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태영의 이전 영어 이름은 그렉 스티븐슨. 1978년 2월 10일생인 그는 미 공군 출신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문성애 씨의 품에서 태어났다. 3년 위 형인 제로드 스티븐슨, 즉 문태종의 동생으로 이미 한국에 오기도 전부터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형 문태종을 따라 농구를 시작한 문태영은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에 입학했으나 많은 기회를 받지 못했다. 2학년 때까지 그저 그런 벤치 선수에 불과했던 그는 확실한 기회 보장을 위해 리치먼드 대학으로 편입했고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리치먼드 대학에서의 마지막 해, 문태영은 평균 19.7득점 7.7리바운드 1.7어시스트 1.4스틸을 기록했다.
그러나 NBA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2001 NBA 신인 드래프트에 지원했지만 지명받지 못했고 이후 해외 리그로 눈을 돌려야 했다.
프랑스를 시작으로 독일, 네덜란드, 헝가리 등 다양한 곳에서 활약한 문태영은 2008년 11월 5일, KBL이 귀화 혼혈 선수들을 전향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꿈에 그리던 한국에 몸담을 수 있었다.
사실 문태영은 이전에도 한 번 KBL의 문을 두드린 적이 있었다. 2003 KBL 외국선수 트라이아웃에 참가한 적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못했다. 심지어 현장에 있었던 관계자들조차 문태영이 참가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
어머니의 나라에서 뛰고자 했던 문태영의 꿈은 좌절됐지만 농구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수많은 해외 리그에서 몸담으며 기량을 발전시켰고 당시만 하더라도 KBL에서 외국선수 경력 제한을 둔 독일, 프랑스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해외에서의 외로운 생활이 길어지고 있던 시점, KBL이 귀화 혼혈선수에게 큰 기회를 제공했고 문태영 역시 한걸음에 다가섰다. 마음의 문이 닫히기 직전, 갑작스럽게 들려온 희소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포트라이트는 문태영이 아닌 전태풍과 이승준에게 집중되었다. 미국 청소년 국가대표 출신이자 조지아 공대를 졸업한 전태풍, 이미 KBL에서 뛰고 있었던 이동준의 형이자 잠시 모비스(현 현대모비스)의 외국선수로도 뛰었던 이승준에게 거는 기대가 더 컸던 것이다.
문태영은 “토니(전태풍)와 에릭(이승준)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선수들이었다. 내 플레이를 직접 본 사람은 없었고 다른 두 선수에게 평가가 밀리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2009년 2월 2일 양재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2009 귀화 혼혈선수 드래프트. 전체 1순위의 주인공은 전태풍이었고 다음 호명된 선수는 이승준이었다.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승진을 보유한 KCC는 가드 자원이 필요했고 반대로 가드가 많은 삼성의 입장에선 빅맨이 절실했다.

대부분의 귀화 혼혈선수들이 그랬듯 문태영 역시 힘든 적응기를 거쳐야 했다. 미국 문화에 적응되어 있었던 터라 한국인의 정서와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반대로 토종 국내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LG의 주장을 맡았던 조상현 국가대표 코치는 “서로 지내온 문화가 다르다 보니 처음부터 깊어질 수는 없었다. 또 (문)태영이는 숙소 생활이 아닌 따로 지냈기 때문에 오히려 외국선수처럼 대하는 경우가 많았다”라고 밝혔다.
문태영도 적응하는 데 있어 쉽지만은 않았다. 그는 “LG에 처음 몸담았을 때 내가 한국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건 굉장히 적었다. 몇 가지 말들과 명절 정도? 문화적 충격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적응하려 노력했다. 또 완벽한 숙소 생활은 아니었지만 기숙사와 같은 곳에서 지냈던 것 역시 생소했다”라고 기억했다.
그러나 문태영은 프로페셔널한 선수였다.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 그리고 문화에 적응하려 노력했고 차이에 대해 인정하려 했다. 코트에서는 불같았던 그의 모습 탓에 오해도 많았지만 문태영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신사 같았다고 말한다.
문태영과 가장 가깝게 지냈다고 전한 전형수 안양고 코치는 “같이 생활하는 데 있어 전혀 문제가 없었다. 성격도 너무 좋았고 짧은 영어로 하는 대화도 재밌었다. 사실 LG에 있을 때는 심판 판정에 대해 크게 항의하지도 않았었다. 처음 본 문태영은 굉장히 신사다운 사람이었다”라고 이야기했다.
조상현 코치 역시 “따로 지낸 만큼 다른 선수들에 비해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가지고 있는 성격 자체에 문제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만큼 프로선수로서의 마인드가 확실했고 실력도 너무 좋아서 잘 지낼 수 있었다”라고 동의했다.
조금씩 LG와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던 문태영은 또 하나의 벽에 가로막혔다. 바로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과 LG가 원하는 농구가 조금 달랐던 것. 팀플레이를 중시하는 강을준 감독과 본인이 해결사 역할을 해야 했던 문태영의 차이는 크지 않았지만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더불어 당시 문태영은 194cm의 신장으로 4번 포지션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선수들과 미스 매치 상황이 연출될 수 있었다. 210cm에 달하는 윙스팬으로 어느 정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본래 4번 스타일의 선수가 아니었던 만큼 어색함이 짙었다.
또 초창기 문태영에 대한 평가는 3점슛이 없는 선수였다. 시도 자체도 굉장히 적었으며 성공률 역시 높지 않다는 저평가를 받아야 했다. 오로지 점프슛만 던진다는 편견 속에서 문태영의 첫 KBL 시즌은 험난할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문태영이 가세한 LG는 달랐다. 크레이크 브래드쇼, 크리스 알렉산더가 있었지만 문태영의 존재감은 외국선수 그 이상이었다. 1쿼터부터 맹폭격에 나선 문태영은 연장 접전으로 이어진 이날 경기에서 41분 5초 동안 26득점 11리바운드 2어시스트 1스틸 2블록을 기록하며 81-79 극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문태영의 진가는 승부처였던 연장에서 120% 발휘됐다. 브라이언 던스톤을 앞세워 맹렬히 추격한 모비스는 마지막 순간 문태영에게 내리 4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특히 경기 종료 직전 문태영은 양동근의 공격 시도를 블록으로 저지했고 이후 함지훈에게 파울을 얻어내며 결승 자유투를 모두 성공시켰다.
만화와 같았던 문태영의 데뷔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아쉽게도 문태영은 11년 전 영웅이 된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함께 승리의 기쁨을 맛본 조상현, 전형수 코치는 “급이 달랐던 선수였다. 일대일로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고 잡으면 득점이었을 정도로 신뢰가 가는 선수였다”라고 극찬했다.
중요한 건 문태영은 데뷔전 이후 더 펄펄 날았다는 것이다. 전태풍, 이승준에 가려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2009-2010시즌이 끝난 뒤 제일 위에 서 있었던 건 문태영이었다. KBL 출범 이래 최초의 국내선수 득점왕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 사진_점프볼 DB(문복주, 이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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