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 인 NBA] 우리 시대 최고의 로맨티시스트, 마누 지노빌리

양준민 / 기사승인 : 2019-09-02 01:05:00
  • 카카오톡 보내기
  • -
  • +
  • 인쇄


[점프볼=양준민 기자] “나를 축구계의 마누 지노빌리라 불러달라. 사람들은 지노빌리를 농구계의 메시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는 틀린 표현이다. 내가 축구계의 지노빌리로 불려야 한다” 지난해 여름 마누 지노빌리가 선수 은퇴를 발표한 이후 리오넬 메시가 지노빌리의 은퇴를 축하하며 남긴 메시지다.

아르헨티나는 모두가 알고 있듯 축구의 나라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디에고 마라도나부터 현재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로 군림하고 있는 리오넬 메시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르헨티나를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아마 축구일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7월 19일(이하 한국시간)을 기준으로 피파(FIFA) 랭킹 10위에 올라있다. 그렇다고 해서 농구가 아르헨티나 내에 인기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이번 2019 농구월드컵에서 대한민국과 같이 B조에 속한 아르헨티나는 B조에서 예선통과가 가장 유력하다는 평가를 받는 등 농구 강국으로 군림하고 있다. FIBA(국제 농구연맹) 랭킹 5위를 기록 중인 아르헨티나는 8월 31일 한국과 가진 예선 첫 경기에서 15득점(FG 33.3%) 9리바운드를 올린 루이스 스콜라와 3점 5개(3P 45.5%)를 터뜨리며 한국의 외곽을 유리한 니콜라스 라프로비콜라의 활약에 힘입어 95-69로 승리했다.

아르헨티나가 축구에 이어 농구까지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지노빌리가 그 토대를 마련했기에 가능했다. 지노빌리는 1997년 FIBA 21세 이하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처음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아르헨티나를 전체 4위에 올려놓았다. 1998년 아테네 세계선수권(現 농구월드컵)에서 성인대표팀 데뷔전을 가진 지노빌리는 2016년 리우 올림픽 8강 토너먼트를 끝으로 국가대표팀을 은퇴하기 전까지 아르헨티나 황금세대의 중심으로 활약했다. 지노빌리는 2004 아테네 올림픽 준결승에서 드림팀인 미국을 격파하고, 조국에 대회 첫 금메달을 안기는 등 아르헨티나 농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인도에서 열린 2002 세계선수권에서도 미국을 격파했던 지노빌리는 마지막 은퇴경기까지 미국을 상대하는 등 국제무대에서 유독 미국과 인연이 깊었다.(*2004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 획득으로 지노빌리는 세계 농구 역사상 올림픽·유로 리그·NBA 모두를 제패한 2번째 선수로 남게 됐다)



지노빌리가 아르헨티나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을 받는 것은 단순히 국제대회에서 아르헨티나의 호성적을 이끌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지노빌리는 아르헨티나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내내 조국인 아르헨티나를 향한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주며 아르헨티나 전 국민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대표적으로 2008 베이징 올림픽 참가를 놓고, 그렉 포포비치 감독과 지노빌리가 언쟁을 벌인 일화는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포포비치 감독은 지노빌리가 30살이 넘은 후 오프시즌 쉬지 않고 국제무대에 참가하는 것에 대해 늘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젊은 시절과 달리 이제는 오프시즌 체력관리가 필요한 시점이라 판단했기 때문. 하지만 리그 내에 대표적인 꾀자 감독으로 꼽히는 포포비치 감독조차 대표팀을 향한 지노빌리의 열망을 꺾지 못했다.(*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발목을 다친 지노빌리는 이 때문에 시즌 초반 컨디션 난조를 경험했다)

그 결과 지노빌리의 애국심은 상대 선수로부터도 존경을 받기에 이른다. 코비 브라이언트는 2016 리우 올림픽에서 마지막 경기를 마친 지노빌리에게 “나는 지노빌리를 존경한다. 그는 국가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과 책임감을 보여준 위대한 선수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상대편 선수까지 감동시킬 정도로 지노빌리가 보여준 열정이 함께 시대를 이끌어간 국가대표 동료들은 물론 후배들에게까지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 예로 현재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중심으로 활약 중인 니콜라스 라프로비콜라와 파콘도 캄파쪼의 경우, 2016년 여름 샌안토니오와 계약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등 평소 지노빌리에 대한 아낌없는 존경심을 드러내고 있다.

마찬가지 지노빌리의 지고지순함은 NBA 16년의 커리어에서도 잘 묻어난다. 2002년 유럽을 떠나 NBA에 입성한 지노빌리는 샌안토니오에 4번의 NBA 파이널 우승을 안겨주며 명가 건설에 앞장섰다. 여기에 더해 팀에 대한 애정과 희생정신을 몸소 보여주며 샌안토니오 팀 문화 형성에도 결정적 역할을 하는 등 샌안토니오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이에 필자는 지노빌리의 눈부신 업적을 고작 종이 몇 장에 모두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단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번 칼럼을 통해 그의 NBA 커리어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마이클 조던을 동경했던 꼬마 아이, 샌안토니오 그 전설의 시작!

마누 지노빌리가 유년기를 보낸 아르헨티나의 1980년대는 디에고 마라도나 열풍이 불며 축구 열기가 매우 뜨거운 시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은 마라도나 월드컵이란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마라도나는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였다. 잉글랜드와 8강전에서 신의 손 논란이 있었지만 마라도나를 앞세운 아르헨티나는 1986년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차지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 원맨 팀이라 평가될 정도로 월드컵 개막 전에는 우승후보로 평가받지 못했다. 하지만 마라도나를 중심으로 톱니바퀴 같은 조직력의 축구를 선보인 아르헨티나는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우승에 이어 2번째 월드컵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 결과 아르헨티나의 축구 열기는 절정에 달했고, 많은 어린이들이 차세대 축구 스타를 꿈꾸는 등 이른바 마라도나 키즈가 붐을 이룬 시기였다.

지노빌리 역시 어린 시절 마라도나의 열렬한 팬이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 영향력을 끼친 것은 다름 아닌 농구였다. 프로 농구 선수인 형과 프로 농구팀 코치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지노빌리는 어린 시절 농구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야후 스포츠에 따르면 지노빌리는 매주 일요일 저녁마다 아르헨티나 방송에서 해주는 마이클 조던과 매직 존슨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며 농구 선수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지노빌리는 2012년 야후 스포츠와 인터뷰에서 “내가 마이클 조던의 경기 영상을 제대로 본 건 10살 때가 처음이었다.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의 대결도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플레이는 마치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처럼 경이로웠다. 그때부터 농구 선수의 꿈을 키운 것은 맞지만 NBA에서 뛴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전까지 아르헨티나 출신 농구 선수가 NBA에서 뛴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지노빌리는 평소 훈련 때도 마이클 조던의 영상을 많이 참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로부터 농구 수업을 받은 지노빌리는 18살의 나이에 아르헨티나 프로리그에 데뷔하며 농구 선수로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아르헨티나 리그에서 실력을 쌓은 지노빌리는 1998년 여름 이탈리아 리그로 무대를 옮긴다. 지노빌리가 단기간에 유럽 최고의 선수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어려서부터 유럽 문화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지노빌리 가족은 이탈리아계 출신으로, 아르헨티나·이탈리아 이중 국적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큰 형이 유럽에서 프로 생활을 하면서 덩달아 지노빌리까지 유럽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평소 여행을 좋아하는 지노빌리는 어린 시절 틈날 때마다 유럽 곳곳을 여행하며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까지 자연스레 익혔다. NBA 선수로 뛸 당시에도 유럽 영화와 라틴 음악을 즐기고, 쉴 때는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는 등 사실상 유럽은 지노빌리에게 있어 또 다른 고향이나 다름이 없었다.

1998-1999시즌 이탈리아 2부 리그 비오라 레지오 칼라브리아에 입단한 지노빌리는 팀을 1부리그로 승격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리고 1999년 여름 지노빌리는 NBA 신인드래프트에 참가 의사를 밝히며 미국 무대에 첫발을 들였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 NBA는 유럽 리그에 대한 스카우팅 체계가 발달한 시기가 아니었다. 지노빌리가 유럽에서 주목받는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NBA 구단 스카우터들의 눈에 들지 못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샌안토니오가 지노빌리를 지명한 것은 당시 선수 스카웃 업무를 담당하던 R.C 뷰포드 단장이 입김이 있어 가능했다. 뷰포드 단장은 1997 21세 이하 세계선수권 때 지노빌리를 처음 봤다. 이때의 기억이 뷰포드 단장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은 것이 샌안토니오가 전체 57순위로 지노빌리를 지명한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1999년 NBA가 29개의 팀으로 운영되던 때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지노빌리의 지명은 리그 역사상 최고의 스틸픽이었다.

다만 지노빌리의 리그 데뷔는 1999년이 아닌 2002년에 가서야 이뤄진다. 샌안토니오의 지노빌리 지명은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알박기’였다. 1999 파이널 우승에 성공한 샌안토니오는 신인드래프트 개막을 5일 앞두고, 우승을 확정해 로스터를 정비할 시간이 부족했다. 이에 샌안토니오는 1999 신인드래프트에서 즉시 전력감이 아닌 잠재력이 풍부한 선수들을 지명하는 쪽으로 전략을 세웠다. 그 결과 샌안토니오는 지노빌리와 함께 40순위로 크로아티아 출신의 고단 기리첵을 지명했다. 당시 샌안토니오는 29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를 포기, 댈러스로부터 40순위 지명권과 2000년 신인드래프트 2라운드 지명권을 받아왔다. 기리첵도 지노빌리와 마찬가지로 NBA가 아닌 유럽에서 활약하던 선수였다.(*기리첵은 2002년 멤피스와 계약을 맺고 NBA에 데뷔, 2008년까지 NBA 선수로 활약했다)

지노빌리 역시 자신의 기량이 아직 NBA에서 뛰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껴 유럽 복귀를 결정했다. 유럽으로 돌아온 지노빌리는 1999-2000시즌까지 비오라에서 뛴 후 2000년 새 시즌 개막을 앞두고 킨더 볼로냐로 이적한다. 지노빌리는 2000-2001시즌 리그 34경기 평균 28.9분 17.1득점(FG 51.4%) 4.4리바운드 2.5어시스트를 기록, 팀의 리그 우승과 이탈리안컵 우승을 이끈다. 그 결과 지노빌리는 2000-2001시즌 리그 MVP로 선정됐다. 지노빌리의 활약은 유로 리그에서도 이어진다. 2000-2001시즌 유로 리그 22경기에서 평균 29.7분 15.2득점(FG 44.5%) 4.1리바운드 2어시스트를 기록한 지노빌리는 팀을 유로 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파이널 MVP까지 수상한다. 지노빌리는 2001-2002시즌 다시 한 번 이탈리아 리그 MVP를 수상하는 등 유럽 진출 4년 만에 유럽 최고의 선수로 발돋움한다.



▲유럽 최고의 선수 마누 지노빌리, NBA 무대에 도전장을 던지다!

지노빌리가 2002년 NBA에 입성할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유럽 무대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남긴 것이 아닌 인도에서 열린 2002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미국을 상대로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지노빌리는 무릎 부상을 안고 있었음에도 미국을 상대로 종횡무진 활약을 펼치는 등 세계 최강 미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 당시 미국의 대회 첫 패배이자 58연승 행진의 중단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반면 승승장구를 거듭한 아르헨티나는 결승에서 유고슬라비아(現 세르비아)에 패하기 전까지 무패 행진을 이어갔다. 이때를 시작으로 아르헨티나는 지노빌리와 함께 루이스 스콜라-파브리시오 오베르토가 주축을 이룬 황금세대가 등장해 전성기를 구가한다.(*지노빌리는 4강전에서 발목을 다쳐 결승은 12분만 출전한다)

야후 스포츠의 보도에 따르면 당시 선수 스카웃 업무를 위해 인도를 찾았던 뷰포드 단장은 지노빌리의 경기를 눈으로 직접 보게 됐다. 뷰포드 단장은 지노빌리의 기량이 NBA에서 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고, 대회 도중 정식계약을 제안했다. 뷰포드 단장은 결승 직후 열린 아르헨티나 대표팀 축하연에 직접 참석, 장시간 지노빌리와 대화를 나누며 계약의 큰 틀을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지노빌리는 세부사항의 조율을 끝낸 후 정식으로 샌안토니오와 계약에 합의하며 리그에 입성하게 된다. 당시 25살로 적지 않은 나이였던 지노빌리는 주전이 보장된 유럽과 달리 샌안토니오에선 백업 가드의 역할을 맡을 것을 알면서도 안정이 아닌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다른 유럽 출신 NBA 선수들처럼 지노빌리도 데뷔 초반 리그 적응에 애를 먹었다. 설상가상으로 부상까지 겹치면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부상의 회복과 함께 점점 NBA 스타일에 적응하기 시작한 지노빌리는 후반기 32경기에서 평균 25.6분 출장 10.3득점(FG 48.2%) 3리바운드 2.6어시스트를 기록, 샌안토니오의 주축 로테이션 멤버로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그 결과 지노빌리는 데뷔 시즌 정규리그 69경기 평균 20.8분 7.6득점(FG 43.8%) 2.3리바운드 2어시스트를 기록해 NBA 올-루키 세컨드 팀에도 선정된다. 2002-2003시즌 팀 던컨과 토니 파커를 중심으로 전력을 운용한 샌안토니오는 정규리그 60승 22패를 올리며 리그 승률 1위에 등극했다.

정규리그 막판 그렉 포포비치 감독의 신뢰를 받기 시작한 지노빌리는 플레이오프에 들어와선 붙박이 로테이션 멤버로 자리 잡는다. 정규리그에선 스티브 스미스의 백업으로 활약했던 지노빌리는 플레이오프에선 그를 밀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노빌리는 클러치 상황 때마다 득점을 올리는 등 해결사의 면모를 과시했다. 수비에서도 상대 스코어러의 득점을 봉쇄하는 등 일각에선 지노빌리가 향후 3&D 플레이어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파이널에서 뉴저지를 만난 샌안토니오는 던컨의 인사이드 장악과 함께 시즌 개막을 앞두고 은퇴를 선언한 데이비드 로빈슨까지 힘을 보태면서 파이널 2번째 우승에 성공한다. 지노빌리는 플레이오프 24경기 평균 27.5분 9.4득점(FG 38.6%) 3.8리바운드 2.9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성공적으로 플레이오프 무대 데뷔를 마무리했다.

성공적으로 적응기를 마친 지노빌리는 2번째 시즌인 2003-2004시즌, 정규리그 77경기에서 평균 29.3분 12.8득점(FG 41.8%) 4.5리바운드 3.8어시스트를 기록, 리그에 안착했다. 포포비치 감독은 지노빌리를 선발과 벤치로 골고루 중용하며 활용법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심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10경기 평균 27.9분 출장 13득점(FG 44.7%) 5.3리바운드 3.1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2년차의 지노빌리는 데뷔 시즌과 비교했을 때 모든 면에서 일취월장해있었다. 단점이 있다면 경험 미숙에서 나오는 턴오버와 기복이 심하다는 점이었다. 다만 지노빌리가 샌안토니오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지노빌리의 시그니쳐인 유로스텝까지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하는 등 지노빌리의 인지도 역시 점점 더 높아져만 갔다. 유로스텝에 이은 지노빌리의 원핸드 덩크는 경기를 지켜보는 샌안토니오 팬들에게 짜릿함을 선물했다.

포포비치 감독은 2003-2004시즌을 기점으로 로빈슨이 떠난 샌안토니오의 새로운 미래 계획에 던컨-파커와 함께 지노빌리를 구상에 넣었다. 이를 위해 샌안토니오는 2003년 여름 2002 파이널 우승의 주역인 스테판 잭슨과 재계약을 포기했다. 당초 잭슨은 샌안토니오 잔류를 최우선시하며 프랜차이즈 스타로 남길 원했다. 그러나 샌안토니오는 잭슨이 제안한 장기계약을 단칼에 거절, 잭슨은 샌안토니오를 떠나 애틀랜타로 이적한다. 당시 잭슨은 에이전트와 함께 공개적으로 샌안토니오를 비난하는 등 잭슨과 샌안토니오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무엇보다 잭슨과의 재계약 포기는 샌안토니오가 지노빌리에게 얼마나 두터운 신뢰를 갖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였다.(*이후 샌안토니오와 관계를 회복한 잭슨은 2012-2013시즌 샌안토니오로 복귀했다)



▲2번의 파이널 우승, 샌안토니오의 빅3로 올라선 마누 지노빌리!

2005 NBA 파이널 우승은 지노빌리에게 있어 여러모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바로 본인이 팀의 주역으로 활약해 달성한 첫 파이널 우승이기 때문이다. 2004년 여름 샌안토니오와 지노빌리와 재계약을 두고 갈등을 빚으며 지노빌리의 이적설이 불거지기도 했다. 하지만 시즌 개막을 앞두고, 샌안토니오와 재계약한 지노빌리는 2004-2005시즌 정규리그 74경기를 모두 주전으로 뛰면서 던컨-파커와 함께 빅3를 구성했다. 지노빌리는 당해 시즌 평균 29.7분을 소화하며 16득점(FG 47.1%) 4.4리바운드 3.9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6년의 커리어 동안 2번 올스타에 선정됐던 지노빌리는 2005 올스타전에서 서부 사령탑을 맡은 포포비치 감독의 추천으로 생애 첫 올스타 선정의 기쁨을 누렸다.(*지노빌리는 2011년에도 포포비치 감독의 추천을 통해 다시 한번 올스타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플레이오프에 들어와서 지노빌리의 경기력은 더욱 날카로웠다. 지노빌리는 2004-2005시즌 플레이오프에서 23경기 평균 33.7분 20.8득점(FG 50.7%) 5.8리바운드 4.2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순도 높은 득점력으로 팀의 고공행진을 이끌었다. 정규리그에서 59승 23패로 서부 컨퍼런스 2번 시드에 오른 샌안토니오는 덴버 너게츠와 시애틀 소닉스, 피닉스 선즈를 가볍게 물리치고, 파이널 진출에 성공한다. 샌안토니오는 파이널에 오르기까지 단 4패만을 기록하는 등 강력함을 자랑했다. 샌안토니오의 파이널 상대는 2003-2004시즌 전당포 라인업의 LA 레이커스를 물리친 디트로이트였다. 디트로이트와 샌안토니오 모두 수비가 단단한 팀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두 팀의 시리즈가 재미는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로 2005 파이널은 파이널 역사상 2번째로 낮은 TV 시청률(8.2%)을 기록하는 등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치러진다. 공교롭게도 파이널 역사상 최악의 시청률(6.2%)을 기록한 것도 샌안토니오가 우승을 차지한 2007 파이널이었다.

사람들의 무관심과는 별개로 2005 파이널은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이 펼쳐지며 치열하게 전개됐다. 1차전과 2차전을 홈에서 시작한 샌안토니오는 던컨과 지노빌리의 활약을 앞세워 2연승에 성공한다. 지노빌리는 첫 2경기에서 평균 26득점(FG 66.7%) 6리바운드 4.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던컨도 같은 기간 평균 21득점(FG 46.8%) 14리바운드 3블록을 기록, 디트로이트의 왈라스 듀오를 압도했다. 그러나 이어진 3차전과 4차전, 샌안토니오는 디트로이트의 조직적인 수비에 고전해 평균 75점을 올리는 데 그쳤다. 지노빌리는 천시 빌럽스와 리차드 해밀턴의 수비에 막혀 평균 9.5득점(FG 36%) 4리바운드 1.5어시스트로 부진했다. 던컨도 지노빌리와 마찬가지로 왈라스 듀오의 수비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고, 평균 15득점(FG 31.2%)을 올리는 데 그쳤다.

5차전, 홈으로 돌아온 샌안토니오는 연장까지 가는 공방 끝에 경기 종료 5.9초를 남기고 터진 로버트 호리의 결승 3점 슛에 힘입어 시리즈를 리드한다. 경기 초반부터 쾌조의 컨디션을 보여준 호리는 이날 3점 5개(FG 83.3%)를 포함해 21득점(FG 58.3%) 7리바운드를 기록했다. 4차전까지 부진했던 지노빌리도 15득점(FG 31.3%) 6리바운드 9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팀플레이에 주력하며 승리에 일조했다. 호리의 결승 3점도 지노빌리의 패스가 있기에 가능했다. 이날 경기는 4쿼터 종료를 앞두고 지노빌리가 결승 득점에 실패하며 연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지노빌리는 연장전 작전타임 후 이어진 마지막 공격에서 상대 수비의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뒤 비어있던 호리에게 패스를 전달, 이 패스가 호리의 3점으로 이어지면서 승부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샌안토니오는 6차전 원정에서 패했지만 홈으로 돌아온 7차전, 63득점을 합작한 던컨-지노빌리-호리의 삼각편대를 앞세워 디트로이트에 84-71로 승리, 구단 역사상 3번째 파이널 우승을 달성했다. 6차전 21득점(FG 41.2%)을 올린 지노빌리는 7차전도 23득점(FG 61.5%) 5리바운드 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노빌리는 수비에서도 해밀턴을 봉쇄했다. 지노빌리는 브루스 보웬과 호흡을 맞출 때는 3번 포지션 수비를 맡았다. 테이션 프린스는 수비에 특화된 선수라 지노빌리로선 수비에 에너지를 덜 쏟을 수 있었다. 파이널 7경기에서 평균 36분 18.7득점(FG 49.4%) 5.9리바운드 4어시스트를 기록한 지노빌리는 던컨과 파이널 MVP를 두고 경쟁했다. 하지만 MVP의 영광은 던컨에게 돌아갔다. 당시 일각에선 지노빌리가 미국 국적 선수였다면 파이널 MVP는 그에게로 돌아갔을 것이란 말을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다는 말처럼 2005-2006시즌은 지노빌리에게 있어 고난의 시간이었다. 시즌 초반부터 발과 발목 부상으로 고생했던 지노빌리는 정규리그 65경기 평균 27.9분 15.1득점(FG 46.2%) 3.5리바운드 3.6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후반기에 들어와서야 컨디션을 회복한 지노빌리는 플레이오프 13경기에서 평균 32.8분 18.4득점(FG 48.4%) 4.5리바운드 3어시스트를 기록했지만 팀의 탈락을 막진 못했다. 2006-2007시즌은 지노빌리에게 있어 커리어의 전환기였다. 지노빌리의 보직 변경이 결정된 시기가 바로 이때였기 때문. 시즌이 중반으로 흘러가면서 벤치 멤버들의 기량이 떨어진다는 것을 실감한 포포비치 감독은 지노빌리를 식스맨으로 내려 문제를 해결했다. 지노빌리는 2006-2007시즌 39경기를 벤치에서 출장, 평균 26.2분 16.7득점(FG 47.7%) 4.2리바운드 3.8어시스트를 기록했다.(*2006-2007시즌 지노빌리는 정규리그 75경기 평균 27.5분 16.5득점(FG 46.4%) 4.4리바운드 3.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지노빌리는 핵심 식스맨으로 출격해 4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서부 컨퍼런스 3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오른 샌안토니오는 덴버-피닉스-유타를 물리치고 파이널 진출에 성공한다. 샌안토니오의 강세와 플레이오프의 흥행이 반비례했다. 2007 NBA 파이널은 르브론 제임스(CLE)가 처음으로 대권에 도전할 기회를 얻으며 흥미를 끌었다. 하지만 제임스의 상대가 샌안토니오로 결정되면서 파이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급속도로 하락했다. 사람들은 제임스가 이끈 클리블랜드를 철저하게 언더독으로 평가하며 샌안토니오의 우세를 점쳤다. 시리즈 결과도 샌안토니오의 스윕으로 끝나며 사람들의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샌안토니오는 빅3와 조직적인 수비를 바탕으로 클리블랜드를 압도, 프랜차이즈 역사상 4번째 파이널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샌안토니오는 2007년 파이널에서 4-0으로 스윕했다)


▲절정의 기량, 리그 역사상 최고의 식스맨 마누 지노빌리!

2006-2007시즌 성공적으로 보직을 변경한 지노빌리는 이후 식스맨 역할 이상의 롤을 부여받고, 커리어의 전성기를 열게 된다. 2007-2008시즌 정규리그 74경기 평균 31.1분 19.5득점(FG 46%) 4.8리바운드 4.5어시스트를 기록한 지노빌리는 올해의 식스맨상 투표에서 124명 중 123명으로부터 1위 표를 받아 수상의 영광을 안는다. 마찬가지 올-NBA 팀 선정에서도 생애 처음으로 써드 팀에 선정되는 등 데뷔 후 최고의 시즌을 보내게 된다. 지노빌리는 플레이오프에서도 뉴올리언스와 맞붙은 세미파이널에서 평균 34.8분 21.3득점(FG 38.5%) 4.1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팀 공격을 이끌었다. 하지만 샌안토니오는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코비 브라이언트가 이끄는 LA 레이커스를 만나 패하면서 백투백 우승 도전에 실패하게 된다. 일각에서 샌안토니오를 왕조라 부르지 않는 것은 백투백 우승은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노빌리는 부상으로 신음한 2008-2009시즌을 제외하고, 팀의 핵심 식스맨을 맡아 샌안토니오를 이끈다. 2008-2009시즌 부상에 허덕이며 정규리그 44경기 출장에 그친 지노빌리는 플레이오프에는 아예 나서지조차 못했다. 지노빌리가 빠진 샌안토니오는 서부 컨퍼런스 1번 시드를 차지하고도 1라운드에서 탈락해 1999-2000시즌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1라운드 탈락을 경험했다. 이후 샌안토니오는 2014 파이널에서 5번째 우승을 달성하기 전까지 플레이오프 진출팀 명단에 꾸준히 이름을 올렸고, 시즌 개막 전에는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로 거론됐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실제로 우승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샌안토니오는 빅3가 조금씩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그 경기력이 떨어진 것이 원인이었다.

포포비치 감독이 지노빌리에게 식스맨 보직을 맡긴 것은 그의 창의성과 순간적인 폭발력이 식스맨 역할에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샌안토니오는 다양한 스크린 전술 등 포포비치 감독이 설계한 시스템 농구를 기반으로 경기를 펼치는 팀이다. 리그에서 농구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선수들도 적응에 애를 먹는 것이 바로 샌안토니오 농구다. 이와 함께 샌안토니오 농구에는 창의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비판도 함께 뒤따른다. 샌안토니오가 파이널에 오를 때마다 시청률이 뚝 떨어진 것도 샌안토니오의 재미없는 농구 스타일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샌안토니오의 농구는 승리에는 적합한 농구지만 앞서 언급한 파이널 시청률에서 알 수가 있듯 흥행에는 한계가 있는 농구 스타일이다.(*2014 NBA 파이널의 시청률은 평균 9.3%였다)

그러나 모든 시스템이 완벽할 수가 없듯 샌안토니오의 시스템 농구도 48분 내내 기름칠한 기계처럼 원활하게 돌아갈 수 없었다. 이때마다 포포비치 감독은 지노빌리의 창의성을 문제의 해법으로 활용, 경기 분위기를 전환해 승리를 이끌었다. 돌파가 좋은 지노빌리는 아이솔레이션 플레이로 득점과 어시스트를 뿌리며 뻑뻑했던 공격에 돌파구를 만들었다. 젊은 시절 지노빌리는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한 돌파가 일품이었다. 플라핑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자유투를 얻어내는 능력도 지노빌리의 또 다른 장기 중 하나. 가끔 젊은 혈기에 영웅 심리가 발동하며 무리한 돌파로 턴오버를 유발, 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서 운동능력이 감퇴한 지노빌리의 돌파 위력은 점점 더 떨어졌다. 다만 그 대신에 경험이 쌓이며 노련미가 더해진 지노빌리는 은퇴 직전에는 안정적인 경기운영으로 플레이 스타일에 변화를 주기도 했다.

정교한 슛도 지노빌리의 공격루트 중 하나다. 지노빌리는 커리어 평균 36.9%(1.4개 성공)의 3점 성공률을 기록할 정도로 외곽 슛이 정확한 선수다. 16피트 이상 거리에서 시도한 3점 성공률이 평균 34.6%에 이를 정도로 지노빌리는 슈팅 레인지가 길고, 장소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젊은 시절 지노빌리는 스스로 공간을 만들며 3점 슛을 만드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면서 동료들의 오프 더 볼 스크린을 적극 활용하는 등 캐치 앤 슈터로 변신해 외곽 슛의 효율성을 유지했다. 여기에 지노빌리는 리그에 처음 입성했을 당시 미드레인지 점퍼가 불안정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드레인지 점퍼가 안정되면서 2대2 하이 픽앤 롤 플레이도 위력을 발휘하는 등 지노빌리의 공격력은 완성형에 이르게 된다.

무엇보다 지노빌리가 리그 역사상 최고의 식스맨으로 평가받는 것에는 경기력도 경기력이지만 자신의 변화된 역할을 받아들이는 태도도 남달랐기 때문이다. 보통 주전으로 뛰다 식스맨으로 보직이 변경되는 경우, 대부분 달라진 역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더 애슬레틱의 보도에 따르면 지노빌리는 처음 식스맨으로 보직 변경을 들었을 당시 불평 하나도 없이 자신의 바뀐 역할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프런트의 우려와 달리 오히려 식스맨으로 뛴 첫 경기부터 벤치에 앉아 선수들을 독려하는 등 코트 밖에서도 동료들과 함께 싸웠다. 르브론 제임스도 처음 농구를 시작한 아들이 식스맨 역할을 맡은 것에 대해 실망감을 드러내자 지노빌리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등 코트 밖에서 보여준 모습들도 지노빌리를 리그 역사상 최고의 식스맨으로 만든 요인이었다.



▲마지막 우승과 베테랑의 품격을 보여준 마누 지노빌리!

모두가 알고 있듯 샌안토니오와 지노빌리의 마지막 파이널 우승은 2014년이다. 샌안토니오는 빅3 체제를 유지하며 2011 신인드래프트에선 카와이 레너드를 지명, 또 다른 미래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지노빌리는 2010-2011시즌 잠시 선발로 복귀해 정규리그 80경기에서 평균 30.3분 17.4득점(FG 43.3%) 3.7리바운드 4.9어시스트를 기록, 정규리그 MVP 최종 투표 전체 8위를 기록한다. 이후 지노빌리는 포포비치 감독의 철저한 관리 아래 커리어의 황혼기를 준비한다. 샌안토니오는 2012-2013시즌 파이널에 오르며 통산 5번째 우승 달성의 기회를 맞이했다. 실제 샌안토니오는 5차전 24득점(FG 57.1%)을 올린 지노빌리의 활약을 앞세워 경기에 승리, 르브론 제임스-크리스 보쉬-드웨인 웨이드가 이끈 마이애미에 시리즈 스코어 3-2로 앞서며 우승을 눈앞에 뒀다. 하지만 6차전과 7차전을 내리 패하며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파이널 우승 재도전에 성공한 2013-2014시즌, 지노빌리는 정규리그 68경기에서 평균 22.8분 12.3득점(FG 46.9%) 3리바운드 4.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레너드와 함께 대니 그린과 패티 밀스, 마르코 벨리넬리 등 젊은 선수들이 대거 합류해 로스터의 운용 폭이 넓어진 샌안토니오는 정규리그에선 빅3의 출전시간을 철저하게 관리했다. 빅3의 시대를 이어받을 것으로 평가받던 그린과 레너드 등 샌안토니오의 젊은 선수들은 성장세를 이어가며 샌안토니오의 고공행진을 이끌었다. 이때부터 포포비치 감독은 젊은 선수들에게 출전기회를 주면서 노장 선수들의 결장 사유로 OLD를 표기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신구 조화를 이루는 데 성공한 샌안토니오는 정규리그에서 62승 20패를 기록, 리그 전체 승률 1위이자 서부 컨퍼런스 1번 시드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다.

그리고 플레이오프는 정규리그 출전시간의 관리를 받은 노장 선수들의 가치가 돋보였다. 샌안토니오는 1라운드 댈러스를 만나 7차전까지 접전을 벌인 끝에 세미파이널 진출을 확정했다. 이에 사람들은 샌안토니오의 향후 시리즈가 험난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노장 선수들의 노련미와 젊은 선수들의 패기를 앞세운 샌안토니오는 포틀랜드·오클라호마시티를 가볍게 물리치고 2년 연속 파이널에 진출한다. 샌안토니오의 파이널 상대는 지난해 패배의 아픔을 안겨줬던 마이애미였다. 빅3를 앞세운 마이애미는 샬럿-브루클린-인디애나를 차례대로 꺾고, 동부 제패에 성공했다. 2013 파이널 6차전에서 레이 알렌에게 경기 종료 5.3초를 남기고 결승 3점을 허용, 이후 시리즈 분위기가 마이애미 쪽으로 넘어가며 아쉽게 우승을 내줬던 샌안토니오는 2014 파이널 첫 경기부터 마이애미를 강하게 몰아쳤다.

홈에서 1차전을 가진 샌안토니오는 지노빌리가 3점 3개(3P 50%)를 포함, 16득점(FG 50%) 5리바운드 11어시스트로 더블-더블을 기록하는 등 전 선수가 고른 활약을 펼치며 마이애미를 110-95로 대파했다. 2차전은 제임스를 막지 못하고 패했지만 이후 카와이 레너드가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샌안토니오는 3연승에 성공, 시리즈 스코어 4-1로 지난 시즌 준우승의 아쉬움을 되돌려줬다. 지노빌리 역시 파이널에서 5경기 평균 15.4득점(FG 50%) 3리바운드 4.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강력한 파이널 MVP 후보로 거론됐다. 하지만 파이널 MVP의 영광은 제임스를 상대로 깜짝 활약을 보여준 레너드에게 돌아갔다. 이때를 기점으로 샌안토니오는 레너드 중심으로 팀을 재편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레너드와 샌안토니오의 동행은 지난해 여름 새드엔딩으로 끝이 났다.

이후 지노빌리는 2018년 여름 은퇴하기 전까지 파이널 무대를 밟지 못하고 코트를 떠나게 된다. 2016년 여름 던컨의 은퇴를 시작으로 샌안토니오의 빅3는 조금씩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토니 파커도 지난해 여름 샬럿으로 이적, 올여름 공식적으로 선수 은퇴를 선언하고 18년의 NBA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지노빌리는 서른 중반의 백전노장이 됐음에도 은퇴 직전까지 샌안토니오 벤치의 핵심으로 활약한다. 지노빌리는 마지막 은퇴 시즌인 2017-2018시즌 정규리그에서 65경기 평균 20분 8.9득점(FG 43.4%) 2.2리바운드 2.5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웬만한 젊은 선수들 못지않은 기량을 선보였다. 지노빌리는 눈에 보이는 기록이 아닌 안정적인 경기운영과 허슬플레이 등 눈에 보이지 않는 플레이로 팀에 공헌하며 노장의 품격을 보여줬다.

다만 지노빌리가 은퇴 직전까지 샌안토니오 백코트의 중심으로 활약했다는 것은 샌안토니오의 세대교체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샌안토니오가 지노빌리를 쉽게 놓지 못했던 대체자의 부재도 문제였지만 경기 외적으로 지노빌리가 팀에 끼친 영향력이 지대했기 때문이다. 특히 지노빌리의 리더십은 지금의 샌안토니오 문화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팬사이디드에 따르면 지노빌리는 팀 후배들에게 샌안토니오와 자신의 철학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팀 문화에 자연스레 녹아들 수 있도록 배려의 리더십을 실천했다. 후배들에게 조언을 건네면서 끝에는 자신을 무조건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법을 찾으라는 이야기도 함께 해준 것이 그 예다. 지금도 라마커스 알드리지와 마르코 벨리넬리 등 고참 선수들도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지노빌리에게 조언을 구하는 등 지노빌리의 리더십은 은퇴 후에도 샌안토니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마찬가지 지노빌리의 리더십은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에서도 잘 드러난다. 지노빌리는 대표팀 주장으로서 언제나 선수들에게 하나의 ‘원팀(One Team)’이 될 것을 강조했다. 아르헨티나가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도 지노빌리의 리더십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당시 아테네 올림픽에 참가한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지노빌리를 포함해 루이스 스콜라, 안드레 노시오니, 카를로스 델피노까지 NBA 리거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에 이들을 제외한 다른 동료 선수들이 위화감을 느낄 법도 했지만 지노빌리가 팀을 하나로 모으는 리더십을 발휘한 덕분에 미국대표팀을 꺾고 대회 최정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지노빌리는 평소 훈련에도 솔선수범하는 것은 물론, 경기를 뛰면서 리바운드와 수비 등 팀을 위한 희생도 등한시하지 않았기에 동료들의 두터운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지노빌리가 은퇴한 지금도 아르헨티나가 대표적인 농구 강국으로 군림하는 것은 지노빌리가 대표팀으로 활약하며 만든 팀 문화가 토대가 됐기 때문이다. 현재 침체기에 빠진 대한민국 농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기 위해 아르헨티나처럼 농구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발돋움한 나라들의 사례를 참고해 이를 우리의 방식에 맞게 도입하는 것도 식을 대로 식어버린 농구의 인기를 되살릴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운도 노력하고 준비된 자에게 따르는 것”이란 야오밍 중국 농구협회장의 말은 그저 지나가는 말로 가볍게 흘려들을 이야기가 아니다.

2016년 여름 던컨이 은퇴하면서 계속해 은퇴를 고민하던 지노빌리도 지난해 여름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 샌안토니오의 전설로 남게 됐다. 지노빌리의 은퇴 소식에 현역 시절 우승을 두고 다퉜던 코비 브라이언트, 르브론 제임스 등 많은 선수들이 축하 소식을 전하며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지노빌리를 응원했다. 샌안토니오도 지난 3월 지노빌리의 등 번호 20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해 전설의 은퇴를 축하했다.

은퇴 후 지노빌리는 가족들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지노빌리가 올여름 샌안토니오가 제안한 어시스턴트 코치직 제안을 거절한 것도 아직은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美 현지에선 빠른 시일 지노빌리가 샌안토니오 코치진에 합류할 것이라 점치고 있다. 그렇기에 머지않아 샌안토니오의 빅3가 코치로 변신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등 샌안토니오와 지노빌리의 인연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2004년 아르헨티나 출신의 아내와 결혼한 지노빌리는 슬하에 아들만 3명이 있고, 평소 아내와 자전거 데이트를 즐길 정도로 가정 생활에서도 역시 로맨티시스트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스크롤 압박에도 불구하고,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점프볼 DB, 나이키, NBA 제공, NBA 미디어센트럴, 유튜브 영상 캡처
#기록참조-NBA.com, BASKETBALL REFERENCE

[저작권자ⓒ 점프볼.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양준민 양준민

기자의 인기기사

JUMPBALL TV

오늘의 이슈

점프볼 연재

더보기

주요기사

더보기

JUMPBALL 매거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