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간 16주년기획 | 역대 최고의 팀
현대 STOP! OK, SK!
1999-2000시즌 챔피언 SK 나이츠
[점프볼=손대범 기자] 챔피언결정전이 시작될 무렵만 해도 현대 우승을 점쳤던 이들은 놀랍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SK가 전문가 예상을 뒤엎으며 챔피언결정전 승리를 따낸 것이다. 그러나 더 젊고 자신에 가득 찼던 그들은 두 건의 트레이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INFORMATION
감독 최인선 / 코치 박건연
정규리그 32승 13패(2위)
4강 PO vs 삼성, 3승 0패, 챔프전 vs 현대, 4승 2패
SK는 1999-2000시즌을 준비하고, 또 치르면서 두 차례 트레이드를 통해 변화를 꾀했다. 첫 트레이드는 비시즌에 일어났다. 현대에서 뛰던 재키 존스를 영입하는 조건으로 지명권을 내준 것이다. 현대는 그 해 트라이아웃 최대어로 꼽히던 203cm의 로렌조 홀을 데려갔고, SK는 존스를 품을 수 있었다. “존스가 공격력이 화려했던 선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수비와 리바운드가 가능한 선수였다. 우리팀에는 더 잘 맞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신인이었던 포인트가드 황성인(현 양정고 코치)의 회고였다.
최인선 감독은 다른 의견도 보탰다. “센터이지만 3점슛도 던질 수 있었다. (서)장훈이, (현)주엽이와는 전술적으로도 겹치지 않고 잘 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로드릭 하니발(193cm)의 선발도 호재였다. 서장훈이 있었기에 SK는 굳이 장신 선수 두 명을 뽑을 이유가 없었다. 가드-포워드 라인에서 힘을 보탤 수 있는 193cm의 하니발은 최인선 감독을 든든하게 했다. “하니발은 경험이 많은 선수였다. 코트 안팎에서 항상 자신감을 북돋워주는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고맙고 그리운 선수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고 정말 보고 싶다.” 황성인의 말이다.
전 시즌 19승 26패로 8위에 그쳤던 SK는 좋은 분위기 속에서 새 시즌의 막을 열었다. 삼보와의 개막전에서는 현주엽의 결승 3점포로 97-91로 승리하는 등 3연승을 달렸다. 비록 기아에게 98-118로 20점차 대패, 이어 현대에게 중립경기를 내주면서 2연패를 당하기도 했지만, 1라운드 마지막 경기였던 동양(현 오리온) 전에서 서장훈의 버저비터로 연장까지 가서 극적인 승리를 챙기기도 했다. 뒷심이라는 것이 생긴 것이다.
덕분에 SK는 7승 2패로 2위로 마쳤고, 2라운드 중반에는 선두로 올라서기도 했다. 숙제와 같았던 포인트가드 부재를 황성인으로 채운 점이 변화의 키 포인트였다. 황성인은 당시 분위기에 대해 “아무래도 장훈이 형과는 연세대 시절에도 호흡을 맞춰봤기 때문에 큰 걱정이 없었다. (현)주엽이 형도 해결 능력이 있는 선수였다. 여러모로 수월했다”라고 설명했다. 서장훈-존스-하니발의 높이도 상대 득점루트를 틀어막았다. 전 시즌에 평균 90.7점씩을 내주면서 실점 부문 10위로 떨어졌던 SK는 한 시즌만에 실점을 6점이나 줄였다. 84.7점으로 이 부문 3위로 올라섰다.
SK 업그레이드 시킨 트레이드
이제 앞서 말한 ‘두 차례 트레이드’ 중 두번째 트레이드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됐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KBL 팬들 사이에서 항상 회자되는 사건이 하나 있다. 프로농구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단행됐던 대형 트레이드가 그것. 이 트레이드로 당시 최고 네임밸류를 자랑하던 콤비가 해체됐다. 서장훈과 현주엽이다.
12월 25일, SK는 현주엽을 골드뱅크로 보내고 조상현을 영입하는 대형 트레이드를 발표한다. 루머는 꾸준히 나돌았지만 표면 위로 올라오는 시기가 크리스마스가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그랬기에 더 임팩트가 커 보였다. 사실, 트레이드가 단행되던 날까지도 SK는 14승 4패, 승률 77.8%로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최인선 감독은 성적보다는 경기력 자체를 신경쓸 수밖에 없었다. 우승까지는 2%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 선수들도 “팀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다만 석주일 해설위원(아프리카 TV)은 “어떻게든 성적은 날 지 몰라도 우승까지는 못 한다는 평가가 있었다”고 돌아봤다.
트레이드를 밀어붙인 이는 최인선 감독이었다. 감독자리를 걸고 이원재 전 단장을 설득했다고 말한다. “나로서도 모험이었다. 하지만 구단도 고민했다. 현주엽이 워낙 거물인 스타였기에 쉽게 보낼 수 없었다. 하지만 해결책을 못 찾았다. 고민이 많은 시점이었다.” 결국 SK 코칭스태프는 우승을 담보로 구단을 설득시켰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밀어 붙였고, 어떻게 허락해주셨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다. 구단 반대도 심했으니까….”
최인선 감독은 현주엽 대신 슈터를 원했다. 문경은과 조상현이 물망에 올랐으나, 문경은은 삼성측에서 내놓고 싶지 않아 했다. 게다가 현주엽이 삼성에 가게 될 경우, 후배이자 예비 신인이었던 이규섭과 겹칠 수밖에 없었다. 현주엽도 군대를 가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활용시기가 길지 않았다. (당시 드래프트는 시즌 초에 이뤄졌고, 신인선수는 그 다음 시즌에 데뷔할 수 있었다. 이규섭은 1999년 12월 9일에 지명됐다.)
1999년 7월, 나산을 인수한 골드뱅크는 팀을 알릴 간판스타를 원했다. “이인표 단장이 적극적으로 나서주셨다. 그 팀에는 거물이 필요했으니까….” 최 위원의 회고다. 1999년 드래프트 당시 골드뱅크에서 전체 1순위로 선발한 조상현은 나무랄 데 없는 득점력을 지닌 선수였다. 그는 외국선수가 2명 뛰던 시기에 평균 20득점을 올린 국내의 몇 안 되는 득점원이었다. 그러나 현주엽의 네임 밸류와는 비교하기 어려웠다. 결국 SK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골드뱅크와의 거래를 결정했다. 1999-2000시즌의 트레이드 마감일은 12월 25일. 결국 마감에 맞춰 부랴부랴 준비한 카드가 맞아떨어지면서 프로농구판은 발칵 뒤집히게 된다. 리명훈이 이끈 북한 선수들이 방문해 ‘통일농구대회’를 즐긴 지 채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나온 소식이었다. 트레이드 이후 분위기는 오묘했다. “같이 해오던 식구가 떠났는데 (팀 분위기가) 좋은 게 이상하지 않나? 물론, 조상현은 연세대 시절부터 낯익었던 선수였기에 호흡은 나쁠 것이 없었다.” 석주일 위원의 말이다. 황성인도 “(조)상현이는 서대전 초등학교 때부터 같이 해왔다. 친구가 왔으니 반갑고 농구적으로도 어려운 부분은 없었다”라고 돌아봤다.
팀은 서장훈과 존스를 중심으로 높이를 굳건히 했다. 그동안 서장훈과 현주엽으로 분산됐던 공격도 서장훈 쪽으로 더 집중됐다. 트레이드 바로 다음 달에 서장훈은 월간 MVP로 선정됐다. 일각에서는 서장훈에게 골 밑 수비가 집중되면 부담이 가중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지만, 반대로 조상현과 재키 존스 등 다른 선수들의 기회가 더 생겨났기에 큰 부작용은 없었다. SK는 연승행진을 달리며 10개 구단 중 가장 먼저 20승 고지를 돌파했고, 정규리그 2위를 차지했다. 서장훈에게는 생애 첫 MVP 타이틀이 주어졌다. (현주엽도 자기 스타일대로 경기를 풀어갈 수 있게 됐다. 트레이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새 소속팀에서 17득점 16리바운드 10어시스트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차례 트리플 더블을 기록하는 등 개인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적어도 이점만큼은 트레이드를 통해 ‘득’을 봤다고 할 수 있다. 이 스타일은 상무 제대 후 KT와 LG에서도 이어졌고, 우리는 그를 ‘포인트포워드’라 불렀다. 또 서장훈과 현주엽의 맞대결도 해당 라운드의 빅매치가 됐다. 이때 이후 프로에서 두 선수가 함께 성공을 거둔 것은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이 유일했다.)
현대의 아성을 넘다
SK는 트레이드 5일 뒤에 가진 현대전을 83-80으로 이겼다. 이어 2월 12일에 가진 홈 맞대결에서도 86-82로 승리했다. 덕분에 자신감도 갖게 됐다. 내심 정규리그 우승도 기대했던 SK였지만 1위는 아깝게 놓쳤다. 시즌 내내 지켜오던 선두 자리는 5라운드 막판에 내주고 말았다. 현대와의 5라운드 맞대결 패배(85-91), 6일 뒤 SBS에게 당한 4점차 패배(95-99)가 뼈아팠다. 그 사이 현대가 1위로 치고 올라갔다. 최종성적은 32승 13패. 1위 현대와는 겨우 1승 차이였다.
그러나 젊은 선수들은 플레이오프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4강에서는 삼성과의 3연전을 내리 승리했다. 평균 14.3점차의 시원한 승리였다. 1차전에서는 107점이나 뽑아냈다. 하니발도 트리플더블(25득점 15리바운드 10어시스트)을 기록했다. 3차전은 삼성의 반격이 거셌다. 홈으로 돌아온 삼성은 문경은이 3점슛 9개(30득점)를 터트리면서 전반을 앞서갔지만 3쿼터에만 10점을 몰아친 하니발에게 밀리면서 무너졌다.
창단 후 첫 챔프전 진출. 첫 2시즌의 악몽을 잊기에 충분한 보상이었다. 상대는 정규리그 3연패를 달성한 현대였다. 전문가 평가가 인상적이었다. SK 우세를 점친 전문가들이 거의 없었다. 조선일보는 2000년 3월 24일자 기사에서 챔프전에 오르지 못한 8팀 감독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감독 3명(김동광, 최종규, 유재학)을 제외한 전원이 현대를 택했다. (유재학 감독은 ‘예측 불가’로 표기됐다.)
이유는 관록과 자신감에 있었다. 맥도웰과 이상민, 추승균, 조성원 등은 챔피언결정전에서 2년 연속 승리한 경험이 있었다. 4강에서는 SBS를 여유있게 따돌렸다. 이상민은 1차전에서 어시스트 15개를 기록했다. 3차전에서는 맥도웰과 홀이 47점 35리바운드를 합작했다. (SBS 전 선수들이 잡은 리바운드가 35개였다.) 그런데 정작 SK 선수들은 이러한 평가를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황성인은 “(이)상민이 형이 상무에서 뛸 때도 연세대가 이긴 적이 있었다. 정말 잘 하시는 선배이긴 했지만 우리가 일방적으로 밀릴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게다가 매치업도 괜찮았다. 하니발이 먼저 이상민을 막았고, 나는 (조)성원이 형을 마크 했다”라고 돌아봤다. 석주일도 마찬가지. “정규리그를 치르면서 우리가 열세라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렇게 확 밀린 경기도 없었다.”
자신감은 경기력으로 이어졌다. 충무체육관에서 열린 1차전부터 SK는 높이를 앞세워 현대를 제압했다.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78-74로 앞서갔다. 2차전도 분위기는 SK쪽이었다. 다만 4쿼터 종료 직전, 조성원이 황성인의 공을 가로채 기습적인 레이업을 성공시키면서 현대는 극적인 역전승(84-81)을 챙길 수 있었다. 어찌나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이던지, 리플레이조차 나오지 않은 채 그대로 중계가 끝나 허탈했던 경기이기도 했다. 현대는 기세를 몰아 3차전도 79-67로 이기면서 자신감을 보였다. 서장훈이 발목 부상을 입은 것도 현대 입장에서는 호재였다. 하지만 4차전에서는 예상 외 인물이 SK를 구한다. 박도경이다. 박도경이 선발로 나와 17분 22초를 버텨줬다. 리바운드 2개에 스틸 3개가 기록의 전부였지만 덕분에 서장훈과 존스가 번갈아 쉴 수 있었다. SK는 그렇게 78-68로 이겼다. 현대는 더 이상 승리를 따내지 못했다. SK는 5차전을 90-84로, 6차전을 90-83으로 끝내면서 ‘현대 왕조’의 통합 3연패를 가로막았다. 우승이 결정되던 날, 중립구장으로 사용된 잠실실내체육관에는 11,665명이 입장했다. 1999-2000시즌 한 경기 최다 관중이었다.
우승 공신 서장훈은 챔피언결정전 MVP가 됐다. 우승을 확정짓던 그 경기에서도 20득점 9리바운드로 분투했다. (챔피언결정전에서 서장훈이 20점 이상을 올린 경기는 모두 이기고, 그러지 못한 날은 패했다.) 프로 원년 이후 처음으로 정상에 오른 최인선 감독도 감회가 새로웠다. 불과 2년 전, 현대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간 끝에 눈물을 머금었던 그였다. “도박 같은 트레이드로 전력은 분명 좋아졌지만 재정비가 안 된 면도 있었다. 하지만 정규리그 내내 현대를 목표로 달려왔던 만큼 챔피언결정전에서는 장훈이와 존스가 골밑을 잘 맡아줬고, 하니발이 이상민을 잘 막아줬다. 또 벤치멤버들도 열심히 도와줬다”라고 소감을 남겼다.“
한편, 두 팀은 1년 뒤에도 플레이오프에서 맞붙는다. 그러나 챔피언결정전은 아니었다. 부상과 트레이드로 전력이 약화된 현대는 우여곡절 끝에 포스트시즌에 돌입했지만 SK에게 내리 2패를 당하며 6강에서 시즌을 마쳐야 했다.
글_손대범 기자, 사진_문복주 기자, K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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