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형 구비브라이언트, 꼭 키워내고 싶습니다”

김종수 / 기사승인 : 2022-07-26 02:4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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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46)] '구비브라이언트' 김민구

 

 

‘센스 좋은 장신 1번까지 있었으면 정말 완벽했을텐데…’


이번 2022 FIBA 아시아컵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은 각 포지션 별로 한층 높아진 이른바 장신라인업을 구성하며 화제를 모았다. 그전까지 늘 국제대회에서 높이의 한계를 절감했던 것을 감안했을 때 평균신장 196cm의 장신라인업은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매력을 느끼게 했다. 서장훈, 김주성, 이승준 등을 이을 중심 빅맨의 부재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양과 질을 갖춘 장신 포워드 라인이 탄탄하며 무엇보다 이승현이 돌아온다면 크게 아쉽지 않을 전망이다.


정작 아쉬운 것은 1번 포지션이다. 허훈이라는 돌격대장이 있지만 특정 선수에게만 의지하기에는 이래저래 부담스럽다. 이번 아시안컵에서처럼 부상으로 자리를 비울 경우 그야말로 답이 없어진다. ‘허훈과 함께 가드 포지션을 책임질 다른 스타일의 가드가 한명만 더 있었더라면…’이라는 말이 흘러나오는 이유다.


여기서 생각나는 이름이 하나 있다. ‘구비브라이언트’, ‘데릭 민구’ 등의 별명으로 불리던 천재 가드 김민구(31‧190cm)다. 포인트가드, 슈팅가드 양쪽에서 빼어난 재능을 자랑했던 전천후 올어라운드 플레이어인 그가 있었다면 대표팀의 장신라인업은 포지션별로 좀 더 완벽한 밸런스를 갖췄을 공산이 크다. 허재 아들과 허재 제자가 이끄는 가드진이라는 스토리도 더불어 만들어진다.


NBA에서의 마이클 조던이 그랬듯 국내 농구계에서도 오랜 시간 동안 끊임없이 ‘제2의 허재’가 언급됐다. 최고 테크니션으로서 기량과 흥행력을 모두 갖췄던 허재같은 선수가 다시 나오기를 바라는 갈망의 의미였다. 아쉽게도 지금까지도 제2의 허재로 불릴만한 선수는 나오지 않고 있다.


김민구는 거기에 가장 근접했던 선수로 평가받는다. 허재가 그랬듯 1번, 2번 포지션에서 모두 최고가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외곽을 오가는 득점머신에 넓은 시야와 센스를 바탕으로한 리딩, 패싱게임 등 여러 가지 부분에서 고르게 능했다. 그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대학무대는 물론 국제대회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며 한국농구 차세대 에이스로 평가받았다. 드래프트 당시 국가대표 센터 김종규를 뽑지 못했음에도 KCC팬들 사이에서 ‘오히려 잘됐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을 정도다.


그러한 기대치에 걸맞게 김민구는 첫해부터 돌풍을 일으켰다. 데뷔 첫해 2013~14시즌 46경기에 출전하여 평균 13.4득점, 5.1리바운드, 4.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자신을 향한 기대에 걸맞는 루키 시즌을 보냈다. 신인왕 타이틀은 국가대표 센터 김종규가 가져갔지만 기록만 놓고 봤을 때는 누가 수상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각종 국가대표 차출 등으로 팀과 제대로 손발을 맞춰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기록한 성적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다음 시즌이 더욱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민구의 프로 전성기는 거기서 끝났다. 2014년 여름, 국가대표 차출 기간중 불의의 음주 교통사고를 일으켰고 고관절과 신경을 크게 다치며 운동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본인에게도 큰 불행이었지만 음주사고라는 점에서 팬들의 실망이 컸고 보장된 앞날과 좋았던 이미지가 한꺼번에 날아가 버렸다. 그 뒤 이를 악물고 재활에 성공해 코트에 다시 나섰으나 예전의 기량을 회복할 수는 없었다. 식스맨으로 가끔씩 나와 활약해주는 정도가 전부였다.


김민구는 당시 사고로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최고 기대주로서의 재능이 꺾인 것도 아쉽지만 선수 생활 내내 ‘음주’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고 앞으로도 떨쳐내기 쉽지 않은 주홍글씨가 됐다. 지난해 6월 은퇴를 결정한 그는 스킬트레이너를 거쳐 현재는 모교 삼일상고 농구부 A 코치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선수로서 못다한 꿈을 가르치는 쪽으로 옮겨가는 중인 지도자 김민구를 만나 아프지만 솔직한 얘기를 들어보았다.


 

 

 

“무대가 달라지면 보는 눈도 변하더라고요”

Q.어떻게 지내십니까?

은퇴 이후 수원에 위치한 ‘프라임타임’이라는 농구 전문 트레이닝 센터에서 선수들을 가르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지도자 생활도 갑작스럽게 시작하게 된거에요. 모든 선수는 경기를 뛸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저는 은퇴하기에는 나이도 한창때잖아요. 플레이어로 코트에 서는게 최우선이었습니다. 하지만 몸 상태와 몇몇 상황이 은퇴를 생각하게 만들었고 고민이 깊어지더라고요. 그러던 중 스킬트레이너로 활동 중인 찬성이형(박찬성 대표)과 대화를 많이 나누기 시작했어요. 결국 선수로서 못다한 꿈을 지도자로 해보기로 결심했고 스킬트레이너부터 스타트를 끊었습니다. 현재는 찬성이형의 추천으로 모교인 상일삼고에 농구부 A 코치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윤환 감독님, 정승원 코치님 밑에서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하루하루가 값진 경험이 되고 있는 중이에요. 이곳에 온지도 벌써 3개월씩이나 됐습니다.(웃음)

Q.농알못같은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새 농구교실이나 레슨을 하는 전직 선수들이 많던데 스킬 트레이닝도 같은 개념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자신이 가진 농구 노하우를 가르친다는 것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누군지와 가르치는 사람의 태도와 마인드도 중요한 것 같아요. 스킬트레이너를 하면서 배웠던 부분이지만 많은 책임감과 공부가 필요한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돈벌이 개념으로 ‘나도 한번 해볼까?’해서 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닌 듯 해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선수들이 다 가져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도움을 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Q.한창 좋았을 때와는 차이가 크겠지만 백업으로서 여전히 경쟁력이 있었는데 예상보다 빨리 은퇴했어요.
네. 은퇴를 결정한 것에 후회는 없으나 아쉬움도 약간은 남아 있습니다. 그러한 결정을 하기까지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결정적으로 무릎이 너무 아팠던 것이 가장 컸습니다. 그렇지않아도 성치 않은 몸인데 도저히 제대로 뛰지 못할 것 같더라고요. 그런 상태로 고집을 부려서 경기에 나선다 해도 팀에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제 잘못에 대한 업보죠. 좋지 못한 몸 상태는 제가 책임지고 감수해야 될 몫이고 일단 그로 인해 팀이나 동료들에게 더 이상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Q.가르치는 쪽으로서의 김민구는 어떤 스타일인가요? 세심한 스타일, 엄한 스타일, 방목(?) 스타일 등 사람마다 지도 방식이 다양하잖아요.

제 스타일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농구를 잘했다고 가르치는 것도 잘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엄연히 다른 영역이죠. 제 농구 스타일! 제가 잘했던 농구를 가르치면서도 선수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장점과 재능을 살려주려고 노력 중입니다. 각자 자신의 몸에 맞는 옷이 따로 있으니까요. 저는 그 옷이 좀 더 분명한 색깔을 낼 수 있도록 도와줄 책임이 있죠. 그런 생각을 빨리했다는 것이 스킬트레이너 시절 저만의 차별화된 부분이었던 듯 싶어요. 하지만 안되면 될 때까지 했던 제 DNA를 주기 위해서 가끔 꼰대가 되기도 하더라고요. 그만큼 선수들이 정말 잘했으면 좋겠어요. 농구를 배울 때처럼 가르치는 과정에서도 자꾸 욕심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무대가 달라지면 보는 눈도 변한다고 하잖아요. 스킬트레이너 시절에는 기술 향상에만 집중했다면 삼일상고에서의 저는 또 달라야겠죠. 개인 기술 전수와 팀 스포츠에서의 역할은 차이가 많더라고요. 훌륭하신 감독님과 코치님이 계시니까 옆에서 잘 보고 배우면서 열심히 돕고 싶습니다. 진심과 정성을 다해 선수들의 기량을 업그레이드 시켜 줄 수 있는 지도자가 꿈입니다.

Q.이번 아시안컵을 보면서 ‘나도 저 자리에 있을 수 있었는데’라는 생각을 하셨을 것 같아요.
생각하면 뭐해요. 비단 아시안컵뿐만이겠어요. 성실하게 열심히 했으면 좋은 결과가 따랐겠죠. 아쉬움보다는 마음이 너무 아파서 한동안은 농구중계 등을 잘 보지 못했어요. 어차피 제가 저지른 잘못에서 비롯된 상황이잖아요. 후회해봤자 많이 늦었죠. 지금 잘하는 선수들이야 그만큼 실수 안하고 모범적으로 잘해왔기에 그 자리에 있는 것이고요. 이제는 후배들을 가르쳐야 되는 입장인지라 시간이 맞으면 농구중계도 찾아보고 기사도 많이 읽어보고 그래요.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야 지도자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제가 저지른 잘못은 평생 가지고 가면서 가르치는 선수들만큼은 비슷한 실수를 안하도록 잘 잡아주고 싶어요.  

 

 

 


“유병훈과 이대성, 두 형들을 꼭 이기고 싶었습니다”

Q.농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 그러니까, 10살때 처음 농구를 접하게 되었어요. 갑자기 아버지가 ‘너 농구해볼래?’ 이렇게 뜬금없이 말씀을 건네시더라고요. 저는 원래 태권도를 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워낙 운동을 좋아하고 그래서, ‘뭐, 한번해보죠.’ 그런 마음으로 시작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까 이미 초등학교 코치님이랑 이야기가 다 되어있는 상태였어요. 제가 전학 오기 전 학교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는 걸 보시고 연락을 하셨다고 하더라고요.(웃음)

Q.본래부터 포지션이 가드였나요?
네.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일단 초등학교 때는 키가 정말 작았어요. 학교에서도 조회 시간에 맨 앞자리에 앉아있었으니까요.

Q.선수 김민구의 정확한 포지션은 무엇이었을까요? 슈팅가드로만 한정하기에는 1번으로서의 능력치가 너무 좋았습니다.
음…, 저는 어렸을 때부터 1번만 하지는 않았어요. 상황에 따라 2번과 1번을 오갔어요. 포지션에 구애받고 플레이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화려한 플레이를 펼치기 위해서는 기본기가 반드시 밑바탕이 되어야 된다는 점입니다. 본의 아니게 일찍 지도자의 길로 들어서다 보니 많은 생각을 하게되요. 선수시절 저의 플레이나 이전에 제가 배워온 과정까지요. 일단 팬들은 그 선수가 펼치는 완성된 플레이만 집중하게 되지만 그렇게 만들어지기까지는 탄탄한 기초가 먼저에요. 기본기가 부실한 상태에서 이것저것 잔기술만 펼치다가는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있거든요. 이른바 부실공사라고 하죠. 저 역시 훗날 1, 2번을 오가며 어느 정도 몫을 하게 된 배경에는 기본기를 강조하셨던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랐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Q.거기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요?
많은 생각을 하는 습관도 중요한 것 같아요. 선수마다 자신이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다르거든요. 노력으로 커버한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분명 존재해요. 재능? 선수를 목표로 배우는 이들은 기본적인 재능은 다 가지고 있어요. 그게 남들 눈에 확 띄는 재능이든 아니면 묵묵한 성실함의 영역이든 간에 말이에요. 때문에 배워가는 과정에서 지도자의 가르침도 잘 따라야 하지만 스스로 자신의 장단점에 대해서 끊임없이 돌아보는 자세도 필요하죠. 자신이 잘하는 것은 더 키워나가고 좋지 않은 것은 과감히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센스는 부족해도 몸이 튼튼하면 그쪽에 좀 더 비중을 두고 발전시켜나가야 하고, 반대의 경우에는 부족한 하드웨어를 커버할 무기를 만들어야겠죠. 저 역시 이것을 조절하는 것이 참 힘들었어요. 때문에 늘 머릿속에서 농구에 대한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또 했습니다.


 

 


Q.이미지트레이닝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맞아요. 팀훈련, 개인훈련 등 몸으로 하는것도 중요하지만 틈틈이 하는 이미지트레이닝도 기량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저같은 경우 개인 연습이 끝난 후 여러 가지 상황을 상상하면서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그려보는 것을 즐겼어요. 이런 상황이 오면 이렇게 해야지 혹은 혼자 어려운 미션을 생각하고 어떻게 해결해야 될까 등등. 개인 연습 때 그런 순간을 염두에 두고 훈련을 해보기도 하고요. 관중들이 가득한 경기장에서 결정적인 슛이나 패스를 성공시키는 상상을 하다보면 혼자 소름끼치는 기분을 느끼기도 하고 그랬어요.

Q.유명세를 피부로 느낀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조금씩 느낀것 같아요. 알아보는 분들도 늘어나고, 식당 등을 가면 서비스도 주시고 그랬어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적어도 체감상은요.

Q.학창시절 라이벌이라고 생각한 선수가 있었나요?
저는 라이벌이라고 생각한 선수는 딱히 없었지만 초등학교부터 (유)병훈이형을 꼭 이기겠다고 생각하면서 투쟁심을 키워온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는 (이)대성이형까지 포함되어 한명이 더 늘었죠. 적어도 두 형들은 꼭 이기려고 했어요. 워낙 잘했거든요. 저같은 경우 동년배들과 비교해도 파워나 몸싸움에서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체력도 별로라서 달리기 같은 것 하면 꼴찌하고 그랬어요. 반면 형들은 정말 탄탄했어요. 그래도 승부욕은 있는지라 지기 싫어서 오기로 형들에게 들이댔던 기억도 납니다.(웃음) 그러다가 힘도 좀 붙고 요령이 생기니까 강한 상대와 붙는 것도 재미있어지더라고요. 대학을 가서는 포지션은 다르지만 (김)종규를 이기려고 노력했죠. 제 눈에 정말 잘한다 싶으면 불꽃이 화르륵 일어난 것 같아요. 저 선수를 뛰어넘어야 내가 성장한다는 생각을 했지 않나 싶어요.

Q.경희대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종규와 같이 최고의 학교로 만들고 싶은 열정이 가장 컸어요. 물론 자신도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종규와 함께한 선택은 잘한 듯 싶어요. 종규와 함께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Q.1번 두경민이 더 슈팅 가드스럽고, 2번 김민구가 더 포인트 가드같다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저는 포지션에 구애받고 싶지 않았어요. 1번도 잘하고 2번도 잘하고 싶었고 심지어 3번까지도 잘하고 싶었어요. 그 이상은 플레이 스타일상 무리가 있고요.(웃음) 그래서 ‘그냥 상황에 맞춰서 넌 1번이니까 이것만 잘해야 한다’는 것이 아닌 ‘1번이지만 슛도 패스도 두루두루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Q.좋아하거나 동경하던 선수가 있었나요?
저는 오래전부터 허재 감독님과 고 코비브라이언트 선수를 동경해왔습니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선수들이었잖아요. 평소에도 잘했지만 큰 경기에서 더욱 불타오른다는 점이 피를 더 끓게 했습니다. 단 하루라도 좋으니 저 선수들 같은 미친 퍼포먼스를 경기중에 펼쳐보고 싶었어요.

Q.본인의 플레이 스타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는 누구일까요?
저를 가르쳐 주신 스승님들 한 분 한 분 모든 분들이 정말 큰 영향을 주셨어요. 제가 부족한 부분을 정말 잘 짚어서 진심으로 지도해 주셨거든요. 저는 스승님 복은 정말 많았습니다. 물론 혼도 많이 났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제가 생각하는 저의 플레이 스타일은요…”

Q.대학 시절부터 ‘제2의 허재’로 불렸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이야기죠.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평가받는 분이잖아요. 하지만 마음은 크게 먹었습니다. 언젠가는 허재 감독님을 뛰어 넘겠다는 목표를 잡고 정말 많이 노력했습니다.

Q.선수 시절 허재와는 비슷하면서도 달랐죠. 다재다능하다는 점은 같은데 허재가 파워풀했다면 김민구는 부드럽고 능구렁이(좋은 의미로) 같았습니다.
제가 강골에 파워형은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체격이 약해서 악으로 깡으로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요령이라던가 저만에 노하우가 생긴 것 같아요.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정말 지기 싫어 했거든요. 플레이 스타일에 대해서 유연하다는 평가가 많았는데 저도 나름 연구를 많이 했죠. 일단 아무리 힘이 붙었다고는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 예전에 비해 나아졌다는 것이지 힘 좋은 선수들과 정면 승부할 정도는 아니거든요. 그냥 막 들이대기에는 무리수라고 생각되더라고요.


 



Q.자신의 장단점을 알고 잘하는 쪽을 극대화했던 거군요?
그렇죠. 무협 영화 무사들로 비교해보면 저는 청룡언월도 등을 들고 정면에서 상대를 쓸어넘기려 하다가는 분명 중간에 막혀서 무너졌을거에요. 적당히 흘릴 것은 흘려가면서 장검, 중검 등으로 거리별로 공략법을 달리하고, 때에 따라서는 연검으로 허를 찌르기도 해야죠. 그래야 살아남지 않겠어요. 플레이 할 때도 역지사지의 입장에 자주 서기도 했어요. 공격시에는 수비하는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반대로 수비할 때는 공격자 입장에서 생각을 하고 그랬죠. 그러면 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도 해요.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리듬을 빨리 가져가야 하나? 아님 한 박자 느리게할까’같은 것들요. 그런 경험들이 반복적으로 쌓이다 보면 이른바 판단력이 좋아지게 되죠. 찰나의 순간에도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대처법들이 머릿속에서 쫙 펼쳐져요.

 

Q.당연한 말이겠지만 농구에 대한 프라이드도 강하셨을 것 같아요.
그럼요. 프라이드는 자신에 대한 믿음하고도 연결된 부분인지라 선수라면 반드시 갖춰야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필요 이상으로 강해서 역효과가 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래도 프라이드가 묻혀있는 것보다는 전자가 낫지 않나 싶어요. 프라이드가 정확하게 어디까지를 규정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 역시 다른 것은 몰라도 농구에 대해서만큼은 승부욕이 워낙 강해서 누구를 만나도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할 수 있다’는 매번 곱씹었던 것 같아요. 다만 세레머니같은 것은 잘 안하는 성격이었어요. 아주 결정적인 상황에서 저도 모르게 나오기는 하지만 어지간해서는 골을 성공시켜도 당연한 것을 했다고 생각하니까 그냥 무덤덤하게 넘어갔던 것으로 기억해요. 무엇보다 지금 한골이 문제가 아니라 다음 플레이를 생각해야 했으니까요. 그 한골 넣었다고 경기 끝난 것 아니잖아요. 무엇보다 프라이드라는 것은 자기가 표출한다고 빛이 나는게 아닌 듯 싶어요. 열심히 잘하면 주변에서 알아서 만들어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튀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에요.(웃음)

Q.2013년 FIBA아시아 챔피언십에서 대학생 신분으로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대회 베스트5에 들었습니다.
정말 저에게는 잊지 못할 순간이었고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일 것 같아요. 아무나 받을 수 없는 상을 받았으니까요. 당시에 정말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국가대표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고 설레었는데 레전드 선배들과 함께 호흡하고 같이 뛸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꿈만 같았거든요. 그러면서도 국가대표가 끝나면 다시 각자의 팀으로 돌아가서 다들 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걸 알고 약해 보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런 동기 부여가 큰 원동력이 되기도 했고요. 형들의 장점을 어떻게든 복사하듯 빼내려고 질문도 많이 하고 좀 귀찮게 했던 기억이 나요.(웃음) 

 

 

 

 

“2순위는 잠깐 아쉬웠지만 KCC 지명은 기뻤습니다”

Q.신인드래프트에서 2순위로 지명되었습니다. 상황에 따라 1순위도 가능하다는 얘기도 많았는데 아쉬움은 없었나요?

순위에 대한 아쉬움은 드래프트 당일에만 조금 있었어요. 하지만 전주 KCC라는 최고의 명문팀에 2순위로 가게 되었다는 점에서 기쁨도 컸습니다. 대학생 때부터 KCC는 최고 중의 최고라고 생각했었거든요. 더불어 프로에 가서도 신인들 중 가장 잘할 자신이 있었어요. 전주에서의 생활도 기대되었습니다. 최고 명문 KCC, 멋진 도시 전북 전주 그 두가지 프리미엄이 2순위의 아쉬움을 탁탁 털어버렸다고 볼 수 있죠.

Q.제2의 허재가 진짜 허재 밑에서 함께하게 됐죠.
정말 많이 설레었어요. 가서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되었고요. 물론 자신감은 있었지만 정말 잘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너무 큰 잘못을 저질러서 감독님, KCC팀, 돌아가신 명예회장님, 사장님 등등 구단 모든 분들에게 너무 큰 잘못을 했죠. 아직도 죄송하고 또 죄송하죠.

Q.KCC에서의 첫 경기였나요? 제대로 팀과 손발도 안맞춘 상태에서 깜짝 놀랄 정도로 잘했어요.
그때는 감독님, 코치님들, 선배님들 모두 다 하나만 말씀하셨어요. 그냥 들어가서 너 잘하는 거 자신있게 하고 오라고 해주셨던게 너무 큰 힘이 되었어요. 덕분에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무리해서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하기보다는 순리대로 팀에 융화되려고 하다보니 플레이가 더 잘된 것 같아요. 그래도 내심 많이 긴장은 됐어요. 티를 안내려고 노력했죠.

Q.신인왕 타이틀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나요?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솔직히 아쉬웠어요. 다른 타이틀과 달리 인생에 단 한 번이잖아요. 그래서 더 컸습니다. 그나마 친구인 (김)종규가 받아서 위안이 됐죠.(웃음)

Q.시즌 후 팀에서는 프랜차이즈 스타나 다름없던 강병현을 트레이드 시키고, 대신 김태술을 데려왔어요. 그만큼 김민구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고 할 수 있었겠는데요. 부담감은 없었을까요?
부담감은 없었고 그냥 아쉽고 죄송했죠. (강)병현이형이랑은 정말 잘 맞았고 코트 안팎에서 잘 챙겨 주셨어요. 하지만 팀에서 결정한 부분이고 (김)태술이 형과도 대표팀에서 손발이 잘 맞았어요. 워낙 대단한 레전드 선수여서 기대되는 부분도 있었어요. 하지만…, 죄송합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할께요. 제가 여기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기대해주셨던 분들에게 너무 많은 실망을 안겨드렸습니다”

Q.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아프실 질문일 듯 합니다.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하셨을 때 몸의 고통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심했을 것 같아요.

정말 마음 아프고 다시 돌아가고 싶고 제 스스로가 원망스럽고 그렇죠. 그보다 앞서 너무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정말 죄인처럼 살았던 것 같아요. 물론 지금도 반성하고 열심히 살려고 하고 있지만요. 잘되서 부모님도 호강시켜 드리고 싶었는데 외려 더 고생시켰고…, 철없는 행동으로 인해 모든 게 무너져버렸으니까요. 정말 죽고 싶었어요. 대인기피증에 공황장애까지 와서 한동안 밖을 제대로 나가지 못했어요. 물론 모든 원인은 저 자신이었지만요. 너무너무 힘들고 고통 속에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죄송한 마음과 제 스스로에 대한 후회는 평생 짊어지고 가야겠죠.

Q.팀이 짜놓은 시즌 플랜이 망가졌던 상황인데도 허재 감독과 KCC에서 여러 가지로 배려를 많이 해줬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너무너무 감사하고 또 감사하죠. 돌아가신 고 정상영 KCC 명예 회장님께도 너무 죄송합니다. 정말 많이 예뻐해 주셨거든요. 선수로서 정말 보답하고 꼭 좋은 모습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그리고 사장님들, 단장님 그리고 허재 감독님까지, 정말 많이 배려해 주셔서 저에게는 너무나 큰 힘이었고 사랑이었습니다.

Q.치료와 재활과정이 무척 힘들었을텐데요. 돌아온 이후에는 스팟업 슈터 스타일로 가능성을 보여줬어요.
정말이지 운동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특히 정신적인 부분에서 견디기가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어요. 저를 믿고 기다려주시는 부모님 또 구단 분들, 팀 동료, 선후배 동기 그리고 팬분들까지, 한분 한분 생각하면서 이 악물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다시 코트에 서고 싶었거든요. 다치고 2년째 되던 때였어요. 모든 운동이 끝나고 난 후에 침대에 누워 발목을 움직이려 했는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어요. 안 움직이던 발목이 정말 미세하게 움직이는 걸 느꼈거든요. 바로 치료실로 달려갔어요. ‘형들 저 발목 움직여요’하면서요. 신경 반응이 떨어지는 것도 잊은 채로 달려가다가 넘어졌지만요. 그 후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좋아졌어요. 어떻게든 뛰려고 발목을 당겨 고정시켜서 테이핑으로 돌돌 감아서 떨어지지 않게 하고 뛰었습니다. 은퇴하기 전까지도 그렇게 하고 뛰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당시의 몸상태로 ‘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를 찾고 고심하다가 만들어진 스타일이 스팟업 슈터같아요. 예전처럼은 할 수 없으니까요.


Q.몇번의 코트 안에서의 충돌로 인해 다혈질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태종이형과의 충돌 때문에 그런 이미지가 생긴 것 같아요. 코트에서는 모두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 경기가 전쟁이고 가끔씩 큰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게임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경기에서 누구보다 이기고 싶었던 마음이 커서 과했던 것 같아요. 물론 경기가 끝난 이후에 찾아가서 죄송하다고 정중하게 인사를 드렸어요. 코트 안에서 승리에 대한 열망이 커서 저도 모르게 그랬던 것 같아요.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전 다혈질이 아니에요. 저는 해맑고 밝은 사람이거든요.(웃음) 다혈질 뿐 아니라 저를 까칠하게 보는 사람도 많아요. 거기에 대해서는 오해가 있어요. 사실 제가 잘 표현을 못하고 낯을 가리는 성격이에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있었을 뿐인데 사람에 따라서는 ‘쟤 왜저래?’이렇게 느끼시는 분들도 있었을 것 같아요. 저도 좀 마음 속의 밝은 부분을 잘 표출하고 싶은데 여전히 잘 안되네요. 주변을 돌아보니 선수 시절 과묵하고 무뚝뚝했던 선배들도 지도자가 된 후에는 말이 많아지는 케이스를 적지 않게 봤어요. 선수들과 소통해야 되니까요. 저도 그런 부분에서는 바꿔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선수 때야 말없이 잘하기만 해도 됐지만 지도자는 또 다르니까요. 

 

 

 

Q.경희대 동기인 두경민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소문도 있더라고요.
거기에 대해서는 약간의 오해도 섞인것 같아요. 솔직히 말할께요. 예전에는 막 살갑고 개인적으로 자주 연락하고 그런 사이는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서로 으르렁거리는 관계도 아니었고요. 하지만 경기장에서 함께 뛸 때면 호흡도 잘 맞았던 친구에요. 다만 앞서도 얘기했다시피 제가 낯을 가리는 성격이고 많은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스타일적으로 안맞았던 부분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제 저도 서른을 넘긴 나이인지라 많은 사람들과 막 친한 관계로 가지는 못해도 둥글게 모나지 않게 지내고 싶어요. 경민이와는 지금은 친하게 아주 잘 지낸답니다.(웃음) 일부러 경기도 찾아보고 응원하기도 하고요. 올시즌에 좋은 활약 기대합니다. 

“지도자로서의 제2의 인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Q.아픈만큼 성숙해진다는 말도 있습니다. 많은 일을 겪고 고민을 하셨던 만큼 농구를 바라보는, 혹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정말이지 제 인생의 전부였던 농구공을 선수로서 놓아버리는게 쉽지 않았죠. 그런데 나와서 보니까 농구가 더 잘 보이기도 하고 제가 가르치는 선수들이 정말 잘하면 좋겠기에 함께 땀을 흘리면서 온갖 열정을 다 해서 저의 모든 것을 주려고 합니다. 정말 다 가져갔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도 예전 동료들을 중계로 보면 마음 한구석에서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죠. 모두 모두 안다치고 최대한 오래오래 선수 생활 잘했으면 좋겠어요. 선수 시절에는 승부욕이 들끓어있었다면 지금은 한발 물러선 입장에서 진심으로 응원하고 저 또한 새로운 길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Q.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어떤 색깔의 지도자가 되고 싶은지 궁금합니다.
제가 나중에 어떤 지도자로 알려져 있을지 저도 모르겠어요. 이 일을 계속하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현재 상황에서도 많은 공부가 되고 있고 제 색깔과 방향을 찾는 경험이 되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모든게 배움이고 과정이라고 생각하니 지금 너무 행복합니다. 모든 지도자분들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제 모든 진심을 다 해서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Q.마지막으로 여전히 농구인 김민구를 사랑하고 응원해주는 팬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한순간의 잘못된 행동으로 실망도 많이 끼쳐드렸음에도 오히려 힘이 되어주시고 응원해 주신 팬분들께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어떻게든 경기장에서 보답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이렇게 인사를 드리게 되네요.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너무 행복했고 감사했습니다. 앞으로 지도자로서 바르고 현명하게 나아가겠습니다. 끝까지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주세요.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유용우 기자, 박상혁 기자, 이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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