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프볼=손대범 기자] 한 연고지를 대표하는 스포츠 선수를 두고 프랜차이즈 선수, 혹은 프랜차이저(franchiser)라고 한다. 긴 세월, 그 고장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자부심으로 여겨졌던 선수들이다. 조금 과장하면 그 고장 사람들이 자식처럼 아끼고 응원했던 존재이기도 하다. 지금 이 남자는 현역시절도 짧고, 그렇다고 내세울 만한 엄청난 경력을 남겼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20년 간 한결 같이 한 연고지의 프로팀을 지켜왔다. 그는 그냥 전자랜드, 그 자체 같다는 느낌도 든다. 전자랜드 김성헌 사무국장이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1997년, 최초의 프로농구 미디어가이드북부터 2015년 가을에 나온 가이드북까지, ‘김성헌’이라는 이름은 마치 여고괴담 속 졸업사진 주인공처럼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매년 그곳에 이름이 있었다. 신분과 직책만 바뀌었을 뿐, 인천(혹은 부천) 연고의 프로팀에 꾸준히 이름을 올려왔다. 최초의 미디어가이드 북에는 ‘선수’로 등록되어 있다. 등번호 6번, 샤프한 외모의 그가 인천 대우 제우스 선수단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매니저, 지원팀 사원, 홍보과장, 운영팀장 등을 거쳐 ‘사무국장 김성헌’이 되도록 한 해도 쉼 없이 달려왔다. “1995년 3월에 인천 대우증권에 입단해 인천 연고지에서만 20년을 지냈습니다. 체육관 사정상 부천에서 치른 기간도 길었지만, 그래도 인천이 ‘제2의 고향’이라 말할 수 있겠죠.” 김성헌 국장의 말이다.
프로 첫 시즌이 끝난 직후, 그는 현역은퇴를 결정했다. 프로선수 경력은 4개월 밖에 되지 않는 셈이다. 무슨 이유가 있었을까. “은퇴라기보다는 조퇴였죠, 조퇴. 하하. 그때는 외국선수를 가드, 센터로 선발했어요. 게다가 전(全) 쿼터를 두 명이 뛰었고요. 또 그 당시 가드진에는 조성훈 선수가 1~2번을 번갈아 보고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제 설 자리가 없었죠. 큰 변화가 없는 이상 계속 경기는 못 뛸 것 같더라고요. 다른 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마침 구단측에서 프런트에 합류할 생각이 없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한참 프로농구가 형태를 갖추고 프런트가 꾸려지던 시기였다. “농구단에 선수 출신이 한 명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어요. 그래서 주장인 제게 제의가 왔죠.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한동안은 매니저와 사무국 업무를 번갈아 맡았죠. 그렇게 지내다보니 벌써 여기까지 왔네요.”
원년 멤버로서의 책임감
문경은과 이상민, 우지원과 서장훈, 그리고 김택훈과 김훈, 구본근. 1990년대 하늘을 찌를 듯한 연세대 황금멤버들. 그 사이에 김성헌도 있었다. 1995년 2월 2일, 서장훈의 극적인 결승골이 터졌던 연세대와 고려대의 농구대잔치 맞대결을 기억하는가. 당시 그에게 어시스트를 했던 인물이 바로 김성헌이었다. 그 해 농구대잔치에서 부상을 당한 이상민을 대신해 백코트를 잘 지켰다. “그때가 재밌었죠. 그 시기 고려대와의 경기는 전쟁이었어요. 싸움나면 우르르 뛰어나가고, 몸싸움 하고…. 기억에 많이 남아요. 제가 주전으로 뛰었던 경기 비디오테이프를 소장하고 있었는데, 테이프가 끊어졌어요.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언젠가 기회가 되면 테이프를 복원해보려고요.”
김성헌은 엘리트의 길을 착실히 걸어왔다. 그 당시 초등부를 주름잡은 수유초등학교에서 농구를 시작해 삼선중, 경복고를 거쳐 연세대에 입학했다. 중학생 때는 부모님 반대가 있었지만 기어이 농구를 택했다. 대학생이 될 때까지 농구가 재밌었다. 멤버도 쟁쟁했던 터라 이기는 농구를 많이 했다. 우승 경험도 꽤 됐다. 그럴수록 ‘더 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강해졌다. 대학 진학 당시 연세대-고려대로 생이별(?)한 이지승이 그의 동기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연고전을 구경 갔는데 너무 흥분되더라고요. ‘내가 죽기 전에 이런 규모에, 이런 분위기 속에서 농구를 해볼 수 있을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해서 연세대에 가게 됐어요.”
연세대 황금기를 보내고 맞이한 성인무대는 만만치 않았다. 외국선수 도입 초기였기에 외국선수들에 맞서서 뭔가를 한다는 건 상상조차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결국 그는 진로를 바꾸어 프런트의 길에 들어섰다. “어찌하다 보니 15년, 20년 훌쩍 가더라고요. 참 오래했구나 생각이 가끔 들어요. 계속 현장에 있다 보니 시간이 가는 것도 몰랐어요. 나이 드는 것도 모르겠고요.” 그렇다면 업무 적응에 어려움은 없었던 것일까? 그는 선수 시절의 경험이 도움이 됐다고 했다. “최희암 감독 밑에서 독하게 훈련했고, 유재학 감독님도 모셨죠. 그래서 체력적으로는 지치지 않았어요. 다만, 가족들에게 미안했죠. 시즌 때는 쉬는 날이 불규칙하잖아요. 함께 하는 시간도 적고요. 이제는 비시즌이 되면 되도록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프런트가 된 후 그는 여러 직책을 거치며 업무를 익혔다. 한계에 부딪칠 때도 있었지만, 선수 시절의 경험을 발판삼아 여태까지 왔다. 그는 오히려 자신보다는 농구계 종사자로서 제 몫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책임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농구대잔치 황금시대를 겪어본 입장에서 농구가 더 발전하지 못했다는 부분이 안타깝죠. 저희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탓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때 함께 했던 서장훈, 이상민 등 스타들 이후 더 새로운 스타가 안 나오고 있어요. 프로출범 후에는 사람들이 다 알만한 스타가 안 나오고 있잖아요. 김주성, 김승현 정도 있을까요?”

해체 기로에 서다
2012년 봄, 농구팬들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인천 전자랜드가 모기업 경영난으로 흔들려 해체될 수도 있다는 소식이었다. KBL이 일부를 지원하면서 고비를 넘겼지만 농구팬들에게나 전자랜드 선수, 프런트들에게나 가슴철렁한 나날이 계속됐다. 김성헌 국장이 ‘운영팀장’ 타이틀을 떼고 신임 사무국장이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부담됐던 시기였죠. 고비를 잘 넘겼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구단을 유지해주신 부분에 대해 구단주께 정말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또 희생해주신 유도훈 감독님도 빼놓을 수 없죠. 2012-2013시즌에 계약이 종료됐었는데, 떠나지 않고 전자랜드에 남아주셨어요. 팀이 흔들리면 떠날 생각도 할 수 있잖아요. 근데 저와 함께 팀에 남아주셨어요. 게다가 성적도 잘 났어요(2012-2013시즌 33승 21패). 조직력으로 올린 성적이었기에 더 큰 힘이 되었죠. 단장님도 그렇고, 모두가 합심해서 고비를 잘 넘긴 덕분에 지금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대우증권에서 시작해 신세기, SK(빅스), 전자랜드에 이르기까지 모기업이 바뀌는 과정에서 그는 각기 기업 문화와 분위기를 경험해왔다. 그렇다면 전자랜드만의 특징은 무엇이 있을까? “전자랜드는 가족같은 분위기에요. 밝고, 구단주께서도 농구를 사랑하시죠. 그러니 어려운 과정을 잘 넘긴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수많은(?) 모기업을 거치고 프로농구가 나름대로의 시스템을 갖추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바뀐 부분은 무엇일까. 김성헌 국장은 선수들의 마인드를 꼽았다. “예전에는 행사를 하면 선수들이 적극적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요즘 젊은 선수들은 행사를 즐기는 분위기에요. 유도훈 감독님께서도 마인드가 바뀌셔서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시죠. 팬 사인회, 일일 클리닉 등 이제는 선수들이 ‘구단 행사’가 아니라 ‘나의 행사’라 생각하고 있어요. 평소에도 선수들에게 강조해요. ‘팬이 있어야 프로가 있다’라고요. 운동하면서 행사를 갖는 것이 힘들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전자랜드 팬이 아니라 선수의 팬이 되어서 인연이 이어질 수도 있는 거니까요. 또 그게 선수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선수들, 후회하지 않길
1년 중 김성헌 국장이 유독 괴로워(?)하는 시기가 있다. 바로 선수단을 구성하고, 연봉협상을 하는 기간이다. 본인 또한 선수를 경험했기에 선수단의 마음이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 다른 한편으로는 구단 살림을 책임지는 사무국장 입장에서 내려야 할 결정도 있었다. “매년 하면서 느끼지만, 남의 연봉을 책정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아요. 나름대로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하려고 하지만 선수들 입장에서는 늘 더 받을 수 있는데, 덜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겠죠. 그런데 이런 시각도 있어요. 선수 출신이라 선수편에 서는 거 아니냐고요. 결국 저는 중간에 껴있는 상태인데, 이게 서로를 만족시키는 일이 정말 어렵더라고요.” 김성헌 국장의 말이다. 무엇보다 안타까울 때는 바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은퇴하는 선수들을 볼 때다. 20년간 사무국에 있으면서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경험했지만 은퇴선수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은 변함이 없다.
“많이 못 벌고 은퇴하는 친구들을 보면 마음이 아파요. 직장인들이야 50대까지도 일을 할 수 있지만, 선수들은 잘해야 12~13년, 짧으면 2~3년에도 끝나잖아요. 그래서 항상 선수들에게 말해요. ‘너희에게 주어진 기간이 생각보다 길지 않다. 열심히 하는 건 당연한 거고, 어떻게든 자신있게 해서 네 자리를 얻어야 한다’라고요. 저도 식스맨이었잖아요. 슛 찬스 날 때 적극적으로 안 한 게 그렇게 후회가 되더라고요. 또 외부환경 탓만 하고, 미루는 플레이만 하다가 재계약이 안 되는 선수들을 보면 정말 속상했어요. 더 잘 할 수 있는 선수들인데…. 아마 본인들도 은퇴하고 느낄 거예요. 그런 면에서 저는 3라운드에 지명됐지만 여전히 팀의 핵심으로 뛰고 있는 (정)병국이가 참 뿌듯해요.” 선수들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한 마디였다. 김성헌 국장은 언젠가는 은퇴선수들을 위한 시스템도 갖춰지길 바라고 있었다. 1년 정도라도 모기업에서 인턴십을 하거나,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마련해주자는 것이었다. “다들 본사와 협의해야 할 부분도 있겠지만, 10개 구단이 합의해서 1년 정도씩 인턴십을 제공하고 사회를 준비하는 기간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생력 갖춘 구단을 꿈꾼다
전자랜드의 2016년 여름 행보는 대단히 공격적이다. 두 건의 트레이드를 통해 박찬희와 이대헌을 영입, 팀 분위기를 바꾸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코트 밖에서는 한 주가 멀다하고 행사를 갖고 있다. 팬들과 꾸준히 스킨십을 가지며 자신들을 알리고 있는 것. 이러한 활발한 활동 뒤에는 ‘프로다운 구단이 되고 싶다’는 큰 뜻도 숨어있었다.
“지금은 완전한 프로팀으로 거듭나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지금은 선수들만 돈을 버는 구조이니까요. 하지만 언젠가는 넥센처럼 자생력을 갖춘 구단으로 키워나가야 해요. 당장은 힘들겠지만, 열심히 준비해서 프로농구단다운 모습을 갖추는 것이 목적이에요. 그래야 모기업에 부담을 덜 주고 팀을 끌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제가 조금이라도 힘이 됐으면 좋겠고요.” ‘인수’와 ‘해체 위기’라는 과정을 겪어오면서도 팀을 이끌어온 김성헌 국장, 인터뷰가 진행된 1시간여 동안 그가 건넨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농구와 전자랜드, 선수단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보다 오랫동안 농구판을 지켜왔던 만큼, 그와 전자랜드가 앞으로 보일 밝은 행보도 기대된다.
발문
“항상 선수들에게 말해요. ‘너희에게 주어진 기간이 생각보다 길지 않다. 열심히 하는 건 당연한 거고, 어떻게든 자신있게 해서 네 자리를 얻어야 한다’고요. 저도 식스맨이었잖아요. 슛 찬스 날 때 적극적으로 안 한 게 그렇게 후회가 되더라고요.”
프로필
1972년 3월 22일생, 현역시절 포지션_ 가드(180cm), 수유초-삼선중-경복고-연세대(95)
사진_신승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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