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농구가 개막되기 직전 90년대 중반 농구대잔치 시절은 그야말로 ‘전국시대’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실업 형님들에게 밀려 늘 고배를 마시던 대학 세력의 전력이 한꺼번에 올라가면서 반란이 연이어 일어났고, 자존심 상한 실업팀들은 뒤집히지 않으려 이를 악물곤 했다.
대학 반란의 선두주자는 단연 연세대였다.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김훈, 서장훈 등을 앞세운 이른바 독수리군단은 1994년, 농구대잔치 사상 최초로 대학팀 우승을 달성하며 농구 인기에 제대로 불을 붙였다. 영원한 라이벌 고려대 역시 전희철, 김병철, 양희승, 현주엽, 신기성 등으로 이뤄진 호화군단을 만들어내며 대학 강세에 제대로 한몫 거들었다.
어디 그뿐인가. 허동택 트리오 이후 농구 명문으로 거듭난 중앙대 또한 홍사붕, 김승기, 양경민, 김영만, 조동기, 김희선 등 쟁쟁한 선수들로 맞섰다. 당시 이들 대학팀들의 질주가 워낙 거셌던지라 실업 최강 기아자동차 정도 외에는 전력에서 밀리는 분위기였다. 반란을 넘어 세력 재개편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을 정도다.
그런 가운데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등 전통의 강호에 맞서 복병 역할을 제대로 했던 또 다른 대학팀의 기수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명지대였다. 스파르타식 맹훈련으로 유명했던 당시 명지대는 1993년도부터 대학 4강권으로 올라서더니 1995~96 농구대잔치에서는 8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낸다. 우지원, 김훈 등이 건재한 연세대, 실업강호 삼성전자 등을 연파하는 등 내용도 알찼다.
이러한 명지대 돌풍의 중심에서 팀을 이끈 에이스는 조성훈(48‧185cm)이었다. 3점슛, 런닝 점프슛, 돌파 등 내외곽을 가리지 않고 전천후 득점력을 자랑했던 듀얼가드로 조성원, 김현주, 박상관, 김태진, 표명일, 박재일, 이현호, 이병석, 정재헌 등과 함께 명지대를 대학 세력의 중심 자리로 끌어올렸다. 당시 명지대 하면 조성훈이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였다.
아쉽게도 프로에서의 조성훈은 대학 시절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다. 첫해부터 당한 무릎부상이 선수 생활 내내 발목을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우증권, 신세기, SK, 전자랜드 등으로 팀명과 모기업이 바뀌는 와중에서도 한팀에서 쭉 뛰었고 인천 농구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8시즌을 뛰고 커리어를 마쳤다. 정규시즌 212경기에서 평균 6.2득점, 1.2어시스트, 2리바운드를 기록했다. 플레이오프 기록은 16경기 7.4득점, 0.8어시스트, 1.6어시스트다.
명지대 돌풍을 이끈 에이스급 듀얼가드에서 선수와 지도자로서 전자랜드의 처음과 마지막을 모두 지켜본 인천의 프랜차이즈 스타 조성훈, 그의 다사다난했던 농구 스토리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농구계의 희망은 유소년
반갑습니다. 감독님. 은퇴 후 어떻게 지내셨나요?
-어머님께서 찜질방을 하고 계셨는데 일을 조금씩 도우면서 지내고 있다가 농구 교실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어요. 본래는 제물포 고등학교 코치로 갈 예정이었고 6개월 정도 공백 기간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던 것이죠. 그런데 해당 학교에 내부적으로 문제가 생기면서 못 가게됐어요. 그래서 아예 ‘조성훈 농구교실’로 제 이름을 걸고 본격적으로 이어가게 됐죠. 당시만 해도 저를 기억해 주시는 학부모들도 많았구요. 그렇게 2년쯤 지났을까요. 최희암 감독님께서 전자랜드로 오시면서 저에게 선수로 복귀하라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당시 농구교실 회원은 100여명이 넘었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현역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선수를 보장해준다거나 그런 것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냥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충실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최감독님께서 ‘유망주들을 키우는게 좋으면 전자랜드 유소년팀에서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 성훈이 너가 유소년 총감독을 해봐라’ 그렇게 권유를 하셨고 받아들이게 됐죠. 하지만 유소년 지도라는 것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고, 현역 때 같이 뛰었던 선수들 보기도 어색하고 여러모로 낯설더라구요.
적응을 제대로 못하고 있던 어느날 전자랜드 단장님께서 부르셨어요. 그러더니 ‘유소년 농구는 곧 대한민국 농구의 미래다. 이 아이들이 잘 커야지 그 다음 세대도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아니겠니. 누군가는 가야 될 길인데 성훈이 너가 이 방면에서 대한민국 최고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때부터 이를 악물고 전자랜드와 함께 정말 최선을 다해 유소년들을 길러냈죠. 갓 7살이었던 아이가 어느덧 프로 선수가 되는 등 참 오랫동안 했던 것 같아요. 좋아해서 농구를 하는 것과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아이들이 농구라는 종목 자체를 좋아하게 만들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그게 우리의 농구가 가야 될 길이기도 하구요. 그러다가 대구 가스공사로 팀이 바뀌고 전자랜드, 인천 농구와의 오랜 동행을 멈추게 됐습니다.
명함을 보니 ‘독립농구단/유소년 엘리트 총감독’이라고 적혀있으시던데, 직책만 봐서는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ES스포츠나눔 사회적협동조합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국내에서는 최초라고 할 수 있는 시스템이에요. 먼저 독립농구단은 아직 가능성이 남은 기대주들, 농구를 더하고 싶은 선수들을 위해 기회를 한번 더 주는 것이죠. 예를 들어 이번 프로농구 신인드래프트만 봐도 그래요. 뽑힌 선수들은 더없이 축하해줘야겠지만 그렇지않고 탈락한 선수들은 갑자기 공중에 붕뜨게 되는 것이잖아요. 학창시절 내내 농구만 해오다가 갑자기 인생의 모든 절망과 좌절 등을 한꺼번에 겪게 된다고 할 수 있죠. 여기서 농구를 그만두는 친구들도 많을 것이고, 포기하지 않는 친구들도 모교에 가서 후배들 눈치보면서 연습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란 말이에요. 확실하게 준비하고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죠. 대학, 프로팀들과의 연습경기는 물론 전국체전 출전 등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실력 향상은 물론 정말 열심히 하는 선수는 프로팀의 눈에 띌 수도 있겠죠. 내년 신인드래프트에 다시 도전할 수도 있구요. 국내에서 활동을 못하면 외국 2군팀이라도 갈 수 있게 만들어 보는 것도 계획 중이에요. 힘든 길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이고 잘되기를 바랄 뿐이죠.
유소년 엘리트반은 취미반이 아닌 ‘선수를 꿈꾸는 유소년’을 가르치는 반입니다. 그러다보니 훈련량이나 가르치는 시스템도 거기에 맞춰 운영되구요. 기존 전자랜드 유소년팀 아이들도 대부분 이곳으로 와있거나 올 예정입니다. 얼마전 협회장기 전국남녀중고농구대회 남중부에서 MVP, 득점상을 받았던 휘문중 김민규 등이 유소년 시스템하에서 만들어진 좋은 케이스라고 볼 수 있죠. 단! 시대가 바뀌고 있으니 저희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운동하는 친구들은 무조건 운동만 시켰습니다. 이제는 공부는 필수입니다. 저같은 경우만해도 운동만 하다 은퇴하고 나니 갑자기 막막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외국같은 경우는 공부를 병행하다보니 시즌이 끝나고 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직업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그러거든요. 얼마나 안정적이에요. 우리도 이제 그런 방식으로 달라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도자도 다양한 스타일이 있잖아요. 본인은 어떤 유형일까요?
- 엄한 스타일 같습니다. 농구 외적으로는 크게 터치하지 않지만 적어도 가르치는 과정에서는 작은 것 하나라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니다 싶으면 호통도 치고 단호하게 하는 편이죠. 어린 나이에 잘못된 습관이나 태도가 몸에 젖어 들면 나이 먹어서는 더 고치기 힘들어집니다. 아무래도 매일매일 수업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도 정해져 있으니 최대한 집중력을 유지하면서 여러 가지를 잡아주려면 분위기 자체가 타이트 할 필요가 있더라구요.
엄하다기보다 꼼꼼한 스타일같아요.
꼼꼼? 저랑 어울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웃음) 하지만 그냥 넘어가고 싶어도 자꾸 눈에 보이니까 어쩔 수가 없네요. 그냥 넘어가면 안되기도 하구요. 아무래도 유소년이다보니 당장의 여러 기술보다는 가장 기초적인 부분에 좀 더 신경을 써서 가르치려고 합니다. 어느 종목,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첫 단추가 정말 중요하죠. 텔레비전, 스마트폰으로 NBA의 화려한 플레이를 바로바로 볼 수 있는 시대지만 그들도 그렇게 되기까지는 멘탈, 기본기를 탄탄하게 쌓아놓은게 먼저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농구를 가르치시다 보면 소위 말하는 천재형 선수들이 눈에 보일 것 같아요. 비슷하게 출발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를 벌이며 앞서나가는, 그래서 누군가는 농구는 ‘재능의 스포츠’라고 하더라구요.
-없을 수는 없겠죠.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차피 선수 쪽에 도전하는 유소년들은 기본적인 최소 재능은 갖추고 있죠. 한창 육체적, 기술적, 심리적으로 성장이 빠른 시기이니만큼 비슷하게 주어진 시간을 누가 더 알차게 쓰느냐에 따라 그 폭이 갈리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성공에 대한 열정과 승부욕이 강한 친구들은 정말 진지하게 단체 훈련에 임하고 자유시간마저도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우는데 보내는 등 부단히도 노력합니다. 반면 조금만 힘들어도 ‘지금은 좀 쉬고 다음에 좀 더 하면 되지’라는 마인드를 가진 친구들도 많습니다. 재능의 유무를 떠나 어느 쪽이 성공 가능성이 더 높은 지에 대해서는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을 듯 싶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는 더 크게 벌어집니다.
솔직히 예전과 달리 농구를 배울 수 있는 환경은 훨씬 좋아졌습니다. 돈만 주면 각종 고급기술을 과외형식으로 배울 수 있는 곳도 많죠. 하지만 저도 선수 생활을 해봤고 많은 아이들을 가르쳐본 결과 기술은 후순위입니다. 기본기를 누가 더 잘 닦고 치열함이 몸에 더 배여 있느냐가 경쟁에서 앞서나가는 지름길입니다. 흔히 ‘흑인선수들은 타고난게 커서 당할 수가 없다’는 말을 많이 하죠. 상당수는 맞는 말입니다. 당장 운동능력, 밸런스 등 신체능력에서부터 차이가 크죠. 하지만 그런 괴물 같은 육체와 재능을 가진 선수들조차 NBA라는 큰 무대에서 뛰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합니다. 많은 스타급 플레이어들의 노력 일화는 듣는 정도로도 현기증이 날 정도죠. 성공한 선수들의 상당수는 가진 것도 많은 상태에서 노력까지 합니다. 누가 가르쳐 주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더욱이 요즘 신세대들에게는 ‘꼰대들의 잔소리’로 느껴질 수도 있겠죠. 꿈이 크다면 그만큼 본인이 개인 시간을 내서라도 노력하고,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자세는 필수입니다. 결국은 그런 욕심이 더 큰 선수들이 앞서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말하는 천재급 플레이어들인 이충희, 허재같은 분들도 사실은 노력 부분에서도 굉장했습니다.
감독님이 직접 보셨던 분들중에 ‘와 정말 독하게 노력한다’고 느꼈던 인물이 있으십니까?
-있습니다. 2년 대학 선배인 조성원 현 LG 세이커스 감독님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사실 어디가서 한번도 안한 얘기로, 여기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밝히게 되는 일화입니다. 제가 (조)성원이형이랑 룸메이트였어요. 그때 성원이형의 치열하게 노력하는 모습을 정말 많이 봤습니다. 형은 잘 때 무게가 10kg 정도 되는 돌을 항상 머리맡에 놔두고 자요. 그리고는 새벽 1시고, 2시고 중간에 꼭 일어나서 슈팅 연습을 몇 백개씩 하고 자요. 돌을 손으로 집은 다음 어깨에 걸치고 슛을 쏘듯 팔을 하늘로 쭉 뻗는 거에요. 그 무거운 것을 가지고 계속해서 슛 자세를 만들어나가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슛 자세도 탄탄해지고 거리도 엄청 늘어나게 됐죠. 그때는 너도나도 개인 연습을 필수처럼 하던 시대였는데 그중에서도 형은 돋보이는 노력파였습니다. ‘저 사이즈에 정말 잘한다’, ‘타고난 선수다’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저는 딱히 새삼스럽지도 않았습니다. 형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옆에서 보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운동선수로서 성공하고 싶으면 남들보다 한걸음이라도 더 뛰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인천농구의 숨은 레전드
우지원, 김훈 등과 함께 신생팀 대우증권에 입단하셨어요. 신인드래프트를 거치지 않았는데요. 어떤 방식으로 팀에 들어가게 되신 건가요?
-사실은 대학 시절에 스카웃 제의가 되게 많이 들어왔어요. 실업팀에서는 거의 다 제의가 들어왔다고 보면 되요. 최대한 좋은 조건을 찾아 갈 수도 있는 입지였는데, 변수가 생겨버렸죠. 대우하고 동양이라는 신생팀이 창단된 것입니다. 당시 신생팀에게 학교 1개씩을 지명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졌는데 대우는 연대를 지명하고 동양은 고대를 지명했어요. 때문에 해당 학교 선수들은 모조리 신생팀으로 가게 됐습니다. 그 다음에 신생 팀들에게는 나머지 학교를 대상으로 1지명을 할 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대우, 동양 두팀 모두 1지명을 저를 해버린거에요. 그러다 보니 저는 돈을 많이 준다고 했던 현대, 삼성 등 기존팀들을 갈 수 없게되어 버렸죠. 현대에서 깜짝 놀랄 배팅을 했었거든요. 삼성에서도 진작부터 관리를 했었구요.
1지명은 반가운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속이 좀 쓰렸을 수도 있었겠네요?
맞습니다. 솔직히 좀 쓰렸습니다.(웃음) 하지만 대우 측에서 명지대에 많은 지원도 해주고 (우)지원이, (김)훈이 등 마음 잘 맞는 동기들도 있었던지라 좋은 점도 많았습니다. 다들 친하기는 했지만 연대 쪽에 친한 친구들이 좀 더 많아서 대우를 택한 이유도 있었구요.
연대 황금기를 이끌었던 주역 2명에 명지대 에이스까지 합류하며 ‘빅3’가 완성됐다는 얘기도 있었는데요. 기대만큼 시너지는 크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패스보다는 공격 위주로 풀어나가는 스타일입니다. 대학 시절부터 쭉 그래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지원이, 훈이 등과 함께 슛이 한꺼번에 터지면 정말 좋은 흐름을 타지만 반대로 슛감이 안 좋은 날은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중간에서 흐름을 컨트롤 하고 리듬을 재정비할 선수가 필요하겠죠. 누가 하겠어요? 그래도 명색이 가드인데 제가 해야죠. 찬스가 와도 일단 저보다는 지원이, 훈이 등 다른 득점원을 먼저 봐주고 그들의 컨디션을 최대한 좋게 만들어 주는게 가드의 역할이거든요. 그러다보니 제 컨디션이 다운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당시 최종규 감독님께서는 ‘상관없으니까, 찬스 나면 망설이지 말고 슛을 던져’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어떻게 그럽니까. 지금 시대야 저같은 스타일도 듀얼가드라고 좋게 봐주지만 당시에는 가드는 일단 게임조립, 패싱플레이가 우선이었어요. 각각의 다른 스타일은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선수생활 초창기에 당했던 부상도 영향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 영향 정도가 아니라 치명적이었죠. 첫 시즌 당시 12월 22일로 기억되요. 동양과의 경기 도중 무릎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했어요. 전방 후방 다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대학 때 잘하다가 프로 와서 이름 값을 못했다’라고 말씀하시는데 부상 여파가 너무 컸어요. 그때 당시는 재활 환경 등이 지금처럼 좋은 것도 아니고 체계적인 시스템도 부족했습니다. 지금같으면 최소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쉬면서 재활을 해야 했지만 당시는 팀이 ‘6강을 가냐 못가냐‘하는 상황이었던지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3개월만 쉬고 아픈 상태서 무릎에 테이핑하고 보호대 차고 그냥 경기에 투입된거죠. 결국 무릎은 완치가 되지 못했고 불안정한 상태로 경기를 뛰다 보니 신체 밸런스도 깨져서 발목, 허리 등 다른 곳까지 다치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예전 선배들이 입버릇처럼 ‘부상 조심해라’했던 말의 의미를. 그래서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도 부상의 위험성, 몸 관리의 중요성에 대해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시 조성훈님의 농구를 보지 못했을 젊은 팬들을 위해 ‘본인은 현재 이 선수와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했다’고 예를 들만한 인물이 있을까요?
-다른팀 선수까지 볼 것 없이 우리 팀에 있던 (김)낙현이가 슛도 잘 던지고 공격 농구를 잘하잖아요. 정확한 외곽슛으로 에이스 역할도 하고 적절한 타이밍에서 치고 들어갈 줄도 알고. 제가 돌파 등도 많이 했지만 슛에 자신감이 많았거든요. 부상 당하지 않고 건강하게 프로 생활을 했다면 낙현이처럼 플레이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김낙현 선수는 슈터형 가드 이미지가 강하지만 감독님은 돌파는 물론 미들라인에서 점프슛도 잘 쏘셨던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초창기에 1번 포지션을 맡아서 그렇지 팀 사정에 따라서 포지션을 옮겨 다니기도 했어요. 스테이스 보스먼이라는 외국인 선수가 포인트가드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그 선수가 1번을 보게 되면서 제가 2번에서 주로 뛰었던 시절도 있었는데요. 상황에 따라 포워드 진이 부진하다 싶으면 3번까지 내려가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보스먼이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은 제가 다시 1번으로 가구요. 그야말로 전천후 땜빵이었죠. 제가 익숙한 포지션을 정해놓고 농구를 했으면 더 좋았을텐데 이것저것 다하다 보니 컨디션 유지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대학 때가 저의 전성기라고 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때는 1번도 보기는 했지만 주로 2번에서 많이 뛰었습니다. 1번을 보는 날도 주로 공격에 집중하는 플레이가 대부분이었죠.
방금 언급하셨던 스테이스 보스먼을 비롯 마이클 엘리어트, 알렉스 스텀, 카를로스 윌리엄스, 워렌 로즈그린, 요나 에노사, 캔드릭 브룩스, 얼 아이크, 앨버트 화이트 등 다양한 외국인 선수와 함께 하셨는데요.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거나 각별했던 외인이 있었나요?
-윌리엄스, 보스먼과 많이 친했습니다. 개성도 강하고 악동 이미지도 있었던지라 그 친구들이 사고 치면 감독님께서 저를 호출하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어르고 달래는 등 컨트롤 좀 해달라는 것이었죠. 지금은 개인적인 부분이 강조되고 있는 시대지만 당시에는 단합이라는 부분도 상당히 중요시했습니다. 회식 자리 등이 있으면 외국인 선수들도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간단하게 맥주 한잔 마시면서 얘기하는 자리에도 윌리엄스, 보스먼이 참석했죠. 그때 저는 제 차로 두 친구를 데리고 다녔고, 종종 집으로 가서 밥도 먹이고 그랬습니다. 와이프가 스테이크도 구워주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보니 서로 각별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죠, 가족같이 대하니까 가족같이 다가오더라구요.
미국이라는 나라가 개인주의가 강하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에요. 인간적으로 대해주면 고마운 것도 알고 마음도 열더라구요. 당시 저보다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동료들도 많았지만 편해서 그런지 꼭 제 차를 탔어요. 구단버스를 타지 않고 이동해야 되는 경우는 거의 저와 함께 다녔다고 보면 되죠. 이태원도 함께 가고 정말 각별했습니다. 당시에는 저도 부상 후 몸이 올라오면서 그나마 경기력이 좋았던 시절인지라 농구할 맛도 나고 그랬어요. 가드로서 외국인선수와 호흡도 잘 맞고 하니 시너지도 많이 났던 것 같구요. 그러다보니 윌리엄스가 죽었다고 했을 때는 정말 크게 충격받았습니다. 믿기지가 않는거에요. 지금도 보고 싶습니다. 솔직히.
윌리엄스같은 경우 지금도 추억하는 팬분들이 많아요. 상대적으로 보스먼은 기억하는 이들만 기억할 것 같은데요. 다른 것을 떠나 성격이 정말 장난아니었어요.
-맞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같은 이미지도 있었죠. 그래서 감독님께서 저에게 보스먼을 전담 마크 시키셨어요. 다행히 제 말은 잘 들어줬어요. 보스먼은 물론 윌리엄스에게 지금도 참 고마운 일이 있어요. 시즌을 앞두고 저희 아버님이 돌아가신 일이 생겼어요. 저희 집이 경주거든요. 그런데 이 친구들이 밤 12시쯤에 온거에요.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5시간 정도 걸리는 먼 곳인데 찾아온 것이죠. 장례문화가 저희와는 다른 외국인선수라는 점에서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아참! 조니 맥도웰도 있었죠. 타팀 선수로 상대했을 때와 팀원으로 함께 했을 때의 느낌이 궁금합니다.
-다르죠. 일단 저희 팀으로 왔을 때의 맥도웰은 아무래도 전성기가 지났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습니다. 여전히 잘하기는 했지만 전 소속팀에서 리그를 파괴할 정도의 위력을 보여주던 그 맥도웰은 아니니까요. 더욱이 이전팀 KCC(전 현대)에 비해 포지션별 밸런스 등에서 아무래도 저희팀이 조금 떨어졌던 것도 사실이구요. 성격도 좀 진중하더라구요. 윌리엄스와 보스먼, 특히 보스먼은 좀 덤벙대고 그런 면도 많은데 맥도웰은 상대적으로 어른스러웠죠. 보스먼, 윌리엄스가 막둥이라면 맥도웰은 장남 스타일? 그렇게 느껴졌어요.
프로 커리어의 전부를 인천팀에서 보냈습니다. 조성훈 본인에게 인천 프로팀 혹은 인천 농구는 의미가 남다를 것 같아요.
-제가 고향은 영남 쪽이지만 프로 생활도 인천팀에서 다 보냈고, 결혼도 여기서 했고, 가족도 여기서 꾸렸고, 새로운 출발도 여기서 했죠. 인천은 저에게 단순한 제2의 고향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은퇴했을 때도 마음이 아팠지만 전자랜드가 사라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 이상으로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무엇보다 인천 농구팬들의 열정을 너무 잘 알고 있고 추억도 많은 곳인지라 뭐라 표현을 못할 것 같아요. 지금도 믿기지 않습니다.

명지대 돌풍의 주역
상산전자고 시절 활약이 대단했습니다. 충분히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등이 가능했을 것 같은데, 명지대로 진학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 중3때부터 청소년대표도 했었고 쭈욱 엘리트 코스를 밟았습니다. 당시 꾸준히 인지도를 높혀가고 있던 상황인지라 어디든지 선택할 수 있는 여건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명지대를 간 것은 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명지대를 갔기에 조성훈이라는 이름도 알릴 수 있었고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많은 추억과 영광의 순간을 얻었던 것 같아요. 선수층이 탄탄한 곳을 가면 뛰어난 선배들을 보며 배울게 많았을 것 같기도 하지만 반대의 상황에서는 조금 더 빨리 자리를 잡고 많은 경기를 뛸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죠. 연고대처럼 우승을 막하고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열심히해서 조금씩 성장해가는 과정 속에서 많은 것을 기억에 새기게 되었어요. 저희의 그런 모습을 보고 좋아해 주시는 팬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살짝 아쉬울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제가 명지대 출신이라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당시 명지대 선수중 조성원 선수보다 조성훈 선수가 더 유명했던 것 같아요.
-대학 시절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성원이 형은 프로에 가서 제대로 터진 케이스이기도 하구요. 저는 제가 공을 오래 소유하면서 이것저것 하는 경우가 많아서 눈에 띄었지만 성원이 형은 공을 받아서 쏘는 슈터 스타일이다 보니까 다른 포지션의 도움도 필요한 유형이죠. 아무래도 당시 명지대가 포지션별로 밸런스가 아주 좋은 팀은 아닌지라 형이 편하게 마음껏 슛을 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프로에 가서 서로 시너지를 제대로 낼 수 있는 좋은 팀원들을 만났죠. 제가 돌격대장이었자면 형은 저격수 유형이라고 할까요.
명지대는 어떤 색깔을 보여주던 팀이었나요?
-당시는 대학팀들의 훈련량이 굉장히 많던 시절이에요. 그런 가운데서도 명지대는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유명했죠. 워낙 강하게 체력이 만들어지다 보니 일단 달리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고 속공플레이 등에 능하지 않았나 싶어요. 실업 강호를 만나서도 공격적으로 막 들이대고 그랬죠. 아무래도 젊을 때다 보니 노련한 실업팀을 만나게 되면 빠른 공수전환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구요. 저희가 들어갔을 때 박상관, 김현주 선배님들이 졸업반이었고 조성원, 고상준 선배님이 2년 위였어요. 이리보니 장신자가 정말 적기는 한 것 같습니다. 거기에 궂은일을 잘해주는 선수도 많았어요. (정)재헌이는 신장은 190cm 초반 밖에 되지 않았지만 힘이 좋아서 센터 역할도 무리없이 소화했구요. 박재일, 이현호, 이병석같은 후배들도 참 악착같았죠.
대학 시절 다른 학교 선수들과 섞여서 찍은 사진들을 봤는데요. 대부분 센터 자리는 감독님의 몫이더라구요. 또래들 중에서 대장 비슷한 위치셨을까요?
-하하핫… 그래요? 전혀 생각도 못했어요. (전)희철이, (김)병철이, (우)지원이, (김)훈이 등 저희 동기들이 서로 간에 되게 친했어요. 대학은 달랐지만 청소년대표 시절부터 많이 보던 사이들인지라 연락도 자주했구요. 아무래도 그중에 제가 작은 편이니까 자연스레 가운데로 가게 되지 않았을까요.
따님 조정빈 양이 치어리더로 활동한다고 들었습니다.
-정빈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조금 소심했어요. 그때 마침 전자랜드 어린이 치어리더가 생겼고 한번 시켜 봤는데 재미를 느끼고 꾸준히 하더라구요. 여고생 치어리더로도 제법 유명세를 타구요. 그뒤로도 전문적으로까지는 아니지만 조금씩 아르바이트 형태로 했던 것 같아요. 현재 서경대학교 모델연기과에 재학중인데 가고자 하는 길이 따로 있어서 현재는 거기에만 충실하겠다고 하더라구요. 키도 177cm정도까지 크고, 성격도 활발해지고, 치어리더 활동이 좋은 경험이 된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성훈님을 기억해 주시는 팬 분들께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래전에 활동했던 사람인데 기억해 주시는 것 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평생을 농구인으로서 살아온 사람인지라 어떻게 하면 농구 발전에 미약한 힘이라도 보탤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유소년 지도를 택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인성을 갖춘 꿈나무들을 많이 발굴하고 키워내서 농구팬분들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좋은일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필자는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농구를 사랑하던 오랜 팬으로 2002-2003년 본지에 농구 무협소설 '해동전설(海東傳說)''을 연재한 바 있으며 데일리안, 홀로스, 올레, 오마이뉴스 등 다양한 인터넷 매체에서 스포츠 객원기자로 활동한바 있다. [김종수의 농구人터뷰]를 통해 전현직 농구인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시각으로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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