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훈 선녀보살요? 상상도 못했습니다”

김종수 / 기사승인 : 2022-04-12 03: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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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31)] '뿔테 안경의 전설' 최희암

 

‘역대 최고의 대학팀은?’ 여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스타들이 함께하며 각 시대별로 쟁쟁한 팀들이 명성을 떨쳐왔다. 워낙 자신의 시대에서 임팩트있는 모습과 커리어를 자랑했던지라 특정 팀을 딱 하나 꼽기는 매우 어렵다. 주로 중앙대, 고려대, 연세대가 돌아가면서 왕조를 이루었지만 경희대의 돌풍 등 반란도 간간히 있어왔다.


이러한 역대급 강팀 명단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팀이 하나있다. 어쩌면 팬들의 가장 많은 선택은 이팀을 향할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강함을 떠나 상징성, 인기 등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다름아닌 90년대 초중반 연세대다. 특히 1993~94년 시즌 농구대잔치에서 대학팀 최초로 우승을 만들어낸 신화는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임팩트를 남겼다.


농구대잔치에서 종종 대학팀이 돌풍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기아자동차 왕조를 필두로 현대전자, 삼성전자 등이 버티고있던 실업팀들의 벽은 높았다. 하지만 연세대의 상승세는 거침없었고 누구도 그들의 질주에 브레이크를 걸지못했다. 우승의 주역 문경은, 이상민, 김훈, 우지원, 서장훈 등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잠시 주춤했던 농구인기는 폭발적으로 늘어갔다. 이들 베스트5의 인기는 어지간한 연예인 못지않았을 정도였다.


지금까지도 이들은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가며 잊혀지지 않고 있다. 현재는 일선에서 물러나있는 상태지만 문경은, 이상민은 각각 SK와 삼성에서 장수 사령탑으로 팀을 이끌었다. 우지원, 서장훈은 연예계 활동을 통해 이름을 알리고있는데 특히 서장훈같은 경우 예능계 블루칩으로 통하며 제2의 인생에서도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모습이다. 김훈같은 경우 농구교실을 운영하며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다.


이렇듯 한시대를 풍미한 당시 멤버들을 회상하노라면 빠져서는 안될 인물이 있다. 다름아닌 연세대 전성시대를 이끈 독수리 5형제의 수장 최희암(66‧177cm) 감독이다. 어지간한 선수 이상으로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그는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았던 특유의 뿔테 안경에 더해 온화해보이는 이미지를 풍기며 ‘코트의 교수님’으로도 불렸다. 당대 슈퍼스타 이덕화에 이어 한 유명 속옷브랜드의 CF까지 찍었을 정도다. 프로, 실업, 대학을 통틀어도 이정도까지 이슈가 된 지도자는 찾아보기 쉽지않다. 스타선수 출신도 아닌 이전까지는 철저히 무명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후 프로 무대에서 감독으로도 활동했던 최희암은 한동안 잊혀진 인물이 되어갔다가 몇 년전부터 성공한 경영인으로 다시금 화제를 받고 있다. 농구와는 전혀 관계없는 용접봉 만드는 회사에서 무려 부회장까지 올라갔다. 거듭된 좌절과 난관 속에서도 언제나 자신만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던 뚝심넘치는 남자, 뿔테 안경의 전설 최희암을 <농구人터뷰>가 만나보았다.
 

 

“예전 농구인 중에는 공부 잘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Q.고려용접봉이라는 회사에서 경영인으로 성공했다고 들었어요.
성공까지는 아니지만 어떻게 하다보니 자리를 잘 잡은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끌어주고 도와주고 해서 오랜시간 함께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2009년 11월, 전자랜드 계열사인 고려용접봉의 중국 다롄 현지 법인을 맡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고 2014년 귀국해서 본사가 있는 창원공장 사장으로 부임했습니다. 지금은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죠. 40년 이상 농구 코트에서 살았던 농구인이 용접할 때 필요한 철제를 만드는 회사의 경영인으로 오랜시간 잘 적응하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이래저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Q.농구인으로 사시다가 경영인으로 성공한 사례는 꽤 드문 것 같아요. 완전히 다른 영역이잖아요.
꼭 그렇지도 않아요. 분야는 다르겠지만 계속 배우고 열심히 해야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점도 많아요. 사람사는 것 다 똑같죠.(웃음) 농구만해도 그렇잖아요. 중학교 농구 다르고 고등학교 농구 다르고 대학교 다르고, 프로는 또 다르고요. 경험이 쌓이고 실력이 늘어간다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닌 계속해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서 경쟁해야하는 현실인지라 안주하는 순간 밀려나게 되죠. 프로선수가 되어도 매년 새로운 신인이 들어오는지라 자칫하면 팀내 생존도 힘들어 질 수 있고 은퇴 후에 지도자를 꿈꾸는 경우 또 다른 분야를 공부하고 경쟁해야 하죠. 경영도 다르지않아요. 배우고 경쟁하고 또 그런 가운데 화합하고 이런 것은 세상 모든 분야가 다 똑같잖아요.

Q.그래도 공부를 잘하신 케이스라 경영인으로 자리잡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요?
허헛…, 무슨 공부를 잘해요. 공부잘했으면 공부와 관련된 쪽으로 갔겠죠. 그냥 저는 어중간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남들하는 만큼 따라가려고 노력한 정도입니다.

Q.겸손하세요. 순수하게 공부로 예비고사를 쳐서 연세대에 입학했을 정도면 상당히 잘한 것이잖아요. 농구인 중에서도 많지 않을 것 같아요.
아니에요. 농구인 중에서도 공부잘하던 분들도 적지않았어요. 대표적으로 고 김영일 선배가 공부로 연세대에 합격한 케이스며 고려대는 조승연씨가 그랬을거에요. 예전에는 중 고등학교를 시험을 쳐서 들어간 케이스가 많아서 어느 정도는 다들 공부를 했어요. 그러다가 군사정부에서 ‘체력은 국력이다’며 본격적으로 운동을 장려하기 시작했고 엘리트 체육이 시작되면서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는 케이스가 확 줄어든 것 같아요. 운동하는 선수들은 공부는 아예 놓다시피하고 그냥 운동만 매달리게 된 것이죠.

 

 

Q.어떻게보면 요즘들어 학원스포츠도 공부와 운동을 병행해야 된다는 분위기가 많이 일고 있는데 예전 선배님들은 이미 그렇게 하셨네요.
농구계를 떠나서도 여러 방면으로 잘된 분들이 많았어요. 꼭 공부가 다는 아니었겠지만 농구외 다른 세상에 가서도 적응하고 성공한 배경에는 영향이 있었겠죠. 공부를 많이하게 되면 삶의 선택지도 많아지고 또 농구를 할 때도 도움되는 부분이 적지않다는 점에서 얻어지는 점은 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들어 좋은 방향으로 인식의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쉽지는 않을거에요. 운동선수들이 공부를 병행할 수 있는 제도나 시스템적인 부분에서 먼저 바뀌어야하잖아요. 공부하는 것도 습관이에요. 계속 운동만하던 학생에게 갑자기 ‘너, 이제부터 공부도 같이해’라고 한다면 쉽게 따라갈 수 있겠어요? 잘 따라가는 케이스도 있겠지만 아닌 경우도 많을거란 말이에요. 그동안 살아온 생활 패턴이라는 것이 있고 운동하고 다른 일하기도 바쁜데 시간쪼개서 노력 기울인다는게 정말 쉽지 않단 말이에요. 계속 공부만하던 수험생들에게 ‘너 이제부터 운동도 어느 정도 해야돼’라고 지시하는 것이나 똑같죠. 뭐든지 갑작스런 변화는 힘들어요. 농구 시작 당시부터 꾸준히 그렇게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학생들도 그것을 당연스레 받아들이게 되어야 비로소 병행이 가능한 것이겠죠. 물론 제 입장에서는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약간 조심스럽기도합니다. 꾸준히 농구계에 관심은 있었지만 저는 한발 떨어져 있는 상태잖아요. 농구계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완전히 다 알지 못하는지라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길게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냥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고, 시작이 반이라는 말처럼 공부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분위기가 많이 형성되었다고하니 좋은 방향으로 서서히 바뀌어 나갈 것이라고 봅니다.

Q.어쩌면, 감독 생활 당시의 리더십이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없지는 않겠죠. 분야는 다르지만 사람사는 세상 비슷하잖아요. 여러 사람들이 있으면 각자의 역할이 달라지고 성향에 맞게 조화가 이뤄지잖아요. 리더십이라고까지 표현해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수와 한꺼번에 소통해본 경험은 분명 해본 사람과 안해본 사람의 차이는 있을거에요. 막 회사에 들어갔을 당시 가뜩이나 용접봉에 대해 몰랐는데 그런 경험마저 없었다면 말 그대로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낯선 분야에서 낯선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도 처음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거든요. 용기라는 것은 기질도 있지만 경험도 영향을 끼치고요. 해본 사람과 안해본 사람은 다르겠죠.

Q.농구인과 경영인 중 어떤 것이 더 힘드셨을까요?
비교하자면…, 지금이 더 힘들어요.(웃음) 운동이라는 것은 단순해요. 선수든 지도자든간에 목표가 같잖아요. 이겨야 된다는 것, 성적을 내야 한다는 것 등 가고자 하는 길은 똑같아요. 하지만 일반 직장 생활은 좀 달라요. 직장에 더 비중을 두는 사람, 가정에 더 신경을 쓰는 사람, 승진에 욕심이 많은 사람,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 등 다양하죠. 이런 여러가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하며 회사 발전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자체가 쉽지는 않죠. 운동선수는 경쟁선에서 탈락하면 끝이에요. 하지만 직장인들은 그정도는 아니잖아요. 열심히는 해야겠지만 기본적인 역할만 해준다면 막 쳐내고 그러지는 않죠. 반면 운동이라는 세계는 어느 정도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면 내일이 있어요. 반면 회사는 호흡은 길지만 크게 한번 잘못되면 모든게 사라질 수도 있다는 위험부담이 있어요. 각자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평생 회사 생활만 하신 분이 갑자기 농구쪽 일을 한다면 얼마나 어렵겠어요. 저는 반대의 경우라고 생각하면되요. 이제 내공도 제법 쌓이기는 했지만 전문 경영인들만 하겠어요. 여전히 배워 나갈 것 투성이죠.

 

 

“여자친구도 와있는데, 잠깐이라도 경기 좀 뛰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Q.농구를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휘문중 시절 키가 168cm정도 되어서 담임 선생님이 농구를 추천해주셨어요. 일단 농구는 사이즈가 가장 중요하니까요. 문제는 이후 기대만큼 키가 안컸다는 것이죠. 제가 처음에 센터 포지션을 맡았는데 현재 제 키(177cm)를 생각하면 의아해 하시는 분들도 계실거에요. 농구는 키가 깡패라고 하잖아요. 키가 전부는 아니겠지만 이렇게 안커버리면, 더욱이 처음에 빅맨으로 시작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여러모로 아쉬워지게 되는 거죠. 이후 포워드를 거쳐서 가드로 가기는 했는데 적성이라기보다는 체격 조건이 안되서 어쩔 수 없이 옮겨지게 된 것인지라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습니다. 어릴 때 키가 안커서 가드포지션을 맡다가 차차 신장이 커지는 케이스는 기술도 함께 옮겨가는 것인지라 장점이 많아요. 하지만 전 반대였잖아요. 안크는 키를 원망할 수도 없는 것이고 거기까지가 제 복이였구나하고 생각합니다.

Q.학창시절 플레이스타일은 어떠셨나요?.
중학교 때까지 센터를 볼 때는 곧잘 득점도 많이 올리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진학후 점점 신장에서 밀리며 포워드, 가드로 간 이후에는 평범하게 변해갔죠.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수비전문선수가 됐죠. 스윙맨이나 가드로서의 공격스킬이 제대로 다져지지 못했던지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수비수로서의 집중력을 키우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Q.농구로 연세대 입학이 좌절되자 예비고사를 치르고 대학에 합격하셨어요. 그리고 다시 농구부로 들어가셨어요. 그렇게까지 하신 것으로 봐서는 농구에 대한 열망이 굉장히 깊으셨던 것 같아요.
하하핫…,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열망이라기보다는 농구를 중, 고등학교 때까지 쭉 했으니까 당연히 대학교 때도 그래야 되는 줄 알았어요. 어떻게 보면 시야가 좀 좁았죠. 그때 시야가 넓었더라면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텐데 그런 생각 자체를 못했어요. 그리고 농구를 해야 장학금도 좀 받을 수 있었던 이유도 있고요. 당시에 대학생들이 많이 없었잖아요. 그때를 돌아보면 공부를 잘해도 대학교 입학 자체를 못하는 케이스가 수두룩했어요. 가난한 시절이었으니까 경제적으로 힘든 이유가 컸죠. 저희도 그리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던지라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게 의미가 컸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평안북도에서 월남하셨어요. 그때 당시 내려오신 분들이 나중에 장학재단을 만드셨는데 거기서 도움도 조금받았어요. 거기다 더해 농구부 장학금까지 해서 4년 학업을 마칠 수 있었죠.

Q.하필이면 주변으로 잘하는 선수들이 유독 많았어요. 당시 연세대 멤버들이 무시무시했죠.
그러게요.(웃음) 많았죠. 실력과 이름값에서 대단했습니다. 구태여 선배들까지 갈 것도 없어요. 불멸의 가드로 불리던 인창고 박수교, 고교 최고 센터 용산고 신선우 등이 동기였고요. 조금있으니까 신동찬, 박인규 등 후배들이 들어왔어요. 당시 국가대표 선수 12명 중에 연세대 출신이 6명이나 됐을 정도로 실력들이 어마어마했죠. 이것 뭐 어느 정도여야 경쟁이 되죠. 거의 국가대표급 멤버구성인지라 여러 가지 면에서 그냥 묻혀버렸습니다. 지금보면 우리 동기 때와 일년 밑으로 해서 연세대 스포츠 전성기였던 것 같아요. 농구뿐 아니라 야구, 축구까지 인재가 쏟아졌던 시기에요.

Q.연세대 시절 경기를 거의 못뛰었는데, 어느 날인가 여자친구가 응원을 와서, 주장에게 ‘잠깐이라도 뛰게 해달라고’ 부탁을 해서 경기를 뛰었다는 에피소드도 들었어요.
아…, 잊고 있던 것인데 그걸 알고 계셨네요. 그때 주장 형님이 기자님하고 이름이 같은 김종수였어요. 여자 친구는 제가 3학년때 1학년 학생이었는데 체육관에서 서로 알게 되어 가지고 사귀게 되었던 것이죠. 당시에는 학생시절이잖아요. 그래도 농구부고 여자친구까지왔는데 경기를 뛰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더라고요. 그때 마침 점수 차이도 어느정도 났고해서 종수 형님에게 말씀을 드렸더니 다시 종수 형님이 코치님에게 전달을 해주셔서 코트에 나갈 수 있었죠. 많이도 안뛰었어요. 한 3~4분 정도 뛰었을겁니다.

 

 

“준비하고 기다리다보면 어떤 기회든지 꼭 옵니다”

Q.연세대 시절 학교를 찾아온 도널드 휴스턴로부터 선진농구 시스템을 배웠다고 들었어요. 향후 지도자 생활을 하는데 큰 자산이 되었을 것 같아요.

도움이 많이 됐죠. 저한테는 천운이었습니다. 일찌감치 전략의 중요성을 깨닫고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분이 이화여대 교환교수로 한국을 방문했었는데 이후 연세대 측의 주선으로 농구팀을 찾아오게 됐어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농구를 했고 마이클 조던의 은사로 유명한 딘 스미스 감독으로부터 직접 농구를 배운 사람입니다. 당시 농구부에서 통역이 가능한 사람이 나 밖에 없었어요. 휴스턴 교수의 통역을 도우면서 그 분이 가르치는 선진농구를 많이 배우게 됐죠. 하나라도 잊어버리면 안되겠다 싶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전략전술을 빠트리지않고 노트에 기록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것을 보면 사람에게는 언제나 한두번의 기회는 꼭 오는 것 같아요. 준비하고 있어야 그런 순간을 잡던지 아니면 뭐라고 배우게되는 것이죠.

Q.학창 시절에도 그랬고 실업 현대전자 시절에도 그랬고, 농구는 꾸준히 하셨지만 출장시간 자체는 많이 짧았어요. 심리적으로 회의감이 들거나 힘들지 않으셨나요?
힘들고 그랬다기 보다는 많이 뛰는 선수들이 부럽기는 했습니다.(웃음) 제가 농구 선수의 길을 걷게된 것은 좀전에 말한 것처럼 자의반 타의반이었어요. 연세대 시절에는 농구를 안했으면 대학을 못다녔던 이유가 컸고 이후 실업시절에도 그냥 쭉 하던 것이니까 계속 이어갔어요. 제가 멘탈적으로 아주 강한 사람이고, 농구에 대한 열정이 미칠만큼 높았다 그런 것은 아니에요. 힘든 것도 많았고 견디어야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것을 좋은 말로 포장할 정도는 아닌 듯 싶고 그냥 ‘하던 것이니까 했다’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는게 맞는 듯 해요.

Q.군 제대 후 1년 정도 있다가 은퇴하셨어요. 빠른 은퇴였던 것 같아요.
아니에요. 꼭 그렇지도 않아요. 많이 못뛴 것에 비하면 그래도 적당한 때 은퇴했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특별한 케이스 말고는 다들 선수 생활이 길지 않았어요. 더욱이 실업시절인지라 직장인 개념이었잖아요. 오래 뛰어봤자 경제적으로 큰 이익도 없고, 적당한 때 되면 다들 알아서 나가고 또 새로운 선수들이 들어오고 그런 시스템이었죠. 은퇴하면 계열사 직원으로 들어 갈 수 있어서 어설프게 선수 생활 길게 이어나가느니 빨리 일을 배우는게 나은 부분도 있었어요. 본래는 제대하자마자 바로 은퇴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당시에 이충희 등 쟁쟁한 스타들이 신인으로 입단했고 이에 팀에서 신인들 기강 좀 잡아달라고해서 고참 역할좀 하다가 은퇴하게 된거죠.

Q.은퇴 후 현대 건설에 몸담으며 1985년 이라크 바그다드 지사에서 근무하셨어요. 이때만해도 농구인의 길을 다시 걷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그렇지는 않아요. 현대에 있을 때도 부러웠다고 했잖아요. 특히 국가대표같은 경우는 선수로서 너무 멀게만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비록 선수로는 태극마크를 달지 못했지만 지도자로서는 달아봐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어요. 때문에 지도자로서의 농구인생에 대한 마음은 가지고있었죠.

 

 

Q.1986년 3월 연세대 코치로 부임해서 한시적 감독대행을 하기로 했다가 17년이나 장수하셨어요. 그만큼 지도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은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라크에서 일하다가 국내로 귀국하게 됐어요. 아버님께서 학교에 선생님 자리도 만들어 놓았으니까 들어오라고 하셨거든요. 당시 이라크가 전쟁중이어서 꽤 위험했어요. 결혼해서 아이도 있는 상황에서 저도 그게 낫겠다 싶었고요. 체육선생이라는 자리가 오자마자 바로 들어갈 수 있는게 아니에요. 그해 8월에 귀국을 했는데 기다렸다가 다음해 2월에 발령을 받을 에정이었어요. 그러다가 중간에 연세대에 감독자리가 비었다고해서 대행으로 잠깐 가게된거죠. 마침 정기 연고전도 있었고 그걸 치르게됐죠. 다들 좋게보셨는지 그대로 계속 남게되었습니다.

“때리기도하고 기합도 많이 주고, 솔직히 지금은 후회도 됩니다”

Q.‘정재근부터 조상현 등까지’ 연세대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1990년대가 생각납니다. 연세대를 대학 최강으로 이끈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스카우트죠. 아무리 감독이 열정이 넘쳐도 결국 농구는 선수가 하는거에요. 재능있고 잘하는 선수가 많으면 7~8할은 먹고 들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학교까지 내려가서 가능성있는 선수들을 체크하고 쭉 지켜보는거죠. 좋은 선수를 알아보고 스카우트하는 것도 지도자의 능력 중 하나입니다. 제 이전시대에는 특정 선수를 데려오기위해 이른바 납치도하고 그랬다는데 제가 감독할 때는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 방식은 할 수 없었어요. 일단 대한 체육회 동의서에 도장을 찍으면 선수는 천하없어도 해당 학교로 가야해요. 그전까지가 전쟁인거죠.

Q.연세대 최전성기하면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김훈, 서장훈이 활약하던 시절을 꼽는 이들이 많습니다. 당시 1가드 3포워드 1센터 전술도 직접 만드신거죠?
그렇죠. 현재 전력에서 최대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라인업을 구상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 감독이 할 일이죠. 일단 포인트가드하고 센터는 좋았어요. 이상민은 혼자 원맨 리딩이 가능한 정통파 1번이고 서장훈이야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는 최고 센터였잖아요. 구태여 4번 자원을 같이 쓰지 않아도 서장훈만 골밑에 세워놓으면 어지간한 트윈타워는 그냥 박살냈죠. 1번과 5번이 확실하면 라인업 짜기가 편해져요. 마침 팀내에 좋은 슈터들도 많고 해서 문경은, 우지원, 김훈의 3포워드를 여기에 더하게 됐죠. 선수만 확실하면 지금도 좋은 구성같아요. 공간도 넓어지고 전술이 무척 다양해지거든요. 사실 당시 성적이 좋았던 것은 선수들이 잘해서 그런거죠. 지금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Q.지나친 분업농구로 인해 선수들의 창의성이 꺾였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뭐, 분업농구 외에도 당시 여러 가지 비판이 나오기도 했죠.(웃음) 사람들의 시선은 어차피 다 다르니까 모두를 만족 시킬 수는 없는거잖아요. 그런데 분업농구가 창의적인 것 아닌가요?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 다 하게 해준다고 창의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풀어줄 것 같으면 선수들끼리 알아서 하면 되지 감독이 왜 있겠습니까. 감독은 선수들을 훈련시키고 지켜보면서 장점을 발휘 할 수 있게 해주고 또 그 선수들간 조화를 시켜서 최상의 경기력을 만들어내는 자리잖아요. 훈련 때는 여러 가지 플레이도 다 하게 했어요. 다만 경기장에서는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게 했죠. 팀 스포츠잖아요. 각자 자신이 잘하는 것 위주로 플레이하게 했고 그러다보니 단점이 감춰져서 잘 안나오게 된거죠.  

 

 

Q.감독님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뿔테 안경 그리고 자상한 외모입니다. 아무래도 학구파같은 이미지 때문일 것 같은데요. 반전으로 굉장히 무서웠던 스타일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면이 있었죠. 기합도 많이 주고 때리기도 했어요. 한 것은 했다고 해야죠. 기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안 그렇게 생긴 사람이 그러니까 더 쇼킹했던 부분도 있었을거에요. 그때는 열정이 넘쳤어요. 다른팀 감독들이 저만큼하면 나는 이만큼해서 선수들의 실력을 끌어올려야 되겠다는 생각이 가득했죠. 젊었던 시절이라 너무 한 방향에만 집중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후회도 됩니다. 구태여 그렇게 하지않아도 잘할 선수가 많았는데…, 당시 지도자들은 자신이 그렇게 배우고 성장했으니까 몸에 배인 부분도 있었죠.

Q.그래도 훈련과 실제 경기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이셨어요. 때문에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별명도 붙었고요.
그런 별명도 있다고 들었던 것 같아요.(웃음) 실제 경기에서는 최대한 냉정하고 차분하려고 노력했어요. 훈련할때야 기량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혹독하게 했지만 시합은 달라요. 실제로 경기를 뛰다보면 안그러려고해도 좀처럼 긴장이 풀리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실책이라도 하게되면 머릿 속이 하얗게 되기도 하죠. 거기다 대고 감독이 뭐라고하면 그야말로 멘탈붕괴가 되어버리기 십상입니다. 감독이 코트에서 선수들을 지켜보는 것은 경기를 이길 방법을 찾기 위함이잖아요. 뜻대로 안된다고 막 화내고 그러면 선수들은 플레이가 더 안되요. 긴장을 풀어줄 때는 풀어주면서 요점을 정확하게 찍어주려고 노력했어요. 한창 경기에 몰두하다보면 감독말도 잘 안들릴 때가 많거든요. 거기다대고 소리지르고 뭐라고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분위기 쇄신차원 등에서 필요할 때도 있기는 했어요. 하지만 시합중 특정 선수에게 화풀이를 한다던가 등의 감정적인 언행은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감독이 야단치고 선수가 야단맞는 것이 반복되면 나중에 습관이 되요. 그러면 감독은 안될 때마다 야단치고, 선수도 야단을 맞아야 정신이 번쩍 들게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요. 그건 진짜 아닌 것이죠. 단 경기중 스스로 알아서 잘하려면 훈련 때는 다 겪어봐야 해요. 제대로 훈련이 되지 않았는데 실전에서 어떻게 기량 발휘가 되겠어요. 훈련은 강도 높게, 시합장에서는 최대한 편하게 이끌었던 이유입니다.

 

 

Q.감독님 훈련이 강도높기는 했었나봐요. 제자들마다 ‘그때 정말 대단했다’고 다들 언급할 정도에요.
하하핫…, 솔직히 당시 모든 팀들이 훈련량이 많았던 시기이기는 했어요. 다른팀 훈련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저같은 경우도 훈련을 호되게 시키기는 했던 것 같아요. 다들 많이 힘들었을거에요. 하지만 지도자로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예로 들면 더운날 밖에다가 바케스에 물을 가득 채워놓고 먹으라고 했다고 쳐봐요. 반 바케스 밖에 못먹는 이도 있고 겨우 한 바케스 먹기도하고 두 바케스, 세 바케스를 먹는 사람도 있을 거라는 말이에요. 사람마다 자질이나 재능이 다르니까요. 농구는 팀 스포츠잖아요. 강한 팀이 되려면 선수들이 최대한 비슷하게 역할을 해줘야되요. 그러다보니 훈련을 세게 시킬 수밖에 없어요. 반 바케스 밖에 못먹는 친구는 그걸 뛰어넘어 한 바케스라도 먹게 해주고, 두 세 바케스 먹을 수 있는 자질은 있는데 노력이 부족해서 그걸 찾지 못하는 친구에게는 ‘넌 먹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죠. 훈련때 해보지 못한 것을 시합장에서 어떻게 발휘하겠습니까. 경험이라는 것은 기량만 늘리는 것이 아닌 자신감까지 키워줍니다.

Q.당시 문경은은 독대를 신청해 ‘농구 안하겠다’고 하고 서장훈은 ‘그냥 시골 내려가서 농사 짓겠습니다’라고 말했다는 등 에피소드가 많더라고요.
선수가 독대를 신청하고 그런 것을 보면 힘든 부분을 넘어서 화가 날 지경이었겠죠.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럴 때는 선수들 성향에 맞춰서 대응을 했어요. 설명을 원하면 설명을 해주고, 위로나 격려가 필요한 선수에게는 마음을 다독여주고 그랬죠. 다른 종목 어떤 감독같은 경우는 독대 신청하면 주먹부터 날아갔다는 말도 들었던 것 같은데, 제가 훈련을 가혹하게 시켰던 것은 경기력 그 자체에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었어요. 인간대 인간으로서 대화를 나누자고하면 감정적으로 나가거나 쓸데없이 카리스마를 부리고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솔직히 문경은이 우지원, 이상민보다 잘생기지 않았나요?”

Q.최근 서장훈이 방송가에서 활약이 좋잖아요. 특히 무엇이든 물어보살에서는 선녀보살로까지 나오는데 선수 시절 생각하면 상상이 가시나요?

전혀요. 솔직히 (서)장훈이가 그럴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지금도 텔레비전에서 그런 모습보면 낯설거든요.(웃음).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장훈이는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하고 개성도 강한 친구입니다. 평소 책을 많이 읽기도 했던지라 자신이 이해를 하지않으면 절대 수긍하지 않았죠. 우격다짐보다는 논리적인 설명으로 접근해야 했습니다. 고집은 강했지만 또 본인이 이해를 하면 쉽게 받아들이기도 했어요. 아마 명분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선녀보살도 하고 있을거에요. 자신이 ‘이것은 필요하다’, ‘이것은 맞다’라고 인정한다면 얼마든지 망가질 수도 있는 친구거든요.

Q.문경은은 잘 생긴 것 같은데 우지원, 이상민은 잘 생긴지 모르겠다고 하신 말씀을 들었어요. 거기에 대해 어떤 분은 반대로 이야기하더라고요.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른데 감독님은 좀 남자답게 생긴 외모를 잘생겼다고 느끼시는 것 같아요.
남자답게 생겼다기보다는 (문)경은이는 이목구비도 뚜렷하고 정말 잘생긴 얼굴이잖아요. 실베스타 스탤론 같이(웃음) (이)상민이나 (우)지원이가 못생겼다는게 아니고 그 친구들도 잘 생겼는데 경은이가 워낙 잘 생겼다는 말이죠. 뭐든지 상대 비교잖아요. 대신 상민이나 지원이는 그 시대 여학생들한테 참 인기가 좋았잖아요. 야들야들해서 모성애를 자극하는 외모이기도하고, 어쨌거나 다들 매력이 있으니까 인기가 좋았던 것이겠죠.

Q.안경은 언제부터 쓰시게 된 것인가요?
대학교 때부터 썼어요. 사실 안경 자체는 문제가 없는데 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많이 불편하기는 했죠. 그래도 대학교 4학년 때 쯤에는 콘택트렌즈가 나와서 렌즈를 끼고 경기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Q.혹시 무테 안경 사건 기억나세요? 잠시 무테 안경으로 바꿨다가 주변의 반응이 별로라서 다시 뿔테 안경으로 바꾸셨다고 들었어요.
하하핫…, 뭘 또 주변을 그렇게까지 의식합니까. 제가 외모로 승부 보던 사람도 아니고. 앞서도 얘기했지만 안경을 쓰고 운동을 하면 많이 불편해요. 특히 얼굴에 공을 맞아서 안경 때문에 상처가 나기도 했고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상대적으로 안전한 뿔테를 선호하게 됐어요. 그나마 뿔테가 낫거든요. 그러다가 무테를 잠깐 써볼까도 했었지만 위험한 것 같아서 다시 뿔테로 바꿨던 기억은 나요.

 

 

“팬이 없으면 선수도 없는 거잖아요. 당연히 소중함을 잊어서는 안되죠”

Q.엄청난 명성 때문이었는지 프로무대에서도 러브콜 0순위였어요. 한참 프로 행을 미루시다가 결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아이들 때문이었어요. 내내 감독 생활하느라 아이들에게 신경도 별로 못썼는데 프로까지가면 더 그럴 것 같더라고요. 아내도 가족들과 시간좀 보내자고 했고요. 하지만 마냥 프로행을 거부하기에는 경제적인 문제도 좀 있었어요. 유명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대학감독 월급 뻔하잖아요. 프로와는 천지차이죠. 하루는 아이들을 불러다 놓고 ‘너희가 알아서 공부를 잘 한다면 내가 당분간은 대학 감독으로 있어도 된다. 하지만 과외도 필요하고 그렇다면 난 과외비를 벌기위해서라도 프로에 가야 될 것 같은데 어떻게 할래?’라고 물었죠. 그랬더니 아이들이 ‘알아서 열심히 할께요’라고 대답하더라고요. 그리고 실제로 자발적으로 잘했어요. 시간이 좀 지나서 큰 아이가 연세대에 들어간 다음에 저도 프로행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Q.대학무대와 프로의 차이점은 무엇이었나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프로무대에 와서 보니 ‘역시 프로는 프로구나’하는 것을 느꼈어요. 대학교같은 경우 한창 노는 것 좋아할만한 나이대의 아이들을 데려다 훈련시키는 것인지라 이것저것 디테일한 관리가 필요하거든요. 한데 프로는 돈하고 관련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자기 관리가 남다른 선수들이 많더라고요. 알아서 스스로를 관리하니까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감독이 크게 손댈 필요가 없었어요. 심리적인 부분이나 그런 면에서 서로 잘 소통하고 그러면 되는 것이었죠. 더불어 국내 프로농구는 외국인선수의 비중이 워낙 큰지라 외국인선수를 잘 뽑고 관리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죠. 그리고 대학은 한번 전력을 만들어놓으면 적어도 그 선수들이 졸업할 때까지는 꾸준하게 가거든요. 프로는 달라요. 외국인선수 계약문제도 있고, 매시즌 전력 변화의 폭이 깊은 편이죠. 거기에 따른 능동적인 대처나 준비도 중요한 것 같더라고요.

Q.‘너희가 볼펜 한자루라도 만들어 봤냐?’는 팬서비스 일화가 유명하잖아요. 언제 하신 말이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대학 감독 시절부터 늘상 하던 말인데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화제가 되더라고요. 너무 당연한 말이잖아요. 사실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당연한 말을 하면서 칭찬받는다는게 너무 어색합니다. 농구 선수들이 농구를 하면서 사랑받고 인기도 얻는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잖아요. ‘볼펜을 만든다든가 하는 등 당장 드러나는 생산성 있는 일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즐거워 해주니까 대우받는 것 아니겠냐. 그럼 어떻게해야되냐. 더 열심히 잘하고 평소 행동도 모범적으로 가져가면서 너희를 사랑해주는 분들에게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면 후배들도 보고 배우고 선순환이 이어지게 된다’ 그런 식의 말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만약 무슨 산 속에 들어가서 도를 닦는다든가 하면 제멋대로 해도 되겠죠. 본인이 다 알아서 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스포츠는 다르잖아요. 보는 팬들이 있어야 팀도 생기고, 또 팀이 있어야 그 안에서 선수로 뛸 수도 있는 것이고요. 어쨌거나 주체는 팬인데 거기다대고 함부로 하거나 중요성을 잊어버리면 문제가 있는 것이죠. ‘내가 어떻게해서 지금 선수로 뛰고 있는가?’의 근본을 따져보면 바로 나올 수 있는 답이잖아요.

 


Q.농구 무대로의 복귀 등에는 관심이 없으실까요?
에이…(웃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요. 이제는 뒤에서 응원해주면서 혹시 도울일 있으면 찾아보고 그래야죠. 나이도 적지않고요.

Q.나이 때문이라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요. NBA같은 경우는 노감독들도 많잖아요.
NBA하고 국내 리그는 많이 다르죠. 국내리그는 프로이기는 하지만 운영적인 부분에서의 대부분을 기업에 의존하잖아요. 반면 NBA는 스폰 형식으로 도움은 받겠지만 국내 리그와 비교해 의존도가 현저히 낮은 것이 사실이고요. 그러다보니 NBA는 뭐랄까 구단 자체의 독립성과 색깔이 강하고 그런 과정에서 할아버지 감독도 나오고 레전드도 더욱 대우받고 그러는 것 같아요. 반면 국내 구단은 모기업에서 임명한 사람들이 구단을 이끌잖아요. 그러다보니 선수는 물론이거니와 감독까지도 자신보다 급이 낮은 직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요. 그런데 감독이 본인보다 나이가 많거나 농구계에서 짠밥이 높으면 어떻겠어요? 아무래도 부담스럽겠죠. 꼭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런 영향도 적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Q.마지막으로 여전히 농구인 최희암을 기억하고 사랑해주시는 팬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농구계를 떠난지도 꽤 오래됐는데 아직까지 기억해주시는 분들께는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현장에 남아 여러 가지 도움을 줬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사람사는 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는지라 나름대로 다른 길에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농구에 대한 애정만큼은 여전합니다. 한 사람의 팬으로서 자주 들여다보면서 응원은 하고 있습니다. 최근 농구 인기가 살아나고 있는 분위기인데 다들 좀 더 관심 가져주고 함께 응원하다보면 예전의 뜨겁던 분위기도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다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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