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최고의 농구 선수는?’ 많은 농구 팬들에게 이것만큼 난감한 질문은 없을 것이다. 일단 각각 다른 다섯 개의 포지션별 차이를 무시할 수 없고 누적기록이냐, 임팩트냐에 따라 평가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리그 우승 여부 및 타이틀, 국제대회 활약상, 선수 개인별 인기 및 인지도, 시대 보정 등도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는지라 특정 후보군은 몰라도 누군가 한 사람을 콕 찍어 지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도 시대별 레전드끼리의 비교 논쟁이 나올 때는 서로간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편이며 지극히 주관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가운데 절대적이지는 않겠지만 남자 농구같은 경우는 허재 고양 캐롯 점퍼스 대표를 역대 최고로 거론하는 의견이 많다. ‘농구대통령’이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높은 직책(?)이 이를 입증해 준다.
여자농구는 더욱 어렵다. 여자농구 1세대 간판스타 박신자, 전천후 슈퍼 가드 전주원, '바스켓퀸' 정선민, 아직 현역임에도 역대 최고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박지수까지…, 누구를 꼽아도 고개가 끄덕여질 만한 레전드가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들에게서 거론되고 있는 선수하면 박찬숙(63‧190cm)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농구 여제’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박찬숙은 한국 여자 농구사에서 전설 중의 전설로 통한다. 동시대를 지배한 최고의 센터였던 그녀는 소속팀은 물론 각종 국제대회에서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로서 다양한 역할을 해내며 1979 FIBA 세계여자선수권대회 은메달, 1984 LA올림픽 여자농구 은메달 등의 쾌거를 이끈다.
무엇보다 혼자만 잘하는 스타일이 아닌 전체를 이끌고 함께 시너지를 내는 리더형 에이스였다는 점에서 더욱 높은 평가를 줄 수 있겠다. 여전히 많은 후배들이 “찬숙 언니가 옆에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두렵지 않았다”,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힘을 주는 든든한 존재였다”고 회상할 정도다. 때문에 당시 인기 및 대중적 인지도 또한 매우 높았고 지금까지도 박찬숙이라는 이름은 잊혀지지 않고 계속해서 회자되고 있다.
박찬숙은 센터로서 최고의 기량을 갖추고 있으면서 거기에 더해 포워드로서의 능력까지 갖춘 다재다능함이 돋보이는 선수였다. 포스트업, 페이스업에 두루 능한 것은 비롯 3점슛 라인 인근에서 정확도 높은 슈팅을 꽂아 넣었다. 탑, 사이드 등을 가리지 않고 공간만 생기면 어지간한 슈터 이상으로 미들슛을 성공시켰으며 기동력을 살린 속공참여도 일품이었다.
기본적으로 워낙 근성이 좋았던지라 포스트 인근에서 몸싸움, 수비, 리바운드 등에 소홀하지 않았으며 패싱센스, 게임조율능력 등까지 겸비한 전천후 플레이어로 평가받았다. 에이스이면서도 포인트 센터까지 가능했다고 볼 수 있는데 당시는 물론 지금도 이같은 유형의 선수는 찾아보기 쉽지않다. 수려한 외모로 인기 또한 높았다. 이후 무수한 스타플레이어들이 등장했음에도 여전히 많은 팬들이 ‘박찬숙, 박찬숙’하는 이유다. 한국여자농구사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존재인 박찬숙을 만나 파란만장했던 인생스토리를 들어보았다.

Q.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아주 잘지내고 있어요.(웃음) 어떻게 잘 지내고 있냐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농구를 시작한 이래 계속 농구 관련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온전히 하지 않게 된 것이 1년 정도 됐어요. 그러다 보니 여유있는 시간도 많아지고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도 하네요. 간간이 방송도 출연하고 매주 목요일마다 시니어 모델 활동도 하는 등 여유를 즐기면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더불어 영어공부도 하고 있어요. 예전부터 자유롭게 외국인들과 영어로 대화 한번 하고 싶었거든요. 늦은 나이에 무슨 공부냐고 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배움에는 왕도가 없다는 등 어려운 말을 꺼내지 않더라도 사람은 배울수록 발전하지 않나 싶어요. 결과도 결과지만 그 과정에서 스스로 깨닫게 되는 부분도 많고요.
Q.어느 정도 나이가 드신 분들은 건강 차원에서라도 등산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많이들 하죠. 주변에도 많고요. 하지만 저는 아쉽게도 현재 산을 타고 그럴 몸은 못됩니다. 현역 때 허리, 무릎, 발목 등 참 골고루 다쳤는데 나이 먹으니까 더 심해진 것 있죠. 무릎은 오래 걷고 그러면 퉁퉁 붓기도 하고요. 허리같은 경우 협착증이 와서 시술도 받은바 있어요. 병원에서는 무리하지 말고 무조건 쉬어라 그러는데 어디 그게 그렇게 되나요. 자기 몸은 자기가 잘 알잖아요. 무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맞아요. 하지만 평생 운동 쪽에서 있던 사람이 그렇게 살 수 있나요. 너무 가만히만 있어도 근력이 떨어지고 그러잖아요. 제 또래 친구들보면 여행도 다니고 그러는데 망가져서 따라갔다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그러면 무슨 민폐에요. 적당한 선에서 꾸준히 관리를 하고 있어요. 체중도 적정선을 유지하려고 하고요. 관리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젊은 시절보다 지금이 더 철저한 것 같아요. 어쩌면 그것이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Q.사업도 하신다고 들었어요.
사업은…, 하지 않습니다. 하하하핫. 예전에 뭣도 모르고 한적이 있어요. 결과적으로 좋지 않았고 그로 인해 한동안 힘든 시절도 보냈죠. 운동만 하던 사람이 뭘 알겠어요. 친구가 한다니까 쫄래쫄래 따라다니면서 함께한 것인데, 확실히 사람은 자신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분야는 함부로 뛰어드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인생의 교훈만 얻었습니다. 조금만 힘을 보태주면 확 살아날 수 있다고 해서 함께 했던 것이지만 잘못 판단했죠. 운동하던 사람들이 많이 그래요. 성향이 단순한지라 쉽게 사람을 믿고 이것 한번 해볼까 하면 의욕적으로 덤비는 경우도 적지 않거든요. 실상은 거기에 관한 지식도, 경험도 부족한 경우가 태반인 상태에서요. 뭐, 그 친구도 일부러 안되게 하려고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름 열심히 해보려고 그랬겠죠. 하지만 당시 제가 대표 직함을 가지고 있던 상태에서 모든 책임을 떠맡을 수밖에 없었고, 이래저래 후폭풍이 상당했습니다. 지난 일이니까 담담하게 말하지만 당시에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아픈만큼 성숙해진다는 말도 있잖아요. 어쨌거나 한번 정도는 살면서 큰 시련도 겪어봐야지 깨달음도 얻고 성장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또 다시는 겪고 싶지않네요.(웃음)

“박찬숙이 가진 노하우와 열정을 싹 쏟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Q.농구 지도자 쪽은 이제 계획이 없으신 것인가요?
왜 생각이 없겠습니까. 젊은 시절의 전부를 바쳐서 걸어온 길이 농구이고, 그런 만큼 제가 가진 노하우와 열정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죠. 선수 시절 그리고 이후 농구인으로 살아오면서 깨닫고 느끼고 배우게 된게 정말 많거든요. 그대로 혼자만 가지고 사라지기에는 너무 아까워요. 한때 WKBL 최초 여성 감독으로서 꿈을 꾸고 준비를 했고 실현 직전까지 갔었어요. 하지만 막판에 무산됐었죠. 그때 상실감은 말도 못해요. 단순히 제가 유명한 선수였고 그래서 이름값을 감안 했을 때 감독을 해야 한다 그런 것이 아니에요. 명성과 관련 없이 정말 열심히 준비했었어요. ‘감독이 되면 어떻게 할까’를 세세한 플랜으로 짜서 방대한 준비물을 제출했었죠. 거기에 코치나 매니저 등의 활용방안과 역할까지도 계획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단계에서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많은 면에서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농구판에는 학연, 지연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Q.당시 절차가 공정하지 못했다고 느끼신 듯 해요.
맞아요. 저 대신 기회를 얻은 사람이 많은 준비를 하는 등 여러 가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도자였다면 납득했을겁니다. 설마 제가 무조건 왜 나를 안 뽑았냐고 땡깡 부렸겠습니까. 여러 가지 부분에서 아무리봐도 이상하더라고요. 얼마나 화가 났으면 국가인권위원회에 고발까지 했다니까요. ‘내가 어떻게 준비한건데…,이래저래 너무 속상했어요.
Q.여자 농구계에 여성 지도자가 여전히 참 적은 것 같아요.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죠. 남녀 따지지 말고 기회를 주고 거기서 더 잘한 사람이 살아남는 것이 기본적인 상식 아닐까 싶어요. 하지만 역대로 통틀어서 여자 감독이 몇 명이나 되며 얼마나 기회를 받았을까요? 가뭄에 콩나듯 한번 기회를 받은 여자 감독 조차 짧은 시간에 성적이 안나면 ‘봐봐, 여자 감독은 힘들잖아’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져버려요. 남자 지도자는 짤려도 다음 타자가 또 남자지만, 여자감독은 한번의 실패가 그 이후까지 이상한 선입견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남자 감독들과 비교해 10% 기회도 못 받으면서 책임은 두고두고 전가시키죠. 여성 선수들이 뛰는 리그에서 여성지도자가 이렇게까지 적다는 것도 분명 문제가 있는 부분입니다.

Q.그래도 각 팀별로 여성 코치들은 예전에 비해 많이 늘어났더라고요.
그렇더라고요. 어쨌거나 여성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고 성장하는 길의 일 부분이 되길 바랍니다. 행여나 윗선에서는 이른바 구색 맞추기 정도로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현직에 있는 코치들이 더 노력하고 힘을 키워서 감독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도록 해야겠죠. 여성 지도자들 스스로가 그런 인식과 욕심을 가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녀 불문하고 감독은 파리목숨이라고 하잖아요. 한번 기회를 얻었다가 실패하고 나면 그대로 프로 무대에서 지도자 생활이 힘들어지는 경우도 많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시나 책임감이 큰 감독보다 가늘고 길게 코치 생활을 오래하자는 생각을 가지는 후배가 있다면 여성농구계 전체를 위해서 좀 더 앞으로 나설 것을 권유하고 싶어요. 그런 용기와 도전이 쌓이고 쌓이다보면 언젠가 여성 농구계에도 많은 여성 감독들이 나오지 않을까요.
Q.여자농구계에서 레전드로 불렸던 인물들에게 후배들을 위해서 공헌할 수 있는 기회가 너무 없는 것 같아요.
제말이요. 그래도 남자농구는 왕년에 날렸던 스타들이 학연 등과 맞물려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이들이 많지만 여자농구는 그야말로 전멸이에요. 과거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내고 농구대잔치에서 흥행몰이하던 스타들 지금 뭐하나요? 대부분 평범한 주부로 살던가 하면서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니까요. 외국에서는 50~60년대에 활약했던 선수들까지 끌어올리며 과거와 현재를 접목하는 다양한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국내는 그런 노력이 전혀 없는 것 같아요.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경쟁할 기회를 주고, 그렇지않은 이들은 평범하게 살면 되는 것이죠. 다만 이 시기에 이런 스타들이 있었고 현재의 이런 스타들로 계보가 이어진다는 등의 스토리를 자주 언급하고 그 시절 기록들도 따로 정리해보고 하면서 여자농구만의 역사를 꾸며보는 것이 나쁜 일 일까요? 중요한 행사나 무슨 무슨 기록을 달성한 선수가 있으면 예전 선수들이 초청되어 함께 기뻐해 주고 목에 꽃다발이라도 걸어주면 그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거든요. 과거가 제대로 인정받아야 미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Q.과거가 제대로 인정받아야 미래도 있다는 말씀에서 깊은 의미가 전해집니다.
당연하죠. 과거라고 하면 저희 때만 과거같이 느껴질 수 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지금 선수들도 과거형이 되는거에요. 과거 레전드를 기록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갖춰지면서 히스토리가 제대로 만들어진다면 그 혜택이 어디로 가겠어요? 그래도 WKBL 출신들은 나름 일대기로 기록되면서 어느 정도 체계가 만들어지는 듯 싶은데 이전 농구대잔치 전설들은 말 그대로 전멸이에요. 그때 국제대회에서 기적같은 드라마를 쓰고 국내리그를 뜨겁게 달구던 선수들 다 잊혀졌어요. 한때 컴퓨터 가드라고 불리던 박양계같은 경우 요즘 세대에서 이름 석자라도 아는 친구들이 얼마나 될까 싶어요. 정말 기술도 좋고 잘하는 선수였거든요. 성정아, 조문주도 한동안 잊혀졌다가 2세들이 잘해서 조금씩 거론되는 것 아니에요. 2세들에 관계없이 잊혀져서는 안될 대단했던 선수들인데요.

Q.그래도 박찬숙만큼은 확실하게 알아주잖아요.
팬분들에게는 고맙죠. 많은 분들이 지금도 잊지 않고 성원해주시고 심지어 방송에서도 종종 불러주면서 그 시절 얘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하지만 정작 농구계에서는 알아주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가 뭐 엄청 대단한 사람이니까 나를 알아주고 대접해라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앞서 언급했듯이 여자농구의 역사를 써내려 갔던 수많은 선수들! 그래도 제가 거기서 많이 알려진 케이스에 속하니까 자꾸 저를 빗대서 전체를 이야기하는거에요. 이렇게 자꾸 쓴 소리를 할수록 저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라도 자꾸 이런 얘기를 언급해서 화두에 올려보고 싶습니다. 그렇지않으면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바뀌는 것 하나 없이 유야무야 잊혀지고 흘러갈테니까요. 지나가다 팬분들을 만나면 근황을 물어보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때면 ‘조용히 개인적인 일하면서 쉬고 있어요’정도로 대답합니다. 하지만 진짜 속마음은 코트에 나가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후배들에게 싹 물려주고 후회 없이 돌아서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이게 비단 저만의 생각일까요. 농구만 생각하고 젊음을 불태웠던 예전 선수들 중에 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이 적지않을거에요.
Q.그러게요. 박찬숙이라는 이름값을 감안하면 농구계에서도 여러모로 활용할 구석이 많을 텐데요.
맞습니다. ‘영원한 농구인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저로서는 어떤 쪽이든 농구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활용당해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웃음) 그렇게 되어서 당시 함께 활약했던 좋은 선수들도 다시금 알려지는 계기로 만들고 싶고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를 별로 반기지않네요. 후배들 격려하려고 농구장에 나타나는 것 조차도 부담스럽다는 사람도 있어요. 그냥 좋은게 좋은 거라고 고개만 끄덕거리면 되는데 자꾸 제 의견을 내고 소신을 밝혀서 그런 부분도 클거에요. 정치질 좀 해보라는 사람도 있는데, 평생 못해왔던게 지금에 와서 되겠어요. 그렇게 할 생각도 없고요. 이렇게 말하니까 제가 굉장히 고집불통에 강성같이 느껴질 수도 있겠는데 아는 사람은 아시겠지만 저 굉장히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다만 원리원칙에 너무 충실한 성격이고 거기에 대한 부분을 인터뷰에서 계속 얘기해서 좀 세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저는 술도 38살에 배웠어요. 그냥 일탈 자체를 몰랐습니다. 하지 말라는 것 일정 하지 않았고 말 그대로 FM대로 살았죠. 그래서 지금도 농구를 바라보는 눈만큼은 누구보다도 구김살없다고 자부합니다.
“박지수 공황장애, 백번천번 공감합니다”
Q.최근 방송 등을 통해 모습을 종종 드러내시는데 외모 등에서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 보여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1959년생이에요. 뭐 아직도 쌩쌩하지만 그래도 60살을 넘겼다는 점에서 적은 나이는 결코 아니죠. 건강 때문인 이유도 있지만 지켜봐 주시는 팬분들을 위해서도 최대한 관리를 하려고 합니다. 팬들은 가장 좋을 때를 많이 기억해 주세요. 박찬숙하면 그래도 한창 날아다니던 선수 시절 이미지를 생각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실텐데 간만에 텔레비전에 나와서 몰라보게 살이 쪘거나 확 늙어있는 모습을 보면 슬퍼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가는 세월 못 막는다고 주름도 하나둘 늘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최대한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팬들에 대한 예의일 듯 싶어요. 그분들 입장에서 볼 때 ‘어휴…, 나도 늙고 박찬숙이도 많이 늙었구나’보다는 ‘어? 박찬숙 아직도 쌩쌩하네’그렇게 보이는게 훨씬 좋지않겠어요.

Q.딸 서효명양은 배우로, 아들 서수원군은 모델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혹시 농구 선수로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셨나요?
저는 우리 아이들이 농구 한다고 할까 봐 엄청 떨었습니다. 제가 농구에 모든 것을 불태워서 젊은 시절을 보내서인지 자식들은 별로 시키고 싶지않더라고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녀석들이 농구하겠다고 고집부렸으면 시켰을지도 모르겠지만 다행히(?) 큰 관심이 없더라고요. 아이들은 농구와 인연이 없었던거죠. 아들같은 경우 축구를 조금 하기는 했는데 저는 그마저도 크게 마음에 들지않았어요. 본인 또한 큰 미련은 없었는지 2학년 때 관뒀습니다. 딸같은 경우는 엄마를 여러번 놀라게 했던 기억이 나요. 초등학교 때 체육대회를 하는데 너무 잘 뛰는거에요. 거기에 폼까지 딱 잡히다 보니 주변에서도 ‘운동시켜야겠다’는 말이 많이 나왔어요. 운동과는 다른 쪽으로 가기를 바라던 엄마 입장에서는 ‘어? 어라?’ 막 이럴 수밖에 없었죠. 그러다가 초등학교 5학년때 쯤 잘하던 공부를 소홀히 하고 성적도 뚝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잘 판단해라. 공부 안할 것 같으면 너 농구해야돼. 둘중에 하나 선택해’그랬더니 화들짝놀라면서 ‘엄마, 저 공부열심히할께요. 농구안할거에요’그러면서 싹싹 비는 것 있죠. 그 다음부터 다시 열심히 공부하더라고요.(웃음) 사실 요새 농구인 2세들이 많이 거론되기는 하는데 (성)정아 아들, (조)문주 딸 등 일부 선수들이 부각되서 그렇지 실패한 케이스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잖아요. 정말 본인이 좋아하고 확실한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부모 욕심으로 시키고 싶지는 않았어요.
Q.최근 국가대표 주전 센터 박지수가 공황장애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심리적 압박과 스트레스가 주원인이라고 하는데 누구보다도 그 마음이 더 공감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럼요. 백번 천번 공감합니다. 나도 힘든데 주변에서는 나만 쳐다보고 있고 그런 시선 때문에라도 오랜시간 동안 힘든 내색 한번 제대로 못하고,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육체적 고통보다 마음적으로 참 힘들고 외로웠던 것 같아요. 양어깨에 무거운 짐을 올려놓을 듯 항상 무거웠거든요. 솔직히 그때 저도 20대 어린나이였잖아요. 일찍부터 국가대표 등을 해서 그렇지 운동을 안했다면 부모님에게 어리광도 부리고 그럴 수 있는 나이였어요. 하지만 일찌감치 리더나 중심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파도 아픈 티도 잘못했어요. 어쩌다 크게 아프면 각종 언론에서 ‘박찬숙 침몰하다’, ‘박찬숙 잠수타다’ 등 어쩜 표현력들도 좋아요. 하여튼 온갖 말들이 다 나왔어요. 병원에 한번 입원하면 병실까지 기자들이 몰려와서 사진 찍고 질문하고 의사까지 인터뷰하고 부담도 그런 부담이 없었죠.
Q.사생활 자체가 없었네요. 생각만해도 답답해집니다.
그러니 제가 편안히 누워라도 있었겠어요. 남들 안볼 때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죠. 운동만 잘하다 뿐이지 저도 똑같은 사람이고 어린 여자아이일 뿐인데…, 주변의 너무 많은 기대가 족쇄처럼 온몸을 꽁꽁 묶어서 숨을 쉬기조차 어려울 때도 있었습니다. 아마 저도 우울증, 공황장애 그런 것이 왔었을지도 몰라요. 당시 상황상 왔어도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갔을 가능성이 크죠. 그래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팬들 덕분이에요. 격려하고 응원해주시는 팬들을 위해서라도 마음을 강하게 먹자고 거듭 다짐했던 기억이 나요. 더불어 매일 일기를 썼어요. 그날 있었던 일을 쓰면서 스스로 풀기도 하고 나름 파이팅을 다짐하기도 했죠. 어떤 날은 막 울면서 일기를 쓰는 바람에 종이가 젖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박)지수도 정말 힘들거에요. 워낙 잘하는 선수니까 일찍부터 얼마나 많은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겠어요. 비슷한 일을 겪었던 입장에서 ‘그래 내가 이런 일로 무너질 수 없지. 더 강해져서 어떤 선수인지 제대로 보여주겠어’라는 독기를 품었으면 좋겠지만 그건 제 생각일 뿐이고요. 부디 지수가 현재의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다시금 국가대표 기둥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화려한 노룩패스요? 기본기만 탄탄하면 저절로 나옵니다”
Q.처음에는 농구를 해보자는 제의를 강경하게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때 단지 키가 크다는 이유로 인연을 맺게됐죠. 처음에는 기겁을 했어요. 농구가 뭔지도 잘몰랐고 운동을 특출나게 좋아한다거나 그런것도 딱히 없었어요. 무엇보다 저는 공부하면서 지내는 학교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으니까요. 단지 키 하나 때문에 그런 제의를 받는다는게 황당하기는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농구라는 스포츠에서 그것만큼 큰 재능도 없기는 하죠. 어쨌든 저는 하기 싫었습니다. 담임선생님도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저 또한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거부 의사를 드러냈습니다.
Q.그정도로 싫고 관심이 없었다면 안하는 것이 맞았을 수도…
맞아요. 결과야 어쨌든 당시 상황에서는 안하는 것이 맞았죠. 잘 풀려서 다행이지 만약 농구로 성공하지 못했다면 죽도 밥도 아니게 되는 거잖아요. 그것 누가 책임져주겠어요. 어쨌거나 저를 설득하는 것은 힘들다고 판단한 농구부 선생님께서는 이후 부모님 쪽으로 방향을 바꿨고 이는 좋은 전략이었죠. 부모님 말씀이라면 잘 듣던 저는 결국 창신초등학교에서 숭의초등학교로 전학을 가면서 농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그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만약 농구를 안했다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가끔 궁금하기는 해요. 물론 후회는 없어요. 농구를 안했다면 전 국민이 알아주던 박찬숙도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농구선수로 살아온 삶에 대해서는 충분히 만족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고있어요.
Q.초등학교때부터 키가 많이 컸다고하는데, 이런 경우 신장만으로 먹고들어가는게 많아서 기술적인 부분에 소홀한 경우도 생기다던데, 결과적으로 그러지 않았어요.
일단 저는 키가 크다는 이유로 농구를 시작했잖아요. 또래들보다 항상 신장에서 위에 있어서 그런지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어유, 멀대야’, ‘키가 크면 느릴 수밖에 없어’ 같은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사실 듣기 싫었습니다. 키가 커서 농구는 시작했지만 키가 커서 농구를 잘한다는 소리는 정말 싫더라고요. ‘키가 커도 빨리 달릴 수 있고, 키가 커도 기술이 좋을 수 있잖아’ 그런 오기가 생기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죠. 그래서 저는 저랑 비슷한 스타일과는 파트너를 안했어요. 키작고 빠른 선수들이랑 주로 함께 훈련하면서 그들의 스피드를 따라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계속 같이하다보니까 언제부터인가 순발력, 기동력 등에서 비슷하게 따라가고있더라고요.
Q.어쩐지 센터포지션을 맡고 있으면서도 중거리슛, 패싱게임 등에 고루고루 능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는요. 다시 농구를 한다면 가드가 하고 싶어요. 내가 점수를 내는 것도 좋지만 좋은 타이밍에 패스를 찔러줘서 동료가 득점하도록 도와주는 어시스트도 정말 좋더라고요. 그만의 짜릿함이 있어요. 어시스트라는 것은 혼자 잘해서는 안되잖아요. 어시스트가 기록되었다는 것은 동료가 득점을 성공시켰다는 것이니까 두배로 기쁘죠. 그래서 진작부터 그러한 플레이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그 결과 국제경기 등에서 상대 수비진을 한꺼번에 속이는 노룩패스도 종종 뿌리게됐어요. 그때는 국내에서 그러한 플레이를 하는 선수가 별로 없었던 시절이에요. 농구의 길이라고 하죠. 언제부터인가 그런 것들이 눈에 보이더라고요. 안보고 있어도 등 뒤로 상대와 우리 편의 움직임같은게 그려질 때가 많아요. 그럴 때면 몸을 돌릴 필요도 없이 바로 보지도 않고 패스를 넣었는데 상대팀 수비가 손도 못 쓰고 무너지는거에요. 이거구나 싶었죠. 하지만 여기서 잊어서 안될 것은 기본기에요. 화려한 플레이라는 것은 탄탄한 기본기가 갖춰졌을 때 가능합니다. 기술을 위한 기술이 되어서는 안되죠. 기본기도 제대로 닦지 않은 상태서 그냥 이것저것 수박겉핥기 마냥 기술을 배웠을 경우에는 깊이도 없거니와 수비 등에 막히거나 그러면 무용지물이 되요. 일단 기본이 되어야 여러 기술을 구사함에 있어 자연스러움을 갖추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본기가 갖춰져야 응용기술도 나오기 되죠. 그래서 혹시 지도자로 다시 현장에 나가는 경우가 생긴다면 첫째도 기본기 둘째도 기본기, 이 부분을 먼저 만들어 놓는데 심혈을 기울일 생각입니다.
“캐나다, 유고에 숙적 중국까지 격파! 지금 생각해도 기적입니다”
Q.어렵사리 1984년 LA올림픽에 출전했잖아요. 그래서 더 잊지 못할 은메달일 듯 싶어요.
아유, 평생의 훈장이죠. 죽는 그 날까지 잊을 수 없을겁니다. 질문한 것처럼 올림픽 은메달도 대단한 업적이지만 나가게 된 과정이 정말 험난하고 드라마 같았던지라…, 그래서 더 가슴속에 깊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무릎 인대 수술로 대표팀을 포기할 생각을 가지고있었고 프레올림픽에서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면서 사실상 LA 올림픽 출전이 물건너갔었죠. 다행히 공산국가들 보이콧으로 인해 저희가 나가게 됐는데 다들 ’뭐하러 나가냐? 국가 망신 또 시키려고 하냐‘는 등 부정적인 분위기가 가득했어요. 어쨌거나 부랴부랴 준비도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출전한 것이죠.
Q.그런 상황에서 기적의 반전 드라마를 만든 것이네요?
준비가 안된 것도 문제였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자신감이 뚝 떨어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잘해서 출전한 것도 아니고 다분히 운이 따라서 출전하게 된 것인데 본선에서 만나야 될 상대 팀들도 워낙 쟁쟁한지라 ’1승이나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컸죠. 캐나다, 유고슬라비아, 호주, 중국 등 경쟁자들의 면면이 너무 쟁쟁했어요. 상대적으로 그나마 호주가 해볼만하다고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그때는 호주가 지금처럼은 강하지 않았어요. 물론 그것을 감안한다 해도 저희가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었지만요. 어디까지나 그나마라는 것이죠. 어쨌거나 믿는 것은 엄청난 훈련량이었습니다. 올림픽 출전이 결정되고 그야말로 맹훈련을 했어요. 훈련강도요? 다들 소속팀에서 한 체력했다는 선수들이 부들부들 떨었을 정도로 엄청났어요. 전력에서는 힘드니까 조직력이나 체력전으로 승부를 봐야 했으니까요.

Q.힘든 훈련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감이 없었어요. 우여곡절 끝에 출전하게는 되었지만 ’괜스레 또 망신당하는 것 아니야‘라는 생각부터 들며 이후에 불어닥칠 후폭풍이 걱정됐죠. 프레올림픽에서의 부진으로 국가대표팀에 대한 신뢰도가 땅에 떨어졌었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대표팀에 안들어가려고 했어요. 자신감도 없고 몸 상태도 최악인지라 합류해봤자 도움이 안될 것 같았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조승연 감독님이 계속 설득을 하셨고 마음을 다잡고 결국 합류하게 된거죠. 이왕지사 다시 해보기로 마음먹었으니 어쩌겠어요. 그대로 무너질 수는 없잖아요. 동료들이 저를 보고 무척 반가워하면서 힘을 내는거에요. 힘든 상황에서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거죠. 그래 한번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죽기 살기로 훈련에 임했고 그때 만들어진 체력, 조직력 그리고 정신력이 은메달이라는 값진 결과물로 돌아온 것 같아요.
Q.첫게임 캐나다전을 기점으로 기적같은 승리가 이어졌어요.
그렇죠. 어느 한팀 만만히 볼 수가 없던 상황에서 캐나다랑 붙었는데 접전 끝에 승리를 가져갔어요. ‘이겼네? 할 수 있겠다’ 선수단 전체에 자신감이 확 퍼졌습니다. 그 기세를 몰아서 유고슬라비아, 호주까지 이기면서 4강에 진출했죠. 준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숙적 중국이었습니다. 수시로 아시아 무대 결승에서 붙던 상대죠. 그들을 이기면 우승이었고 지면 준우승이었던 시절이었어요. 신체조건에서 차이가 상당했던지라 늘 두려운 상대였죠. 무엇보다 저희는 매경기 결승전이다 생각하고 온힘을 다 짜내서 달려왔어요. 만약 중국에게 진다면 3, 4위전에서 승리한다는 보장도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밤새 중국을 어떻게 이길까로 고민하다가 잠을 설쳤어요. 꿈속에서 경기를 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다행히 당일 컨디션이 상당히 좋았고 최상의 결과까지 얻어냈죠. 신장에서 밀리니까 그들보다 한발 더 뛰는 이른바 활동량으로 승부했습니다. 상대 센터를 막내 (성)정아랑 같이 협력수비로 막아내고 공격 때는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정말 혈전이었습니다.
Q.요즘은 국가대표에 대한 마음이 예전같지않다는 얘기도 있어요.
맞아요. 예전선수들하고 비교하면 꼰대다 그렇게 말할지 모르겠지만 국가대표에 임하는 자세는 확실히 떨어진 것 같기는 해요. 지금 선수들도 어려움은 있겠지만 여러 가지 환경에서 훨씬 좋아진 것은 사실이잖아요. 의료나 재활시스템의 발달은 물론 부상 투혼을 강요하지 않는 분위기 등 농구하기 정말 좋은 시대가 왔어요. 과거에는 별다른 보상이 없어도 국가를 대표해서 가슴에 태극기를 단다는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동기부여가 됐어요. 국제대회 나가서 신체조건이 월등한 흑인, 백인선수들과 맞서서도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싸웠고요. 솔직히 배구의 김연경이 부러워요. 빼어난 기량에 더해 엄청난 투지와 열정 거기에 리더십까지 강해서 배구 전체의 인기와 위상을 끌어올리고 있잖아요. 타 종목선수지만 존경스럽기까지 해요. 농구인 출신인 제가 김연경 때문에 배구 경기도 종종 본다니까요. 김연경의 등장으로 인해 여자배구의 인지도나 입지가 엄청 상승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김연경이 좋아도 저는 천상 농구인인지라 농구 쪽으로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자 농구 쪽에서도 김연경처럼 중심이 되어줄 선수가 한명 나왔으면 좋겠어요. 구심점이 확실하면 주변으로 좋은 선수들이 뭉치게 되고 서로간 시너지가 제대로 일어나거든요. 배구를 낮게 보는 것은 아니지만 저희 때 여자농구의 위상은 구기 종목 중에서도 단연 원탑이었어요. 그때처럼 다시금 성적과 인기를 모두 잡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Q.1985년 3월 10일 태평양화학에서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이후 결혼을 했어요.
소속팀과 국가대표팀을 오가며 고생하다 보니까 몸은 물론 마음까지도 지치더라고요. 당시 기준으로 결혼할 때가 되기도 했고요. 주변에서는 더 뛰라고 했지만 뭐랄까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 미국 등에서 스카웃제의도 들어왔지만 멀리까지 가는 것도 낯설고 두려웠던지라 거절했죠.(당시는 WNBA가 없던 시절이다) 아마 지금 마음가짐 같았으면 여러 가지 도전도 했을 겁니다. 이후 출산하고 나서 돌아와 대만에서 4년 뛰고 국내 무대에서도 선수생활을 이어갔지만 당시에는 복귀 생각 같은 것 하지 않았었습니다.
Q.어머님이 아버님보다 크셨잖아요. 본인도 남편분보다 키가 컸던 것 같아요.
당연하죠. 제가 10cm나 더 큰데요. 저는 우리 엄마가 장군처럼 크셨고 아빠가 갸름하시고 그러셨거든요. 그래도 별로 어색하다던가 그런 것은 느끼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 역시 남자 키 그런 것은 별로 따지지 않았습니다. 외려 제가 커서 그런지 저보다 큰 사람하고는 결혼 안한다고 했거든요. 작은 사람이 좋았어요. 그리고 생각해보면 당시에 저보다 큰 남자가 얼마나 있었을까 싶기도 해요. 있기는 했겠지만 그렇게 되면 선택의 폭도 엄청 좁아졌을 것 같고요. 예전에 구 소련에서 키 큰 사람끼리 결혼시켜서 운동하기 적합한 체격을 가진 아이를 의도적으로 출산하고 그랬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저한테도 비슷한 얘기가 오갔어요. 상대는 운동선수였죠. ‘그건 아니에요. 선생님’하면서 거절했던 기억도 납니다.(웃음)
Q.마지막으로 농구인 박찬숙을 사랑하고 응원하는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릴께요.
농구를 하면서 행복한 기억이 훨씬 많지만 힘든 순간도 간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금 용기를 낼 수 있게 된 것은 팬분들의 따뜻한 성원 덕분입니다. 제가 농구를 하기 정말 잘했다고 느끼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하고 있던지간에 저는 영원한 농구인 박찬숙이며 오늘의 저를 있게 해주신 팬 여러분들은 잊지못할 소중한 존재입니다. 늘 감사한 마음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가을입니다. 풍성한 결실의 기운이 가정곳곳으로 들어가 좋은일 가득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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