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프볼=맹봉주 기자] “우띠.. 아니 김철욱 선수!”
지난달 24일 열린 경희대와 조선대의 대학리그 경기. 경기 후 수훈선수 인터뷰를 하기 위해 김철욱(24, 204cm)을 찾아갔다. 이날 김철욱은 16득점 10리바운드 더블더블로 팀의 대학리그 개막 첫 승리를 이끌었다. 더불어 지난해 부상으로 일찍 시즌 아웃되며 신인 드래프트까지 한 해 미룬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털어버리며 건재함을 알렸다.
▲ 하얼빈에서 건너온 농구 유학생
김철욱은 중국 하얼빈에서 태어났다. 중국이름은 우띠롱. 김철욱이란 이름은 한국으로 귀화하며 새로 지은 이름이다. “왜 김철욱이에요?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라는 질문에 김철욱은 “몰라요. 어머니가 지어줬어요. 아마 유명한 이름 짓는데서 만들지 않았을까요?”라며 웃어보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농구를 시작했어요. 농구가 좋아서 한 건 아니에요. 노는 걸 좋아했어요. 어릴 적부터 학교에서 다른 애들보다 컸어요. 부모님이 그냥 놀 거면 농구라도 배우라며 농구교실을 보냈어요. 거기서 하루 두 시간씩 친구들이랑 농구를 하며 놀았죠.”
노는 게 좋아 시작한 농구.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김철욱의 꿈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부를 잘해서 명문 고등학교, 대학교에 가는 것. 농구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공부가 아닌 농구에 눈을 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반 중학교에 갔어요. 그 때 키가 186cm였어요. 어렸을 적엔 좋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가는 게 목표였어요. 농구 특기생으로 학교를 가면 시험 점수가 플러스가 되요. 그래서 중간에 농구전문중학교로 전학을 갔어요. 그러면서 점점 농구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공부하는 시간은 줄어들면서 공부는 못하고 농구는 잘해졌어요.
결심했어요. 차라리 공부를 포기하고 농구로 프로에 가서 좋은 선수가 돼야겠다고.”
농구를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기량도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우리나라의 유소년 팀 격인 중국 프로리그 3군에 스카우트 되며 실력을 쌓아갔다.
김철욱이 한국에 오게 된 건 그의 나이 18세 때였다. “한국엔 언제 오게 됐어요?”란 얘기에 김철욱은 “2009년 2월 28일.”이라며 정확한 날짜로 대답했다. 경희대 최부영 전 감독(현재 경희대 농구부장)과의 인연이 그 시작이었다.
“중국 연변대학 총장님을 통해 최부영 감독님을 알게 됐어요. 두 분이 친한 사이였거든요. 최 부영 감독님을 중국에서 한 번 만나고 제가 혼자 운동하는 모습과 개인기가 담긴 영상을 경희대에 보내줬죠. 이후 ‘한국에 와서 농구해도 괜찮겠냐’라는 제안이 왔어요.”
하얼빈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17년을 자란 김철욱이 단번에 한국행을 결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행에 긍정적인 가족들의 반응과 농구를 통해 성공하고자 하는 욕심이 그를 움직였다.
“부모님과 선생님 모두 다 찬성했어요. 물론 제가 혼자 멀리 가는 건 마음 아파했지만 운동선수 출신이라 이해했어요. 아빠는 높이뛰기, 엄마는 배구 선수를 했어요. 농구인의 길을 선택했으니까..농구로 빛나야죠. 그래서 제 인생에 발전이 될 한국행에 승낙했어요.”
한국으로 오는 과정을 설명하는 김철욱의 표정에 진지함이 묻어났다. 어린나이임도 그는 매우 현실적이었다. 중국에선 농구선수로서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김철욱은 어린시절 자신을 되돌아보며 “저 중국에서 잘하는 편 아니었어요. 중간 정도?”라고 회상했다. 이어 필자를 충격에 빠트린 사실 한 가지도 함께 전했다.
“중 3 때 제 키가 2m였어요. 그거 아세요? 저 사실 스몰포워드였어요. 중국에선 빅맨 본 적 없어요. 중국에서 2m는 빅맨 볼 수 없어요. 적어도 210cm는 돼야 안쪽에 들어갈 수 있어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 다음 준비한 질문이 “중국에서 포지션은 무엇이었나요? 센터는 언제부터 본거에요?”였기 때문이다. 2m의 키에 중국에서 스몰포워드를 보다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골밑에 들어갔다는 답변을 들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210cm는 고사하고 아직도 190cm대의 선수들이 센터와 파워포워드를 오가는 우리나라 대학농구 현실을 생각하면 정말 다른 세상 이야기 같았다.
“중국에는 사람이 많아서 키 큰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에요. 진짜 키가 많이 크거나 엄청 잘하지 않으면 선수로서 성공할 확률이 낮아요. 이 얘기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발전할 기회가 많고 시설도 중국보다 좋은 한국행을 택하게 된 거에요. 그리고 한국이란 나라가 좋았어요. 깨끗하고 공기도 맑고 이미지가 좋았어요.”
“그렇다면 중국내 농구 인기는 어때요? 야오밍, 이젠롄 등 NBA에서 활약한 선수들로 인해 중국내 농구 인기가 엄청나다고 들었어요.”
“음..모르겠어요. 중국은 사람이 워낙 많아서 뭐가 더 인기 있는지 몰라요. 다 비슷비슷해요. 농구장 가면 사람들 꽉 차요. 축구장 가면 또 꽉 차고. 배구, 탁구, 배드민턴을 보러가도 사람들로 가득 차요. 이렇게 보면 다 인기가 많아요, 하하.”
▲ “잠깐, 한국말을 어떻게 그렇게 잘해요?”
한창 인터뷰가 진행되고 있을 때, 갑자기 떠오른 생각. “아니 잠깐. 아까 18살에 한국에 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한국어를 이렇게 잘한다고?” 그렇다. 김철욱의 한국어 솜씨는 매우 수준급이었다. 물론 중간 중간 중국어투의 발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평상시 그가 구사하는 어휘나 표현만큼은 한국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어 따로 배운 거에요? 학교 어학당 같은데서 배웠나요?”
“저 한국어 배운 적 없어요.”
“네? 한국어를 배운 적이 없다고요?”
“네. 한국에 와서 처음 6개월간은 한국말 거의 못했어요. 아주 간단한 영어와 한국말을 같이 했어요. 어릴 때부터 기억력이 좋았어요. 중국에서는 언어대회나 국어시험에서 1등도 한 적도 있어요.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은 괜찮은 것 같아요(웃음). 주변에서 얘기하는 말의 의미는 대충 눈치로 알았어요. 그 말을 기억해서 써보려고 노력했어요. 여기는 다 한국사람 밖에 없으니까 한국어 실력이 빨리 늘었어요.”
“농구보다 공부에 더 소질이 있었던 것 아니에요?”
“수학 못해서 공부하면 망했어요. 제가 노는 거 엄청 좋아해서 앉아서 하는 공부는 못해요, 하하”
▲ 부상이란 늪에 빠지다
한국행을 결정한 김철욱은 군산고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많은 경기 수와 출전시간을 보장한 제물포고로 전학하게 된다. 제물포고에서 김철욱은 한국농구에 빠르게 적응하며 서서히 자신의 이름을 농구팬들에게 각인시켰다. 높이와 정확한 중거리 슛을 모두 갖춰 상대로선 여간 막기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김철욱은 고교 마지막 대회에서 뜻하지 않는 불운을 맞는다.
“고등학교 마지막 대회인 대통령기였어요. 경기를 앞두고 계속 발이 아팠어요. 운동하면서 크게 다쳐본 적이 없었어요. 아팠지만 시합도 얼마 안 남았으니 참고 계속 운동했어요. 경복고와의 첫 경기에서 레이업을 하기 위해 점프하고 착지하는 순간 발에서 ‘뚝’하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합은 이겼지만 바로 병원 가서 검사를 받아보니 왼쪽 네 번째, 다섯 번째 발가락이 다 부러졌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대학 진학을 코앞에 남겨놓고 당한 부상. 이후 김철욱은 부상 후유증으로 인해 기나 긴 재활과정을 거치게 된다.
“수술안하고 핀만 박았어요. 그때는 몸 관리의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소독도 제대로 안하다보니 핀 주위에 염증이 생기더라고요. 대학에 오자마자 바로 수술했어요. 결국 발가락 부상 때문에 총 1년을 쉬게 된 셈이에요. 염증 때문에 운동하다 아프면 쉬고, 아프면 쉬고를 반복했어요.”
김철욱은 대학 1학년이 끝나갈 때쯤에야 지긋지긋했던 발가락 부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학년 말쯤 핀을 빼고 다음 동계훈련 갔다 와서 정상적으로 복귀했어요. 복귀하고 처음엔 힘들었어요. 하지만 잘하는 형들이 위에 있으니까 팀은 계속 우승해요. 김종규, 김민구, 두경민이 그 때 형들이에요.”
하지만 부상 악령은 김철욱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대학 4학년을 앞두고 이번에는 무릎 부상을 당하며 오랜 기간 재활에 몰두하게 된다.
“동계훈련 때 상대편이랑 무릎을 박았어요. 무릎에 계속 물이차고 학교 돌아와서는 무릎을 구부리지도, 펴지도 못 하는 거에요. 병원 가서 MRI를 찍어보니 무릎연골이 떨어져나갔다고 하더라고요. 동계 때만 해도 근력이 엄청 좋았는데 부상으로 근력과 살이 다 빠져버렸어요. 이후 하루 종일 재활만 했어요. 오전, 오후 나눠서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타지 생활에 계속되는 부상까지. 좌절할 법 했지만 김철욱은 흔들리지 않았다. 올 시즌 대학리그 경기 중 경희대 김성철 코치는 김철욱을 “사이즈와 함께 멘탈은 프로레벨이다”라며 그의 정신력을 언급한 바 있다.
“저 멘탈 강해요. 쉽게 깨지는 편 아니에요. 멘탈 약하면 한국에서 이렇게 혼자 생활 못해요(웃음). 안 되고 혼나도 ‘못 하겠다’는 생각보단 ‘그래도 잘 할 수 있다, 그럴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아무리 안 되도 어차피 나중엔 다 될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 이제 국가대표를 꿈꾼다
김철욱은 한국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인으로서 겪는 편견과 차별을 걱정했다. 하지만 이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한국에서 혼자 있는데 차별 당하면 어떡하나 걱정 많았어요. 하지만 막상 와보니 선생님도 그렇고 주위 친구들, 친구들의 부모님까지 진짜 잘 챙겨줬어요.”
김철욱의 밝은 성격 또한 낯선 한국생활을 적응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그는 코트 밖 자신의 성격에 대해 “저 재밌어요. 어두운 거 아니고 밝아요. 남들이 오는 것보다 제가 먼저 가는 편이에요”라고 설명했다. 농구선수로서의 장점을 물어보자. “농구선수로서 장점이요? 키 크고 힘이 좋아요. 또 슛도 있어요. 알다시피 요즘 키 큰 사람이 슛 던지는 게 대세에요(웃음)”라며 재치 있는 답변이 돌아왔다.
2011년 귀화한 김철욱은 이제 대한민국 국적의 한국 사람이다. 중국인 우띠롱이 아닌, 한국인 김철욱으로서 그가 꿈꾸는 목표는 무엇일까?
“국가대표가 꿈이에요.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그런 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꿈을 이뤄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나가면 중국대표팀도 만나게 될 텐데 느낌이 어떨 것 같아요?”
“느낌 이상하죠. 재작년 아시아퍼시픽 첫 경기를 경희대와 중국이랑 했어요. 그 경기에서 오래간만에 예전 친구들도 보고 즐겁게 경기했어요. 코트장에서 만큼은 국적과 선후배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현재는 한국 농구선수니까 농구로서 상대편을 이겨야한다는 생각뿐이에요.”
어느덧 김철욱과의 유쾌한 수다가 끝이 나고 마지막으로 팬들과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어봤다.
“팬들한테는 항상 응원해줘서 고맙다는 말 하고 싶어요. 홈경기에 많이 찾아와줬으면 좋겠어요. 부모님에게는...한국 와서 집에 1년에 한번 정도 갔어요. 대학 와서는 2년 8개월 동안 못 간적도 있어요. 지금까지 부모님이 뒷바라지를 해줬는데 이제 프로가면 돈 벌 수 있으니까 효도하는 시기가 온 거 같아요. 두 분 다 중국에서 건강하시고 프로선수로서 집에 가서 찾아뵙고 싶어요. 저한텐 농구보다 가족이 우선이에요. 가족 때문에 모든 걸 버틸 수 있었어요.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부상 없이 이번시즌을 잘 마무리하고 싶어요.”
영상촬영/편집 : 김남승, 박선희 기자
사진_신승규 기자, 한필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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