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마 잡았다’, 현주엽 드래프트
1998년 신인선수 드래프트는 KBL 역사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KBL에서 최초로 신인드래프트가 시작된 첫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농구대잔치 시절과 마찬가지로 팀이 능력껏 선수와 계약하거나 신생팀같은 경우 대학교 전체를 통째로 지명하는 등의 방식으로 선수가 수급됐다. 신인 드래프트가 시작되면서 사실상 특정 몇몇팀의 선수 싹쓸이가 어려워졌다고 할 수 있다.
첫해 드래프트의 주인공은 단연 ‘매직히포’ 현주엽(47‧195cm‧고려대)이었다.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슈퍼스타로 불렸던 그는 엄청난 체구에서 뿜어져나오는 강력한 파워와 운동신경에 기술적인 부분까지도 탁월했다. 기본적으로 워낙 힘이 좋은지라 골밑에서 장신빅맨들과 몸싸움이 가능했으며 내외곽을 오가며 득점을 뽑아내고 어시스트를 뿌려댈 수 있었다.
우람한 체구를 앞세운 포스트 장악력에 더해 올어라운드 플레이어라는 점에서 ‘KBL판 찰스 바클리’로 불리기도 했다. 엄청난 기대치만큼 프로에서 대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당시 멤버들로 다시 드래프트가 펼쳐진다해도 현주엽이 유력한 1순위라는데는 변화가 없을 듯 싶다.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도 있지만 국가대표급 기량에 스타성까지 차고 넘치는지라 어지간해서는 지나치기 힘들 것이다.
1순위 지명권을 가졌던 SK 역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현주엽을 뽑았고 여러 신문에는 ‘하마 잡았다’라는 타이틀과 함께 안준호 감독이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 도배되기도 했다. 현주엽 입장에서는 SK행이 좋은 쪽으로 작용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SK에는 현주엽의 고등학교 1년 선배이자 대학시절 라이벌 ‘골리앗’ 서장훈(48‧207cm)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더없이 좋아보였다. 당시 서장훈, 현주엽이라면 국가대표 주전 4, 5번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SK가 신생팀임에도 단숨에 우승후보로 불렸던 이유다. 하지만 서장훈과 현주엽은 둘다 1인자 기질이 강한 선수들이었다. 김주성, 추승균 등 기량도 빼어나면서 살림꾼 역할까지 해낼 수 있는 유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신이 중심이 되어 팀이 돌아가는 것을 선호했다. 거기에 더해 연세대, 고려대라는 학연적인 라이벌 관계도 있었다.
여기에 대해 SK 2대 사령탑을 지냈던 최인선 전감독은 ‘농구人터뷰’를 통해 “둘이 조금씩 양보하면서 팀 플레이를 맞춰가는게 최선의 방향이었겠지만 스타의식도 강하고 서로간 알력이 있었던지라 공존이 쉽지 않았다. 농구는 팀스포츠다. 잘하는 선수가 많다고 무조건 팀이 강해지는 것이 아닌 포지션별로 조화가 잘되어 유기적으로 돌아갈 때 성적이 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거기에 더해 KBL은 외국인선수 제도가 있었다. 외국인선수에게 기대하는 포지션의 특성상 주로 골밑에서 활약할 선수를 우선적으로 뽑는다. 국내선수만 뛰는 리그라면 서장훈, 현주엽의 ‘트윈타워’도 가능했겠지만 외국인 빅맨까지 있는 상황에서는 밸런스를 맞추기기 쉽지 않다. 결국 당시 최감독은 슈터형 스몰포워드 조상현과 현주엽을 맞트레이드했고 이는 SK의 창단 첫우승이라는 결과물로 이어졌다.
현주엽 또한 새로운 소속팀 광주 골드뱅크(현 수원 KT)에서 남다른 존재감을 뽐내며 에이스로 활약했다. 플레이 스타일상 3번, 4번 어디에 놓기도 애매했지만 좋은 사이즈로 내외곽을 오가며 다재다능하게 플레이했던지라 선수층이 얇은 팀사정과 잘맞아 떨어졌다. 특히 자신과 비슷한 체형에 득점력 좋은 외국인선수들과 호흡이 좋았다. 애런 맥기(196.3cm), 게이브 미나케(195.5cm)와 함께 3포워드를 이뤄 이른바 ‘덩어리 3총사’로 불리며 돌풍을 일으켰던 것이 대표적 예다. 백인 득점머신 에릭 이버츠(198cm)와도 환상의 콤비플레이를 선보였다. 주로 현주엽이 주고 이버츠가 받아먹는 포지션이었다.
다재다능했던 선수시절만큼이나 은퇴후 현주엽은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했다. 사업가, 농구 해설자에 더해 2017년~2020년까지 창원 LG 감독을 역임한 바 있다. 무엇보다 현주엽의 재능이 가장 크게 빛나는 쪽은 예능 분야다. 특유의 입담과 먹방 캐릭터를 앞세워 허재, 서장훈과 함께 성공한 농구선수 출신 예능인으로 꼽히고 있다.
◆ 현주엽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397경기 출전 평균 13.3득점, 4.1리바운드, 5.2어시스트, 1스틸

윤영필, 김택훈, 변청운, 이은호…, 빅맨 선호 현상
당시 드래프트는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어? 저 선수가 왜 저 순번에?’같은 의외의 지명도 적지않다. 지금처럼 디테일한 분석이 이뤄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골밑에서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빅맨 선호 현상도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다.
현주엽 다음으로 SBS(현 KGC) 윤영필(47‧193cm‧경희대) 삼성 김택훈(47‧193cm‧연세대), 나산(현 KT) 변청운(48‧191cm‧건국대), 대우증권(현 한국가스공사) 이은호(47‧197cm‧중앙대)가 뽑혔던 것이 이를 입증한다. 지명 당시 기준 전형적인 빅맨은 윤영필, 이은호뿐이었으나 김택훈, 변청운 역시 3번에서 뛰면서도 4번 역할도 어느정도 가능한 자원들이었다.
변청운은 ‘농구人터뷰’에서 “당시 1라운드에서만 뽑혀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높은 순위가 나와서 놀라움, 기쁨, 부담감 등 여러 가지 감정이 한꺼번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주 포지션은 3번이었지만 힘이 좋아 골밑에서 몸싸움도 가능하다는 점 등이 플러스 요소로 작용됐던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2~5순위 지명자들은 이른바 스타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내실있는 플레이를 통해 팀에 많은 보탬을 주었다. 윤영필, 이은호는 언더사이즈 빅맨이라는 약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근성있는 플레이로 골밑에서 외국인선수들과 경쟁했으며 변청운은 다재다능한 포워드로 활약하며 11시즌 동안 프로무대서 뛰었다. 김택훈같은 경우 부상으로인해 기대치에 한참 미치지못했으나 터프한 수비력을 통해 나름대로의 경쟁력을 가져갔다.
현재 윤영필은 상촌중학교 체육교사, 변청운은 성남초등학교 농구부 코치, 이은호는 중앙대학교 농구부 코치로 재직중이며 김택훈은 공중파 해설해설위원으로 활약하다가 2019~20 시즌을 끝으로 하차한후 간간이 대학농구리그 중계 등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 윤영필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344경기 출전 평균 4.2득점, 2리바운드, 0.6어시스트, 0.5스틸
◆ 김택훈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226경기 출전 평균 2.5득점, 1.9리바운드, 0.7어시스트, 0.4스틸
◆ 변청운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384경기 출전 평균 4.1득점, 1.7리바운드, 0.7어시스트, 0.5스틸
◆ 이은호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366경기 출전 평균 4.9득점, 2.8리바운드, 0.3어시스트, 0.4스틸

신인왕 타이틀은 7순위 신기성
결과적으로 현주엽은 아마시절 명성만큼 프로 커리어는 보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5순위와 비교해보면 1순위의 위엄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해당 선수들이 주로 블루컬러 스타일로 뛰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기록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크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당시 신인왕은 현주엽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현주엽은 정규리그 첫시즌 34경기에서 평균 23.9득점, 6.4리바운드, 4.6어시스트, 0.8스틸을 기록했다. 지금같으면 신인왕이 문제가 아니라 MVP도 노려볼만한 성적이다.
현주엽을 제치고 신인왕을 차지한 선수는 다름아닌 그의 대학동문 ‘총알탄 사나이’ 신기성(47‧180cm)이다. 신기성은 45경기에 출전해 평균 12.9득점, 3.6리바운드, 4.1어시스트, 1.9스틸로 신인왕을 수상했다. 기록자체는 수상에 아무문제 없어보이지만 현주엽과 비교하면 득점 등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는 현주엽의 SK는 플레이오프도 진출하지못한 반면 신기성은 주전 가드로서 소속팀을 4위로 이끌었다는 점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다.
결과적으로 최고의 스틸픽이 되기는 했지만 당시 신기성의 7순위 지명은 충격적이었다. 아무리 빅맨 선호도가 높은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당시 대학 최강팀 중 하나인 고려대의 주전 포인트가드가 그렇게까지 낮은 순위를 기록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고개가 가웃거려질 일이다. 신기성에 앞서 동양 오리온스(현 오리온) 박재일(47‧190cm‧명지대)이 6순위로 뽑혔으며, 기아(현 현대모비스) 표명일(47‧182cm‧명지대), LG 구병두(47‧187cm‧중앙대), 현대(KCC) 구본근(47‧195cm‧연세대) 등이 8, 9, 10순위를 이었다.
은퇴후 박재일은 평범한 직장에서 근무하면서 동호회 농구를 즐기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신기성은 고려대, 부천 KEB하나은행 코치, 인천 신한은행 에스버드 감독을 거쳐 현재는 SPOTV 농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구병두는 침산중 코치, 구본근은 현대모비스 사무국장으로 있으며 표명일은 안타깝게도 지난 1월 12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 박재일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238경기 출전 평균 7.6득점, 2.6리바운드, 0.9어시스트, 0.7스틸
◆ 신기성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613경기 출전 평균 10.2득점, 2.9리바운드, 5.3어시스트, 1.4스틸
◆ 표명일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547경기 출전 평균 5.5득점, 2리바운드, 3.2어시스트, 1스틸
◆ 구병두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322경기 출전 평균 3.4득점, 1.3리바운드, 1어시스트, 0.5스틸
◆ 구본근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78경기 출전 평균 0.7득점, 0.4리바운드, 0.1어시스트, 0.1스틸

1라운드 못지않았던 2라운드 신인 정락영과 신종석
2라운드는 박영진, 최성우, 황문용, 신종석, 정락영, 강기중, 김병천, 남진우, 황인성, 박도경 순으로 뽑혔다. 1라운드가 주로 골밑에서까지 전천후로 활약해줄 자원 선호 현상이 돋보였다면 2라운드에서는 박영진, 정락영, 강기중, 김병천 등 좋은 평가를 받던 가드들이 선택을 많이 받았다. 3, 4라운드같은 경우 SK만 박용호, 송태균 순으로 뽑았으며 다른팀은 모두 이후의 지명을 포기했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2라운드 4순위(나래)로 뽑힌 스몰포워드 신종석(47‧193cm‧중앙대)과 5순위(동양)로 뽑힌 포인트가드 정락영(47‧183cm‧한양대)이다. 둘다 주전보다는 식스맨으로 주로 뛰었지만 준수한 수비와 이것저것 고르게 할줄 아는 능력치로 인해 첫시즌부터 팀에서 중용받았다.
정락영은 첫시즌부터 강하게(?) 컸다. 데뷔 시즌 동양은 전희철, 김병철, 김광운 등 기존 주전들은 물론 드래프트 1라운드에 선발한 박재일까지 모조리 군대 및 공익근무로 보내버리면서 탱킹에 가까운 시즌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로인해 32연패라는 굴욕적인 연패기록을 쓰게 됐다. 당시 정락영은 얇은 선수층 탓에 데뷔하자마자 주전 포인트가드를 맡으면서 8.8득점, 4.4리바, 3.6어시, 1.8스틸을 기록했다. 데뷔 당시의 팀 상황은 어수선했지만 그로인해 주전자리를 차지하게 됐고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다는 점에서 선수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신종석은 프로 초창기 나래가 얇은 선수층을 극복하고 강팀으로서의 초석을 다지는데 크게 한몫했다. 탄탄한 수비력에 더해 외곽슛이 일품이었던 그는 주전 양경민을 도와 포워드진의 중심을 잡아줬다. 특히 팀이 첫 우승을 차지했던 2002~03 시즌 챔피언결정전 6차전 당시 2쿼터에서만 3점슛 5개를 쏘아 모두 적중시키는 이른바 ‘종석 타임’을 선보이며 일방적으로 끌려가던 분위기를 바꿔버리고 역전승의 기틀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KBL역대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히고 있다.
◆ 정락영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477경기 출전 평균 5.3득점, 2.5리바운드, 3.4어시스트, 1.4스틸
◆ 신종석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429경기 출전 평균 4.1득점, 1.9리바운드, 1어시스트, 0.7스틸
많은 농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2라운드에 뽑혔던 이들 역시 상당수가 지도자 생활과 인연을 맺었다. 대진고등학교 코치, KDB생명 코치, KDB생명 감독대행, OK저축은행 코치 등 은퇴후 지도자의 길을 쭉 걸었던 박영진은 현재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엘리트 바스켓볼 아카데미’에서 선배 추승균과 함께 농구 기대주들을 길러내는 일을 하고 있다. 황문용은 중국 NBL(2부리그)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있으며 신종석은 인헌고등학교 코치로 재직중이다. 정락영은 제주도에 살면서 중고등부, 성인부 등을 대상으로 클럽반을 운영하고 있으며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박장법사’로 유명세를 탄 박도경은 LG에서 매니저, 홍보차장 등을 거쳐 현재는 홍보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KBL 제공
#이미지편집_김종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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