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정신이 신체를 지배하는 경기

허진석 / 기사승인 : 2021-03-10 14:5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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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에서 보는 KB스타즈의 모습은 뜻밖이다. 나는 KB가 두 경기 내리 내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농구는 손으로 하는 데다 ‘키’라는 신체조건이 작용하는 운동이라 이변이 자주 나오기 어려운 경기다. 경기력이 강한 팀이 약하다고 평가되는 팀에 잇달아 지는 경우도 흔치 않다. 솔직히 나는 삼성생명이 첫 경기를 접전 끝에 내주거나 간신히 이길 것으로 예상했다. 두 번째 경기는 KB가 일방적으로 이긴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내 전망은 ‘시리즈 전적 3승1패 또는 3연승으로 KB 우승’이었다. 챔피언 결정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삼성생명이 잘해야 1승을 건지리라는 내 예상은 휴지통에 들어가고 말았다.

삼성생명의 김보미 선수는 9일 경기를 마친 다음 “정신이 신체를 지배하는 3차전이 될 것”이라고 했다. 1986년에 태어난 이 뛰어난 포워드는 플레이오프 시즌에 들어서자 삼성생명 농구의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았다. 적지 않은 나이, 크지 않은 키, 경기당 30분 이상 뛴 적이 없는 평범한 커리어는 지금 그에게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 수많은 불리를 딛고 끝내 일어서는 의지의 화신으로서 삼성생명뿐 아니라 여자프로농구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스포츠 뉴스에, 인터넷 포털에 매일 그의 이름이 오른다. 정신이 신체를 지배한다는 저 품위 있는 언어의 출처도 무르익은 인격의 깊은 곳에서 건져낸 것이라 감동과 믿음을 준다.

정신이 신체를 지배하는 선수를, 그러한 경기를 자주 보기는 어렵다. 허재 선수가 남자프로농구 1997~1998시즌 플레이오프에서 손등뼈 골절을 딛고 맹활약해 소속팀 KIA의 준우승에도 불구하고 최우수선수(MVP)에 뽑혔을 때, 마이클 조던이 훗날 플루 게임(flu game)이라고 불린 유타 재즈와의 1997~1998시즌 미국프로농구(NBA) 챔피언결정 5차전에서 38득점을 기록한 다음 탈진해버렸을 때가 아마도 그러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여자농구 경기에 그렇듯 웅혼한 이미지를 주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금까지 삼성생명과 그 상징으로서 (김한별 선수의 절대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보미 선수가 보여준 농구는 감동의 크기라는 면에서 앞서 제시한 사례 못지않다.

삼성생명은 이번 시즌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플레이오프를 거쳐 챔피언결정전에 도달하면서 단연 화제의 중심에 섰다. 타이틀이 걸린 경기는 분위기를 많이 탄다. 대중들은 특정한 팀이 이겨서 우승해야 한다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기 쉽다. 리그를 운영하는 관계자들도, 심판진도, 심지어 경기를 하는 두 팀의 벤치와 선수들도, 또한 언론도 영향을 받는다. 코트 주변의 분위기가 강하게 한 방향으로 흐르면 그 물길을 돌리기가 매우 어렵다. 삼성생명은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라’는 격언에 어울리게 지혜로운 경기를 하면서 대세를 장악하였다. 지금까지 챔피언결정전에서 먼저 2승을 거둔 팀은 100% 우승했다. 그러나 삼성생명은 자신들이 단일리그가 시작된 2007~2008시즌 이후 정규리그 4위 팀이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한 첫 사례라는 사실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확률은 확률일 뿐이다.

KB가 청주에서 삼성생명을 큰 점수 차로 이겨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KB는 삼성생명보다 강한 팀이다. 삼성생명은 임근배 감독과 선수들의 ‘준비된 농구’로 KB를 두 번 연속 쓰러뜨렸다. 그래도 농구는 준비한 그대로 되기 어렵다. 2차전에서 삼성생명의 김한별 선수가 결승골을 넣었지만 사실은 윤예빈 선수를 위한 작전이었다고 하지 않는가. 이렇게 보면 운이 작용한 것 같다. 계획이 어긋나 선택지 밖의 경기를 했는데 결과가 좋았으니까. 하지만 ‘운도 실력의 일부’라는 생각을 버려서는 안 된다. 중요한 점은 그 장면에서 KB의 박지수 선수는 쓰러졌고 김한별 선수는 골을 넣었다는 사실이다. 김한별 선수의 의지와 집중력이 마지막 장면에서 보상을 받았다.

승리를 거둔 뒤 삼성생명 선수들이 코트에 몰려나와 부둥켜안은 채 기쁨을 나누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경기할 때는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윤예빈 선수의 얼굴에도 밝은 빛이 스쳐 지나갔다. 김보미 선수와 신이슬 선수는 눈물을 흘렸다. (아, 예뻐라!) 그러나 삼성생명 선수들만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KB의 선수들도 쓰디쓴 눈물을 맛보았을 것이다. 눈물은 감정을 정화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챔피언결정전 두 경기의 승리도 패배도 ‘어제 내린 눈’일 뿐이다. (리누스 미셸스) 3차전은 다를 것이다. KB는 분명히 힘 있는 팀이다. 1차전은 일방적으로 불리한 흐름에도 불구하고 거의 따라잡았고, 2차전은 승리의 문턱에서 발을 헛디뎠다.

KB가 박지수 선수를 중심으로 경기한다는 사실은 어떤 면에서든 불리한 조건일 수 없다. 국내 최장신인데다 미국 무대에서도 경쟁할 정도로 기량이 뛰어난 선수를 팀의 대들보로 삼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떤 대안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박 선수가 중심에서 활약을 하면 할수록 동료 선수들에게도 많은 기회가 부여된다. 박지수 선수는 하이 포스트에서든 로 포스트에서든 최고 수준의 피딩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결국 KB는 3차전에서도 박지수 선수를 팀의 기둥으로 삼아 착실하게 스코어 탑을 쌓아 나가야 마땅하다. 박지수 선수는 삼성생명의 김보미 선수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KB를 상징하는 존재다. 다만 한 가지, (지나치게 예민한 인식이겠지만) 나는 박지수 선수를 무언가 불안한 이미지가 움켜쥐고 있다고 느낀다.

박지수 선수는 도쿄올림픽 최종예선에서 ‘혹사’ 논란의 중심이었다. 플레이오프와 챔피언결정전에서도 박 선수의 이미지는 KB의 승패 모두를 책임지기 위해 홀로 희생하고 헌신해야 하는 존재다. 대표 팀에서도 소속 팀에서도 혹사를 당하는 선수다. 챔피언결정전은 이틀에 한 번씩 경기가 열린다. 박지수 선수는 정규리그 30경기에서 경기당 33분57초, 플레이오프 들어서서는 38분39초 동안 코트를 지켰다. 긴 경기 시간은 에이스의 숙명이다. 김단비(신한은행·정규리그 36분31초, PO 38분33초), 강이슬(하나원큐·정규리그 37분06초), 박혜진(우리은행·정규리그 32분11초, PO 38분20초)…. 어떤 에이스도 극심한 체력 소모를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유독 박지수 선수만 혹사의 아이콘으로, 희생양으로 이미지가 굳어버렸다. 나는 이러한 이미지가 젊은 선수에게 자기 연민을 강요하고 ‘슬픔의 농구’에 익숙하게 만들지 않을까 우려한다. 농구는 (내가 언제나 주장하듯이) 하늘을 날고 싶은 인간의 꿈을 담은 스포츠고, 그러기에 골을 땅바닥이 아니라 공중에 매달았다고 생각한다. 강하고 용감해야 대지를 박차고 날아오를 수 있다.

다시 3차전을 이야기하자. 홈 코트로 삼성생명을 불러들인 KB는 2차전보다 훨씬 강할 것이다. KB는 원래 강한 팀이고, 2차전은 거의 이긴 경기였다. 삼성생명의 입장에서는 가라앉는 배의 밑바닥에서 물이 차올라 목젖까지 적신 기분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빨리 챔피언결정전이라는 유람선에서 탈출하고 싶을 것이다. 유효타를 많이 적중시켰지만 아직 상대를 KO시키지 못한 권투 선수는 경기가 후반으로 갈수록 두렵고 초조해진다. 한 대 제대로 맞으면 링 바닥에 누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니까. 삼성생명의 기세에 휘말렸지만 1차전에서도 2차전에서도 결코 굴복하지는 않은 KB가 얼마나 냉정하게 자신들의 경기 방식을 지켜 나가느냐에 따라 3차전의 승패가 갈릴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KB의 안덕수 감독이 어떻게 경기를 설계할 것인지 궁금하고 기대가 된다.

안 감독은 1차전에서 진 다음 인터뷰에서 “선수들의 움직임이 적었고, 수비도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선수들이 서 있었다. 공격을 누구한테 미루는 게 문제였다. (박)지수가 서 있는 선수에게 주니 상대한테 ‘툭툭’ 걸려서 턴 오버가 나왔다. 전혀 토킹이 안 됐고, 오히려 상대 기만 살려줬다.”고 했다. 2차전 패배 이후에는 “턴 오버가 너무 많이 나와 추격을 당했다. 소극적인 모습이 많았고, 6초 남기고 공격권을 내준 것도 문제다. (3차전 이후) 승부를 뒤집기 위해서는 정신력이 우선이다. 자신감과 서로 간의 소통이 필요하다. 선수단의 피로도가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다”고 정리했다. 여기까지 들으면 매우 실망스럽다. 안덕수 감독이 진짜 문제가 뭔지 모르고,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된 해결책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챔피언결정전까지 팀을 이끌고 온 감독이 그렇게 무능할 리는 없다.

나는 안덕수 감독이 인터뷰를 할 때 말을 아꼈다고 본다. 귀한 물건을 함부로 내보이는 사람은 없다. KB는 2차전에서 강한 팀의 면모를 보여줬다. 박지수 선수를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움직이면서 양쪽 코너와 엘보 지역에서 많은 슛기회를 만들어냈다. 삼성생명의 수비 시스템을 크게 흔드는 능률적인 공격 작업이었다. (이 공격법은 계속 사용해도 상대가 대처하기 어렵다. 박지수 선수의 압도적인 높이는 삼성생명의 골밑 선수들에게 물리적 한계를 경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체력이 떨어진 조건에서는 키 1㎝의 의미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진다.) 강아정 선수는 내·외곽에서 모두 위협적이었고, 김민정 선수는 삼성생명의 김보미 선수나 윤예빈 선수 못잖게 헌신적인 농구를 했다. 허예은 선수의 당돌함과 기여도는 삼성생명의 신이슬 선수에 비할 만했다. 안 감독은 이러한 조건과 자원들을 현명하게 재구성하여 3차전에 대비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경기를 관전함으로써 ‘안덕수 농구’의 맨 밑바닥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누릴 것이다.

3차전에 모든 것이 걸렸다는 말은 100% 진실이다. 삼성생명이 승리하면 시즌이 끝나고, KB가 승리하면 리버스 스윕의 가능성이 구체화된다. 누가 더 초조하고 불안할지, 누가 더 자신이 있을지 노트북 앞에 앉아서는 짐작할 길이 없다. 하지만 팁오프가 되면 금세 알 수 있다. 삼성생명의 김보미 선수도, KB의 안덕수 감독도 ‘정신’을 이야기했다. “정신력으로 승리한다.”는 말은 정말 불합리하게 들리지만, 가끔 (사실의 차원을 넘어) 진실인 경우가 있다. 코로나19가 온 세상을 뒤흔드는 두렵고 우울한 시기에 이렇듯 뜨겁고 사랑스러운 인간의 경기를 거듭하는 두 팀의 선수와 감독, 팀 구성원 모두는 이미 박수를 받아 마땅한 큰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도 말해 둔다.

청주에 가고 싶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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