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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식 감독 |
오랜만에 점프볼 독자들께 인사드린다. 시즌이 시작됐을 때 결심한 대로 꽤 여러 경기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농담’은 오랫동안 쓰지 않았다. 게으름 탓이지만, 딱히 입에 담고픈 화제를 찾지 못한 탓도 있다. 반듯하게 정리된 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처럼 그냥 그렇게 시즌이 막바지를 향하고 있다. 낭떠러지도 폭포도 없는 물길. 지켜보는 이의 가슴에 불을 댕기는 폭발적인 힘과 매력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농구에는 언제나 스토리가 있고 감동이 잠복했다. 그러니 가장 큰 허물은 역시 필자의 게으름일 수밖에 없다. 최근에 눈에 띄는 일이 몇 가지 있기에 기록해 둔다.
김상식 감독
나는 김상식 감독이 고려대에서 뛸 때 처음 보았다. 슛이 정확해서, 고려대가 경기를 하면 언제나 돋보이는 선수였다. 이때 고려대는 실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주전 선수들의 키가 연세대나 중앙대, 한양대에 비해 작아서 늘 불리한 경기를 했다. 센터 포지션이 특히 불리했는데, 고려대의 주전 센터는 190㎝ 남짓한 ('팜플렛 기록'은 193㎝) 노정현 선수였다. 여기에 180㎝ 초·중반의 김상식과 서동철, 김지홍 선수가 포진했으니 ‘높이’를 따지면 고려대보다 못한 팀이 없었다. 그러나 고려대는 선명한 팀컬러를 지켜온 팀이었다. 강한 수비와 빠른 공수 전환, 정확한 외곽슛, 속공 등으로 대학농구 무대의 강호 자리를 지켜냈다.
선수 김상식은 고려대를 졸업한 다음 기업은행에 들어갔다가 프로 출범과 함께 광주 연고의 나산 플라망스에서 원년멤버가 되었다. 독자들께서 잘 아시듯 이 팀은 골드뱅크와 코리아텐더, KTF를 거쳐 KT 소닉붐으로 간판을 바꿔 왔다. 연고지도 광주에서 여수-부산-수원으로 떠도는 신세였다. KTF로 주인이 바뀌기 전까지 극심한 재정난을 겪었고, 당연히 소속 선수들도 불안한 가운데 운동을 했다. 김상식 선수의 입장도 다른 선수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1998년에 SBS로 이적했지만 본질은 기업은행에서 나산으로 이어지는 금융-호남 팀 계열의 ‘개국 공신’임에 틀림없다. 아무튼 그는 선수생활 기간의 대부분을 어려운 팀에서 어려운 농구를 하며 보냈다.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김상식 선수를 힘들게 한 것은 소속팀의 선수 구성이나 재정불안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매우 심지가 굳은 사나이여서, 동료나 소속팀을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조건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김영기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농구선수의 운명을 안고 세상에 태어나 보니 선수와 지도자로 우리나라 남자농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슈퍼 스타가 아버지인 것이다. 축구인 차두리 씨의 고뇌를, 김상식 선수가 먼저 경험했다고 해도 크게 과장은 아니다. ‘김영기의 아들’이라는 세상의 부름을 ‘김상식의 아버지’로 바꾸고픈 소망이 언제나 그의 가슴 속에 잠복했으리라고 믿는다. 그는 한시도 소망을 잊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왔다.
김상식 감독이 이끄는 KGC가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다. 우승할 만한 팀이 합당한 결과를 얻었기에 놀랍지는 않다. 선수 구성이 좋고 홈 팬들의 사랑도 각별한 팀이 아닌가. 실력 있는 전임 감독들이 여러 해 동안 다듬어온 경기력이니까, 오직 김 감독 만의 공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똑같은 팀이 지도자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 자주 봐오지 않았는가. 우승할 능력을 갖춘 팀을 별 탈 없이 우승시키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KGC는 좋은 팀이다. 그래도 올해 SK와 LG가 얼마나 인상적인 시즌을 보냈는지 돌이켜보면 김상식 감독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무엇보다 김 감독이 생애 최초로 ‘해볼 만한 조건’ 속에서 농구를 한 것만 같아 흐뭇하다.
유재학 총감독
유재학 총감독의 ‘은퇴식’ 보도는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프로격투기 선수가 글러브를 벗어 옥타곤 한 가운데 내려놓는 의식이라면 모를까, 프로농구 감독의 은퇴식이라. 유재학 총감독은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으나 나는 몹시 부당한 일이라고 느꼈다. 그 이유는 첫째, 유재학 총감독이 경력을 마감해도 좋을 만큼 노쇠하지 않았고 여전히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지도력을 보유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둘째는 지도자의 은퇴는 인위적 규정이나 명명에 따라 결정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노병과도 같이 죽지 않고 사라져간다. 농구가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복무하는 가혹한 직종이다.
내가 보기에 유재학이라는 거함(巨艦)에는 아직 남은 연료가 충분하고, 그가 가보지 못한 항구가 많이 남아 있다. 그를 마지막으로 경기장에서 본 날은 지난번 ‘농담’에서도 언급한 대로 2022년 11월 24일이다. 농구장 밖에서 본 날은 올해 2월 7일이었다. 이때는 유재학 총감독이 내가 근무하는 한국체육대학교로 찾아왔다. 경기장에서나 경기장 밖에서나 나에게 유재학 총감독은 여전히 젊은 사고의 소유자다. 한 경기든 한 시즌이든 흐름의 중심을 움켜쥐고 문제의 핵심을 찾아내는 밝은 눈이 아직 흐려지지 않았다. 유재학 총감독은 아직 ‘현역’의 지평선 위에 뜬 별이다. 그러므로 은퇴식은 그저 ‘모비스 감독’의 ‘이임식’이면 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유재학 총감독의 소식을 듣고 오래전 방열 감독의 은퇴를 기억해냈다. 실업농구 기아의 총감독으로 일하던 방 감독은 1992년 12월 21일 나를 여의도에 있는 한 호텔로 불렀다. 그날 농구를 떠나 대학 강단으로 옮긴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나는 방 감독의 팬이었고, 비록 지금은 총감독의 굴레를 쓰고 일선에서 잠시 물러났지만 가까운 날에 벤치를 되찾으리라고 기대했다. 이런 내게 방 감독의 고백은 청천벽력이어서, 나는 내가 기자라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다행히 기자임을 늦게라도 기억해서, 방 감독의 ‘비보도’ 요청을 뿌리치고 이튿날 기사를 썼다. 농구계가 진동할 사건이었는데, 방 감독은 끝까지 품위를 지켰다. 그는 미안해하는 나에게 말했다.
“허형, 괜찮아요. 보안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언젠가 누가 써도 썼을 텐데, 훌륭한 기자가 썼으니 나로선 다행이지.”
나는 여의도에서 방 감독에게 물었다. 왜 그만두시느냐고. 그는 ‘내 역할이 끝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농구 감독으로서 이뤄야 할 목표는 모두 이뤘고, 지금은 제자들이 각 팀의 벤치에 속속 진입하고 있다. 그들과 경쟁하는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노추(老醜)를 보이기보다는 그 동안의 경험을 학문의 형태로 강단에서 펼쳐 보고 싶다.’ 이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마음으로 그를 응원하거나 축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 시절부터 한 가지 꿈을 간직해왔다. 방열, 김인건, 이인표, 조승연 같은 명장들과 이제 막 선수생활을 끝내고 데뷔한 젊은 코치가 한 리그에서 경쟁하는 모습. 그럼으로써 우리 농구는 더욱 강하고 다채롭고 아름다울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길게 써보겠다.)
조문주 선생
나는 운이 좋게도 조문주 선생의 전성기를 코트 사이드에서 볼 수 있었다. 포털에 소개된 동영상 소식을 보니 따님(고현지 양)이 엄마를 많이 닮았다. 이 소녀의 재능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엄마의 재능과 더불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투혼마저 닮았다면 (요즘 젊은이들의 표현대로) 국내코트 정도는 씹어 먹을 것이고 아시아를 호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문주 선생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182cm의 키로 (신문에 기록하던 기억에 의존한 것이라 오차가 있을 것이다) 중국 센터 정하이샤(204cm)를 상대한 몸이시다. 골밑 수비를 할 때 팔뚝을 정하이샤의 허리춤에 들이대고 버티면 그 거구가 붕붕 떠서 밀려 나갈 정도로 강하고 전투적이었다. 국내 무대에서는 천재적인 올 라운더 성정아 선생과 좋은 승부를 자주 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훌륭한 선수를 많이 취재한 운 좋은 기자였다. 얼핏 떠올려도 여자농구 스타 정미경, 전주원, 박현숙, 이강희, 정은순, 유영주, 정선민, 박정은, 최경희, 강선구…. 헤아릴 수 없는 선수들이 내가 기자로 일할 때 코트를 수놓고 떠났다. 학생시절에는 김화순 선수가 나의 스타였고, 그보다 앞선 세대의 스타 중에서는 송금순 선수를 좋아했다. 이들의 소식은 가끔 신문이나 잡지에서 보았고, 어쩌다 해주는 중계방송을 통해 갈증을 풀었다. 좋아하는 선수를 만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경기장으로 찾아가는 것이었다. 요즘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선수들의 소식을 듣는다. 가끔 등장하는 옛 스타들의 이야기. 그때마다 반갑고 재미있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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