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비의 달인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김종수 / 기사승인 : 2022-09-06 04:3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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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52)] '코트의 마라토너' 이훈재

 

 

“저는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이훈재(55‧190.8cm) 국가대표팀 코치와 인터뷰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남들보다 한참 늦은 중학교 3학년때 농구를 시작했던 것치고 실업, 프로에서 적지않은 기간을 뛰었고 지도자로서도 공백없이 쭈욱 활동중인데 대한 감사의 마음이 함축되어 느껴졌다. 실제로 그는 10년넘게 선수로 활약했으며 감독, 코치 포함 지도자로서도 은퇴직후부터 지금까지 현장을 떠나질 않았다.


“솔직히 저보다 훨씬 유명하고 커리어높은 스타 출신들도 농구판을 떠나있는 케이스가 많잖아요. 이렇게 계속 농구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쁘지않은 인생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좋게봐주신 덕분이지 않을까 싶어요”


모든 면에서 겸손이 넘쳐흐르는 모습이었지만 이코치의 롱런은 결코 운이 좋다는 말로 퉁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농구판은 비즈니스의 집합체다. 아무리 많은 인맥을 자랑하고, 사람좋다고 칭송이 자자해도 계속해서 기회를 받기는 쉽지않다. 이른바 성적에 대한 호불호가 확실한 무대인지라 실패에 대한 책임 또한 어떤 곳보다도 엄격하다. 때론 억울하다싶은 상황에서도 아쉽게 물러날 수밖에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코치는 그런 곳에서 선수, 코치, 감독 등으로 30년 넘게 생존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해당팀을 떠나도 금세 다른 곳에서 불러들인다. 그쯤되면 운이 아니라 철저히 실력이다. 이훈재라는 사람이 필요하기에 다들 그를 원했다고 보면 된다. 선수시절에도 누구보다도 열심히 뛰며 궂은 일에 앞장섰기에 공격 스킬이 아쉽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롱런이 가능했다는 평가다.

 

 


 

최근 이코치는 아들로 인해 덩달아 유명세를 타고 있다. 아들 이채형(18‧용산고‧185cm)은 최근 있었던 제26회 국제농구연맹(FIBA) U-18 아시아 남자선수권대회서 최고 스타중 한명으로 확 떴다. 이전부터 한국농구를 이끌어갈 차세대 가드유망주중 한명으로 기대를 모았는데 이주영, 강성욱과 함께 우승을 이끌며 인지도가 더욱 올라갔다.


이채형이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수비다. 이전 사례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제대회에서 수비로 눈에 띄기는 매우 힘들다. 대부분 스포트라이트는 득점, 어시스트 등 공격적인 부분에서 인상적인 선수들이 가져간다. 때문에 재능있는 선수들 대부분은 자의든 타의든 공격 쪽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그래야 제대로 어필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최상은 양쪽에서 다 잘하는 것이다. 이른바 공수겸장이라 불리는 선수의 가치는 무대를 가리지않고 높다. 하지만 그럴 경우 체력적 한계는 물론 자칫하면 양쪽다 이도저도 아니게 될 수 있는지라 실제로는 매우 어렵다. 이채형은 그 어려운 것을 해내고 있다. 5경기 평균 11.2득점, 4.8리바운드, 5.8어시스트, 6.6스틸을 기록하고 베스트5에 뽑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강력한 수비에 더해 득점력과 패싱능력까지 겸비했다.


조별 예선 첫 경기 인도전에서는 13점, 10리바운드, 10스틸로 트리플더블을 작성하며 주변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보통 트리플더블하면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스틸이 섞여서 나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벌써부터 ‘역대급 수비수가 될 것이다’는 극찬이 쏟아지는 이유다.


일각에서는 현역 시절 좋은 수비수였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 대해 이코치는 “이제 겨우 고등학생일뿐입니다. 어떤 선수가 될지는 차차 성장하면서 추후에 드러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버지를 떠나 농구 선배로서 작은 성공에 자만하지않고 더욱더 열심히 실력을 갈고 닦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찌됐든 수비 등 궂은 일에 신경쓰는 모습은 칭찬할만합니다”라며 싫지않은 기색을 보였다. 성실함 하나로 농구판에서 여전히 생존하고 있는 '코트의 마라토너' 이코치의 농구인생을 함께 들여다보자.

 

 

 

“아들 (이)채형이요. 농구를 대하는 자세와 마인드는 무척 마음에 듭니다”

Q.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오프시즌간 대표팀 일정은 어디나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현재는 소집 기간이 아닌지라, 대학팀 경기, 프로팀 연습 경기 등 각종 시합 등을 고르게 살피고 있어요. 기존 멤버들의 컨디션 체크와 더불어 새로운 전력이 될 선수들도 발굴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더불어 추일승 감독님을 도와 기존 전술의 보완 및 새로운 전술 등에 대해서도 같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Q.최근 있었던 제26회 국제농구연맹(FIBA) U-18 아시아 남자선수권대회서 아들 이채형군이 좋은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렇지않아도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벌써 이렇게 컸나 싶기도 하고요. 사실 여기서 끝이 아니잖아요. 아직 갈 길은 멀지만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면서 발전해가는 거죠. 베스트5를 받기는 했으나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죠. 농구를 대하는 자세와 마인드는 진심인 녀석인지라 스스로 알아서 잘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선수부를 시작하기 전부터도 농구를 무척 좋아했어요. 농구 중계는 놓치지 않고 보고 틈날 때마다 집 1층에 만들어놓은 농구 골대에 슛을 던지고 튕겨 나온 볼을 잡고 그러면서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좋아했던 분야니까 더 열성적으로 하는 부분도 있고요.

Q.현역 때 빼어난 수비로 유명했잖아요. 부전자전이라는 소리도 많아요.
감사합니다. 저야 유명한 정도는 아니고 근근히 안짤릴 만큼 버틴거죠.(웃음) 농구인 2세들을 보면 과거 부모와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한 경우가 꽤 많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가장 많이 보게 되는 움직임이라 그런가 싶기도 하고요. 어쨌든 아들 녀석이 더욱 열심히 해서 수비하면 생각날 수 있는 선수까지 성장했으면 좋겠어요. 수비 실력이야 동나이대 저보다 훨씬 좋은 듯 싶고 다른 부분에 있어서도 현역 때 아버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높은 수준으로 성장해야죠. 아무래도 입시 때문에라도 고교선수들은 좀 더 공격적으로 플레이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어요. 모든 선수들이 실시간으로 체크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객관적인 데이터가 중요하잖아요. 득점, 어시스트, 리바운드 등 눈에 확실히 보이는 것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는 환경같아요. 그런 상황에서 채형이가 수비나 궂은일 위주로 열심히 하다 보니까 많이들 좋게 봐주시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팀이 강해지려면 궂은 일을 열심히 하는 선수는 꼭 필요하거든요.

 

 

 

 

Q.확실히 궂은일 위주의 선수들은 기록적인 면에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을 듯 싶어요. 그런 점에서 채형군의 스틸 능력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어보여요.
그러게요. 스틸같은 경우 다른 기록 등과 달리 마음먹고 한다고 개수를 늘리기는 쉽지않잖아요. 한데 이번 대회에서 채형이가 무더기 스틸을 하다 보니까 이것도 데이터적으로 눈에 띄게되네요. 블록슛, 리바운드 등이 수비 열심히하는 빅맨이 어필할 수 있는 최고의 퍼포먼스라면 가드 쪽에서는 스틸이 있는 듯 싶어요. 스틸이라는게 단순히 빠르기만 하다고 되는게 아니거든요. 볼이 나가는 방향을 잘 읽을 수 있어야되요. 특유의 센스와 더불어 경기 내내 집중력을 가지고 선수들의 움직임에 주목하지 않으면 상대의 공을 가로채기는 결코 쉽지않죠. 끊임없는 활동량은 기본이고요. 일단은 많이 움직여줘야 스틸할 기회도 생길 것 아니에요.

Q.1~2번을 오가며 플레이하고 있는데 최종적으로 어떤 포지션이 더 어울릴까요?
음, 아직은 속단하기 어렵지만 제가 보기에는 포인트가드가 가장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요. 신장도 신장이지만 이 녀석이 선패스 마인드가 상당히 강하거든요. 어쩔 때는 본인이 마무리해도 될 듯 싶은데 구태여 동료를 활용하려고 하고요. 좋은 쪽으로 보면 이타적이고 반대로 생각해보면 욕심을 좀 더 낼 필요도 있죠. 성향 같은 것도 타고나는 부분이 강한 만큼 1번에 적합하다고 느껴져요. 다행인 것은 용산고에서는 선수를 특정 포지션에 가둬두지 않고 다양하게 이것저것 시켜본다는 사실입니다. 이것 은근히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포지션에 있다고 나머지 쪽을 전혀 경험하지 않은 것과 어느 정도 해본 것과는 천지차이니까요. 아직 플레이 스타일이 완성되지 않은 어린 친구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런 듯 싶어요. 그러한 과정에서 새로운 재능에 눈을 뜰수도 있고 약점으로 지적되던 부분이 강화되기도 하니까요. 설사 나중에 채형이가 1번으로 정착하더라도 용산고에서 맡았던 2번 역할, 슈터 역할 등은 큰 자양분이 되지않을까 생각합니다.

Q.이채형군의 얼리드래프트는 계획에 없나요?
아버지 된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아직은 바로 프로 무대에 뛰어들 만큼의 월등한 기량은 아닌 듯 해요. 현재로서는 대학에서 좀 더 실력을 쌓아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대학행을 원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아들의 의견을 존중해주려고 합니다. 아마도 채형이가 ‘무조건 프로에 가겠습니다’했다면 반대는 안 했을 것 같아요. 만약 이번 드래프트에 참가한다면 1라운드 중반 정도에 뽑힐 수 있다는 예상 정도는 들었어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상일뿐이고 실제 드래프트 때는 다를 수도 있잖아요. 원하는 팀이 있다는 루머도 있지만 이것 역시 실체가 없는 것이고요. 실제로 특정팀에서 원하고 키우고 싶다 해도 변수가 많은 드래프트 상황상 그 팀으로 못갈 수도 있잖아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모험을 하기보다는 대학에서 실력을 끌어올리는 쪽이 장기적으로 현명하지 않을까 싶어요. 채형이 본인이 알아서 잘 판단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늦은 나이에 농구를 시작해서 기술을 닦을 시간 자체가 없었습니다”

Q.농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중학교 3학년 때 키가 크다는 이유로 시작하게 됐어요. 초등학교 4학년 정도부터 시작하는 친구들도 많고 거기에 더해 학창시절의 1년은 특히나 차이가 크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아주 많이 늦은거죠. 어지간한 친구들 같으면 아예 시작 자체를 안했을 듯 싶습니다. 어쨌거나 당시 신장이 185cm정도였으니까 선생님들 입장에서 그냥 놓아두기에는 키가 아까웠나 봅니다. 저도 농구만 늦게 시작했을 뿐 운동 자체는 좋아하는 성향이었어요.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늦게라도 시작해서 운좋게 농구인으로 꾸준하게 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Q.학창시절에는 주로 빅맨포지션을 맡았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언더사이즈 빅맨으로 생각하는게 맞을까요?
지금 기준으로 보면 빅맨을 보기에 어림도 없는 신장이지만 1980년대 초 당시 기준으로는 작은 키는 아니었어요. 아주 크다고도 할 수 없지만 비슷한 사이즈의 4,5번 자원들이 많던 시절이에요. 저 정도 되는 키를 가진 선수도 팀별로 많이 없던지라 처음부터 포스트 인근에서 골밑 플레이를 하는 역할을 주문받았죠. 아쉬운 것은…, 농구도 늦게 시작했고, 저같은 케이스에서는 흔한 유급도 안했고, 거기에 처음부터 빅맨으로 뛰었으니까 뭔가 기술을 갈고닦을만한 시간이 전혀 없었어요. 그냥 실전에서 궂은일하고 우당탕탕 득점하고 그게 전부였죠. 저 역시 그런 점을 알고 있었으니까 정말 열심히 했고요. 어떤 면에서는 그러고도 프로까지 가서 살아남은게 신기하기도 합니다.

Q.양정고 졸업 후 대학 하위권팀이던 성균관대학교에 들어갔어요.
그래도 저한테는 성장하는데 좋은 밑거름이 된 시기같아요. 당시 젊은 감독님이셨는데 열정이 넘치셨어요. 성대가 대학부 1위 및 농구대잔치 1차대회 8강까지 올라가며 1985~86 농구대잔치 신인상을 받기도 했고요. 그때는 실업과 대학선수들이 모두 함께 뛰던 시기였던지라 나름 의미 있는 상이었죠. 부족하지만 행운도 따랐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연고대같은 강팀에 갔었으면 성대 때처럼 많은 출장시간은 힘들었겠죠. 하지만 또 다른 메리트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하여튼 어느 팀에서 뛰느냐의 나비효과에 대해서는 정답이 없는 듯 싶어요. 1, 2학년 시절에는 성적이 나쁘지 않았어요. 대만에서온 유학생 서지태(201m) 선배도 있었는데 둘이 ‘더블포스트’를 이뤄서 나름 6강권에서 안정적으로 순항했었죠.

 

 

 

“궂은일 위주의 식스맨이었지만 기아 입단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Q.대학 졸업 후 기아자동차에 입단합니다. 하고많은 팀 중 선수층 탄탄하기로 유명한 최강팀에 들어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부모님은 은행권팀을 추천했었어요. 프로화가 되기 전인지라 은퇴 후 삶까지 고려하면 은행권팀이 안정적인 부분도 분명 많았거든요. 당시 기아 방열감독님께서 ‘기아로 왔으면 좋겠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고민이 되더라고요. 기아는 강력한 전력을 갖춘 신흥명문이었지만 은행권 팀은 노후보장이라는 메리트가 컸거든요. 하지만 능력은 부족해도 기아같은 팀에서 한번 뛰어보고 싶다는 로망도 있었던 것 같아요. 때문에 고민도 잠시, 기쁜 마음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불러주신 자체가 감사했죠.

Q.당시 기아멤버들을 감안했을 때 궂은일 담당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듯 싶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선수가 코트에서 뛰지 못하면 의미가 없잖아요. 어떻게든 뛰려고하다보니 그렇게 된거죠. 다들 아시다시피 당시 기아는 공격력 좋은 테크니션들이 많았잖아요. 허재 선배야 설명이 필요 없는 역대 최고 득점머신이고, (강)동희도 정통 포인트가드이기는 하지만 슛이나 개인기도 좋고 기본적으로 공격력이 출중하죠. 거기에 (김)유택 선배와 (한)기범 선배도 골밑에서 득점력이 좋은 선수들이고요. 저같은 경우 본래 공격력이 탁월한 선수도 아니었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남들이 안하는 부분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죠. 팀 입장에서도 제가 어설프게 득점을 하는 것보다는 수비 등 궂은 일에 전념하는 쪽이 밸런스 적인 측면에서도 좋았을테고요.

Q.이후 3번으로 포지션 변경을 합니다.
같은 맥락이죠. 스타 군단 기아에서 저는 언제 잘려져 나가도 이상할 것이 없는 선수였습니다. 무슨 역할을 맡든 최선을 다해 해내서 팀에 필요한 선수라는 것을 알릴 필요가 있었어요. 당시 유택선배, 기범선배의 이른바 ‘쌍돛대’는 기아는 물론 국가대표팀에서도 주축을 이루는 포스트전력이었단말입니다. 제가 낄 수 없었죠. 이따금씩 부상 등 이런저런 이유로 공백이 생겼을 때 빈자리를 메웠지만 선배들이 건강하게 뛸때는 잠깐의 출장시간도 잡기가 쉽지않았습니다. 그러던중 몇몇 베테랑 선배들이 은퇴를 해서 백코트 쪽에 결원이 생겼고 3번 자리로 자연스레 이동하게 됐죠. 다소 낯설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이 아니었어요. 시키면 무조건해야죠. 어쨌거나 득점력이 좋은 선수가 많은 팀에서 저같은 유형이 필요는 했을거에요. 기회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그냥 머리쳐박고 죽어라 뛰었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Q.개인 기록에서는 손해는 많았지만 팀 우승은 많이 경험합니다.
기아로 가서 얻은 최고 훈장 같습니다. 좀 더 비중을 가져갈 수 있는 팀으로 갔더라면 출장시간이라든지 개인기록에서는 더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연봉도 조금 더 받았을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선수로서 우승을 경험한다는 것은 무엇하고도 바꾸기 힘든 영광입니다. 그런 순간을 한 두번도 아니고 정말 많이 만끽한 것만으로도 복받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시즌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정상에 오른 팀의 일원으로서 마지막에 동료들과 기쁨을 나누는 기분은 정말 최고입니다.


Q.KBL 원년, 시즌 우수 수비상, 수비 5걸 등을 차지하며 첫 스타트를 잘 시작하지만 다음 시즌 기량이 뚝 떨어지고 맙니다. 부상이 있었던 것일까요?
원년같은 경우 여러 가지로 운도 따랐습니다. 아시다시피 당시는 외국인선수를 2명을 쓰던 시절이라 공격력의 상당수가 그들에게 몰렸습니다. 거기에 에이스급 토종 선수가 뒤를 받치고 더불어 포인트가드의 역할도 중요했죠. 그런 가운데 당시 팀에서는 저같이 공격 욕심 안부리고 수비에만 전념하는 선수도 필요했던 것 같아요. 공격할 선수야 차고 넘쳤으니까요. 그렇게 기회를 받아서 원년 시즌에 나름 스타트를 잘 끊을 수 있었죠. 다음 시즌같은 경우 기량이 떨어졌다기보다는 자리가 없었다고 보는게 맞을 듯 싶습니다. 원년에 허재형이 자존심이 좀 상했었잖아요. 다음 시즌에는 그야말로 마음먹고 나왔어요. 그러다 보니 강동희, 허재, 김영만이라는 확실한 3인방이 시즌 내내 돌아갔고 제가 들어갈 틈이 없었죠. 부진이라기보다는 출장시간을 못 받아서 그렇게 보였을거에요. 이따금씩 나오더라도 계속 뛰던 시절보다는 몸놀림 등에서 차이가 날 수도 있었겠고요.  

 

 

 


“주전보장? 출장시간 증가? 전혀 즐겁지 않았습니다”

Q.핵심전력들이 대부분 군 입대한 대구 동양으로 트레이드되면서 주전 자리를 차지했지만 팀은 32연패라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썩 나쁘지는 않았지만 아시다시피 휴…, 그렉 콜버트라는 외국인센터가 8경기인가만 뛰고 미국으로 도망을 가버렸어요. 정말 있어서는 안될 황당한 사건이 터져 버린거죠. 앞서도 말한 것처럼 그때는 외국인선수가 두명이 뛰던 시절이잖아요. 외국인선수에 대한 의존도가 엄청 컸던 때죠. 더욱이 다른 외국인선수는 가드인지라 삽시간에 팀 내 주득점원이자 주전 센터가 사라져버린 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높이 부분에서의 하락이 뼈아팠습니다. 주전급 토종 선수 상당수가 군 입대한 상태이기도 했던지라 남은 저희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포스트에서의 열세가 메워지지가 않았습니다. 이후 부랴부랴 대체 외국인빅맨을 데려오기는 했지만 기량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클 수밖에 없었고요.

Q.출장시간은 많았지만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럼요. 출장시간하고 전혀 관계없이 힘들기만 했습니다. 기아 시절처럼 많이 못 나오더라도 팀이 잘 나가고 많이 이겨야 저도 기분이 좋은 거죠. 도저히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1승조차 손에 잡히지 않았던지라 언제부터인가는 코트에 나가는 것도 두렵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자꾸 지다 보니까 알게 모르게 패배의식에 젖어있었던 듯 싶고요. ‘오늘은 이겨보자’와 ‘오늘은 이길 수 있을까?’의 차이점은 너무나 큽니다. 아쉽게도 당시의 저희는 후자였습니다. 전반까지 앞서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워낙 자주 지다보니까 불안한거에요. ‘이러다가 후반에 가서 역전패 당하지 않을까?’ 아니라 다를까 3쿼터에 야금야금 따라잡히다가 4쿼터에서 점수가 뒤집어지며 지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선수가 마음을 그런 식으로 먹으면 안되는 것이었지만 워낙 자주 반복되는 상황에 투지가 많이 깎였던 것 같아요. 개인기록 부진, 출장시간 감소 등은 ‘내가 부족해서 그렇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연패는 그것과는 또 많이 다르거든요. 32연패를 끝냈을 때는 정말 기뻤거든요. 하지만 다음날인가 이어진 경기에서 또다시 패배를 기록하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래저래 지금도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시절입니다.

Q.콜버트는 왜 야반도주를 택했던 것일까요? 구단에 미리 말하고 갈 수도 있었잖아요.
집안 사정으로 인한 개인사로만 들었어요. 저도 정확히는 몰라요. 하지만 그렇게 무책임하게 가버림으로 해서 팀은 역대 최악의 순간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죠. 가기 전까지만 해도 득점, 리바운드 등에서 상위권을 달렸을거에요. 득점력이 좋은 강력한 빅맨의 존재는 팀원 전체를 업그레이드시켜주죠. 그런 선수가 갑자기 확 빠져버렸으니 팀이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콜버트가 사라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다들 믿을 수가 없다는 반응이었어요. 일어날 수 없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잖아요. 팀 분위기도 최악이었죠. 구단에 미리 말이라도 하면 좋았겠지만, 했어도 팀에서는 잡았을 것 같아요. 말도 안되는 일이잖아요.(웃음)

Q.당시 단신 외국인선수 존 다지는 이른바 식물용병으로 불렸는데요. 한창때 현주엽과도 쇼다운을 벌였을 정도면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을 듯 싶어요.
맞습니다. 완전히 기량이 떨어지는 선수까지는 아니었어요. 가드로서 나름 테크닉도 준수했고 운동능력도 갖춘 선수였어요. 식물 용병이라는 표현은 다지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겠네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승부처에서 약한 모습을 자주 노출했는지라 그래서 더 임팩트가 떨어져 보였지 않나 생각해요. 1점차 승부에서 드리블을 치다가 공이 본인 발에 맞고 코트 밖으로 나가서 공격시간이 날아가는가 하면, 잘 들어가던 슛도 클러치 상황에서 고장나버리는 등 뭔가 단신 외국인선수에게 바라는 해결사 역할에서 아쉬움이 컸던 이유가 결정적이었지 않나 싶어요. 각 팀들 입장에서 단신 외국인선수에게 바라는 역할은 해결사, 에이스 그랬잖아요.

 

 

 

Q.이후 전희철, 김병철이 돌아왔음에도 팀은 여전히 약체를 면하지 못합니다.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요?
아…, 좀 어려운 질문이네요. 제 생각에는 외국인선수 영향도 컸던 것 같아요. 당시 외국인선수 2인 출전제에서는 국내 선수도 국내 선수지만 외국인 선수가 어떻게 뽑혔느냐에 따라 팀전력이 널뛰기를 많이 했지 않나 싶어요. 5명 중에 2명이지만 전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따지면 60% 이상은 되지 않았을까요. 한창때 허재형 등 정말 특별한 선수가 아니라면 주 득점원도 외국인선수였고 주전 센터 역할도 당연히 외국인선수가 맡던 시절인지라 거기서 타팀에 밀려버리면 경쟁력이 쭉 떨어지지 않나 싶어요. 더욱이 당시는 프로 초창기였잖아요. 지금은 외국인선수와 많이 부대끼면서 수비 노하우 등도 생겼지만 그때는 그런 것도 드물었고 지금보다도 훨씬 의존도가 높은 시절이었죠.

Q.하필이면 슈퍼루키 김승현이 들어와 팀이 바뀌게되는 이전 해에 은퇴하고 맙니다. 아쉬움이 컸을 듯 싶어요.
그렇죠. 저 나가고 (김)승현이가 들어왔죠. 무엇보다 그 해 팀 창단 후 첫 우승까지 했던지라 많이 뛰지는 못해도 그 자리에 함께했으면 어땠을까라는 부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아마도 모든 선수들이 다 그렇지않을까요. 하지만 당시 상황은 제가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그러기에는 어려웠고요.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고 남들보다 지도자 생활을 빨리 시작했으니까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그래야죠. 세상 모든 일이 잃는 것이 있으면 얻은 것도 있고 그렇잖아요.

“대단할 것 없는 이훈재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Q.수비수로서의 이훈재는 어떤 스타일이었을까요? 대인 수비와 도움 수비에 모두 능한 전천후 수비수?

주로 대인 수비에 특화된 플레이를 많이 했던 듯 싶어요. 도움 수비를 아예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썩 잘했다고도 못하겠고요. 그냥 상대팀 에이스급 선수를 끈질기게 전담 마크하는 역할에 자주 투입됐어요. 특히 슈터 등 상대팀 주 득점원들을 많이 맡았던 기억이 납니다. 어릴 때는 (이)충희형이나 (김)현준이형을 열심히 따라다녔고 이후에는 문경은, 조성원 등도 맡았었죠.

Q.빅맨출신이라 엄청 빠르고 그러지는 않았을 듯 싶은데 발 빠른 슈터들을 많이 상대했네요?
맞아요. 제가 빅맨 출신인지라 기동성 좋은 스윙맨들과 스피드에서 맞짱을 뜰 정도로 막 빠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까 채형이 얘기할 때도 말씀드렸지만 수비라는게 빠르고 힘 좋다고 잘하는 것은 아니에요. 유리한 조건일 뿐이죠. 당시 제가 선수로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수비 등 궂은일 밖에 없었어요. 나름 살자고 연구를 많이 했죠. 상대 선수 움직임을 담은 비디오 등도 여러 번씩 돌려보면서 다각도로 생각하고 이미지 트레이닝도 했습니다. 상대가 어떤 플레이를 즐겨하고 어떤 식으로 자주 움직이는지를 머릿속에 담아놓고 수비하게 되면 반응 동작도 더 빠르게 가져갈 수 있고 여러 가지로 유리한 면도 많죠. 볼 흐름 등을 읽는 능력도 중요하고요. 무엇보다 선수로서 경쟁력을 가져가기 위한 간절함 그것이 가장 컸던 것 같습니다. 사실 기아 시절에는 유택선배, 기범선배의 존재가 아주 든든했죠. 상대를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해도 골밑 쪽으로만 몰아넣으면 그 다음부터는 선배들이 알아서 막아주거든요. 그로인해 상대를 놓쳤다 싶은 순간에도 크게 티가 안났던 듯 싶어요. 하지만 포스트가 약한 팀에서는 내외곽을 모두 신경써야 되니까 더욱 어렵고 힘들죠.

 

 

 


Q.프로 생활을 하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외국인선수 한명만 꼽아주세요.
음…, 어렵네요.(웃음) 각자 색깔과 개성이 확실한 외국인선수들을 너무 많이 봐서요. 그래도 구태여 한명을 꼽아보자면 원년에 저희와 우승을 놓고 챔피언결정전에서 맞붙었던 나래의 주포 칼레이 해리스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흔히 당시 나래하면 제이슨 윌리포드부터 언급하기 일쑤지만 팀 내 득점 리더는 분명 해리스였어요. 실제로 원년 득점왕도 차지했고요. 당시 나래가 토종 선수진이 강한 편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외국인선수 2명이 모두 대박이 나면서 그야말로 최대 다크호스로서 승승장구했었죠. 일단 나래랑 붙는 팀은 앞선에서 북치고 장구치면서 다하는 해리스가 경계대상 1순위였어요. 덕분에 저도 할 일이 늘어났었죠. 나래와 붙게되면 해리스를 맡는 역할을 주로 담당했고 그 과정에서 ‘수비가 좋다’, ‘궂은일을 잘한다’는 등의 소리도 많이 들었죠. 잘하기는 했으나 다혈질 성격 탓에 기복도 다소 있었어요. 어쨌거나 저한테는 고마운 선수였습니다.(웃음)

Q.여자농구, 상무에 이어 국가대표팀에서 지도자를 하고 있어요. 이렇게 커리어를 꾸준하게, 오래 가져가는 농구인도 많지는 않을 듯 싶어요.
맞습니다. 은퇴 후 여자팀 인천 금호생명 팰컨스에서 코치와 감독대행으로 경험을 쌓았고 이후 상무로가서 감독 생활을 시작해 꽤 오랜 기간 팀을 맡을 수 있었습니다. 욕심을 내서 부천 하나원큐 감독으로 갔지만 실패하고 추일승 감독님께서 불러주셔서 현재 대표팀 코치로 있는 상황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가지고 있는 능력보다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선수 시절에 저보다 훨씬 유명하고 잘했던 분들도 이렇게 농구판에서 롱런하는 이들은 드물거든요. 열심히도 했지만 좋게 봐주시고 끌어주셨던 분들이 아니셨다면 이렇게까지 오래 농구 관련일을 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여러 방면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깨닫게 된 것도 많아요. 여자농구에서는 좀 더 세심해야 했고, 무대가 어디냐에 따라서 각각의 차이점에 대한 철저한 접근과 준비가 부족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모든 것들이 저에게는 경험과 공부가 되는지라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말자’라는 생각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여자농구, 상무, 국가대표팀은 다양하게 어려움도 있지만 다양하게 즐거움도 있었던 것 같아요.

Q.마지막으로 농구인 이훈재를 사랑하고 응원하는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릴께요.
이름값이 높거나 플레이가 화려했던 선수가 아니었음에도 저를 기억하는 팬들이 있으시다면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고요. 여러모로 부족했지만 농구를 대하는 태도와 마음만큼은 정말 진지했고 열심히 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인터뷰를 하면서 ‘감사’라는 단어를 참 많이도 쓰는 것 같습니다만 농구인 이훈재의 과거와 현재를 떠올리다 보면 계속해서 나올 수밖에 없는 듯 싶어요. 농구라는 종목에도 감사하고, 소리 없이 그저 열심히만 했을 뿐인데 그걸 알아봐주고 격려해주시는 팬분들께도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예전의 저처럼 주연보다는 조연으로 활약 중인 후배님들, 당장은 화려함에서 밀려 티가 좀 덜날 수도 있지만 꾸준하게 하다보면 누군가는 알아주고 또 본인에게도 큰 자양분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단할 것 없는 이훈재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장 빛이 안나더라도 팀이 승리하는데 보탬이 되어서 동료와 팬들에게 믿음을 주는 선수가 될 수 있다면 그 미래도 결코 어둡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 파이팅합시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KBL 제공, 유용우 기자, 점프볼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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