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없이 강한 남자…, 그래도 충분히 시끄러웠지않나요?

김종수 / 기사승인 : 2022-08-23 07:4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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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50)] '소리없이 강한 남자' 추승균

 

 

추승균(48‧190cm) SPOTV 해설위원은 현역 시절 ‘소리없이 강한 남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실력과 공헌도에 비해 덜 알려져서 안타깝다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는데 결과적으로 그 어떤 별명보다도 많이 알려졌고 또 오랫동안 남고 있다. 처음의 의도(?)와 다르게 정말 소리가 많이 나다 못해 요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보면 해당 별명은 추위원의 현역 시절을 그대로 함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화려함보다 실속있는 플레이를 추구하고 팀을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스타일상 처음부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유형은 아니었다. 묵묵하고 성실하게 경기에 임한 끝에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팀 성적까지 함께 올라간 이후 숨은 공신으로 재발견되고 그 과정에서 뒤늦게 인정받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물론 추위원의 공헌도를 잘 아는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스타성과 무관하게 신뢰도가 매우 높았다. 처음에는 감독을 즐겁게 하다가 나중에는 팬들까지 함께 즐겁게 하는 플레이어라고 하는게 맞겠다. 그는 프로에서 은퇴하는 순간까지도 ‘성장에 대한 욕심’을 멈추지 않았다. 부산중앙고 시절 박훈근, 박규헌과 함께 빅3로 이름을 날렸지만 대세였던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가 아닌 한양대를 선택한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1학년 때부터 많은 경기를 소화하며 스스로 더욱 발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해당 선택은 신의 한수가 됐다. 팀 성적 등에서 손해보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으나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처럼 꾸준하게 발전하는 재능은 자리를 가리지 않고 빛났다. 한양대 전력의 절반이상이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부동의 에이스로 성장한 것을 비롯 졸업반 때는 전국 포워드 랭킹 1위로 우뚝섰다.


실력에 비해 다소 가려졌던 대학 시절과 달리 KCC(전 현대)에서 뛰던 프로선수 생활은 그 어떤 스타보다도 더 화려했다. 초반에는 유명 대학에서 명성을 날렸던 인기스타들에게 이름값에서 밀리는 느낌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장 앞서나가가 시작했다. 이상민, 조성원과 함께 현대왕조의 빅3로 명성을 떨쳐왔으며 이후 베테랑이 되어서는 강병현, 하승진, 신명호, 임재현 등과 함께 2차 왕조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KCC는 현재까지 챔피언결정전에서 5회 우승을 차지했는데 여기에 모두 관여되어있는 선수는 추위원이 유일하다. 그야말로 팀내 산역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끊임없이 팀에 자신을 맞춰나갔던 추위원의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한양대 시절 전방위에 걸쳐 북치고 장구치며 팀을 이끌던 독보적 에이스였다. 보통 이런 타입은 볼을 독점하던지 아니면 득점에서 핵심역할을 하려고 욕심을 내는 경우가 많다.


추위원은 달랐다. 최고의 정통파 포인트가드 이상민, 클러치 슈터 조성원 사이에서 묵묵히 궂은 일을 했다. 충분히 한팀의 토종 1옵션급 득점원 역할을 해낼 역량이 있었음에도 보조 공격수로서 이상민, 조성원을 도왔다. 수비나 팀플레이에 집중하며 팀내 밸런스를 맞춰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잘해주었다.


최고참급으로 올라섰던 선수 생활 말년에는 다른 스타일로 변신에 성공하며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다. 공수겸장으로서의 가치는 여전했지만 아무래도 젊은 시절보다 활동량이 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보조리딩, 패싱게임에까지 눈을 뜨며 전천후 포워드로 활약했다. 역대 어떤 선수를 봐도 이 정도까지 플레이스타일을 바꿔가며 팀에 공헌한 선수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이렇듯 대단할 정도의 꾸준함은 탄탄한 기록으로도 잘 드러난다. 정규리그 통산 738경기 동안 평균 13.5득점, 2.3리바운드, 2.8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 통산 1만 득점, 자유투상 6회, 최우수 수비상 2회, 수비 5걸 7회 등 쟁쟁한 업적을 남겼다. 이정현(삼성)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최다 연속 출전 기록 역시 추위원이 가지고 있었다. 이같은 성적을 모두 한팀에서 이뤄낸 원클럽맨이라는 점도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Q.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시즌 중에는 SPOTV에서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는 것은 다들 아실테고요. 지난 1월부터 준비를 시작해 이번 달부터 아산 지역에서 유소년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글로우 아카데미라고 에밀리앤글로우와 글로우스포츠를 통칭하는 단체인데 영어, 스포츠 전문가들이 의기투합, 전문성과 현장 경험을 융합해 기존에는 없던 차별화된 미국의 교육환경을 국내에서도 실현해 보고자 설립됐습니다. 본래는 에밀리앤글로우라는 영어유치원이 먼저 운영되고 있었어요. 그 아카데미에서 스포츠 사업도 확장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고 염상훈 대표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 끝에 농구교실도 운영하자는 쪽으로 뜻이 합쳐지면서 총감독으로 함께 하게 된거죠.

​Q.엘리트 농구가 아닌지라 성적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즐기면서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을 것 같아요.
음, 분명 그런 점도 있죠. 아무래도 엘리트 농구에 비해 그런 쪽의 압박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농구에 대해서만큼은 한결같이 진지했던 제 현역 시절의 성향이 묻어나는 부분이 있는 듯 싶어요.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농구를 가르친다는 얘기는 아니에요.(웃음) 즐기면서 하되 기본기도 확실히 쌓아가면서 각자의 성향을 살려나가는 쪽에 신경을 쓰는 거죠. 모든 플레이의 밑바탕에는 기본기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고급 스킬을 배우고 타고난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기본기라는 기초공사가 제대로 되어있지 못하면 위로 뻗어 나갈 수 없습니다. 외려 어설프게 잘못된 방향으로 가거나 기량 향상이 정체될 수 도 있어요. 그것을 직간접적으로 충분히 경험해본지라 저는 어떤 지도자보다도 기본기에 대한 강조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Q.최근 농구인 2세들이 뜨고 있던데, 농구하는 자제분이 있을까요?
고등학교 1학년,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이 있지만 농구는 전혀 하고 있지 않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신체조건, 여러 가지 농구 환경 등에서 2세들이 좋은 점은 분명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해당 종목에 대해 관심이 많고 성향이 맞아야 하는 것이죠. 저희 아들들은 다른 길을 원했고 저역시 억지로 강요하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농구하고는 인연을 맺지 않았습니다.

Q.해설위원을 하시면서 이미지가 많이 바뀌었어요. 본래 그렇게 흥이 많은 성향인줄 몰랐다는 의견이 많더라고요.
하하핫…, 간혹 저도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뭐 크게 눈에 띌 정도로 활발하거나 말을 잘한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저 사람이?’. ‘그동안 봤던 모습과는 좀 다른데’등의 반전 느낌 때문에 더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닐까 싶어요. 빨간 바구니가 있다고 치고 거기에 과일을 담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주황색 과일을 넣을 때보다 파란색 과일이 들어갈 때 더 눈에 띄기는 할거에요. 팬들 눈에 비쳤던 저는 파란색 과일이었나봐요. 제가 많이 무뚝뚝하고 과묵한 이미지였나? 싶기도 하면서도 사람은 어차피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으니까 앞으로도 그냥 편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비쳐나갈 생각입니다.


 

 


Q.거기에는 개인적인 노력도 많이 들어가고 있다는 말일까요?
일단 해설위원을 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리 현장에서 선수, 지도자 생활을 했어도 해설위원은 또 다른 영역이니까요. 단순히 내가 아는 것을 나누는 것과 그것을 잘 풀어서 시청자분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차이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격적으로는 예전의 저와 별반 차이는 크지 않아요. 제가 농구를 접근하는 자세가 워낙 진지한 편인지라 선수 시절에는 잘 웃지도 않고 그래서 무뚝뚝한 이미지도 많이 쌓였을거에요. 실제로 농구를 하면서 장난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본래 성격은 그 정도는 아니에요. 끼가 넘치고 그러지는 않아도 어디가서 말도 잘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도 좋아해요. 해설을 하다 보면 좀더 적극적인 제 모습이 많이 나오는 합니다. 아무래도 시청자분들에게 상황을 알려줘야하잖아요. 거기서 덤덤하게 상황 설명만 하면 너무 무미건조하잖아요. 필요한 순간에는 리액션도 하고 목소리 톤도 올려가 줘야 상황에 대한 집중도도 높아지고 더 봐주지 않을까요? 선수나 지도자 시절 추승균이 거기에 맞는 모습으로 활동했듯이 해설위원 추승균 역시 해설위원에 어울리는 색깔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보는게 맞을 듯 싶습니다.

Q.역대급 FA시장을 거치면서 각 팀 별로 전력 변화가 많아요. 다음 시즌 주목할만한 팀은 어디가 있을까요?
농구는 야구와 다르게 선수 한두명이 바뀐 것만으로도 전력이 확 달라지는게 사실이에요. 거기에 외국인선수가 팀전력에 끼치는 영향력도 매우 크고요. 그런 점에서 다가올 시즌은 더욱 예측이 힘들 것 같아요. 말씀하신데로 FA시장이 워낙 뜨거웠던지라 굵직한 선수들의 이동이 많았고요. 외국인선수야 늘 중요한 부분이고…, 무엇보다 아시아쿼터제를 통해 필리핀, 일본 선수들이 합류한 변수를 무시할 수 없을 듯 싶어요. 예전 혼혈귀화선수들이 들어왔을 때처럼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어떤 영향력을 끼칠지 짐작하기 어렵잖아요. 기량에 더해 해당리그에 대한 적응여부도 있을테니까요.

​Q.개인적으로 우승후보는 어디를 꼽고 계시나요?
보통 우승후보를 꼽을 때 직전 시즌 결승전에서 격돌한 팀을 많이 거론하죠. 그런 점에서 SK와 KGC를 주목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 팀들마저 전력변화가 꽤 있었어요. SK는 주축 주전이 상무를 갔고요. KGC같은 경우는 간판 슈터의 이적과 더불어 그동안 팀을 강호로 이끌었던 감독마저도 타팀으로 이동했잖아요. KCC가 FA시장에서 큰손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기존 주축 선수 둘이 한명은 상무로, 한명은 타팀으로 이적한 상황인지라 직전 시즌 대비 플러스가 될지 마이너스가 될지는 짐작하기 어렵죠. 그 외 플레이오프 탈락팀들도 적지 않은 보강이 이뤄졌고요. 보통 개막 후 1라운드 정도는 지나야 대략적인 윤곽이 나온다고 하잖아요. 어쩌면 다음 시즌은 1라운드 후에도 안개 정국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갑자기 키가 커지면서 가드에서 파워포워드로 포지션을 변경했습니다”

​Q.농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제가 같은 학년에서 제일 키가 컸을거에요. 하지만 저희 학교에는 농구부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친한 친구 사촌 형이 다른 학교에서 농구를 하고 있었는데 ‘키 큰 친구가 있다’는 얘기가 그쪽 학교까지 얘기가 전해졌나 봐요. 어느날 해당 학교 코치 선생님께서 찾아와서 ‘농구를 한번 해보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솔직히 그 당시에는 공부도 곧잘 했고 농구가 뭔지도 제대로 몰랐거든요. 1983년이니까, 축구 정도만 알았지 개인적으로는 야구도 솔직히 잘 몰랐던 시절이에요. 그냥 얼떨결에 해보겠다고 했고 4학년 때 농구부가 있는 그쪽 학교로 전학을 가서 농구공을 제대로 잡아보기 시작한 거죠. 그 뒤는 별것 없어요. 그냥 하던 것이니까 놓지도 못하고 계속하면서 오늘날까지 왔죠. 뭔가 그럴듯한 스토리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너무 밋밋했을까요.(웃음)

Q.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가드를 맡았다고 들었습니다.
농구를 하기 전에는 학교에서 손꼽힐 정도로 컷지만 농구부에 들어가 보니 그것도 아니더라고요. 거기에 더해 친구들은 쭉쭉 컸는데 저만 크지 않아서 어려움도 있었어요. 포지션이라는게 꼭 신장으로만 나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당시에는 신장에서 밀렸으니까 가드를 맡은 이유가 컸죠. 다행히 2학년 때 12cm가 크면서 파워포워드로 포지션을 바뀌게 되었습니다. 제가 맨발로 딱 190cm인데 지금 키가 그때 키에요. 갑작스럽게 키가 크면서 성장통도 찾아오고 두어달 정도 쉬기도 했지만 농구 인생을 돌아봤을 때는 정말 중요한 계기가 됐던 시기였죠. 키가 크면서 체격도 좋아지고 힘까지 붙다 보니 그때부터 농구가 더욱 재미있어졌거든요.

Q.스몰포워드도 아니고 파워포워드로 바꾼 것이면 적응하는데 힘들 수도 있었겠어요?
아니요.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어찌보면 저는 초등학교 때 운동을 잘 배운 케이스이죠. 처음 농구를 시작할 무렵에 선생님들께서 기본기를 엄청나게 강조하셨어요. 포지션에 상관없이 다 함께 드리블, 슈팅 연습을 하는 등 당장의 성적보다는 선수 육성 자체에 신경을 쓰셨던거죠. 그러다 보니 이후 중요한 순간마다 포지션 변경을 할 때에도 이른바 슬럼프같은게 오지 않더라고요. 이미 기본적인 부분에서 어느 정도 경험했기 때문이죠.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키가 컸다지만 그동안 플레이해온 스타일이 있는데 가드에서 갑자기 파워포워드로 뛰게 되면 조금 뜬금없잖아요. 하지만 그런 어색함이 전혀 없더라고요. 마치 예전부터 4번으로 나선 것 마냥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Q.정말 정석인 듯 싶은데 그렇지못한 경우도 많다고 들었어요.
그렇죠. 당시 선생님들의 방식은 특별할 것도 없이 그야말로 정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초등학생인 선수들이 나중에 얼마나 키가 더 클지 알수 없는 것이잖아요. 예를 들어, 지금은 또래 중에서 신장이 우월해서 센터를 보지만 거기서 신장이 멈춰버리게 되면 나중에는 공중에 붕 뜰 수가 있어요. 때문에 지도자는 그 모든 것을 감안해서 아이들을 가르칠 필요가 있는거죠. 저같은 경우처럼 포지션을 옮겨도 무난하게 살아남을 수 있게요. 하지만 말씀하신데로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죠. 거기에는 계약기간 등 지도자에 대한 처우문제도 있을거에요. 최소한 3~4년은 보장해줘야 자신이 뽑은 선수들을 성장시켜 승부를 볼 수 있어요. 거기에 대한 안정감만 있다면 초반에는 기본기를 탄탄하게 만들어놓고 이후에 기술을 보강시키는 지도방식이 가능해져요. 하지만 이른바 성적압박이 과하게 끼게 되면 상황이 달라지죠. 자칫 언제 짤릴지 모르는데 기본기 중심의 제대로 된 육성에 신경 쓸 수 있겠어요. 모든 초점이 당장의 성적을 내는게 맞춰질 수밖에 없을겁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죠.

 

 

 

“고려대 낙방설요? 한양대는 제 스스로 의지로 결정했습니다”

Q.본래 진학이 예정되어있던 고려대에서 포기를 하면서 공중에 붕뜨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게요. 간혹 인터넷 등에 올라온 글 등을 보면 ‘박훈근, 박규헌을 고려대가 선택하고 추승균을 포기해서 어쩔 수 없이 한양대를 갔다’, ‘거기서 추승균이 충격을 받아서 더 이를 악물고 농구를 했다’는 등의 저도 모르는 출처 불명 인생이야기가 있더라고요.(웃음)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농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양대 선택은 100% 제 의지에 의한 선택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고려대에서 어떤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어요. 부모님과 얘기가 있었을 수는 있겠지만 저는 한양대를 원했고 그대로 진로를 정하게 됐습니다.

Q.한양대를 선택한 것은 더 많이 뛰고싶었던 이유가 컸겠죠?
맞습니다. 당시가 농구대잔치 전성기였잖아요. 스타도 많았고 대학에도 정말 이름값 높은 선배들이 즐비했어요. 심지어 이후에 올라올 후배들도 쟁쟁했고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가 열심히 하는 것과 별개로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등 잘 나가는 대학으로 가게 되면 얼마나 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40분 내내 풀로 뛰면서 풍부한 경험치를 쌓기를 원했거든요. 잘나가는 3개 대학을 빼면 한양대가 제일 나아보이기도 했고, 성장을 위한 결단을 스스로 내린거죠.

Q.본래 궂은 일에 특화된 선수도 아니었을 텐데, 프로에 가서는 수비 등 이것저것 살림꾼 역할을 정말 잘해냈습니다. 능력을 떠나서 에이스 출신으로서 마인드 전환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렇죠. 주변에서 보면 자연스럽게 그냥 이어진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제 나름대로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이)상민이형, (조)성원이형같은 분들과 함께 뛰게 되면 3옵션이 맞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몸에 배인 플레이 스타일이나 성향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농구를 하다 보면 작은 습관 하나를 고치는 것도 시간이 꽤 걸리는데 이것은 개인적으로는 전체적인 수술을 해야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대학교 시절 공수겸장이라 칭하시는 분들도 많았지만 사실 당시의 저는 공격올인형 에이스에 가까웠어요. 수비를 못한다 잘한다를 떠나서 크게 비중을 두지도 않았고요. 매경기 공격에 에너지를 대부분 쏟았어요. 거기에 자유투도 별로 좋지 않았던 기억이 나요. 67%? 그 정도 되었을려나 싶네요.

 

 

 


Q.그럼에도 잘해내셨어요?
해야죠.(웃음) 프로에서 살아남으려면요. 다행히 형들께서도 배려를 많이 해줬어요. 저만 맞추려고 한게 아니죠. 제가 변화폭이 커서 그렇지, 형들 또한 팀에 맞는 조각이 되려고 여러 부분에서 양보하고 그랬습니다. 당시 신선우 감독님께서도 다양한 전략을 짜는 와중에서도 저를 이해시키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써주셨고요. 사실 자유투나 수비는 프로에 와서 많이 좋아진거에요. 슈팅같은 경우 고등학교 때 많이 닦아져서 대학교에서 잘 써 먹었지만 나머지 부분은 프로입성 후 변화하는 과정에서 업그레이드된 것이 맞습니다. 외국인선수도 있는 상황에서 상민이형의 패스나 리딩은 팀의 1옵션이 될 수밖에 없어요. 거기에 성원이형은 국내 최고 3점슈터중의 한명이었고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팀내 주포 경쟁을 어찌할 수 있겠어요. 수비 등 궂은일에 집중하는게 맞고 더불어 공격기회가 많이 오지 않는 특성상 정확도가 중요해서 자유투 하나에도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Q.3번 경험이 거의 없음에도 프로에서 스몰포워드로 정착을 했고요.
앞서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포지션 변경을 할 때 찾아오는 슬럼프가 거의 없었던 케이스입니다. 농구를 시작할 때부터 기본기 위주로 기초를 잘 닦아놓은지라 가드, 포워드 무엇을 보던지 적응을 잘했죠. 중2때 가드에서 파워포워드로, 프로에서 스몰포워드로 바뀌는 과정에서도요. 대학교 때까지는 장기인 미들슛을 앞세워 4번으로 뛰는게 어렵지 않았거든요. 신장이 크지는 않았어도 어지간한 동포지션 빅맨들과 부딪혀도 힘으로 크게 밀리지 않았고요. 하지만 프로에서는 다르잖아요. 일단 외국인선수가 있고 대학때 센터보던 선수들 상당수가 4번을 보는 경우가 많아 제가 그들과 매치업된다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다행히 발도 느리지 않고 그래서 성공적으로 스몰포워드 변신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3번이 안됐다면 프로무대에서 살아남지못했거나, 아니면 그저그런 식스맨 정도로 커리어를 마쳤을지도 모를일이죠.

Q.프로에서 손꼽히는 누적기록을 쌓기는 했지만 수비가 아닌 공격에만 집중했다면 기록에서 더 좋았을텐데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것은 아닐거에요. 한 경기씩만 따져보면 수비에서 쓸 에너지까지 공격에 투자할 경우 좀 더 나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선수 커리어 전체를 따져본다면 상황은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수비에서 힘을 아낀다고 그게 다 공격에서의 시너지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농구는 수학이 아니잖아요. 국어나 철학도 될 수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흔히 말하는 과학으로도 표현되니까요. 수비를 하게 되면 얻게 되는게 많아요. 상대의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도 읽어야 되니까 나중에는 공격에서도 도움이 되요. 이 선수를 상대로는 내가 어떻게 공격을 해야겠다는게 느껴집니다. 연차가 적을 때는 잘 보이지 않지만 5~6년 경험치가 쌓여가다 보면 그런 눈이 떠진다고 할까요. 때문에 공격과 수비는 따로 떨어트려 놓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함께 묶어서 가야 할 부분인 듯 싶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공격은 물론 수비에서도 열심히 했기에 감독님들도 기회를 많이 주시고 덕분에 저도 오랜 기간 코트에서 뛸 수 있지 않았을까요.(웃음) 수비 열심히 하는 선수 싫어하는 감독은 없습니다. 내가 아닌 팀이 원하는 농구에 맞출 수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 되기도 하니까요.

 

 


Q.3점슛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미들슛을 정말 잘 던졌습니다.
대학교 때까지 4번을 봤던지라 3점슛은 많이 안쏘는 유형이었습니다. 미들슛이야 주특기였지만요. 하지만 프로에 와서는 팀을 위해서도 저를 위해서도 3점슛을 좀 더 쏴야 할 필요성을 느꼈어요. 그래서 찬스가 나면 망설이지 않고 던지려고 했고요. 다행히 미들슛 위주의 공격 스타일이 팀에서도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성원이형은 3점슛 아니면 돌파아니에요. 저랑 공격적인 부분조차 겹치는게 별로 없었죠. 더불어 미들슛을 잘 던지니까 상대 팀에서도 많이 까다로웠을거에요. 당시에는 미들슛을 특기로 던지는 선수가 많지 않아서 수비하는데도 생소했을 것이고, 미들슛이 매치업 상대 머릿속에 각인되다 보니 빈틈을 이용해서 다른 공격을 하는데도 편했습니다. 더불어 자유투도 좋아지면서 파울하기도 까다로운 선수가 됐고요.

“추추추추? 그것 저 부르는 것 아니었습니다”

Q.신선우 감독에게서 받은 신뢰가 무척 깊다고 느꼈어요. 변화를 자주 시도하는 지도자였지만 ‘3번 추승균’만큼은 어떤 상황에서도 입지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었거든요.

감사한 일이죠. 프로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던 모습을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신인 시절에는 깨지기도 많이 깨졌어요. 저 역시 감독님 스타일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부던히 노력했죠. 이것저것 혼도 나고 배워나가다가 3년차 들어서니까 편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어쨌든 많은 면에서 배우고 변화하기 위한 그 시기가 있었기에 빠르게 프로에 적응하면서 실력을 쌓아나갈 수 있었던 듯 싶어요. 당시에는 단신 외국인선수 제도도 있었잖아요. 말이 단신이지 신체조건 등에서 저희보다 월등히 좋았거든요. 매번은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외국인선수와 매치업될 때도 있는지라 웨이트 트레이닝도 열심히 했고요. 딱 부딪혀보면 힘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이 느껴지거든요.

Q.작전타임 도중 신선우 감독이 선수들을 향해 ‘추추추추~’하는 추임새를 넣으면서 말을 시작할 때를 자주 봤어요. 혹시 선수 추승균을 부르던 것은 아니었죠?
하하하핫…, 아닙니다. 아무리 중용한다해도 매번 그렇게 저를 애타게 부르겠습니까. 뭐랄까 정확한 발음을 못하겠네요. 그렇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정확히 하면 추추추추는 아닐겁니다. 어쨌거나 신감독님만 그런게 아니라 그런 추임새를 넣는 분들이 예전부터 많이 계셨어요. 일종의 ‘주목’, ‘자 나를 쳐다봐’ 그런 의미라고 보면 맞을거에요.

Q.함께 뛰어본 외국인선수 중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선수를 꼽아주세요.
어, 일단 선수로서 함께 뛰어본 외국인선수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우승에 공헌한 케이스겠죠. 그만큼 잘해줬으니까 우승도 할 수 있었던 것이고요. 먼저 조니 맥도웰은 누구나 인정하는 초창기 최고 외국인선수였잖아요. 기술적으로 엄청나지는 않았지만 웨이트 트레이닝 등이 본격화되지 않았던 당시, 엄청난 상체근육과 파워를 앞세워 그야말로 우겨넣는 농구의 진수를 보여줬죠. 몸싸움에서 워낙 압도적인지라 파워포워드임에도 어지간한 외국인센터까지도 밀어냈던 기억이 납니다. 맥도웰이 그렇게 골밑에서 우당퉁탕 잘해줬기 때문에 저나 성원이형도 외곽에서 슛찬스가 많이 날 수 있었고요. 재키 존스같은 경우 센터 포지션을 보면서도 당시 빅맨중 기동력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고 거기에 더해 3점슛까지 일품이었죠. 지금이야 그런 유형이 꽤 많지만 당시에는 정말 생소했습니다. 그 외, 많은 팬들이 역대 KCC 외국인선수 중 최고로 많이 언급하는 찰스 민랜드는 어쩌면 완성도 적인 면에서는 넘버원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기량은 물론 매우 영리하면서도 인성까지 좋은 편이었죠.

 

 


Q.현역으로 뛰던 그 시절 최고의 3번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본인을 꼽아도 됩니다. 솔직한 의견이 듣고 싶습니다.
잘하는 선수가 상당히 많았죠. 하지만 이런 부분같은 경우 비교가 어려운게 각자 플레이 스타일이 다르다는 점이 커요. 비슷한 유형이면 그중에서도 어느 정도 우열이 갈리겠지만 당시 날리던 3번들은 정말 개성이 제각각이었지 않나요? 이건 어떤 팀이냐에 따라 맞는 조각이 달라진다는게 현답일 듯 싶습니다. 예를 들어 수비는 좋은데 주포가 없는 팀은 3점슛 마스터 (문)경은이형이 단연 1순위겠고요. 같은팀 2번 자리에 (조)성원이 형이 있다면 같은 슈터보다는 (김)영만이형, (양)경민이형같은 공수겸장이 더 잘어울리겠죠. 같은 공수겸장 중에서도 영만이형은 전천후 공격수, 경민이형은 3점슈터 등 또 공격 스타일이 갈리고요. 저 같은 경우는…, 잘 모르겠습니다.(웃음) 다만 적응력은 좋은 편이니 어떤 역할을 맡아도 해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을 것 같기는 합니다.

Q.그럼 현재 최고의 3번은 누구일까요?
이것도 순위보다는 각자 플레이 스타일의 문제라고 봐야죠. 어느 포지션이 대세냐 하는 것은 뭔가 트랜드적인 요소도 큰 것같아요. 저희 때는 공격력 좋은 스윙맨이 많다 보니 상대적으로 이를 막기 위해 수비가 출중한 3번도 덩달아 많이 나왔어요. 그래서 스몰포워드 전성기라고 불렸는데 이후 가드진의 공격 참여가 많아지고 앞선 압박수비 등도 대세가 되다 보니 강력한 3번 수비수가 줄더라고요. 하지만 최근에는 장신화와 더불어 달리는 농구, 스페이싱 농구의 붐과 함께 좋은 스몰포워드가 정말 많아졌습니다. 일단 공수겸장하면 안영준이 가장 먼저 떠오르고 수비의 문성곤, 포텐의 양홍석 등을 언급 할 수 있겠죠. 문성곤같은 경우 수비로는 국내 최강이겠지만 공격력이 아쉽잖아요. 그래도 시즌이 거듭되면서 슈팅성공률도 올라가는 것 같고 무엇보다 2대2 능력을 키워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하는 것이야 다들 아는 것 이고 다른 부분에서 성장을 해야만이 한단계 업그레이드가 가능하겠죠. 전성현도 타팀으로 이적한 이상 좋든 싫든 문성곤의 공격 참여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고 봅니다. 송교창같은 경우는 최근 4번으로 쭉 플레이해왔는지라 3번으로서 다시금 경쟁력을 보여 주는게 중요하겠죠. 제가 직접 드래프트로 뽑고 3번으로 키우려 했던 선수이니만큼 꼭 정상급 스몰포워드로 한획을 그었으면 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Q.이조추 시절을 넘어 본인이 최고참급이 된 후 또 한번의 변신에 성공합니다. 저렇게 시야가 넓고, 패싱센스가 좋았을까 싶을 정도로 소위 포인트 포워드의 플레이까지 보여줍니다. 젊은 시절에는 봉인해두었던 것인가요?
그럴리가요.(웃음) 일찍부터 준비했던 거죠. 어차피 나이를 먹으면 신체 능력은 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젊은 시절이야 소위 활동량 하나만으로도 밥값을 할 때도 많았지만 노장이 되면 그런 플레이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요. 때문에 어느 정도 연차가 쌓였을 때부터 새로운 스타일에 대한 연구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 결과 베테랑이 된 후에도 좋은 활약이 가능했던 듯 싶습니다. 젊었을 때는 그냥 발로만 상대를 따라다니며 수비했다면 나이가 든 후에는 동선파악, 움직임 예측 등 좀 더 디테일하게 접근했죠. 공격시에도 마찬가지로 주변을 넓게 보며 플레이하려 했고요.

“에밋 지명, 당시 구성상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Q.KCC 팀 역사를 통틀어 선수로서 가장 화려한 커리어를 남겼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감독으로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못했죠.

제가 감독을 해야겠다고해서 감독을 한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감독대행을 맡게 되었고 그게 감독으로까지 연결되었습니다. 경험도 짧고 감독으로서는 어린 나이였지만, 그렇다고 그 좋은 기회를 안할래요 할 수도 없고요. 아마든 프로든 감독들이 제일 날개를 펴기 좋은 환경이 내가 발굴해 키운 선수들의 기량이 만개할 때에요. 당시 주축 선수들은 모두 저와 선수로 함께 뛰던 선수들이고 기량이 전성기에서 떨어지는 상태였어요. 제가 장단점을 체크하면서 성장시킨 선수들도 아니고요. 때문에 우승을 해야겠다 그런 생각은 없었고 하나씩 차근차근 준비를 하면서 순차적으로 우승에 도전할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짧은 시간 내에 정규리그 우승을 했고 그런 과정에서 팬들이나 외부의 기대치도 높아져 버렸습니다. 초보 감독 추승균이 아닌 우승에 도전하는 팀 감독으로서의 평가가 가득했고 그러한 과정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해 아쉬운 시선이 많이 쏟아졌던 듯 싶어요. 작전타임 중 노련하지 못한 표정 관리, 대사처리 등은 경험이 짧다 보니 베테랑 감독님들처럼 하기는 쉽지 않기도 했고요.

 



Q.2015 KBL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 당시 유일하게 1라운드에서 단신 외국인선수를 뽑으며 화제를 모았어요.

외국인선수를 뽑을 때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잖아요. 일단 기본적으로 기량이 빼어나야겠지만 어느 정도 기준치를 넘어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팀 사정과 어울리느냐’도 중요한 체크포인트가 되요. 에밋을 뽑을 때가 딱 그랬어요. 일단 당시 우리 팀에는 국내 최장신센터 하승진이 있었어요. 호불호는 갈릴 수도 있겠지만 하승진을 보유한 팀은 그를 중심으로 팀컬러를 짤 수밖에 없습니다. 묵직한 파워형 센터가 크게 아쉽지 않았던 이유죠. 그 외에도 당시 팀내에 이름값 높은 선수들이 다수 있었어요. 단순히 네임밸류만 보면 우승후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 선수들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전성기가 지나가는 시점이라는 사실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안정적으로 두자릿수 득점을 올려줄 선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당시 팀에 가장 시급한 것은 주득점원이라 판단했고 과감하게 에밋을 1라운드에서 선택하게된거죠. 득점능력에 있어서는 당시 드래프트 참가자 중 최상위권이라고 인정받았던 만큼 그 픽에서 안뽑았으면 2라운드에서는 어려웠을겁니다.

Q.에밋은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스타일이었어요.
그렇죠. 그러한 득점올인형 단신외국인선수들은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어요. 저도 알고 있었거요. 일단 현역 시절의 저나, 상민이형, 성원이형이 있을 때 같으면 혹은 승진이가 없었다면 에밋을 안뽑았을거에요. 당시 외국인드래프트에서 순번이 애매하기도 했고 이러저래 뽑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에밋의 장점은 높은 득점성공률이에요. 그래서 당시 선수들에게 자주 얘기했던 것이 이것저것 패턴 다해보다가 안되겠다싶으면 5초 정도 남겨놓고 에밋에게 공을 주라고 했어요. 하지만 에밋이 워낙 확률높은 득점력을 자랑하다 보니 일찌감치 볼이 가는 경우가 많았고 본의아니게 몰빵농구같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외부에서는 세세한 상황까지는 모르잖아요. ‘저 팀은 왜 맨날 에밋한테만 공을 주는거야. 다 보이잖아’라는 지적도 있었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도 분명 많았습니다. 제가 직접 뛰는 것도 아니고 조절하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Q.당시 KCC팬들의 비판 강도가 꽤 셌어요. 그래도 내가 이팀의 레전드인데, 너무 하는 것 아니야라는 생각은 안드셨나요?
콕 짚어서 누구에게 서운하다 싶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프로는 결과로서 증명해야하는 자리입니다. 잘하면 칭찬받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비판받는 것이잖아요. 팬들 역시도 팀에 그만큼 애정이 많았기에 아쉬움도 컸겠죠. 대신 선수 시절에 많은 응원을 받고 뛰었잖아요. 세세한 것까지 팬들이 아실 수는 없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을 겁니다. 제가 또 일일이 다 해명하는 스타일도 아니고요. 어쨌거나 당시 뜻대로 잘되지 않을 때는 누구에게 서운하고 그런 것이 아닌 개인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기는 했습니다. 앞서도 말했 듯이 너무 갑작스럽게 감독 자리를 맡아서 준비하지 못했던 부분도 많았던 것 같아요. 나중에 한발자국 떨어져서 보니까 더 잘 보이는 것도 많더라고요.

Q.마지막으로 농구인 추승균을 사랑하고 응원하는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릴께요.
데뷔부터 은퇴까지 한팀에서만 뛰며 정말 과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지만 지도자까지 마치고 나갈 때는 다소 아쉽게 인사를 드린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팬들께서 잘해주신 부분만 떠오르는 것을 보니 KCC와 저는 참 가족같은 관계였구나라는 생각도 듭니다. 더불어 현재 추승균이라는 사람은 유소년 농구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새로운 쪽에도 눈을 떠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프로농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아마농구 등 그 젖줄이 튼튼해야 되며 더 나아가 유소년 등이 활발해지면서 농구 자체의 풀이 넓어져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리며 거기에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작은 힘이나마 힘껏 나눌 생각입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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