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조원규의 즐거운 籠談] 충북대 교수 임용석 “학생선수에서 ‘학생’을 빼면?”

조원규 / 기사승인 : 2018-08-29 10: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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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조원규 칼럼니스트] 고등학교 3학년 때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았고, 명문대에 입학. 대학 4학년 때는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었고 각종 대회에서 입상을 했으며 개인상도 수상.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꽤 잘나갔던 농구선수 임용석’입니다. 그런데 대학교 4학년 때 큰 부상을 당했고, 훌륭한 농구선수라는 꿈이 사라진 임용석은 학생도 아니고 선수도 아닌 ‘중간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 본 기사는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8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농구선수 임용석의 가능성이 얼마나 컸는지, 프로에 진출했다면 어떤 커리어를 만들었을지는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아닙니다. 농구선수 출신 임용석을 만난 이유는, 이 사람이 교수이기 때문입니다. 2017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대학교 교원 수는 약 90,000여 명. 임용석 교수는 그 많은 교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대학교 4학년 때까지 11년간 학생선수였다면 의미가 달라집니다.

지난 4월에 농구선수 출신 이선영 박사를 인터뷰했습니다. 이선영은 대학에서의 수업시간을, 이해할 수 없는 얘기들이 잠시 귓전에 맴돌다 떠난 시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6월에는 연세대 양재민 선수를 만났습니다. 양재민 선수는 수업시간에 30분 앉아 있는 것도 힘들었다고 토로했습니다. 임용석 교수도 비슷한 얘기를 합니다. 공부를 하려고 앉은 의자가 너무 차가웠다고 했습니다. 한국말로 수업을 듣는데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다고 했습니다.



의자에 앉는 것도 낯설었던 운동선수가 12년을 공부했습니다. 박사 학위를 받았고, 국립대학교의 전임 교원으로 임명장을 받았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꿈이 생겼고, 그 꿈은 공부하는 이유가 됐습니다. 공부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꿈이 커졌습니다. 그 꿈은 농구선수들에게, 모든 엘리트 운동선수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한국의 엘리트 체육 시스템에 던지는 화두가 됩니다.

‘학생선수’에서 ‘선수’라는 단어를 빼면 당연히 ‘학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학생도 아니고 선수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의 본인을 ‘중간인’으로 표현합니다. 무엇이 그를 ‘중간인’으로 만들었을까요? 임용석 교수가 진단한 원인과 해법을 정리했습니다.



학생선수 임용석
농구선수 임용석은 영광과 시련이 교차했습니다. 임용석이 3학년이던 1998년, 춘계에서 4강에 그쳤던 명지고는 대통령기 준우승에 이어 쌍용기를 제패하며 전국 최강자의 자리에 오릅니다. 임용석은 주전 포인트가드로 팀을 이끌었고, 그 해 18세 대표팀에 선발되는 영광도 누렸습니다. “청소년대표에 선발되고 처음으로 운동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표팀에 대한 선망이 있었어요. 맞지 않고,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겠다는 기대였죠. 그런데 고등학교 팀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국가대표도 매를 맞는데…. 매를 맞는 이 생활은 변하지 않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운동을 그만두게 만든 큰 시련은 따로 있었습니다. 반복된 부상입니다. 원했던 명문대에 입학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다쳐서 발목이 부러진 상태로 입학했습니다. 1학년 말, 충분한 재활 없이 복귀해서 운동을 하다 허리 디스크가 왔습니다. 3학년 때부터 경기를 많이 뛰었고, 부족한 재활로 인해 크고 작은 부상 역시 많았습니다. 4학년 때는 얼굴이 함몰되는 부상을 당했고, 정기전 합숙 후에는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무릎이 너무 아팠습니다.

“정기전을 앞두고부터 무릎이 안 좋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장이에요. 아프다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정기전이 끝나고 모두 재활과 휴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럴 수 없었어요. 프로에 가고 싶은데…. 그 전에 보여준 것이 너무 없었거든요. 당시로는 프로에 가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생각해보지도 않았습니다. 참고 뛰다가 결국 대형사고가 났습니다. 상대 수비와 부딪혀 넘어졌는데 무릎에서 ‘빡’ 소리가 났어요. 일어나려고 했는데 다리가 안 움직였어요. 무릎을 보니 슬개골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아프지는 않은데, 너무 놀라고 겁이 났어요. 119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구급차에 실려 바로 병원으로 후송된 후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을 받으면서도 이것이 농구선수로서의 마지막 경기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근력이나 유연성이 100% 돌아오지는 않는다고 애기를 들었습니다. 그래도 농구선수의 길을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드래프트에서 이름이 불리지 않았습니다. 2라운드 호명이 지나가고 ‘내 길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수련선수로 들어오라는 제안이 있었지만 거절했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부정당한 상실감이 모든 희망을 이겼습니다.

중간인 임용석
‘언드래프티’ 임용석이 당면한 과제는 농구선수 임용석과의 결별이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농구를 시작했으니 11년을 농구선수로 살아왔네요. 농구공을 옆에 끼고 잤습니다. 훈련이 끝난 후, 친구들이 집에 가는 모습을 보고 다시 체육관으로 들어와 개인훈련을 했습니다. 11년간 농구는 임용석의 생활이고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도전했습니다.

“석사 학위를 마치고 뭘 할까 고민하다 다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병원에 가보니 몸 상태가 선수생활을 할 때와 거의 비슷하데요. 트라이아웃까지 6개월 정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다시 농구를 시작해도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어요. 나름 트라이아웃을 잘한 것 같은데…. 이번에도 제 이름을 불러주는 구단은 없더라고요. 마음의 짐을 털어낼 수 있는 터닝포인트가 된 것 같습니다.”

마음의 짐을 털어냈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중간인’의 삶을 청산했다는 의미고, 새로운 꿈에 매진할 수 있다는 의미니까요. 선수가 아닌 학생으로서의 학교생활은 낯설었습니다. 운동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한국어로 하는 수업을 알아듣지 못해 고개만 주억거렸습니다. 전공 서적을 읽는 그에게 한 선배는 “네가 보면 알아?”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래서 자랑스러웠던 ‘고려대학교 농구부 주장’이라는 과거를 숨겼습니다. 농구선수 출신 임용석이 아닌 함께 공부하는 학생 임용석으로 만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하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학생선수들의 현실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선수생활에 대한 미련도 털어냈습니다. 2006년에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이듬해에 결혼하고 미국행을 결정했습니다. 원서 위주의 수업을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두 가지만 했습니다. 공부와 운동입니다. 그 과정에서 농구를 바라보는 시각도 변했습니다.

“학교 체육관에 갔습니다. 4개의 코트가 있는데 유독 입구 쪽 코트만 사람이 많았어요. 가장 잘하는 아이들이 뛰는 코트였죠. 운이 좋아 함께 뛸 수는 있었는데 저한테 공을 안줘요. 일부로 안줘요. 공을 달라는 손짓을 했고, 돌파를 해서 득점에 성공했습니다. 저를 막던 아이는 야유를 받았어요. 동양인 학생에게 골을 내줬다는 이유겠죠. 사람들이 주시하는 가운데(웃음) 저와 그 친구의 일대일이 계속 이어졌고, 이후 저는 농구 잘하는 아저씨(The old man call ball)로 통했습니다. 말 한마디 못했던 동양인 아저씨에게 미국인 친구들이 생겼죠. 이전까지 제게 농구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직업으로서의 농구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사람들과 어울리는 도구로서의 농구도 있습니다. 지금도 꾸준히 동호회 농구를 하고 있고, 여전히 농구는 제 삶의 중요하고 커다란 일부입니다.“



꿈을 꾸는 생활인 임용석
작년 5월에 충북대학교에서는 이색적인 타이틀의 농구대회가 열렸습니다. ‘제1회 충북대학교 5on5 임용석배 농구대회’입니다. 충북대학교 체육교육과 농구동아리 학생들이 준비한 교내 대회입니다. 8개 팀이 참가했고, 올해 2회 대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학생들이 찾아왔어요. 농구동아리 학생들이 대회를 만들고 싶다는 거에요. 우리 학교에는 교내 경기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관심을 가졌습니다. 고려대에서 조교를 할 때 교내 경기 경험이 있었어요. 해보라고 했죠.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학생들이 준비하면서 대회 이름을 투표로 정했나 봐요. 투표 결과가 ‘임용석배’라고 얘기는 들었지만 설마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이름으로 홍보를 하는 거예요. 누구 말처럼 제가 죽은 것도 아니고(웃음) 농구계에 대단한 업적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름을 바꾸라고 했어요. 학생들이 더 많이 참가해서 나중에는 총장배 이름으로 하고 싶습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시절, 임용석에게 농구는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삶의 일부입니다. 농구로 가득 찼던 자리에 직장이 있고, 제자가 있고, 가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부가 전부보다 작지 않습니다. 관심이 적지 않고 애정이 작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농구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힘이 작지 않습니다. 특히 교수가 된 이후 말이나 글의 무게가 달라진 것 같다는 말을 합니다.

“교수라는 직업을 흔히 사회지도층이라고 하잖아요.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피부로 느껴지는 변화도 있어요. 일단 매스컴에서 인터뷰 요청이 많이 옵니다. 교수가 된 이후로만 6번을 인터뷰 했어요. 말이나 글에 대한 신뢰가 더 높아진 것 같고, 그래서 더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대학원 지도교수이신 류태호 교수님 생각을 많이 합니다. 당신의 교육과 삶, 연구가 다르지 않은 분이세요.”

관련해서 이런 얘기도 했습니다. “인천대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신 선배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정이 되면 너무 이기적으로 살지 말아라. 교수라는 직업이 그렇게 살아도 크게 비난을 받지는 않는다. 그래도 할 수 있다면, 많은 것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다음 주에도 학생선수들을 만나러 군산에 갑니다. 멘티로 만나는 학생들이에요.”

‘중간인’ 임용석에게 꿈이 생겼습니다. 학생선수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특히 본인처럼 중도에 운동을 그만둔 학생선수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과정에 목표도 생겼습니다. 대학 강단에 서는 것입니다. 운동을 그만둔 후배들에게 좋은 롤모델이 되고 싶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성실하게 운동했던 과거가 자양분이 되면 제2의 삶을 보다 능동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중간인’ 임용석은 꿈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건강한 ‘생활인’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운동선수가 최고가 되기 위한 포스트 김연아, 이상화를 꿈꾼다. 하지만 이들은 운동선수로 살아가는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다. 나는 더 이상 최고가 되기 위해 뛰지 않는다. 최고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최고가 아니어도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는 행복하다.”
- 임용석 교수의 ‘스포츠와 인권’ 中



배려가 아니라 소외입니다
임용석 교수는 2009년부터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 해부터 모교에서 학생선수들에게 진로상담교육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 첫 시간에는 항상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무식하다고 생각합니다.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무식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멍청하지 않습니다.”

임용석의 꿈은 멍청하지도, 무식하지도 않은 학생선수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운동과 공부를 병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최근까지 학생선수들은 운동만 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어차피 운동으로 성공해야 하는 아이들이라 공부에 뺏기는 시간은 아깝다는 인식이 팽배했습니다. 공부를 안 해도 명문대학에 입학할 수 있고,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혜택을 받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0.1%나 될까요? 혜택을 못 받는 나머지 99.9%는요? 운동을 하고 있을 때에는 문제가 잘 드러나지 않아요. 운동을 그만두면 바로 나타나죠. 그 문제를 학생선수 본인이 해결해라? 과연 개인이 해결할 문제일까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식과 사고력, 인적 네트워크까지 아무런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어요?”

많은 운동선수들은 은퇴 후 지도자 수업을 받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운동선수 이후 선택할 수 진로는 적지 않습니다. 교사, 지도자뿐 아니라 스포츠 행정가, 스포츠 마케터, 스포츠 콘텐츠 개발, 기자, 아나운서, 빅데이터 분석가 등 다양한 진로를 모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의 선택은 지도자 수업입니다. 정보가 부족합니다. 사회에 나설 선수들의 준비도 부족합니다. 시야를 넓혀주고 준비를 시켜줄 환경이 미비합니다.

“처음 학생선수 강의를 했을 때 절반은 F를 줬습니다. 김연아 선수도 F를 줬어요. 운동선수들은 배려를 해주라는 충고를 들었습니다. 배려를 해달라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출석과 학점에 대한 배려는 배려가 아닙니다. 소외에요. 수업은 단순히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를 배우고, 운동부 외의 기준들도 알게 됩니다. 운동부와 일반 학생은 가치판단이 기준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구타와 폭언이에요. 수업을 듣는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고, 운동부 외의 사람들과 소통은 아주 중요합니다.”

학생선수에서 선수를 빼면? 학생이 남을까요? 15년 전, 23살의 임용석은 학생도 선수도 남지 않았다고 기억합니다. 15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요? 다수의 학생선수들이 여전히 임용석과 같다면 그것은 사회문제입니다. 사회문제는 국가와 사회가 해결책을 모색해야 합니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아직도 운동만 해야 한다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많아요.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해서 박태환이나 김연아가 나오겠어? 전 이렇게 대답합니다. 안 나오면 어때?”

“수업은 단순히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를 배우고, 운동부 외의 기준들도 알게 됩니다. 운동부와 일반 학생은 가치판단이 기준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구타와 폭언이에요. 수업을 듣는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고, 운동부 외의 사람들과 소통은 아주 중요합니다.” 임용석 교수의 말이다.

# 사진_유용우 기자, 임용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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