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구의 DEBUT] 미국에서 돌아온 ‘Mr. 빅뱅’ 방성윤의 KBL 데뷔

민준구 / 기사승인 : 2020-04-17 14: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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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민준구 기자] 큰 꿈을 품고 떠났던 한 남자는 절반의 성공을 안고 정든 한국으로 돌아왔다. 남들이 걷지 않는 길을 떠났던 만큼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복귀에 많은 사람들의 기대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남자가 드디어 KBL에 데뷔했다.

한국농구 역사상 비운의 사나이로 불리는 방성윤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추억의 스타다. 어린 시절부터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섰으며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이제는 3x3로 전향, 다시 코트에 서고 있지만 우리가 추억하고 있는 방성윤은 KBL의 아이콘이었다.

방성윤은 대현초 재학 시절, 은퇴한 배구 선수였던 이모의 손을 잡고 농구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신체 조건이 좋았던 탓에 금세 적응할 수 있었고 명문 휘문중으로 진학하게 된다. 타고난 농구선수였던 방성윤에게 적수는 없었다. 휘문고에 올라오면서 이름을 알리게 된 그는 2000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U18 아시아 대회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정신없이 농구만 했던 시절이었다. 내가 관심을 받고 있는지, 주목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농구를 하는 게 너무 행복했고 이 시간이 소중했다. 그러다 보니 좋은 성적이 따라왔고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청소년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방성윤의 말이다.

당시 한국은 일본, 예멘, 태국을 차례로 격파하며 1라운드를 전승으로 마무리했다. 2라운드에서 만난 중국에 연장 접전 끝, 103-107로 패했지만 사우디 아라비아와 카타르를 격침시키며 4강에 진출한다. 이후 대만을 꺾은 한국은 결승에서 중국과 리턴 매치를 갖게 된다.

방성윤은 “중국은 그때도 강했다. 조별 예선에서는 아쉽게 지기는 했는데 결승에선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결승에서 엄청 크게 이겼던 걸로 기억한다. 개인적으로 득점도 많이 했던 것 같은데 생각은 안 난다(웃음)”라고 이야기했다.

한국은 중국과의 결승에서 120-92로 크게 승리했다. 이날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인 건 단연 방성윤. 무려 23득점을 폭발시키며 만리장성을 격침했다. 통산 세 번째 우승이자 1995년 이후 5년만에 이룬 쾌거였다.

고교 최고의 선수로 꼽힌 방성윤의 미래는 탄탄대로였다. 여러 대학이 ‘방성윤 잡기’에 나섰고 경쟁은 치열했다. 당시 중앙대 사령탑이었던 김태환 전 감독은 “우리도 방성윤을 잡으려고 엄청 노력했다. 내 생각에는 중앙대에 오기로 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연세대로 가더라. 하하. 만약에 방성윤이 중앙대로 왔다면 전성기가 오래 갔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한국농구를 이끌 최고의 유망주로 꼽혔던 방성윤은 연세대에서도 단숨에 주력 선수로 자리 잡았다. 공격적인 성향 때문에 무리가 많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에이스의 본능으로 보는 시선이 더욱 짙었다. 그만큼 방성윤은 독보적인 존재였다.



방성윤이 얼마나 큰 기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은 바로 2002 부산아시안게임 출전이다. 김진 전 감독은 선수 명단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방성윤을 선발한다. 당시 문경은, 이상민, 서장훈, 전희철, 김주성 등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선수들만이 발탁된 가운데 방성윤은 유일한 대학선수 신분으로 김진 전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방성윤은 “큰 부담은 없었다. 어차피 막내였으니까(웃음). 그냥 형들이 하는 대로 열심히 했을 뿐이다. 질 것 같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중국과의 결승도 형들은 다 질 거라고 했는데 결국 이기지 않았나. 그때는 진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라고 전했다.

성공적인 단계를 거쳐 온 방성윤에게 있어 도전의 시기가 찾아왔다. 연세대 입학 전, 하와이 전지훈련을 통해 본 NBA에 푹 빠져 미국 진출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모두가 무모한 도전이라고 평가했다. 아시아 선수의 NBA 도전 성공 사례가 많지 않았고 또 도전 방법도 모르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방성윤은 자신의 생각을 접지 않았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생각나는 건 하와이 전지훈련 때 NBA 경기를 우연히 보게 됐고 완전히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미국 진출에 대해 고민했다.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연세대를 다니는 내내 미국 생각만 했다.”

연세대 졸업 후 방성윤은 영어도 제대로 모른 채로 미국행 티켓을 끊었다. 이미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으로 병역 혜택까지 받게 된 그의 도전에 제약은 없었다.

“한동안 잊고 살아서 내가 어떻게 미국으로 갔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근데 주변에서는 가지 말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려울 거라는 이유가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냈고 D-리그(현재 G-리그) 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있게 됐다.”

2004년 11월 6일, 방성윤은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열린 NBA D-리그 신인 드래프트에서 4라운드 2순위로 로어노크 대즐에 지명됐다. 5월부터 플로리다 IMG아카데미에서 훈련해왔던 그는 비교적 오랜 시간을 준비한 끝에 결실을 맺게 됐다. 당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의 D-리그팀 포틀랜드 레인에서 뛰고 있던 하승진에 이어 두 번째 도전자가 된 것이다.

적응이 쉽지 않을 것이란 평가 속에서도 방성윤은 자신의 진가를 마음껏 발휘했다. 2004-2005 NBA D-리그 개막전서 13득점 4리바운드로 합격점을 받은 것. 이후 승승장구한 그는 평균 12.5득점으로 전체 15위에 올랐으며 장기인 3점슛은 38개를 성공해 1위를 차지했다.

아시아 출신 선수로 불과 1년 만에 성공적인 행보를 보였던 방성윤. 그러나 그는 NBA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아니 문을 두드리지도 못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방성윤은 “그때 우리 팀에서 2~3명 정도가 NBA 팀에 콜-업된 적이 있다. 내가 그들보다 성적이 떨어지지 않는데 왜 순위에서 밀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당시 내 에이전트가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다. 시즌 막바지에 3경기 연속 20득점을 기록한 적이 있고 대부분의 경기에서 두 자릿수 득점 이상을 해왔다. 3점슛도 전체 1위면 주목받을 만한 일인데 그렇지 않은 게 너무 이상했다. 주변 사람들이나 코치들도 왜 에이전트가 가만히 있는지 궁금해하더라.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에 대한 일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라고 아쉬움을 표현했다.

이어 “10일 계약을 세 번 하면 1년 동안 자동으로 계약이 맺어질 수 있었다. 적어도 10일 계약 정도는 따낼 수 있었는데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때가 적기라는 생각에 아직도 아쉽다”라고 덧붙였다.

본인의 기량을 증명했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얻지 못했던 방성윤의 첫 도전. 이후 큰 파도가 그를 덮쳐 오면서 시련이 시작된다. NBA 진출의 꿈을 포기하지 못한 그와 이미 2005 KBL 국내 신인선수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지명한 부산 KTF의 갈등이 생긴 것이다. 실질적으로 방성윤이 아닌 에이전트를 맡고 있던 IMG 코리아와 KTF의 문제라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문제는 심각했다. 만약 KBL 신인 드래프트에 지명된 방성윤이 계약하지 않으면 5년간 국내무대에서 뛸 수 없었다. 반대로 IMG 코리아는 최소 2년간 방성윤의 NBA 도전을 원했고 당장 KBL에 나설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70억이라는 거대 금액 관련 이슈, NBA 도전에 대한 문제 등 다양한 상황이 펼쳐졌고 오랜 줄다리기 끝에 계약이 성사됐다.

계약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KTF는 방성윤에게 신인 최고 대우를 해주는 것과 동시에 NBA 도전을 위해 KBL 출전을 2년간 유예해주기로 했다. 그렇게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였고 방성윤은 서머리그 출전을 위해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방성윤의 NBA 도전은 현재진행형처럼 보였다. 그러나 2005년 11월, 짧은 기간 동안 한국에서 머물렀고 이후 깜짝 소식을 전했다. SK와 KTF가 3대3 트레이드를 감행했고 여기에 방성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SK는 조상현과 황진원, 이한권을 내주는 대신 방성윤과 정락영, 김기만을 데려왔다. 방성윤은 KBL 출전을 약속하며 국내 리턴을 확정지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중앙대 시절 방성윤을 놓쳤던 김태환 전 감독은 SK 지휘봉을 잡음과 동시에 그와 재회하게 됐다. 김태환 전 감독은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방성윤이라는 초특급 스타가 KBL에서 뛰어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오래전에 한 번 놓쳤던 선수를 다시 품에 안게 돼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다”라고 회상했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온 방성윤은 SK에서 KBL 데뷔전을 치르게 된다.

모두가 기대했던 방성윤의 데뷔전은 2005년 11월 26일 창원실내체육관에서 펼쳐졌다. 당시 SK는 6승 7패를 기록, 전체 8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방성윤의 합세와 함께 수직 상승을 기대하며 기분 좋게 창원 원정을 떠나게 됐다.

너무 기대가 컸던 탓일까. 선발 출전 명단에 이름을 올린 방성윤은 자신의 KBL 데뷔전에서 27분 21초 동안 21득점 2리바운드 1어시스트 1스틸을 기록했다. 3쿼터 5반칙 퇴장할 때까지의 기록이며 SK는 87-100으로 패했다.

신인선수의 데뷔전인 만큼 대단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방성윤이라는 이름값에 비교하면 아쉬운 성적이었다. 특히 부산아시안게임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활약한 현주엽과의 매치업에서 밀렸다는 것은 더욱 씁쓸한 일이었다.



방성윤은 이날 장기인 3점슛이 말을 듣지 않았다. 7개를 시도해 단 2개 성공에 그쳤고 무엇보다 팀원들과의 호흡이 맞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팀메이트였던 전희철 코치는 “(방)성윤이의 기량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필요 없었다. 부산아시안게임 때 본 성윤이와 SK에서의 성윤이의 플레이는 조금 다르긴 했지만 말이다(웃음). 데뷔전이어서 그런지 무리성 플레이가 많았다. 자세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해줬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김태환 전 감독 역시 “방성윤이라는 이름값에 걸맞지 않은 활약이라는 건 인정한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오래되어서 그런지 첫 경기에는 적응하기 힘들어하기도 했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방성윤이 기억하는 자신의 데뷔전은 어땠을까. “15년 전 일인 만큼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웃음). 하지만 정신없이 경기했던 건 생각난다. (현)주엽이 형과 매치업이 됐는데 버거운 면도 있었다. 반칙 관리도 못해서 퇴장당하기도 했다. 만족스럽지 못한 데뷔전이었다.”

아쉬움 가득했던 데뷔전을 뒤로 한 방성윤은 2005-2006시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부상으로 마지막까지 뛰지는 못했지만 34경기에 출전해 평균 29분 10초 동안 17.2득점 4.2리바운드 1.8어시스트 1.7스틸을 기록,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자신의 첫 시즌을 회상한 방성윤은 “미국과 한국을 오고 가면서 몸 관리가 힘들었다. 첫 시즌은 무사히 잘 마쳤지만 이후 ‘유리몸’이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쉬운 시절이다. 모든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던 때였는데…. 아쉬움이 남지만 이제는 추억이 됐다”라며 데뷔 시절을 간직했다.

# 사진_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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