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외부 필진의 글로 본지의 의도와는 상관 없음을 알립니다.
대학은 방학중이다. 몹시도 무더웠던 여름이 이제 막 고비를 넘는 것 같다. 나는 매일 한국체육대학교에 나와 고적한 나의 공간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자주 생각의 매듭이 풀려나가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게 된다. 즐거웠던 기억과 후회스러운 결정, 안타까운 전언(傳言)이 한 데 버무러져 복잡한 감정에 휩쓸리기도 한다. 몇 토막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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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재학 감독 |
유재학과 전창진
지금 우리 프로농구는 유재학 감독과 전창진 감독의 시대다. 그들의 농구는 여전히 유효하고, 앞으로도 몇 차례 더 우승할 가능성이 있다. 유 감독은 장구한 시간동안 한결같은 지도력을 발휘하며 매 시즌 뛰어난 결과물을 보여준다. 명장(名將)의 타이틀이 아깝지 않다. 전 감독은 (프로농구의 여러 명장 가운데 한 사람인 안준호 감독의 말을 인용하자면) ‘선수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농구에 전력을 다하게 만드는’ 마법의 소유자다. 승부조작과 관련한 파문에 휩쓸렸지만 그 흙탕물 속에서 살아남아 프로농구 무대로 복귀했다. 보통사람은 견뎌내기 어려운 고통을 딛고 재기해 이전과 다름없는 실력을 보여주는 점은 놀랍기 그지없다. 그러나 유재학과 전창진 두 사람의 시대가 지속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종말은 의외로 가까이 와 있을지도 모른다. 농구의 ‘잔고’가 바닥난다면 유재학 감독 쪽이 먼저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는 코치가 된 뒤 한 번도 실직을 경험해 본 일이 없고, 반복해서 성공을 맛보았다. 그 결과 지도자로서 도전할 목표가 많지 않다. 현실적으로 자기 자신이 유일한 목표가 되어 버렸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끔찍한 삶의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에게 끝없는 소모를 강요한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많은 노력과 집중을 요구하게 된다. 그런데 충전과 업데이트를 할 시간이나 기회는 부족하고, 의지는 믿기 어려운 것이라 언제든 가파르게 우하향(右下向)할 수 있다. 그렇게 따지면 전창진 감독은 원하지 않았던 휴지기가 전화위복(轉禍爲福)일지 모른다. 에너지를 모으고 미래를 설계하는 기회를 주었으니까. 그의 능력과 야망의 크기를 감안하면 갈 길이 멀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해는 떨어지고, 저들의 그림자는 시간이 갈수록 길어진다. 나는 고즈넉이 지켜보고 있다. 그들의 여름을, 그리고 다가오는 계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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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인선 전 감독 |
최인선
전창진과 유재학의 시간 이전에 최인선과 신선우의 시간이 있었다. 김동광 감독과 안준호 감독이 일정한 업적을 이루었지만 압도적 이미지를 남기지는 못했다. 나는 최인선 감독을 우리 프로농구 초창기 역사를 장식한 대감독이라고 평가한다. 최 감독의 업적은 신선우 감독과 쌍벽을 이룬다. 실업농구(농구대잔치)와 프로농구 무대에서 모두 우승을 기록했다. 실업시절부터 뛰어난 선수를 거느린 기아에서뿐 아니라 신생팀의 티를 벗지 못한 프로농구 SK에서도 트로피를 따냈다는 점에서 역량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인선 감독은 실력과 업적 양면에서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한 면이 있다. 나는 취재 일선을 떠난 뒤 시간이 가고 거듭 생각할수록 최 감독이 얼마나 뛰어난 코치였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는 매우 어려운 입장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지만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내 생존했을 뿐 아니라 최고 수준의 결과도 만들어냈다. 안타깝게도 젊은 날의 나는 성격이 강퍅해서, 최 감독을 까칠하게 대한 편이다. ‘좋은 멤버로 편하게 농구한다.’든가, ‘방열이 이룩한 업적을 가로챈다.’는 등의 무례한 평가를 서슴지 않았다. 특히 그가 SK 감독으로 일하던 2003년 3월 25일에 내가 『중앙일보』에 쓴 기사는 너무나 비신사적이었다. (제목은 ‘최인선 남의 농구 엿보기’였다.) 졸렬한데다 인신공격에 가까운 이 기사를 낯이 뜨거워서 스스로도 다시 읽기 어려울 정도다. 그래도 최 감독은 화를 내거나 항의하지 않았다. 아예 이 기사를 읽어보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고, 한결같은 태도로 나를 대했다. 최인선 감독은 기아에서 방열 감독을 돕는 코치로 일했다. 방 감독이 중앙대 출신의 선수들과 갈등하다가 모기업의 결정으로 일선에서 퇴진하자 최 코치가 승진해 지휘봉을 잡았다. 당시 농구계에는 ‘중앙대를 나온 최인선이 후배들을 꼬드겨 방 감독의 등에 칼을 꽂았다.’든가 ‘후배들의 반란을 수수방관함으로써 이득을 보았다.’는 루머가 나돌았다. 그러나 루머는 대부분 사실과 다르고, 불편한 상황 속에 사령탑을 넘겨받은 최 감독의 입장도 편하지는 않았다. 팀을 수습하고, 누구나 ‘최고의 승부사’로 꼽는 방열 감독의 업적을 능가해야 하는 과제가 그를 고통스럽게 했을 것이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인내력이 강했을 뿐 아니라 너그러웠고, 본질적으로 선한 사람이었다. 나는 최인선 감독에게 사과할 기회를 엿보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하고 취재 현장을 떠났다. 나에게는 그에 대한 사과가 청산해야 할 과제,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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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동희 전 감독 |
농구감독 강동희가 일찍 야인이 되어 버린 점은 무척 안타깝다. 그가 치러야 할 대가가 있겠으나 뛰어난 재능을 다 펼쳐보지 못했음이 아쉬운 것이다. 그가 평지풍파에 휩쓸리지 않았다면 유재학-전창진 체제를 크게 흔들었을 것이다. 일류 가드 출신답게 코트 전체를 조망하는 시야, 상황을 이해하는 통찰력, 선수의 마음을 읽고 동기부여하는 능력을 겸비한 지도자였다. 그의 잘못을 둘러싸고 논쟁의 여지가 적지 않았다고 본다. 나는 그의 재능과 진심 양쪽을 모두, 대단히 믿는 편이다. 언론이 보도한 내용을, 심지어는 법이 내린 심판을 모두 믿지는 않는다. 강동희가 ‘결백하다.’거나 ‘누명을 썼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승부조작을 했다.’는 혐의는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를 평가할 때 승부조작을 상수로, 기정사실로 간주하고 시작하면 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내가 보기에 그가 부정한 (또는 받을 이유가 딱히 없는) 돈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 대가로 경기의 결과를 바꿨다는 의심은 연결 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주 최근까지도 (사실은 현재도) 리그의 순위가 정해지고 플레이오프에서 경기할 상대가 가려지면 주전선수들의 소모를 줄이고 벤치를 지키고 있던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상식이었다. 여자프로농구의 삼성생명도 2020-21시즌의 정규리그 순위가 정해지자 승패를 떠나 다양한 선수기용과 작전을 시험하면서 플레이오프에 대비했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 챔피언 결정전 우승이다. 리그 4위 팀이 1, 2위팀을 모두 이기고 트로피를 낚아챈 것이다. 삼성생명이 승부조작을 했는가? (몸이 아픈 선수들까지 모두 털어 넣어 사력을 다했다면, 전력을 다했다면) 이길 수도 있었던 경기를 일부러 내주었는가? 승부조작을 해도 대가를 받지 않았다면 문제가 없는가? 오해가 없기를. 삼성생명은 승부조작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구구절절 시비를 가릴 뜻은 없다. 아무튼 다투어볼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강동희는 모든 혐의를 짊어지고 물러나는 쪽을 택했다. 그는 그럴 수 있는 사나이다. 양보와 희생에 익숙하다. 농구입문도, 진학도, 취직도, 친구를 사귈 때도 그런 식으로 했다. 그가 이기적인 인간이었다면 학력도 커리어도 인생도 달라졌을 것이다. 강동희가 이대로 사라져간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프로농구 팀의 감독을 다시 맡기 어렵다는 데에는 나도 이견이 없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우리 농구를 위해 노력할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
1993년 2월에, 나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강동희와 시간을 함께 보낸 적이 있다. 뢰머 광장에 딸린 맥주 집에서 소시지를 안주 삼아 생맥주도 마셨다. 스포츠 기자로 일하면서 누린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이렇게 뛰어난 스타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다. 당시에는 몰랐다. 나는 기자나 아나운서가 스타 선수와 사진을 함께 찍거나 사인을 받으려고 노력하면 ‘체신없는 짓’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와 생각하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스타들을 만나고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강동희를 좋아했다. 기아 팀을 취재할 때는 자주 강동희를 불러서 이것저것 물었다. 그가 총각일 때 가끔 신문사로 나를 찾아왔다. 그런 날엔 시청 뒤에 있는 오래된 식당에서 밥을 함께 먹었다. 그는 변변찮은 음식도 고마워하면서 먹었다. 착한 사람이었다. 선수생활을 하면서 큰 말썽을 피워본 일도 없다. 나이가 들면서 선수로서 기량도, 인품도 무르익어갔다. 자연인으로서 그의 삶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나 현명하게 헤치고 이겨냈다. 농구인으로서 그의 남은 삶이 어떨지는 모르겠다. 잘됐으면 좋겠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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