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프볼=조원규 칼럼니스트] 농구는 공중에 매달린 바스켓(Basket)에 공을 넣는 경기입니다. 바스켓 링의 높이는 3.05m. 일반적으로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있는 높이가 아닙니다. 공을 넣기에 쉽지 않습니다. 확률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최대한 링 가까이에서 던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농구를 ‘높이의 스포츠’라고 얘기합니다. 높이가 있으면 상대방이 가까이 오기 어렵습니다. 링에 튕겨져 나온 공을 소유할 확률도 높아집니다.
이 명제를 증명하며 대학농구의 역사를 바꾼 사람이 있습니다. 이전까지 대학농구의 중심은 연세대와 고려대, 두 사학 명문이었습니다. 어렵게 하나의 방벽을 넘어도 또 하나의 철옹성이 있었습니다. 둘 모두를 넘는 팀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두 개의 방벽을 모두 허물고 왕조를 구축한 팀이 있었습니다. 80년대 중앙대입니다. 그들은 ‘청룡군단’이라는 별명에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무적의 청룡군단을 조직한 사람은 정봉섭 감독입니다. 그는 한기범과 김유택을 스카우트하여 높이를 구축했습니다. 허재와 강동희를 스카우트하여 높이에 기술을 더했습니다. 그들의 경쟁상대는 대학팀이 아니었습니다. 성인 남자농구의 최고봉 삼성전자와 현대전자였습니다. 고공농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정봉섭 감독은 조금은 이른 나이인 40대 말에 감독 자리를 제자에게 넘겼습니다. 이후 행정가로 모교 농구부를 위해 일했고, 12년 전 돼지해에 정년퇴임을 했습니다.
“잘 놀다 갑니다. 여러 후배들도 잘 놀다 따라 오세요.”
그가 후배들에게 남긴 말입니다. 코트를 떠난 지금도 여전히 잘 놀고 있을까요? 2019 대학농구리그 중앙대의 첫 경기가 있던 날, 정봉섭 전 중앙대 감독을 만났습니다.
Q. 반갑습니다. 감독님. 잘 놀고 계신지(웃음) 궁금해서 찾아왔습니다.
건강이 안 좋아서 잘 놀지를 못하고 있어요(웃음). 내가 공식적으로는 45년생이지만 실제로는 43년생이야. 몸을 많이 썼죠. 여기에 숙소 생활을 오래 해서 몸이 곯았어요.
Q. 결혼 생활 36년 동안 집에 들어간 날을 헤아려 보니 2년 정도 된다고 했던 과거 인터뷰를 봤습니다. 가족들과는 많은 시간을 보내셨어요?
딸이 둘이고 아들이 하나에요. 딸 둘은 모두 시집을 갔는데, 우리 집에서 같이 살다 막내가 최근 분가했습니다. 아들도 같이 살고 있고요. 내가 가족한테는 빵점입니다. 우리 막내가 어렸을 때, 아빠 무릎을 치면서 “엄마, 엄마”하고 불러요. 아빠 소리를 해보지 않았으니까. 당시에는 참 지독하게 했어요.
Q.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클 것 같습니다.
84년에 농구부가 안성으로 옮겼어요. 집을 판교로 이사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 세 명은 모두 흑석동에 있는 학교에 다녔어요. 아내가 매일 차로 등하교를 시켜줬죠.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야 더 말해서 뭐 하겠어요.
Q. 왜 그렇게 지독하게 하셨어요?
나를 자극한건 연고대였어요. 농구계에 있는 두 학교 선배들이 너무 행세를 했어요. 대표선수를 선발할 때에도 연대 출신이 5명이면 고대 출신도 5명. 신문기자와 방송기자도 대부분 두 학교 출신이고…. 두 학교 출신이 아니면 지도자 생활도 어려웠습니다. 두 학교를 이기고 싶었죠. 한양대나 경희대가 연·고대를 이기고 우승한 적도 있어요. 계속 이긴 건 아니고 간헐적으로. 나는 계속 이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그 학교 사람들이야(웃음).
■ 중앙대 순위는 제일 아래쪽이었지
Q. 1983년 춘계연맹전에서 처음 우승하셨죠?
그랬지. 난리가 났어요. 당시에는 학교의 지원이 적었어요. 체육관도 없어서 용산고 체육관을 빌려서 운동했죠. 용산고 감독과의 인간적인 관계 때문에 가능했어요. 83년에 우승하고 학교에 체육관도 지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84년에 체육관을 건립했죠.
Q. 중앙대 감독(당시에는 코치로 표현)으로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이 1977년입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중앙대로 오기 전에 명지고등학교에서 코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3학년이 다섯 명인데, 세 명은 스스로 대학 진학을 할 수 없었어요. 진효준이 그 친구들과 함께 한양대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반대를 했어요. 명지대도 아니고, 왜 한양대를 가냐는 것이었죠. 진효준은 연고대도 스카우트 제안이 있었어요. 그때까지 명지고는 한 명도 연고대에 보내지 못했었고, 한양대를 가느니 고려대를 가라고 권유를 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학생들은 진학이 어렵잖아요. 한양대에서 교장이 사과하면 약속한 선수들을 받아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장이 사과를 안 해요. 이건 교육자로서의 자세가 아니다 싶었어요. 이런 것이 교육자라면 교사 자격증을 찢어버리겠다고 얘기했고, 자격증을 찢었습니다. 그렇게 학교를 그만 두고 쉬고 있는데 선배들로부터 중앙대를 맡아보라는 제안이 왔습니다.
Q. 어린 나이였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다른 지도자들은 다 나보다 10살 이상 많았어요. 당시 중앙대에는 체육관도 없었죠. 전력도 약했습니다. 고등학교는 경복, 용산, 송도, 수도공고, 신일고 등 7~8개 학교가 강했어요. 대학은 연세대와 고려대였고, 중앙대 순위는 제일 아래쪽에 있었죠.
Q. 잠시 여자농구로 외도를 했던 이유도 그런 어려움 때문이었을까요?
중앙대에 부임해서 결승에도 올리고, 나름 성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체육관이 있는 곳에서 원 없이 농구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만나는 사람들에게 종종 이 얘기를 했는데, 이 얘기가 신탁은행 관계자에게 들어갔나 봅니다. 제의를 받았어요. 학교에는 2, 3년 내에 우승을 한 번만 시키고 오겠다고 했습니다.
Q. 약속을 지켰나요?
4번 결승에 올랐는데 4번을 모두 졌어요. 아직도 네 번의 준우승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을 합니다. 선수들이 아니라 심판이 경기를 지배했어요.
■ 허재는 언감생심이었어요
정봉섭 감독은 지도자 생활을 꽤나 빠르게 시작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으니까요. 중앙대 감독을 맡은 것은 30대 중반. 여자실업농구로 잠시 외도를 했다 돌아온 것은 30대 후반입니다. 혈기왕성한 나이였고, 감독 시절 젊은 혈기에 사고를 많이 쳐서 협회로부터 영구 제명만 네 번 당했다고 토로했습니다. 그 이면에는 심판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있었습니다. 80년대에는 심판이 경기를 지배했다고 의심받는 경우도 제법 있었습니다. 심판의 개입을 이겨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압도적인 실력이었습니다.
Q.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중대가 다시 꼴찌를 했어요. 서울대에게도 졌죠. 물론 당시 서울대는 운동을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체육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이 있었거든요. 그래도 학교 측에서는 충격이었죠. 당시 부총장이 농구부 해체를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가기로 결정했어요.
Q. 처음 부임했을 때보다는 전력이 좋았나요?
전혀. 78년 12월에 다시 학교로 왔는데 많이 부족했어요. 바로 산장호수에 들어가서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82년에 한기범과 박경영이 오면서 4강 전력은 됐습니다. 83년에 김유택과 강정수가 들어오면서 춘계연맹전 첫 우승을 포함해 5관왕을 했던 것 같아요.
Q. 전력의 완성은 역시 허재 전 감독의 합류겠죠?
날개 한 쪽이 없었는데 허재가 들어오면서 완성이 됐지. 강동희가 들어오면서 엔진을 달았고. 대학 경기는 의미가 없었어요. 현대와 삼성을 목표로 연습을 독하게 했습니다. 사실 작전도 필요 없었어요. 허재가 1학년 때 만들었던 것을 4학년 졸업할 때까지 썼어. 허재 학년은 허재 하나입니다. 남은 TO는 다 반납했어요.
Q. 낚시를 전혀 모르는 감독님이 허재 부친이 좋아하는 낚시를 다니면서 마음을 잡았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소문처럼 낚시로 대어를 낚으셨나요(웃음)?
아니에요. 언감생심 허재는 꿈도 꾸지 않았어요. 원래 허재는 연대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8월인가 9월에 허재 아버지가 “왜 당신은 허재를 스카우트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어요. 그 때에도 ‘설마 허재가 중앙대에 오겠나?’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박한 감독이 허재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들어주기도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농구하러 가지, 공부하러 갑니까.”라고 말씀하세요. 중앙대로 올 수 있다는 얘기로 이해했고, 진짜냐고 몇 번을 물어봤습니다. 이후 합의도 되지 않았는데 허재 아버지가 방송에서 중앙대 입학을 선언했어요. 중앙대 선수들과 방송을 함께 봤는데, 선수들이 만세를 부르며 난리가 났습니다(웃음). 사실 공은 많이 들였습니다. 허재 아버님과 가정사 등 속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였어요.
Q. 중앙대 시절 허재 선수가 개성이 강했다고 들었습니다. 기존 선수들과 갈등도 있었을 것 같아요.
허재가 선이 굵어요. 친구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자존심도 강했어요. 허재가 신입생 때 4학년 선배들이 찾아왔습니다. 허재와 운동을 같이 못하겠다고. 그래서 얘기했어요. “기술자에게는 독특한 무엇이 있다. 허재가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데 경기에서는 아무 것도 못해. 그럼 허재나 너희 인생은 어떻게 될까? 잘 달래서 데려가야지”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허재에게는 겸손하라고 얘기했습니다.
Q. 허재 전 감독을 포함해 많은 제자들이 감독님을 존경하는 지도자, 롤모델로 꼽았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 애기들은 모르고…. 나는 지금 이런 생각을 해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 했습니다. 나는 제대로 농구선수 생활을 해보지 못했잖아. 외국에 가는 지인들에게 영어나 일본어로 된 책을 사달라고 하고,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거나 내가 돈을 주고 번역을 시켰어요. 그런 식으로 지독하게 공부했어. 그래서 몸도 상했죠. 밥을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심지어는 꿈에서도 농구를 했습니다.
■ 선생님의 아픈 손가락
정년퇴임 후, 정봉섭 감독이 농구인으로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2011년입니다. 그 해에 동부와 KCC가 챔피언결정전에서 만났죠. 그리고 두 팀의 사령탑은 강동희와 허재였습니다. 모 일간지에 “이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중앙대 시절 은사였던 정봉섭 씨도 깨끗한 모습을 보이라고 신신당부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의 성공은 무엇보다 큰 기쁨이었습니다. 반면 제자들의 추락은 건강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Q. 강동희 전 감독의 불미스러운 사건 이후 몸이 다 쇠약해졌다는 인터뷰를 하셨어요. 당시에 받은 충격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강)동희는…. 동희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벌써 목이 멘다고. 어렵게 살아온 아이잖아요. 이제 살만하잖아. 근데 왜 그런 일을 했을까? 최근 1년 반을 통화를 못했어요. 지금 농구교실을 하는데, 소식을 들으면서 궁금하기도 한데 가지는 못해. 혹시 부담스러울까봐. 얼마 전에는 전창진 어머니가 대성통곡을 하면서 전화를 했어요. 농구계로 따지면 (전)창진이가 정준영보다 대단할 공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있나? 전창진은 아버지가 중앙대 농구선수였어요. 용산고에서도 만났고. 나는 중앙대 출신처럼 생각해.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농구인은 만나기도 싫고, 신동파와 박한 등 몇 명만 만나요.
Q. 허재 전 국가대표 감독도 선수 선발과 관련해 구설수가 있었습니다.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허재가 좀 양보했어야 해. 냉정하게 했어야 해. 두 아들 모두 대표선수가 될 수 있는 실력이에요. 그래도 하나는 양보했어야 합니다. 농구를 5명이 하는데, 벤치까지 12명이 하는데 둘을 데려가면 ‘이건 허재 팀이야’라는 말이 안 나오겠냐고. 말은 못했지만 마음에 걸렸어요.
Q. 그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월권이지. 선수 선발은 감독의 고유 권한이에요. 그리고 이제는 허재 감독도 농구계의 어른입니다. 먼저 의견을 구하지 않는데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아니죠.
Q. 가장 아픈 손가락은 강동희 전 감독일 것 같습니다.
허재(대표팀 감독 당시 선수 선발 논란)는 충격이었고, (강)동희는 며칠을 마당에도 안 나갔어요. 걔는 누구와 애기할 사람이 없어. 어머니도 몸이 불편하시고. 허재는 농구계에 친구들이 많아요. 후배들도 잘 따르고. 동희는 친구가 많지 않아요. 대신 일반인 친구들이 많아. 전국 어디에 가도 밥을 사줄 친구들이 있어요.
승부의 세계는 은퇴가 있지만, 스승의 자리는 은퇴가 없나 봅니다. 인터뷰하는 내내 제자들에 대한 걱정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질문이 시작되기도 전에 허재 전 감독에 대한 얘기를 했고, 강동희 전 감독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올 시즌 김승기 감독의 성적 부진에 대한 걱정이 이어졌습니다. 현역 지도자 시절 잘 놀았는데, 오히려 은퇴 후 잘 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인연이 숙성해서 운명이 되다
농구감독 정봉섭은 대학농구 역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그런데 농구선수 정봉섭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서울사업고등학교에서 농구를 했지만 취미생활에 가까웠습니다. 대학도 농구선수가 아닌 일반 학생으로 입학했습니다. 중앙대 사범대 체육과에 입학했는데, 체육과를 선택한 이유는 합격이 상대적으로 수월했기 때문입니다. “키도 작았고, 공부도 농구도 성공 못했기 때문에 농구가 싫었다”던 그가 농구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이유는 지금은 돌아가신 김영태 선생님과의 ‘인연’입니다. 그 작은 ‘인연’이 오랜 시간 숙성하며 ‘운명’이 됐습니다.
“UCLA 전설적인 감독이 한 유명한 얘기가 있어. 감독은 딱 두 부류가 있다고. 이겨서 현재를 유지하는 감독과 져서 쫓겨나는 감독. 이건 진리야. 대신 지더라도 남아 있는 감독이 있어. 져도 남아 있는 감독은 졌지만 최선을 다한 감독이라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거지. 그런 감독이 되려면 엄청난 노력을 해야 돼. 내가 다시 태어나 지도자를 또 한다면 난 결혼 안 해.”
2010년 서민교 기자가 정봉섭 감독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인터뷰 말미에 지도자 정봉섭의 생각이 잘 담겨 있습니다. 사심 없이 선수들과 뒹굴면서 농구만 생각하는 지도자입니다. 명지중학교 코치였던 젊은 김상준(현 성균관대 감독)을 중앙대 감독으로 추천하는 조건도 그것이었습니다. “은행 가는 것”도 몰랐던, 농구 외에는 “완전히 바보”였던 제2의 정봉섭이 되는 것이 조건이었습니다.
서민교 기자는 정봉섭 감독을 ‘풍운아’로 표현했습니다. 소속팀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나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교장 앞에서 교사 자격증을 찢기도 했습니다. 네 번의 영구제명을 당해 8년 동안 관중석에서 팀을 지휘해야 했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성숙하지 못했지만 후회는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후회는 없었습니다. 노력 없이 승리를 도둑질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봉섭 감독의 노트에는 2019 대학농구리그의 모든 일정이 있었습니다. 잘 정리된 표를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데, 그는 노트에 정성스럽게 펜으로 적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경기장을 찾지는 않습니다. 대학농구연맹에 아쉬움이 있습니다. 농구에 대한 열정과 사업적인 마인드입니다. 부담도 있습니다. 제자들의 행보는 그에게 거울이 됩니다.
“박한이나 나나 임영보 같은 사람들은 아마 사형당했을 거예요. 애들 패고, 성질내고. 85년부터 애들한테 손을 못 대게 했습니다. (중앙대의) 3개부 감독들을 모아서 직접 교육을 시켰어요. 엄마들이 못 견딥니다. 예전 엄마들은 죽지 않을 만큼 패서라도 선수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엄마들이 변했죠. ‘우리 아이는 칭찬해야 잘해요’라고 얘기합니다.”
그는 옛날 농구인 입니다. 합리적인 사고보다 혈기를 앞세웠고, 설득보다 회초리를 앞세웠습니다. 그의 지도방식은 지금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이었습니다. 본인의 레벨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고, 선수들의 사생활까지 세세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E.H.Carr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습니다. 정봉섭 감독은 지금의 지도자들과 어떤 대화를 하고 있을까요? 열정은 고스란히 남고, 지도의 방식을 현재의 것으로 만든다면 우리 농구가 보다 많은 팬들과 교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사진_박상혁 기자, 정봉섭 감독 제공
[저작권자ⓒ 점프볼.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