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서원밸리와 최희암

/ 기사승인 : 2021-07-12 18: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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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열 선생(왼쪽)과 필자. 점프볼의 손대범 기자가 보내준 사진이다. 2010년 챔피언결정전 5차전이 열린 날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201049일 금요일이고 장소는 잠실체육관이다.

여자프로골프 박민지 선수가 시즌 6승째를 기록했다. 나는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문수산 아래 오두막에서 텔레비전 중계를 시청했다. 우리 방송의 골프중계 품질이 매우 뛰어나다는 생각을 또 한 번 했다. 중계화면 오른쪽 아래에 배치한 자막에 필요한 정보가 집약됐다. 순위, 타수 등등. 선수의 동작, 표정, 상황과 풍경을 보여주는 화면 움직임도 훌륭했다. 타구의 궤적을 붉은 색 선으로 표시해 타구의 방향을 알 수 있게 해주기도 했다. 옥에 티를 굳이 꼽자면 진행자의 동어반복이었다. “이거 들어가면 11언덥니다.” “이거 넣으면 공동선둡니다.”와 같은 설명은 전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화면이 모든 정보를 직관적으로 구현하고 있었으므로. 진행자는 녹음기를 돌리듯 선수가 퍼트를 할 때면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듣기 불편했고, 진행자의 상황설명보다는 해설자의 분석을 조금 더 듣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중계진은 (‘보그병신체’를 빗대 말하자면) 절대로 치유 불가능한 ‘골프병신체’로 말하고 있었다. 물론 이 같은 불만은 다른 시청자분들의 공감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아무튼 놀라운 승부였다. 박 선수는 선두 서연정 선수에 2타 뒤진 채 마지막 날 경기를 시작했다. 초반에는 서연정 선수가 흐름을 주도했다. 서 선수는 2번 홀에서 10m쯤 되는 긴 버디 퍼트에 성공해 2위와의 거리를 3타 차까지 벌렸다. 그러나 5번 홀에서 보기를 기록하면서 추격의 빌미를 주고 말았다. 박민지 선수가 6번 홀에서 6m짜리 버디 퍼트를 떨어뜨려 1타 차로 추격한 것이다. 박 선수는 7번홀(파5)에서 맞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해냈다.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티샷이 페어웨이를 벗어났고, 공을 살려 내기 위해 친 두 번째 샷은 반대편 러프로 날아갔다. 그래도 이 홀에서 파를 지키고 다음 홀에서 버디를 잡아 공동선두에 나섰다. 13번 홀에서 버디를 더해 마침내 단독 선두가 되었다. 박민지 선수는 17번 홀에서 1타를 잃어 공동 선두를 내주었지만 18번 홀 버디로 승부를 결정지었다. 경기를 끝내고 보니 2타 차 우승이었다. 박 선수는 정신력이 정말 강한 선수 같다. (‘같다.’고 표현해서 미안하다. 그러나 나는 이 선수와 대화해본 적이 없기에 단언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로 강한 정신을 느끼게 해주었다.

“17번 홀에서 보기를 하고 ‘나는 인생이 쉽게 가지 않는구나.’ 라고 느꼈다. 보기를 해 심장이 떨리는 상황을 만들더라. 그래서 웃음이 나왔다. 기가 막혔다. 그런 상황을 많이 경험해 웃음이 나왔다. 다시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갖고 다음 홀로 갔다.” (필자 정리)

박민지 선수에게 7번 홀과 17번 홀, 어느 쪽이 더 큰 위기였을까? 7번 홀에서 맞은 위기를 넘기지 못했다면 1, 2타를 잃었을 것이다. 선두를 추격할 동력을 잃을 수도 있었다. 반면 7번 홀에서 점수를 잃어도 남은 홀에서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후의 경기 내용과 결과를 놓고 보면 이때의 손실이 박민지 선수에게 치명적이지 않았다고 판단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결과론일 뿐이다. 17번 홀에서는 파를 지키지 못해 어렵게 빼앗은 단독선두 자리에서 내려갔다. 충격이 결코 작았을 리 없다. 어렵게 붙든 경기의 주도권과 흐름을 어이없게 놓쳤으므로. 마지막 홀을 맞는 기분이 착잡했을 것이다. 상황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역전각’이다. 그래도 공동선두였고, 경쟁자가 뛰어난 경기력을 발휘해 박민지 선수를 따라잡은 상황도 아니었다. 아름다운 우승 트로피가 거의 정해진 듯 했던 주인을 잠시 잃어버렸을 뿐. 18번 홀에서는 마지막 날 6타를 줄인 선수가 2타를 줄인 데 그친 선수보다 유리했을 가능성이 크다. 박민지 선수는 샷이 흔들린 게 아니라 퍼트 한 번을 실수해 이번 대회 유일한 보기를 기록했을 뿐이므로. 이렇듯 내가 스포츠 경기를 보는 태도는 유연하지 못하다. 스포츠 경기는 과학이며 수학적 기초 위에 서 있다고 단정한다. 그래서 지난 2021년 1월 25일자 『점프볼』에 〈자유투라는 의지, 승리라는 운명〉을 기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고구마’ 글을 썼다.

"농구는 득점이 많이 나오는 경기다. 결승 3점포라고 해도 60~70점에서 100점 이상까지 나오는 농구에서는 작은 부분일 뿐이다. 물론 2점차로 뒤진 팀에서 나온 3점슛은 값지다. 그러나 나는 1점차로 진 팀의 경기 기록을 다시 읽는다. 경기를 시작하자마자 얻은 자유투 2개를 모두 놓치지는 않았는가. 무인지경의 득점기회에서 림을 맞히지는 않았는가. 눈앞에서 놓친 리바운드 한 개는? 나는 경기를 시작하자마자 얻은 자유투 2개의 값이 2점을 뒤진 가운데 경기 종료 1초를 남기고 던지는 자유투의 값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경기의 흐름’이나 ‘승부처’라는 말에 그다지 흥분하지 않는다. 스포츠가 정말로 인생을 닮았다면, 한 순간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7번 홀의 위기나 17번 홀의 실패가 박민지 선수가 보여준 경기의 본질이 될 수 없다. 박민지 선수는 7번 홀에서 파를 했고 17번 홀에서 퍼트를 세 번이나 하는 바람에 보기를 기록했다. 박 선수는 7번 홀에서 티샷을 더 잘했어야 하고 17번 홀에서는 ‘스리 퍼트’를 하지 않았어야 한다. 그것뿐이다.

경기가 열린 곳은 서원밸리였다. 내가 골프를 자주 친 곳이다. 대학교 선배 한 분이 회원이셔서 자주 초대받았다. 서원밸리는 풍경이 아름답고 코스는 재미있다. 나는 ‘서원코스’의 2번 홀과 ‘밸리코스’의 8번 홀을 특별히 좋아한다. 농구인들과도 이곳에서 골프를 여러 번 쳤다. 금방 떠오르는 이름은 조승연, 김석연, 박수교, 이문규, 신동찬, 박종천, 이충희, 박건연 등이다. 이분들과는 내 시골집이 있는 김포나 강화에서 낚시를 함께 하기도 했다. 앞에 소개한 분들 외에 최정길(박고), 신선우, 유재학, 임근배, 김태훈 등이 나의 낚시 동반자들이다. 휴가철을 이용한 취미는 농구인들을 깊이 이해하고 농구에 대해 더 많이 알게 해주었다. 유재학 감독은 낚시 실력이 농구 실력만큼이나 뛰어난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서 낚시 기술을 많이 배웠다. 충주댐에 가서 밤샘 낚시를 자주 했다. 고요한 밤에 좌대에 나란히 앉아 주고받은 대화는 매우 유익했다. 요즘은 유 감독도 낚시를 그리 자주 하는 것 같지 않다. 나 역시 골프를 치지 않은 지 5년이 다 되었고, 낚시도 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바늘에 걸린 물고기의 몸부림이 ‘손맛’이 아니라 고통으로 느껴졌다. 시간이 허락할 때 ‘도시어부’를 즐겁게 시청하지만 ‘나도 가서 손맛을 보고 싶다.’는 생각은 아직 없다.

서원밸리 멤버 중에 최희암 고려용접봉 대표이사 부회장도 있다. 내가 농구 출입기자가 되었을 무렵 최 부회장은 연세대학교 농구부의 감독으로서 주목받았다. 공들여 우수한 선수를 모으고 혹독하게 조련한 결과는 1994년 연세대가 대학팀으로는 처음으로 농구대잔치를 제패하는 눈부신 성과로 응결되었다. 최 감독이 길러낸 문경은, 김재훈, 이상범, 이상민, 우지원, 서장훈, 김동우 등이 ‘농구대잔치 시대’의 주역이었다. 이들은 나중에 우리 프로농구의 중심선수가 되었다. 나는 가끔 최 감독에게서 농구를 배우기도 하고 의견충돌도 하면서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그는 연세대를 떠나 프로팀(모비스와 전자랜드)에서 일했다. 모비스를 나와 전자랜드 감독이 되기 전에 동국대학교 감독을 맡기도 했다. 이때는 내가 모교인 동국대학교에서 뒤늦게 대학원(박사과정) 공부를 하던 시절이다. 나는 이 시기에 농구지도자 최희암의 진면목을 보았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우리 대학농구 역사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야 하는 뛰어난 감독이다. 내 경험에 한정했음을 전제로 나는 박한, 정봉섭, 최정길, 최부영 감독을 최희암 감독과 함께 거명할 수밖에 없다.

아침 일찍 동국대 체육학과 교수들의 연구실에 있는 ‘금강관’에 가면 거기 딸린 농구 코트가 내려다보였다. 최 감독은 아침 일찍 출근해 ‘동국대학교’라는 푸른색 글자를 프린트한, 목이 늘어진 티셔츠에 운동화를 신고 선수들이 훈련하러 나오기를 기다렸다. 최 감독이 선수들보다 늦게 훈련장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후임자는 그렇지 않았다) 선수들이 개인 야간훈련을 할 때도 최희암 감독은 코트를 떠나지 않았다. 일이 있어 나갔다가도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돌아왔다. 선수 사랑이 대단해서 작은 물건 하나, 간식 부스러기 하나라도 챙겨 주려 애썼다. 동국대학교 농구부를 지도하던 시절에는 연세대에서 일할 때처럼 선수들을 강하게 몰아세우거나 체벌을 하지도 않았다. 이 시기에 (더러 때리는 지도자가 있던 시절이다) 동국대 선수들은 맞지 않고 운동했다. 그리고 그가 지도한 선수들은 대부분 프로에 갔다. 정재홍, 오기석, 이민재, 이강선, 천대현, 기승호 등이 그들이다. 동국대학교 농구부는 2007년 이호근 감독의 지휘로 농구대잔치 결승에 진출했다. 나는 이 성과를 최희암 감독 체제의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최 감독은 이때 동국대를 떠나 전자랜드의 사령탑에 앉았다.

최희암 감독은 코트를 떠난 뒤 기업인으로서도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스포츠 인들은 은퇴한 다음 직업 전선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높은 수준의 경기력은 습관을 넘어 지능과 지식, 간단히 말하자면 이성의 지배를 받은 결과다. 거칠게 말하자면, 머리가 나쁘면 스포츠에서도 사업에서도 성공하기 어렵다. 그래도 최희암 감독만큼 농구와 비즈니스 양면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는 인물은 흔하지 않다. 원래 뛰어난 사람이기도 하고, 주변의 도움과 행운도 따랐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를 농구 감독으로 생각하고, ‘부회장’으로 부르기를 불편해 한다. 나의 오래된 주장은 농구 코트의 스펙트럼이 넓고 다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방열, 김인건과 같은 노장들과 이상민, 이상범 같은 젊은 지도자들이 한 무대에서 경쟁하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1969년과 1970년 우리나라를 아시아 정상으로 인도한 김영기 (당시 코치) 선생님이 백발을 날리며 벤치에 앉은 모습을 상상하면 나도 모르게 흥분된다.

언젠가 유재학 감독이 “우리나라 프로농구 팀들이 결국은 똑같은 농구를 하게 될 것”이라고 한탄했다. 프로리그가 출범한 뒤 농구팀과 지도자의 농구철학이나 개성이 사라지고 외국인 선수 중심으로 단조롭게 이어지는 경기 방식에 대해 정직하게 고민한 결과다. 다양성이 사라진 농구 코트는 근친교배를 거듭한 야생의 동물이나 절대왕정 시대의 황실처럼 생물학적으로 건강성을 잃기 쉽다. 현장의 농구 관계자들께는 매우 미안한 말씀이지만, 내가 보기에 프로농구 코트에서는 별다른 차별점이 없는 경기상품들이 지루한 경쟁을 계속하고 있다. ‘삼성의 농구’와 ‘기아의 농구’, ‘방열의 농구’와 ‘김인건의 농구’, ‘고대의 농구’와 ‘연대의 농구’처럼 강렬한 정체성이 격돌하는 경기를 보기 어렵다. 경기의 속도, 슛 던지는 선수들이 보여주는 스텝의 리듬, 포인트 가드의 손끝이 흩뿌리는 패스의 날카로움 같은 매력을 자주 맛보기 어렵다. 외국인 선수 스카우트의 성패가 한 시즌의 성적을 결정한다든지, 국제대회에서 경쟁력을 상실해 가는 대표 팀의 현실 역시 같은 지점에서 문제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뛰어난 누군가가 나타나 우리 농구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될 것이다. 그러한 충격과 거기 대응하는 용기와 모험이 우리 농구를 발전시키고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해 왔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운다. 한국농구는 존 번, 내트 홀맨, 찰리 마콘, 제프 고스폴 같은 미국인 코치들을 초빙해 ‘선진농구’를 배우고자 노력했다. 이 토양에서 성장하고 성숙한 김영기, 김영일, 김인건, 이인표, 신동파, 유희형 등 ‘레전드’들이 우리 역사를 고쳐 썼다. 방열은 농구 코칭을 남다른 자세와 관점에서 이해한 사람이다. 그의 창의력이 신선우, 박수교, 신동찬, 임정명, 이충희의 재능과 만나 완성한 기록이 1982년 ‘뉴델리의 기적’이다. 나는 최희암 역시 천재적인 코치의 계보에 들어가야 한다고 믿는다. 선수의 기술과 체력, 정신력뿐 아니라 심리의 영역까지 파고든 그의 농구는 연세대와 더불어 역사의 일부가 됐다. 유재학은 프로농구라는 새로운 판도 속에서 합리적이고 세심하면서도 장대한 스케일을 겸비한 자신만의 농구를 추구하고자 애쓴 결과 살아있는 전설의 반열에 올랐다. 이들은 하나같이 모험가였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보그병신체: 세계적인 패션지 ‘보그’에다 비속어 ‘병신’을 결합한 말로, 한글 대신 영어 단어를 소리 나는 대로 쓰고 조사만 갖다 붙인 문체를 일컫는다. 보그를 비롯해 라이선스 패션잡지 한국어판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글쓰기를 워낙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고 해서 누군가 붙인 이름이다. (중앙일보 안혜리 기자, 〈지하철의 ‘보그병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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