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구의 DEBUT] 현대 왕조 떠나 송골매 군단의 비상 이끈 캥거루 슈터

민준구 / 기사승인 : 2020-04-24 16: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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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민준구 기자] 안정과 도전의 선택지에서 과감히 도전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KBL 최초의 왕조를 건설한 사나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저 양보와 배려로 자신의 위치를 지킬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또 도전이란 선택을 통해 자신의 이름 세글자를 천하에 알렸다.



농구선수로서는 작다고 할 수 있는 180cm의 신장. 포지션 대비 수비에 대한 물음표가 항상 달려 있었던 조성원 감독은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무너뜨리며 이름을 알렸다.

조성원 감독의 농구 인생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남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하는 농구를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으며 어떤 고등학교도 관심을 주지 않는 그저그런 무명의 선수였다.

홍대부고로 진학한 조성원 감독의 첫 공식 경기 출전은 2학년 때였다. 이상민이라는 걸출한 후배가 뒤에 있었던 그는 에이스의 위치에 서지 못했다. 그러나 매번 한계에 도달할 정도의 극심한 자기 관리와 훈련으로 어느새 ‘조성원’이라는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명지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조성원 감독이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당시 홍대부고의 감독을 맡았던 김진수 선생의 존재였다. 조성원 감독은 과거 점프볼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처음 농구를 시작했을 때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열심히 하다 보니 기량이 늘게 된 케이스다. 그때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주신 분이 바로 김진수 선생님이시다. 그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라고 밝힌 바 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조성원 감독 역시 홍대부고 3학년이 됐을 때는 어느새 고교 선수들 중 상위 클래스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특히 故김춘수 감독에게 자청해 2년간 개인 훈련을 받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조성원 감독은 고려대의 스카우트 대상자가 될 정도로 이름값을 올렸다.

그러나 조성원 감독은 명지대로 진학하게 된다. 이유는 고려대에 갈 경우 혼자만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명지대에 가게 되면 ‘업둥이’라 불리는 몇몇 선수들과 함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조성원 감독이 홍대부고로 진학할 때 도움을 줬던 선수들이었다고.

이후 명지대에서의 조성원 감독은 불운한 사나이로 기억된다. 개인 기량은 뛰어났지만 팀 전력이 약해 눈에 띄는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언더독으로서 항상 주의해야 하는 팀으로 꼽혔으며 1993-1994시즌에는 중앙대와 고려대를 꺾기도 했다.

KBL 출범 전에 졸업한 조성원 감독은 실업팀 현대전자에 스카우트되어 데뷔하게 된다. 이후 군복무를 위해 상무로 가게 되며 제대 후에는 프로 선수가 되어 복귀한다.

1997-1998시즌부터 프로 생활을 시작한 조성원 감독은 이상민, 추승균 감독과 함께 ‘이·조·추’ 트리오를 형성했고 조니 맥도웰이라는 특급 외국선수와 대전 현대 천하를 이뤄냈다. 1997-1998, 1998-1999시즌 백투백 우승을 이끌며 ‘현대 왕조’를 세우기도 했다.

조성원 감독은 그때부터 ‘캥거루 슈터’, ‘4쿼터의 사나이’로 불리기 시작했다. 특유의 ‘짝발 스텝’을 이용한 3점슛은 알고도 막을 수 없었다. 더불어 4쿼터, 그리고 승부처에 강한 면모를 과시하며 승리의 마침표를 찍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1999-2000시즌 청주 SK에 정상을 빼앗긴 현대와 조성원 감독은 각자의 뜻에 따라 이별을 알리게 된다. 대단한 공격 능력에 비해 수비에서 오는 손실이 컸던 탓에 현대는 이별을 마음먹었고 조성원 역시 더 많은 기회를 보장받기 위해 작별 인사를 건넸다.

2000년 8월 8일, 조성원 감독은 창원 LG로 트레이드된다. 현대는 양희승과 현금 3억원을 받으며 왕조를 세운 공신의 이적을 허가했다.

당시 LG는 중앙대를 대학 최강으로 이끈 김태환 감독 체제로 2000-2001시즌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구 동양에서 건너온 조우현, 화끈한 공격 능력을 자랑한 에릭 이버츠 등을 영입하며 수비적이었던 LG를 공격적으로 탈바꿈하려 했다. 그리고 마지막 퍼즐은 조성원 감독이었다.

김태환 감독은 “LG는 이전까지 승리보다 패배에 익숙해져 있는 팀이었다. 또 수비적인 면에 집중하다 보니 공격에서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공격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다 보니 조성원 감독이 필요했다”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조성원 감독은 현대에서 에이스가 아니었다. 이상민이라는 걸출한 포인트가드가 있었으며 추승균, 맥도웰 등 언제든 득점을 올릴 수 있는 선수들이 가득했다. 조성원 감독의 지분이 없었다는 건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LG에서는 달랐다. 공격적인 농구를 내세운 만큼 조성원 감독의 능력은 빛을 냈다. 당시 LG의 농구는 달리고 던지는 가장 단순한 방식을 내세웠다. 하나, 어떤 팀도 그들의 화력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2000-2001시즌 LG의 첫 경기이자 조성원 감독의 LG 데뷔전만 봐도 그 위력을 알 수 있다.

2000년 11월 4일 원주치악체육관은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허재라는 특급 에이스를 보유한 원주 삼보와 새롭게 탈바꿈한 LG의 첫 만남이 이뤄진 날이었다.

신기성과 허재, 존 와센버그가 버틴 삼보는 전반을 53-37로 크게 앞서며 승리를 장담했지만 후반부터 폭발한 LG의 화력을 쉽게 막아내지 못했다. 조성원 감독은 전반까지 4득점에 불과했음에도 3쿼터에만 17득점을 터뜨리며 71-70, 역전을 이끌었다.

손발을 맞춘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던 만큼 LG는 마지막까지 화력 유지를 하지 못했다. 삼보의 4쿼터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며 결국 92-98로 패하고 말았다.

이날 조성원 감독은 풀타임 출전하며 3점슛 4개 포함 28득점 1리바운드 3어시스트 3스틸을 기록했다. 두 팀 통틀어 허재 감독(28득점 5리바운드 8어시스트 3스틸)과 함께 가장 많은 득점을 올렸다.

조우현 코치는 “처음에는 손발이 맞지 않았다. 김태환 감독님께서 (오)성식이 형 대신 나를 포인트가드로 기용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보이려고 하셨다. 내 역할은 빠르게 코트를 넘어와서 조성원 감독님의 찬스를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랑 (에릭)이버츠 역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첫 경기는 패했지만 이후에는 승리한 적이 더 많았다. 챔피언결정전까지 갔을 정도니까. 나중에는 ‘조·조 쌍포’라고 불렸지만 사실 조성원 감독님의 위치가 너무도 높았다”라고 전했다.

첫 경기에서 패한 LG가 이후 승승장구하며 정규경기 2위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평균 103.3득점이라는 거대 화력만을 꼽을 수는 없다. 조성원 감독의 인품과 리더십이 개성 강한 선수들을 하나로 뭉쳤다는 것에 더 큰 점수를 줄 수 있다.

조우현 코치는 “이적한 선수들도 많았고 서로 손발을 맞추는 데 집중해야 하는 시기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조성원 감독님이 선수들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나가 되려는 노력을 하셨다. 그래서인지 생각보다 빨리 클 수 있었고 좋은 시즌을 보낼 수 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라고 회상했다.

LG에서의 데뷔전을 패배로 끝낸 조성원 감독은 이후 절치부심하며 승승장구하는 데 앞장섰다. 2000-2001시즌 종료 후, 그의 성적은 풀타임 출전 평균 35분 49초 동안 25.7득점 2.2리바운드 4.0어시스트 1.5스틸. 국내선수 득점 1위에 오르며 당당히 정규경기 MVP에 선정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 후, 조성원 감독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안긴 그곳에서 지도자로서 다시 등장했다.

# 사진_점프볼 DB(문복주 기자),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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