨은 순둥이 중에 순둥이였다.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일에 집중했다. 바로 리바운드였다. 신장은 198.7cm에 불과했지만 성실한 박스아웃으로 리바운드를 걷어냈다. 첫 시즌 평균 리바운드는 14.8개. 이미 공격해줄 선수가 충분했던 동양 입장에서는 페리맨의 헌신적인 마인드가 큰 힘이 됐다.
달리고, 또 달린다
양지 톨게이트를 지나 좌측으로 돌면 ‘백암’이라는 동네가 나온다. 조금 더 들어가면 연수원이 하나 있었다. 이곳이 동양의 새 숙소가 됐다. 농구에 집중하기에 좋은 부지였다. 이곳에서 챔피언의 꿈을 키웠다. 이곳은 선수단에게 대단히 소중한 장소였다. 한동안 이들은 제대로 된 전용체육관도 없이 경기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양재동 교육문화회관 체육관은 일반인도 드나들 수 있는 곳이라 집중하기가 애매한 곳이었다. 또한 ‘대관’ 일정 탓에 꾸준함도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45경기를 온전히 치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프로농구는 2001-2002시즌부터 6라운드, 54경기로 진행됐다.) 게다가 승률 20%를 간신히 유지하던 상황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김진 감독대행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2001년 1월 4일 최명룡 전 감독의 자리를 물려받아 ‘대행’ 신분으로 어렵게 시즌을 마무리 해야 했다. 사실, 토시로 저머니, 토드 버나드는 이미 KBL에서는 더 통할 것이 없는 선수들이었다. 이런 수준의 외국선수가 5명이나 2000-2001시즌을 거쳐갔다. 국내 자원도 부족했다. 김병철이 포인트가드 역할을 맡았지만 기본적으로 색깔이 맞지 않았다. 평균 득실마진이 7.9점. 팀도 11연패 늪에 빠지면서 하위권을 전전했다.
하지만 2001-2002시즌은 달랐다.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출발한 새 시즌, 그들은 ‘돌풍의 팀’이 되어 있었다. 1라운드를 7연승으로 마쳤고, 5라운드에서는 서울 SK를 꺾고 단독 1위에 올라섰다. 2라운드에서 전희철이 다치면서 주춤했지만 이내 전력을 다듬으며 상위권과 경쟁을 이어갔다. ‘높이’의 SK를 꺾은 것은 상징적인 면이 있었다. KCC의 11연승을 저지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꼴찌에서 챔피언으로 거듭나며 상복도 많이 따랐다. 김승현은 MVP와 신인상을 동시에 거머쥐었고, 어시스트와 스틸 1위에도 올랐다. 힉스는 블록슛에서, 페리맨은 리바운드를 가져갔다. 감독상은 김진 감독에게 주어졌다. 상복이 끊이지 않았다.
플레이오프에서도 거침이 없었다. 4강 상대는 1년 전 돌풍을 일으켰던 LG였다. LG는6강서 인천 SK(현 전자랜드)를 스윕하며 기세가 오른 상태. 정규리그 5위이긴 하지만 노련미에서 앞섰기에 1위팀이라 해도 쉽진 않으리란 전망이 있었다. 게다가 LG의 연고지 창원 역시 관중 열기가 뜨겁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전국구 인기를 자랑하던 김승현조차 ‘그곳에 가면 악마가 되는 것 같다’고 하소연했을 정도. 그 전망은 빗나가지 않았다.
우승 후 한동안 푹 쉬었던 탓에 감각이 떨어졌던 동양은 1차전서 김승현이 부상을 입는 악재까지 맞는다. 1차전은 90-83으로 패배. 난리가 났다. 김승현이 돌아와 2~3차전 승리를 주도했지만 다시 4차전을 LG가 잡으면서 시리즈는 장기화됐다. 운명의 5차전. 대구 실내체육관은 플레이오프 들어 가장 많은 5,608명의 관중이 입장했다. 수용인원이 5,400석 정도였으니 이쯤 되면 ‘완전매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승부는 의외로 싱겁게 결정됐다. 전반부터 무섭게 몰아친 동양은 압도적인 경기를 펼친 끝에 90-69로 챔피언결정전 진출을 확정지었다. 김승현은 15득점 8어시스트를, 힉스-페리맨-김병철은 모두 20점 이상을 올렸다. LG는 주포 조성원이 묶인 것이 치명적이었다. 리바운드 대결도 42-31로 완패였다.
천신만고 끝에 결승서 만난 SK 역시 강팀이었다. 서장훈과 조상현, 에릭 마틴 트리오가 사실상 전력의 핵이었다. 4차전까지는 서로가 한번씩 승리를 가져가는 형국이었다.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동양이 앞섰지만, 서장훈의 높이와 조상현의 외곽포도 만만치 않았다. 5차전이 좋은 예다. SK는 조상현이 김병철을 앞에 두고 던진 3점슛이 림에 빨려들어가면서 71-70으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챔프전 명승부에 빠지지 않고 회자되는 장면이다. 시리즈를 2승 3패로 밀린 동양이지만 김진 감독은 6차전만 잡으면 승산이 있다고 봤다. 6~7차전이 홈인 대구에서 열리기 때문. 게다가 SK는 에릭 마틴이 마약 문제로 휘청거리고 있었고, 찰스 존스가 사실상 전력 외로 구분되면서 이미 챔프전 초기의 전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문제는 젊은 동양 선수들의 정신력이었다. 전적이 열세인 상황에서 한 시즌 중 가장 중요한 경기를 치러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의외로 베테랑들이 잘 잡아주었다.
동양 관계자들은 당시에 대해 “김도명, 이지승, 위성우 같은 고참들이 분위기를 잘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동양은 6차전을 88-77로 잡은데 이어 7차전을 75-65로 마무리했다. 페리맨이 퇴장당하면서 ‘혹시?’하는 불안감을 조성하기도 했지만 4쿼터 김승현과 전희철이 나서서 시리즈를 마무리 지었다. 챔프전 7경기에서 평균 31.3득점 11.0리바운드 4.1블록을 기록했던 힉스는 챔프전 MVP가 됐다. 외국선수가 이 상을 받은 건 힉스가 처음이었다. 김병철은 “농구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려봤다”며 우승 소감을 전했고, 김진 감독 역시 “지난 시즌에는 최소한의 자존심까지 바닥에 떨어진 기분이었어요. 참담했죠. 그렇지만 자존심이라도 회복해야겠다는 의지 덕분에 버틴 것 같아요. 모두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투표참여자
손대범, 한필상, 곽현, 김선아, 최연길(이상 점프볼), 김태환, 김동광, 현주엽, 정용검(이상 MBC 스포츠 플러스 해설 및 캐스터), 조성원, 김기웅(이상 KBS N 스포츠 해설위원 및 캐스터), 박상준(SBS 스포츠 캐스터), 조현일, 이재범(이상 월간 루키 기자), 김우석, 손동환(이상 바스켓 코리아 기자), 박상혁(더 바스켓 기자), 노주환, 류동혁(이상 스포츠조선 기자), 최용석, 정지욱(이상 스포츠동아 기자), 이웅희(스포츠서울 기자, KBL 인터넷중계 해설위원), 김동찬(연합뉴스 기자), 박세운(CBS 노컷뉴스 기자), 박지혁(뉴시스 기자), 우충원, 서정환(OSEN 기자), 서민교(MK스포츠 기자), 김진성, 최창환(마이데일리 기자), 주건범(네이버 스포츠), 이선영(다음 미디어), 이동환(팟캐스트 '버저비터' 운영자), 김승현(해설위원)

사진_문복주 기자,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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