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구의 DEBUT] 시대를 앞서간 정재호, 1년 더 일찍 치를 수 있었던 프로 데뷔전

민준구 / 기사승인 : 2020-06-12 18: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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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민준구 기자] “(정)재호가 1년 더 프로에 갔었더라면 아마 (양)동근이와 재밌는 구도를 만들었을 것 같네요.”

농구대잔치 세대의 장기 집권 이후 또 다른 황금세대들의 등장은 2000년대 초반, 농구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이후 김승현, 김주성 등 한 시대를 풍미한 남자들이 그 뒤를 받쳤고 또 다른 황금세대의 등장 역시 큰 기대를 걸게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공격형 가드로서 이름을 날린 정재호가 있었다.

운동을 좋아했던 군산초 시절 정재호는 우연한 기회에 농구를 접하게 된다. 써클 활동 시간에 처음 마주한 농구는 이후 자신의 인생이 됐고 그렇게 군산중·고, 경희대를 거쳐 KBL에 발을 디디게 된다.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당시 각 지역에서 농구 잘한다는 소문의 중심에 선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동시대에 활약한 김일두 해설위원에 따르면 “농구하는 사람 중에 군산고 정재호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만큼 아마추어 무대에서 재호는 수준급 선수로 평가받고 있었다”라고 전했다.

정재호의 황금기는 군산고 시절부터였다. 저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기 시작한 그는 매 대회, 팀을 4강 이상으로 이끄는 에이스 오브 에이스였다. 신체 조건은 특출나지 않았지만 능숙했던 2대2 플레이, 정확한 슈팅 능력은 높은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 정재호에게 청소년 국가대표로서의 자격이 주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2000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제16회 FIBA U18 대회 출전 명단에 방성윤, 정상헌, 김일두, 김학섭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정재호는 “그때는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었다. 중국을 결승에서 만나려고 예선 때 힘을 다 뺀 채 상대한 적이 있었는데 계속 시소 게임을 하더라. 예선 맞대결은 졌지만 결승에서 만나면 도저히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라고 이야기했다.

당시 한국은 일본과 태국, 예멘과의 1라운드 예선에서 3전 전승을 거뒀다. 이후 2라운드 예선에서 중국에 연장 접전 끝, 103-107로 패했지만 사우디 아라비아와 카타르를 격침시키며 4강에 올랐다.

4강에 오른 한국은 대만을 100-94로 꺾고 중국과 리턴 매치를 벌이게 됐다. 그러나 모든 힘을 다 쏟아낸 한국에 중국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시종일관 밀어붙인 가운데 120-92, 28점차 대승을 거두며 1995년 이후 5년 만에 왕좌를 탈환했다. 그리고 이 우승 이후 20년째 한국은 정상에 서지 못했다.

“생각하던 대로 다 되었던 시절이었다. 선수들도 너무 좋았고 전술, 전략 모두 완벽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조만간 우리 세상이 올 것 같았다.” 정재호의 말이다.

고교 무대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던 정재호는 군산고 졸업 후 최부영 감독이 이끌고 있었던 경희대로 진학하게 된다. 다른 학교의 스카우트 제의 역시 많았지만 전통적으로 군산고는 곧 경희대라는 당시 이미지를 쉽게 떨쳐내지는 못했다.

정재호의 대학 시절 역시 고교 때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당시 대학 무대에서 바닥을 치고 있었던 경희대는 정재호와 함께 비상했고 중앙대, 연세대, 고려대 등 전통의 강호들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았다.

정재호와 함께 경희대에서 2년을 보낸 박종천 코치는 “신입생 때부터 실력 하나는 최고였다. 공격과 수비 밸런스가 너무 좋았고 슈팅 범위가 정말 넓었다. 키는 작은데 공격력이 워낙 좋다 보니 1학년인데도 많이 뛰었다. 돌이켜보면 그 재능이 참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라고 이야기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단신 가드는 대부분 정통 포인트가드로 포장되기 일쑤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듀얼보다는 퓨어에 가까운 스타일의 가드들이 더 큰 점수를 얻었던 시절이었던 만큼 정재호는 자신의 기량에 대해 100% 정확한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

김일두 위원은 “비슷한 세대를 돌아봤을 때 가드 중 공격력은 재호가 최고였다. 대신 당시 포인트가드에게 바랐던 패스나 수비 등 다양한 면에서 낮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재호는 자신의 길을 고집했고 그 결과가 대학 때까지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정재호는 “공격하는 게 너무 즐거웠다. 농구라는 스포츠가 수비만 잘해서 이길 수는 없지 않나. 최부영 선생님도 그 부분을 동의했기 때문에 공격에서만큼은 자유롭게 풀어주셨다. 내 농구는 공격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에 비례하게 성적도 좋았으니까”라고 말했다.

저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활약했던 정재호로 인해 그의 후배들은 좀처럼 빛을 보지 못한 적도 많다. 대표적인 예가 현대모비스의 이현민. 군산초부터 경희대까지 1년 후배로서 정재호와 함께해온 이현민은 4학년이 됐을 때 비로소 주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현민이가 크게 피해를 본 케이스이긴 했다. 한 번은 농구를 그만두겠다며 나간 적이 있다. 이건 최부영 선생님도 모르실 일이다(웃음). 그때 내가 현민이를 붙잡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프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내게 고마워하지 않을까? 하하.” 정재호의 말이다.

경희대의 에이스, 연령별 국가대표 선발 등 정재호는 아마추어 선수가 거칠 수 있는 모든 단계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2003년 7월, 대구에서 열린 전국종별농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선 양동근과 조성민이 이끈 한양대를 86-85로 꺾고 33년 만에 정상 탈환을 이끌기도 했다. 특히 경기 종료 직전, 멋진 위닝슛을 성공시키며 주인공이 됐다.

실패를 몰랐던 정재호의 인생에 큰 변화가 찾아온 건 2003년 말. 당시 조기프로진출, 즉 얼리 엔트리의 문이 열리며 일찍 프로선수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부터였다.

“3학년 때 얼리 엔트리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당시 언론이나 프로 구단 관계자들은 내가 나오면 전체 1순위로 지명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그래서 최부영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졸업하고 나가는 걸 더 원하시더라. 어린 마음에 1년 6개월 정도를 놀았던 것 같다. 어른들은 잠깐 방황하고 원래 상태로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 있으셨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4학년을 통째로 보내고 나니 90kg까지 쪄 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됐다. 그렇게 신인 드래프트 날까지 시간이 지났다.”

만약 정재호가 1년 먼저 KBL에 진출했다면 어땠을까. 이에 대해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을 모아 “훨씬 더 좋은 평가를 받는 선수가 됐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2004 KBL 국내 신인선수 드래프트에 정재호가 나섰다면 양동근과 함께 좋은 경쟁이 됐을 거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두 선수와 함께 생활해본 박종천 코치는 “지금의 평가로는 두 사람을 비교하기 힘들겠지만 만약 2004년부터 서로 경쟁을 시작했다면 아마 다른 결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재호도 좋은 선수였다. 가정일 뿐이지만 그랬다면 정말 재밌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2005년 2월 2일, 서울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2005 KBL 국내 신인선수 드래프트는 다소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고교 졸업자들은 물론 해외 동포 선수들에게도 드래프트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김효범과 한상웅이 KBL에 드래프트 지원서를 제출했고 기존 국내선수들의 예상 순위는 조금씩 내려갔다.

정재호는 전체 5순위로 전자랜드의 지명을 받았다. 김효범과 한상웅을 제외한다면 실질적인 3순위라는 평가가 내려졌다. 1년 6개월의 허송세월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은 그만큼 정재호가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증명했음을 의미한다.

확실한 포인트가드가 없었던 전자랜드는 제이 험프리스 감독의 믿음 아래 정재호를 주전으로 기용했다. 데뷔 시즌 첫 경기부터 선발로 출전한 정재호는 30분 21초 동안 3득점 4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절반의 성공을 이루게 된다.

이정석과 강혁을 상대한 정재호는 고군분투했다. 득점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동료를 살리며 마지막까지 승리를 바랐다. 하나, 서장훈과 올루미데 오예데지의 트윈타워는 물론 강혁과 네이트 존슨, 이규섭에게 두 자릿수 득점을 내주며 85-93으로 패하게 된다.

이후에도 정재호는 꾸준히 출전 기회를 잡았고 방성윤의 복귀 전까지 김일두와 함께 신인상 후보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공격형 포인트가드에 대한 이미지는 정재호의 발목을 잡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더불어 험프리스 감독, 선수들과의 갈등 역시 그를 힘들게 했다.

“험프리스 감독님은 내게 크리스 폴과 같은 플레이를 바랐다. NBA 영상을 자주 보여주셨는데 그때 폴 역시 신인이었고 공격 성향이 짙음에도 동료를 살려줄 줄 알았다.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외국선수들의 불평, 불만이 많아졌고 선배 선수들과의 갈등이 문제였다. 내 손으로 공격을 끝내고 싶었지만 환경이 도와주지 않았다. 이래저래 흔들렸고 결국 내 색깔도 점점 잃었다. 그래서 프로에서의 기억이 그리 좋지는 않다.”

꿈에 그렸던 정재호의 프로 데뷔 시즌은 50경기 출전 평균 6.7득점 2.0리바운드 4.2어시스트 1.1스틸로 마무리됐다. 신인 선수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준수한 활약이라고 평가할 수 있었지만 정재호라는 이름값에 비하면 초라했다. 이후 2010-2011시즌까지 소화한 그는 일찍 유니폼을 벗었다.

화려했던 아마추어 시절의 정재호는 KBL에서 빛을 보지 못한 채 서서히 잊혔다. 현재 JBA 스킬 농구교실을 운영하며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는 정재호. 과거의 명성과는 달리 지금은 어린 아이들을 지도하면서 작은 행복을 느낄 뿐이다.

“예전 생각을 하면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위기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을 참아냈더라면 지금은 다른 인생을 살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 않나. 그저 아쉬움으로 묻고 지금 하루, 하루를 보내는 것에 집중하고 싶다.”

# 사진_점프볼 DB(문복주 기자),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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