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규의 농구 in] 은행원으로 변신한 연세대 농구선수 김용민 이야기

조원규 / 기사승인 : 2019-03-09 11: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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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조원규 칼럼니스트] ‘제2의 함지훈’을 꿈꾸던 선수가 있었습니다. 함지훈의 영리한 두뇌플레이를 닮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뒤늦게 농구를 시작했고, 함지훈의 모교인 경복고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시작이 너무 늦었나 봅니다. 새로운 꿈을 꾸기에 중학교 3학년이 결코 늦은 시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엘리트 농구선수의 길은 달랐습니다. 중학교를 자퇴하고 1년을 농구만 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공을 만진 친구들과의 경쟁이 쉽지 않았습니다.

김용민이 입학할 당시 경복고는 빅맨이 부족했습니다. 김용민은 저학년 때부터 많은 출전시간을 가질 수 있었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주장을 했고, 명문 연세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농구선수 김용민’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함께 농구를 시작했던 ‘김민욱의 형 김용민’으로 더 알려졌습니다. 김민욱(현 부산 KT)은 고등학교 1학년 때 18세 대표에 선발된 초특급 유망주였으니까요.

고등학교에서 경쟁력이 있었던 196cm의 신장이 대학에서도 경쟁력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1학년 동계훈련을 마치고 감독과 면담을 했습니다. “4학년까지 있으면 프로는 가겠지만 2,3년 있다가 은퇴를 할 수도 있다.”며 공부를 권유했습니다. 그 날 짐을 싸서 숙소를 나왔습니다. 기회를 받지 못한 패배감과 아쉬움을 함께 쌌습니다. 대신 프로선수가 되고 싶은 꿈을 숙소에 남겼습니다.

김용민에게는 새로운 인생 설계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방황의 시기를 거쳐 이제는 설계도면을 완성해가고 있습니다. 겨울 한파가 잠시 숨을 죽였던 1월 10일, 청계광장이 보이는 찻집에서 김용민을 만났습니다.


▲동아리 농구에서 엘리트 농구로

Q.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용민’이라는 이름이 점프볼 독자들에게 낯설 수 있는데요, 인사 먼저 부탁합니다.
경복고등학교 농구부 주장을 거쳐 연세대학교 농구선수였고, 지금은 기업은행에 근무하면서 생활체육과 3대3 농구를 하고 있는(웃음) 김용민입니다.

Q.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잘 했는데 농구선수의 길을 선택했다고 들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농구교실을 개최한다는 공문이 학교로 왔습니다. 학교에서 저와 제 친구 둘, 동생(김민욱)을 추천했어요. 캠프 끝나고 저와 동생 모두 농구를 해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처음에 어머니는 동생만 시키려고 했어요. 제가 중학교 때 전교 5등까지 했었고, 그래서 공부를 하라고 하셨죠. 그런데 제가 고집을 부렸습니다. 농구가 너무 하고 싶었어요. 기회가 왔고,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Q. 그런데 선수로서 인상적인 커리어를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성격적으로 융통성이 없고 FM대로 생활을 했습니다. 감독님 말씀도 그대로 따랐어요. 정해준 역할 말고도 다양한 플레이를 해봐야 발전이 있는데 시도를 안했죠. 구력이 짧아서 개인기량도 부족했습니다. 경복고 신입생 때 (박)찬희 형이 3학년이었어요. 패스가 좋잖아요. 문제는 노룩패스가 오는데 받지를 못했습니다. 그래도…. 내 위주로 플레이를 할 필요가 있었어요. 고3 때 (김)민욱이와 (장)재석이가 있어서 외곽에서도 플레이를 했는데, 더 일찍 그런 플레이를 했으면 좋았겠죠.

Q. 동생 얘기가 나왔는데, 동생과 같이 뛰어서 불편하지 않았어요?
불편한 점은 없었어요. 다만, 동생과 같은 팀에 있으니 더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고3 때 주장을 하면서 후배들을 때린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동생만 동기들, 후배들 앞에서 때리기도 했습니다. 동생을 더 타이트하게 잡았죠. 동생도 제 마음을 알아서 사이가 나빠지지는 않아요(웃음).

Q. 대학교 2학년 때 공부의 길을 선택했어요. 계기가 있었나요?
고3 겨울방학에 어깨 수술을 했습니다. 동기들부터 늦게 팀 훈련에 합류했는데 체력훈련을 못해서 토하고 난리도 아니었죠(웃음). 그래서 1학년 동계훈련은 잠을 자는 시간도 줄이면서 몸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감독님이 부르시더라고요. “너 공부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 4학년까지 있으면 프로는 가겠지만, 2~3년 있다가 은퇴를 할 수도 있다.” 정말 열심히 운동했는데 기회조차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었고, 몇 달만이라도 기회를 달라고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동생도 팀에 합류했고…. 민욱이는 좋은 선수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고 저녁에 짐을 싸서 나왔어요.


▲가장 먼저 한 것은 여학생들 따라다니기

김용민은 더 오래 선수생활을 하고 싶었고, 프로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꿈이 사라진 김용민은 학생도 아니고 선수도 아닌 ‘중간인’이 됐습니다. 운동부 친구들을 보면 움츠러들었고, 패배자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일반학생이 되면서 날아온 등록금 고지서를 받았습니다. 택시기사를 하시는 아버지의 수입으로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었습니다. 그래서 깊은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계속 ‘중간인’으로 머물 수는 없으니까요.

Q. 운동을 그만두고 충격이 컸을 것 같아요.
2학년 1학기까지는 소속이 농구부였습니다. 등록금을 안냈어요. 2학기에 일반학생이 되면서 집으로 등록금 고지서가 날아왔습니다. 등록금이 500만원이에요. 집에서 얼굴을 못 들겠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내가 장남인데…. 동생은 청소년대표도 하고. 장학금 받고 다니는데…. 그때부터 고민을 엄청나게 했어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할 것인지, 공부를 해서 장학금을 받을 것인지. 고민 끝에 후자로 결정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 당장 돈은 모으겠지만 졸업장을 받은 이후 할 수 있는 것아 없을 것 같았어요.

Q. 운동만 하다 갑자기 공부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았겠어요.
중학교 때 운동을 시작한 이후 수업은 오전에만 들어갔습니다. 대학도 마찬가지였죠. 교양수업을 들어가면 인원이 3~400명이니까 뒤에서 자고, 전공수업은 교수님들이 배려해주셔서 또 잤어요(웃음). 수업은 형식이었죠. 공부가 낯설었습니다.

Q. 그렇다면 그 낯선 수업은 어떻게 극복했나요?
가장 먼저 한 것은 여학생들 따라다니기 입니다(웃음). 강의실 맨 앞줄에는 항상 여학생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 앞줄 오른쪽이나 왼쪽 끝에 제가 앉았어요. 우유 셔틀, 커피 셔틀을 자진해서 시작했죠. 여학생들이 적으면 똑같이 적고, 수업이 끝나면 노트를 빌려달라고 해서 빠진 내용을 추가로 적었습니다. 동기들이 착해서 다 빌려주고 가르쳐줬어요. 시험기간 2~3주 전부터는 도서관에서 먹고 잤습니다.

Q. 여학생들 따라다닌 효과가 있었나요?
그 학기에 4.3점 만점에 3.98로 30%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다음 학기에는 50% 장학금을 받았고, 3학년 2학기에는 4.3점 만점에 4.3점으로 과 수석을 했어요. 공부해서 들어온 학생들을 다 이겼습니다. 공부가 어떤 면에서는 운동보다 쉬워요. 시험은 범위가 정해져 있잖아요. 계속 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옵니다. 농구는 매일 300개의 슛을 던져도 경기 중에 들어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공부는 인풋과 아웃풋이 어느 정도 일치하는데 농구는 그렇지 않습니다.

Q. 여학생들만 따라다녀서 나올 성적은 아닌 것 같네요.
축구선수 백승호 아시죠? 그 선수 아버님이 저희 학교 교수님입니다. 교수님 강의를 재미있게 들었는데 돌아서면 까먹어요. 교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세 번은 웃으면서 가르쳐주셨어요. 네 번, 다섯 번을 가니까 조교를 제 담당으로 붙여주셨습니다. 당신도 테니스 선수를 하셨고, 나중에 공부해서 교수가 됐다고 용기를 주셨어요.


▲ 농구교실 일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I love you’를 읽지 못하는 고등학교 2학년이 있었습니다. 전교 755명 중에 750등을 했던 야구선수입니다. 독하게 공부했고, 사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유명 법무법인 변호사를 거쳐 지금은 판사로 재직 중인 이종훈 씨입니다. 그의 공부 노하우 중 하나는 성적이 오르면서 공부에 재미를 느끼고, 재미를 느끼면서 더욱 공부에 빠져드는 선순환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김용민도 그랬습니다. 공부가 재미가 붙었습니다.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이해하게 되면서 재미가 늘었습니다. 특히 해부학이 그랬습니다. 뼈와 근육을 배우면서 내가 운동하면서 왜 아팠는지를 알게 됐습니다. 계속 운동을 하는 동생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대학원 진학도 고려했습니다.

Q. 대학원 진학은 왜 포기했어요?
영어공부를 너무 늦게 시작했습니다. 제가 관심 있는 재활트레이너 분야는 미국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점도 제약이었어요. 트레이너의 급여와 처우가 열악하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고요.

Q. 그래서 취업을 선택했나요?
대학을 졸업하고 체육센터에서 공익을 했습니다. 소집해제가 다가올수록 진로에 대한 걱정이 커졌어요. 대학원을 안가면 취업이잖아요. 제일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농구교실인데, 농구교실 일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한 달에 200만원 넘는 돈도 법니다. 어린 나이에 적지 않은 돈이잖아요. 쉽게 돈을 벌 수 있지만 미래는 불투명합니다. 취업에 필요한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Q. 취업에 필요한 공부라면 어떤 것들일까요?
선배들이 영어공부를 권유했어요. 문제는 제가 영어는 1도 모른다는 점이었죠. 학원에 전화를 했는데 기초는 있어야 수업을 들을 수 있다더군요. EBS를 들어갔는데 교재도 없는 왕초보 강의 영상이 있더라고요. 그 강의를 반복해서 들은 후 기초문법을 사서 공부했습니다. 이후에 영어 학원을 다녔고, 체육인재육성재단의 지원으로 주 5일 중에 4일은 원어민들과 영어공부를 하고 하루는 스포츠마케팅 공부를 7개월 과정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Q. 기업은행에 취직을 했어요. 공채겠죠? (웃음)
공채에요(웃음). 제가 입사할 당시에는 직군을 나눠서 채용했습니다. 정규직, 창구 전담직원, 인턴으로 나눠서 모집했는데 저는 창구 전담직원으로 합격했어요. 작년에 창구 전담직원이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되면서 저도 정규직이 됐습니다.

Q. 김용민씨의 첫 직장이에요. 첫 직장으로 기업은행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동호회 농구를 같이 했던 선배 중에 기업은행을 다녔던 선배들이 있었습니다. 그 분들이 은행을 추천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은 안준호 감독님 아들이에요(웃음). 그 선배도 연세대에서 농구선수를 했습니다.

Q. 경제, 경영, 금융 같은 분야는 생소했을 것 같아요.
선배들한테 그런 얘기를 했죠. 경제나 경영은 하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은행을 가냐고…. 선배들이 스터디를 권했습니다. 포털 카페에서 함께 공부할 친구들을 만났고, 그 친구들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 중에 세 명은 은행에 들어갔고 한 명은 삼일회계법인에 들어갔습니다. 경제신문을 매일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됐어요. 매일경제신문과 한국경제신문 논설을 매일 필사하면서 경제에 관한 지식을 축적했습니다.

Q. 직업인으로서 은행원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일까요?
현재가 안정적이라는 점입니다. 급여수준이나 복지가 나쁘지 않으면서 미래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설계할 수 있어요. 은행 업무가 정말 많지만 노력만 하면(웃음). 10년, 20년 후에도 안정적인 생활이 유지될 수 있을지는 물음표입니다. ‘Banking is necessary. Banks are not’ 얼마 전에 국민은행이 총파업을 했는데 별로 타격이 없었잖아요. 금융서비스는 꼭 필요하지만, 미래에도 그 기능을 은행이 담당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Q. 머리로 생각했던 은행 업무와 실제 생활하면서 느끼는 은행 업무에 차이점이 있을까요?
저는 금융 종합 전문인을 꿈꾸고 들어갔습니다. 은행은 카드, 보험, 펀드 등 금융 관련 모든 상품을 취급하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해보니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키우려고 합니다. 한 가지 분야만큼은 스페셜리스트가 되고 싶어요. 지금 가장 관심 있는 분야는 프로젝트 금융입니다.

Q. 한때 ‘은행고시’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은행권의 취업 문턱은 지금도 여전히 높아요. 은행권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언을 한다면?
은행에 근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적극성입니다. 지점에 배치를 받고 2년차까지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잠시만요. 고객님”이었어요. 신입사원 연수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면 빨리 컴퓨터로 찾아보거나 선배님한테 물어봐야 해요. 고객 응대도 적극성이 필요합니다. 원하는 것만 처리해주는 것이 아니라, 차도 한잔 대접하면서 상품을 적극적으로 권유해야죠. 뱅커는 오퍼레이터가 아니라 세일즈맨입니다.

Q. 은행에 취직해서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동생에게 도움을 주는 형이 되고 싶었어요. 은행에 들어오니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동생 월급 관리를 제가 해주고 있죠. 그래서 동생은 쓸 수 있는 돈이 없어요(웃음).


▲엘리트 농구에서 다시 동호회 농구로

김용민은 꾸준히 농구를 하고 있습니다. 2015년에 K직장인리그에 출전했고, 2017년에는 전국생활체육대축전에 서울시 대표로 참가해서 우승도 했습니다. 작년에는 3대3 코리아투어에 출전했습니다. 3대3 대회에 나갈 때는 태극마크를 달 수 있는 꿈도 꾸었다고 하네요. 타의에 의해 농구를 그만두면서 느꼈던 패배감도 농구에 대한 애정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농구는 어떤 의미일까요?

Q. 농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무슨 매력이 있을까요?
그러게요. 무슨 매력이 있을까요? (웃음)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미칩니다. 아직도 농구를 생각하면 피가 꿇고 심장이 뛰어요. 지기 싫고. 동생 경기 보면서 동생이 슛 하나 넣으면 소리를 질러요.

Q. 동생은 프로선수에요. 부러운 감정은 없나요?
민욱이가 올해 자리를 잘 잡아서 좋아요. 저도 선수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도 가끔 있지만, 저도 잘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해요. 이제 동경의 대상은 아닙니다. 선배나 동기들을 보면, 낮은 임금에 금방 실직하는 선수들도 많아요. 20대만 반짝하고 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혼하고 아이 낳고를 생각하면 제가 더 안정적이죠.

Q. 학교에 다닐 때는 동생과 비교가 되면서 스트레스도 많았을 것 같아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잠을 자는데 동생이 불렀어요. 청소년대표에 선발된 것 같다고 하더군요. 형으로서 ‘정말 잘됐다. 너무 좋다’ 이 생각과, 남자로서 ‘창피하다. 내가 됐어야 하는데’ 두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형으로서의 감정과 남자로서의 감정이 교차할 때는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보다 선수로서 갖는 스트레스가 더 컸습니다. 10센티만 더 컸다면…(웃음). 사회생활도 그렇지만, 실력으로 극복해야죠.

Q. 올해 김민욱 선수의 출전시간이 많이 늘었어요.
너무 좋죠. 너무 좋아요. 제가 동생 경기는 하이라이트와 풀 경기를 다 보는데 너무 좋아요. 잘했던 선수고 잘하는 선수인데 기회를 많이 못 받았습니다. 저는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너는 빅맨이니 골밑에서 더 비벼줘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포스트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더 있다고 얘기해요. 민욱이가 “열심히 하고 인성이 바랐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는데 하나 더 보태서 조금 더 파이팅 넘치는 선수가 됐으면 좋겠어요.

Q. 동생 얘기에 흥분하네요(웃음). 동생과도 가끔 농구를 하나요?
비시즌에는 은행 동호회 팀에 와서 함께 농구도 합니다. 끝나면 농구를 했던 선배님들께 인사 하고 밥도 같이 먹어요.

Q. 동호회 농구에서 엘리트를 거쳐 다시 동호회 농구로 돌아왔습니다. 엘리트 농구와 동호회 농구,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엘리트가 좋아서 시작을 했지만, 어느 수준 이상을 넘어가면 제발 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아프거나 힘들면 쉬어야 하는데 강압적으로 운동을 할 때가 있어요. 그렇게 억지로 하는 것이 반복되면 열정 자체가 식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농구에 대한 열정은 동호회 사람들이 더 강하다는 느낌입니다. 농구하는 시간에 맞춰서 밥을 먹고 스트레칭을 해요. 경기 하나를 위해 준비하는 자세가 다릅니다. 동호회는 정말 자기가 뛰고 싶어서 하니까요.

Q. 마지막 질문입니다. 김용민에게 ‘농구’란?
은인(恩人)입니다. 한 번의 좌절은 있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농구하면서 맺은 인연들이 저를 여기까지 오게 해줬습니다. 농구를 했던 것은 어드밴테이지에요. 밤잠 안자고, 이 악물고, 두들겨 맞으면서 조직생활을 해봤으니까. 그래서 일반 학생들보다 정신적으로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짧았던 좌절의 시간, 길었던 노력의 시간

농구선수 김용민과 공부하는 대학생 김용민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는 점입니다. 식상한 결론이지만, 인터뷰 내내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좌절은 짧았고 노력은 길었습니다. 확실한 동기부여가 있었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아들, 동생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형이 되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그려나갈 김용민의 미래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직업적인 목표만 찾았습니다. 이제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싶고, 나와 내 동생처럼 운동하는 형제를 만들고 싶어요. 물론 본인들이 원해야겠지만(웃음). 저와 동생의 관계가 좋아요. 서로 의지할 수 있고,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어요. 부모님과 동생, 아내, 장모님, 아이들과 모두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꿈이에요. 그리고 동생이 제2의 인생을 시작할 때 도움을 주는 형이 돼야죠. 저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동생은 은퇴가 더 빠르잖아요.”

박스 | 김용민은…
전농중과 경복고를 졸업하고 2008년 농구 특기생으로 연세대 체육교육과에 입학. 196cm의 포워드로 주특기는 몸싸움. 스스로를 골밑에서 터프하게 부딪히는 블루워커 타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 본 기사는 농구전문잡지 점프볼 2019년 2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 사진_ 박상혁, 유용우 기자, 김용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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