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연길의 명장열전
전설을 만든 남자, 프랭크 맥과이어 (FRANK MCGUIRE)
[점프볼=최연길 칼럼니스트]윌트 채임벌린의 전설적인 100득점 경기는 농구 역사상 가장 불가사의한 기록 중 하나다. 99점도, 101점도 아닌 ‘100’이라는 숫자 때문에 그 가치는 더욱 빛난다. 채임벌린의 대기록 뒤에는 명장 프랭크 맥과이어가 있었다. 그가 있었기에 채임벌린은 기록적인 시즌을 보냈고 수많은 기록을 만들 수 있었다.
프랭크 맥과이어라는 이름을 아는 NBA 팬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NBA에서 단 한 시즌을 보냈고 우승을 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맥과이어는 NBA에서 단 한 시즌 동안 윌트 채임벌린과 함께 말도 안 되는 수많은 기록을 양산하며 존재감을 남겼다. 반대로 NCAA 팬들이라면 프랭크 맥과이어라는 이름을 모를 수가 없다. 1957년 NCAA 파이널에서 명승부 끝에 채임벌린이 버틴 캔자스 대학을 꺾고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을 우승으로 이끈 감독이기 때문이다.
NBA와 NCAA에서 모두 성공
프랭크 맥과이어는 NCAA와 NBA에서 모두 좋은 성적을 거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하나다. 물론 맥과이어가 NBA에서 머문 시즌은 단 한 시즌이었지만 NBA 역사에 남을 큰 영향을 미쳤기에 간과할 수 없다.
맥과이어 감독은 1956-1957시즌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을 32승 무패로 이끌었다. 1975-1976시즌 인디애나 대학의 감독이던 밥 나이트와 함께 무패 우승팀 중 ‘최다승’ 기록이기도 하다. 또한 맥과이어는 1952년 세인트존스 대학을 NCAA 준우승으로 이끈 바 있다. 즉, 맥과이어는 세인트존스 대학과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을 모두 NCAA 결승으로 이끌었는데 이런 기록을 가진 감독은 존 캘리퍼리(멤피스 대학, 켄터키 대학), 래리 브라운(UCLA, 캔사스 대학), 로이 윌리엄스(캔사스 대학,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릭 피티노(켄터키 대학, 루이빌 대학) 등 단 5명뿐이다.
맥과이어는 또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과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 감독을 맡아 서로 다른 두 대학을 ACC(Atlantic Coast Conference) 정상에 올려놓았고, 서로 다른 두 대학에서 ACC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맥과이어는 세인트존스 대학에서 102승 36패,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164승 56패,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283승 142패를 기록해 서로 다른 3개 대학에서 100승 이상을 기록한 최초의 감독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대학에서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한 인물도 맥과이어가 유일하다.
1961-1962시즌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의 감독으로 부임한 맥과이어는 괴물 윌트 채임벌린을 괴물의 ‘완성형’으로 만들며 기록적인 시즌을 보냈다. 물론 필라델피아도 49승 31패라는 좋은 성적으로 동부 지구 2위에 올랐고, 플레이오프에서도 동부 지구 결승에서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다.
농구 역사상 NBA와 NCAA에서 모두 성공한 감독은 흔하지 않다. NBA와 NCAA에서 모두 우승한 감독은 래리 브라운이 유일하며 NCAA에서 우승하고 NBA에서 플레이오프에 오른 감독은 맥과이어, 브라운, 피티노, 캘리퍼리 뿐이며 이 중 NBA 지구 결승(혹은 컨퍼런스 결승)까지 오른 감독은 맥과이어와 브라운뿐이다.
공수의 균형을 맞추다
맥과이어는 1958년 오펜시브 바스켓볼(Offensive Basketball)과 1959년 디펜시브 바스켓볼(Defensive Basketball) 등 두 권의 농구 전술서를 출간하며 자신의 철학을 널리 알리려고 했다. 이 두 권의 책은 그의 농구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후 두 책이 하나로 묶여 재출간되었는데 이 책의 제목은 ‘팀 바스켓볼 : 공격과 수비(Team Basketball : Offense and Defense)였다. 책 제목처럼 맥과이어는 팀플레이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공격과 수비에서 전술의 실행(execution)을 강조했다. 그렇기에 그의 팀은 때론 공격적이기도 했고 때론 수비적이기도 했다. 물론 맥과이어는 훈련 과정에서는 수비를 더 중시했다. 그는 강력한 수비가 우승을 차지한다고 믿는 감독이었다. 또한 리바운드와 박스아웃을 강조했고 연습 경기에서도 공격 리바운드를 허용하면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공격에서 맥과이어는 공격권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는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 공격권을 유지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공을 소중히 여겨라. 우리는 공을 금덩이처럼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맥과이어는 또한 수많은 명장들을 배출했다. 세인트존스 대학에서 그의 제자였던 알 맥과이어와 루 카네세카를 비롯,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시절 어시스턴트 코치였던 딘 스미스까지 그의 제자들도 NCAA 무대에서 성공가도를 달렸다. 알 맥과이어는 1974년 마켓 대학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카네세카는 1985년 파이널 4에 올랐다. 스미스는 1982년과 1993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니 맥과이어의 제자들의 이력 또한 대단하다.
고향에서 강팀을 이끌다
1914년 뉴욕에서 태어난 프랭크 조셉 맥과이어는 아일랜드계 뉴욕 경찰관이던 아버지 밑에서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33년 재비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맥과이어는 뉴욕의 명문 세인트존스 대학에 입학했다. 맥과이어는 세인트존스 대학에서 전설적인 명장 조 랩칙 밑에서 뛰며 자신만의 농구관을 세우게 된다. 조 랩칙은 과거 오리지널 셀틱스(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전설적인 프로팀)에서 뛰었고 이후 뉴욕 닉스를 2년 연속 NBA 파이널로 이끌었던 ‘전설’이다. 1936년 세인트존스 대학을 졸업한 맥과이어는 모교에서 고등학교 교사 겸 농구 감독으로 재직하다 2차 세계대전에 미 해군으로 참전했다. 이후 맥과이어는 잠시 ABL(American Basketball League)에서 프로 선수로 뛰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은사인 랩칙이 뉴욕 닉스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세인트존스 대학의 감독직이 공석이 됐다. 랩칙은 맥과이어를 감독으로 추천했고 1947년 맥과이어는 모교에 부임하게 되었다. 야구 감독 겸 농구 감독이었던 맥과이어는 1949년 세인트존스 대학을 컬리지 월드 시리즈로 이끌며 먼저 야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51-1952시즌 세인트 존스 대학은 25승 6패, 메트로 뉴욕 컨퍼런스에서 6전 전승을 거두며 NCAA 토너먼트와 NIT(National Invitational Tournament)에 모두 진출했다. NCAA 토너먼트 1라운드에서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을 60-49로 꺾은 세인트존스 대학은 8강에서 켄터키 대학을 82-54, 파이널 4에서 일리노이 대학을 61-59로 물리치고 대망의 결승전에 올랐다.
결승전 상대는 명문 캔자스 대학. 당시 캔자스 대학은 명장 포그 앨런이 이끌고 당대 최고 센터 클라이드 러블릿(206cm)이 버틴 강호였다. 세인트존스 대학은 밥 졸럭(201cm)과 잭 맥맨(185cm)이 각각 20득점과 13득점을 올리며 분전했지만 러블릿에게 33득점을 허용하며 63-80으로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맥과이어는 경기 후 “경기가 끝난 후 모든 사람들이 캔자스 선수들에게 달려갔습니다. 그곳에 우리도 있었죠. 저와 우리 12명의 선수들도…”라며 “우리는 전미에서 2위를 차지했지만 마치 50위를 한 것 같았습니다. 그것도 교훈이었죠”라고 당시 소감을 밝혔다.
맥과이어의 기적
1952년 준우승 이후 맥과이어는 남부로 향한다. 아들의 건강 문제로 뉴욕을 떠나야 했는데 마침 의료시설이 좋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감독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당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은 명장 에버릿 케이스를 앞세운 라이벌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에 밀려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해관계가 맞았기 때문에 맥과이어는 남부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맥과이어는 뉴욕 토박이답게 뉴욕 농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최고의 고등학생들은 뉴욕에 있다고 믿었던 맥과이어는 부임하자마자 뉴욕 고등학생들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으로 데려오는데 전념했다. 그리고 그가 공들인 선수 중 하나는 레니 로젠블루다. 196cm(NBA 진출 후는 193cm로 정정)의 포워드였던 로젠불르는 득점기계였다.
당시 NCAA 규정상 2학년이 되어서야 출전이 가능했던 로젠블루는 1954-1955시즌에 경기당 25.5득점, 11.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올=아메리칸 써드팀에 이름을 올렸다. 로젠블루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3년 동안 경기당 26.9득점을 올렸고 3년 연속 올-아메리칸에 뽑히는 등 발군의 활약을 펼쳤다. 그가 기록한 통산 평균 26.9득점과 한 시즌 평균 28득점은 여전히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기록이다.
1956-1957시즌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은 강했다. 로젠블루와 피트 브레넌(198cm), 타미 컨스(180cm), 조 퀴그(206cm)가 버틴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은 ACC에서 14승 무패, 32승 무패를 기록하며 전승 우승을 달성했다. ACC 챔피언 자격으로 NCAA 토너먼트에 오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은 1라운드에서 예일 대학을 90-74로 물리쳤고 16강에서 캐니셔스 대학을 87-75, 8강에서 시라큐스 대학을 67-58로 꺾고 파이널 4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파이널 4 상대는 미시건 주립대학이었다. 미시건 주립대학은 점핑 자니 그린이라는 걸출한 스타가 버틴 강호였다. 두 팀은 한 치의 양보 없는 명승부를 펼쳤고 결국 3차 연장 접전 끝에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이 74-70으로 승리하며 대망의 결승전에 올랐다.
결승전 상대는 1952년 맥과이어와 세인트존스 대학을 울렸던 캔자스 대학이었다. 당시 캔자스 대학은 포그 앨런이 물러났지만 그의 제자 딕 하프가 지휘봉을 잡고 있었다. 또한 당시 대학 최고의 괴물 센터 윌트 채임벌린이 버티고 있는 우승후보 0순위 팀이었다. 게다가 당시 파이널 4가 캔사스 시티에서 열렸기 때문에 캔사스 대학은 일방적인 응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맥과이어는 정상적으로 채임벌린을 막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다. 맥과이어는 채임벌린이 공을 잡으면 로젠블루와 퀴그에게 더블팀을 시켰다. 또한 득점을 줘도 절대로 덩크슛을 허용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경기 시작 팁오프도 특이했다. 맥과이어는 퀴그가 아닌 180cm의 최단신 컨스에게 점프볼을 시켰다. 맥과이어는 이에 대해 “저는 채임벌린이 ‘이 감독 미쳤나? 다른 트릭도 있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싶었어요”라고 경기 후 밝혔다. 채임벌린은 이날 평균 득점에 한참 모자란 23득점을 올렸다. 하지만 캔자스와 채임벌린은 강했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은 간판스타 로젠블루가 20득점을 올리고 후반 종료 직전 5반칙 퇴장을 당하는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은 끈질겼고 결국 3차 연장 끝에 퀴그의 결승 자유투에 힘입어 53-52로 승리하며 NCAA 정상에 올랐다. 훗날 팬들은 당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을 ‘맥과이어의 기적(McGuire’s Miracle)’이라 불렀다.

윌트의 어깨에 날개를 달다
1961년 맥과이어는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필라델피아는 윌트 채임벌린이라는 괴물이 버티는 팀이었다. 당시 3번째 시즌을 맞이한 채임벌린은 이미 괴물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루키 시즌이던 1959-1960시즌 채임벌린은 경기당 37.6득점, 27리바운드로 두 부문에서 역대 최고 기록을 남겼다. 이 두 기록은 자신에 의해 깨졌지만 여전히 루키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다. 두 번째 시즌 채임벌린은 경기당 38.4득점, 27.2리바운드를 기록했는데 27.2리바운드는 여전히 깨지지 않는 최고 기록이다.
맥과이어는 부임 후 트레이닝 캠프에서 채임벌린에게 “얼마나 오래 뛰고 싶냐”고 물었다. 채임벌린은 “영원히 뛰고 싶어요”라고 답했다. 맥과이어는 다시 “아니 경기 중에”라고 되물었고 채임벌린은 “제가 벤치에 있다면 득점도 할 수 없고 리바운드도 할 수 없잖아요”라고 답했다. 맥과이어는 “경기 내내 쉬지 않고 뛸 수 있겠나?”라고 제안했고 채임벌린은 “그게 제가 원하는 겁니다”라고 답했다. 결국 채임벌린은 1961-1962시즌 단 한 번도 교체 없이 경기당 48.5분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웠다. 참고로 이전 시즌 채임벌린의 평균 출전시간은 47.8분이었고 다음 시즌은 47.6분이었다.
또한 맥과이어는 채임벌린에게 공을 몰아주는 극단적인 전술을 펼쳤다. 일례로 핫 로드 헌들리가 필라델피아 라커룸을 방문했을 때, 당시 채임벌린의 동료였던 탐 골라가 벽에다 공을 던지고 있었다고 한다. 헌들리는 골라에게 뭐하냐고 물었는데 골라의 답은 “공격 연습. 채임벌린에게 공을 주는 거”였다.
맥과이어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채임벌린은 경기당 50.4득점(2위 44.8득점, 윌트 채임벌린 1962-1963시즌), 25.7리바운드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시즌 합계 4,029득점(2위 3,586득점, 윌트 채임벌린 1962-1963시즌), 2,052리바운드였다. NBA 역사상 한 시즌에 4,000득점을 올린 선수는 채임벌린이 유일하며 4,000득점에 2,000리바운드를 기록한 선수도 채임벌린 뿐이었다.
또한 채임벌린은 1962년 3월 2일 뉴욕 닉스를 상대로 100득점을 올렸는데 이 역시 맥과이어 감독이 밀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미 플레이오프 진출이 확정된 상황에서 채임벌린이 전반에 41득점을 올리자 맥과이어는 채임벌린에게 더욱 공격을 주문했다. 뉴욕이 일부러 다른 선수에게 반칙을 해 채임벌린의 득점 행진을 막으려 하자 맥과이어는 채임벌린에게 포인트가드 역할을 맡기며 공을 가지고 있게 만들었고 상대가 일부로 공격시간을 허비하려 할 때는 반칙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당시 필라델피아는 49승 31패로 보스턴 셀틱스에 이어 동부 지구 2위를 차지했다. 필라델피아는 동부 지구 준결승전에서 시라큐스 내셔널스를 3승2패로 제압하며 보스턴과 지구 결승에서 맞붙었다. 당시 지구 결승은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였고 7차전에서 막판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필라델피아가 107-109로 패하고 말았다. 다음 시즌 필라델피아는 연고지를 샌프란시코로 옮기게 되었다. 하지만 맥과이어는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아들과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의 NBA 감독 생활은 단 한 시즌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대학 무대로 돌아오다
1964-1965시즌 맥과이어는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의 감독으로 NCAA 무대에 복귀했다. 당시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은 이전 그가 맡았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과 같은 ACC 소속이었다. 당시 ACC는 딘 스미스가 이끄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이 절대강자였다. 하지만 맥과이어도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을 서서히 강팀으로 변모시켰다. 부임 첫 해에 6승 17패에 그쳤던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의 성적은 3년차에는 16승 7패로 올라섰고 1968-1969시즌에는 21승 7패를 기록하며 NIT에도 초청을 받았다.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은 1969-1970시즌 ACC 컨퍼런스간 경기에서 14승 무패를 기록하며 ACC 정상에 오르는 등 성공가도를 이어갔고 1971년부터 1973년까지는 3년 연속 NCAA 토너먼트 16강(Sweet 16)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맥과이어는 1980년 현역 감독에서 은퇴했다. 30년 동안 그가 승률 5할을 기록하지 못한 시즌은 단 3시즌 밖에 없었다. 또한 그는 30년 동안 감독을 지내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앞서 언급한 카네세카와 알 맥과이어 외에도 래리 브라운, 도니 월시(전 인디애나 페이서스 사장), 덕 모는 그가 뉴욕에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으로 리쿠르팅한 선수들이었다. 또한 그는 바비 크레먼스(전 조지아 공대 감독), 마이크 던리비 시니어(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감독), 브라이언 윈터스(전 밴쿠버 그리즐리스 감독) 등 수많은 명장들을 배출했고 알렉스 잉글리시(전 덴버 너게츠), 존 로치(전 뉴욕 네츠), 탐 오웬스(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등 수많은 스타들도 길러났다. 따라서 맥과이어는 ‘2위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명언처럼 ‘잊혀진 2위’가 아닌 농구팬들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할 최고의 감독이었다.
프랭크 맥과이어 프로필
1914년 11월8일 뉴욕 태생
1994년 11월11일 사우스캐롤라이나州 컬럼비아에서 사망
1952년 세인트존스 대학 NCAA 토너먼트 준우승
1957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NCAA 토너먼트 우승
ACC 토너먼트 우승 2회 (1957, 1971년)
전미 올해의 감독(1952, 1957, 1970년)
ACC 올해의 감독(1957, 1971년)
1977년 농구 명예예의 전당 헌액
2006년 대학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NCAA 통산 549승237패(승률 .698)
NBA 통산 49승31패(플레이오프 6승6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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