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기사는 점프볼 5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감독상 수상을 축하한다. 연락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매번 연락 오는 사람들한테만 왔다. 메신저로 60~70개 정도 와있더라. 감독상보단 정규리그 우승했을 때 더 연락이 많이 왔다. 제일 많았던 건 감독 선임 발표됐을 때였다. 문경은 감독님은 우승했을 때 축하한다고 연락하셨다.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
와이프가 많이 좋아했다. 선수 때였으면 수상 소감 말할 때 조금 더 길게 얘기했을 텐데 감독이 가족 얘기를 길게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와이프는 언제 감독하냐는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내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감독하면 잘할 것 같다”라는 얘기만 했다. 상황을 잘 모르는 주위 사람들만 얘기했는데 주위에서 그런 얘기를 많이 듣는 게 스트레스였다. 돌아보면 문 감독님과 할 때 힘든 일도, 재밌는 일도 있었다. 문 감독님과 코칭스태프를 이루기 전 2, 3년이 힘든 시기였는데 그때 많이 성숙해졌다. 운영팀장을 1년 정도 맡을 때 배운 것도 있었다.
3라운드에 최준용의 역할을 바꾼 적이 있었다. 스크린을 많이 맡는 등 전체적으로 기록을 쌓기 힘든 역할이었는데 어떻게 설명하고 설득했나?
1라운드를 잘 치러서 선수들이 2라운드에 자만심을 가졌고, 그때가 팀으로선 위기였다. 그래서 3라운드 시작할 때 “정신상태를 바꿔야 한다”라는 말을 많이 했다. (최)준용이를 따로 불러 스크린을 강조했다. 못 받아들인 건 아닌데 표정은 안 좋았다. “감독님이 하라면 해야죠” 이런 느낌이었다. 결론적으로 준용이에게 스크린만 주문했던 게 아니다. 슛, 패스 등 원래 하던 역할에 스크린이 추가됐을 뿐이었다. 재미없어하는 시기가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잘 넘겨줬다. (최준용이 “문 감독님이 ‘문애런’이었다면 나는 ‘전초이’를 만들겠다”라고 말했는데?) 선수가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마운 것이지만 나는 특정 선수만 생각하는 게 아니다. 그러다 보면 팀에서 시기, 질투가 안 나올 수 없다. 준용이는 성격상 그런 걸 좋아하는 것 같다. 그만큼 나를 편하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런 건 없다.

성적보다 큰 목표로 뒀던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큰 부상 없이 시즌을 치르는 것, 두 번째는 어느 팀과 경기하더라도 가비지타임을 만들지 않는 것이었는데 둘 다 이뤘다. 막판까지 추격하는 농구를 보여줬다. 선수들이 경기를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길 바랐고, 백투백을 치른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팀은 누가 들어가도 평균치의 경기력을 유지해야 한다. 거기서 개개인의 능력으로 팀의 평균을 조금 더 높이는 것이다. 공격보단 수비에 해당하는 얘기고, 선수들에게 주입을 많이 했다. 많은 점수 차로 이기고 있는 경기에서 역전패가 없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감독은 선수에게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하고 이해시키느냐가 중요할 것 같다.
연습하던 대로 하라는 말을 많이 하고, 선수들도 항상 같은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한다. 경기 때만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건 안 통한다. 훈련 때도 긴장감을 계속 줘야 한다. 그러면 선수들이 이 타이밍에 내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안다. 그건 뭘 잘못하고 있는지 안다는 의미다. 그래서 훈련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선수들이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작전타임을 불렀을 때 ‘뭘 잘못하고 있구나’를 알고, 그래야 주입도 잘 된다. 선수들이 정말 헷갈릴 수 있는 부분만 잡아주는 편이어서 작전타임 때는 길게 얘기 안 한다. “수비 약속한 이것 안 되고, 공격은 패턴 이걸로 해.” 이러면 된다. 대신 경기 전 미팅에서는 말을 많이 한다. 그래서 시즌 초반에 너무 디테일해서 어렵다는 얘기도 나왔다. 이후 미팅을 15~20분에서 10분 이하로 줄였다.
부상 방지를 최우선 목표로 삼았고, 경기가 끝난 후 코트에서 스트레칭을 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오프시즌에도 선수들의 컨디션을 체크하기 위해 자주 코칭스태프 회의를 가졌던 것으로 알고 있다.
매일 아침마다 회의했다. 누가 몸이 무겁고, 훈련 끝난 후 치료를 받았고, 근육이 뭉쳐있는지 등을 파악했다. 이를 토대로 원래 했던 8주 체력 프로젝트에 변형을 줬다. 선수들의 상태에 따라 훈련 강도를 10에서 6, 7로 내리기도 했고 금요일 성과가 좋으면 토요일은 쉴 때도 있었다. 갑자기 무릎이 붓거나 허벅지 근육이 뭉치는 부상 없이 90% 이상 목표를 달성한 것 같다. 1군 코치 3명에게 각자 담당팀을 3팀씩 맡겼고, 허남영 코치까지 포함한 코치 4명에게는 우리 팀 선수들을 각각 4, 5명씩 담당으로 맡겼다. 매일 아침 담당 선수에게 이슈가 있거나 표정이 안 좋으면 담당 코치가 미팅을 하는 식으로 선수단을 운영해왔다.

국내선수는 신인 포함 19명, 외국선수까지 포함한 선수단은 총 21명이다. 이중 12명만 경기장에 간다. 남은 9명을 챙겨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부모와 같은 마음이 생긴다. 이들도 가족, 부모가 있기 때문에 나를 욕하는 선수도 있을 것이다. 선수는 대부분 본인보단 감독, 코치 탓을 하니까…. 그런 마음을 아울러야 하는데 모두 신경 쓰지 못해 미안하다. 컵대회를 통해 기량을 체크하고, 선수를 하나둘 빼낼 때 마음이 아팠다. 기량은 종이 한 장 차이지만, 팀을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골라내야 한다. 경기를 치르는 것보다 선수를 나누는 게 더 힘들었지만, 나는 돌려 얘기하지 않는다. 앞에서 사탕발림으로 “언젠가는 쓰겠다”라고 안 한다. 이런 식으로 열심히 준비해보라며 희망은 준다. 나를 찾아온 선수가 있었는데 구체적인 예를 들며 경기에 투입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어쩔 수 없었고 미안한 부분도 있었지만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달래준 적도 없다. 그랬다면 그 자리에서는 나쁜 감독이 안 될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난 후 돌아보면 나쁜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거짓은 거짓을 낳는다. 나에 대한 서운함이 작을 일도 거짓말하면 나중에 이만큼 커질 수 있다. 나도 당해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은 절대 안 한다.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선수라고 꼭 농구로 예를 들지 않는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습관을 가져야 농구를 그만둔 후에도 힘든 걸 이겨내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다. “힘들겠지만 이겨내려고 노력해보자. 그러다 보면 트레이드든, 팀 입장에선 불행이지만 부상이든 기회가 올 수도 있다”라고 얘기했다.
시상식이 끝난 후 공식 인터뷰에서도 선수들을 먼저 챙겼다. 김선형, 안영준이 아무런 타이틀도 얻지 못한 게 아쉽다는 말을 남겼는데?
모든 감독님들의 마음이 똑같을 것이다. 내 선수가 상 하나라도 더 받으면 좋은 것 아닌가. (김)선형이, (안)영준이는 다른 팀이었다면 베스트5를 받지 않았을까. 둘 다 아무 상도 못 받는다고 해서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 팀은 우승해서 상을 많이 받았고, ‘SK잔치’라는 말도 나왔지만 선형이와 영준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노력했는데 나는 뭘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선형이는 손가락부상 여파가 있었던 부분을 많이 아쉬워했다. 지나고 돌아보면 별 거 아닌 일도 당장은 서운할 수 있다. 선배로서 경험을 얘기해줬다. 그래도 선형이는 멘탈이 강한 선수다. 다친 게 원망스러웠던 건 이틀이었다며 잘 추슬렀다. 멘탈이 정말 강한 선수라는 걸 이번에 다시 한 번 느꼈다. 영준이는 젊으니까 앞으로도 기회가 충분히 있을 것이다.
‘극대노’라며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도 화제였는데?
져도 화 안 낼 때도 많은데 내가 싫어하는 포인트가 있다. 절대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되고, 프로다운 경기력을 보여주는 게 당연한 건데 경기 전 미팅하며 준비한 걸 놓치는 것이다. 무엇보다 분위기싸움 지는 걸 제일 싫어한다. 꼬리 내리거나 상대 3점슛 들어갔다고 고개 숙이는 것. 밖에서 매 맞고 들어왔는데 고개까지 숙이고 있는 건 너무 싫다. 얻어맞거나 지고 있어도 상대를 잡아먹을 기세로 들어가야 하는데 분위기가 처지는 건 계속 뜯어고칠 것이다. 또 하나, 잘난 척하는 것. 흔히 ‘주접 떤다’고 하지 않나. 지는 게 화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가 제일 싫다.
농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초등학교 5학년 때 키가 커서 연희초에서 대방초로 전학을 갔다. 내가 어릴 땐 의무적으로 키가 큰 아이들을 등록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그 데이터를 보고 운동부 있는 학교에서 찾아가서 제의하는 식이었는데 그렇게 해서 테스트를 보게 됐다. 석주일, 박재헌도 같이 테스트를 봤던 선수들이다. 그땐 (석)주일이가 나보다 더 컸다. 몸 약하다고 불합격했는데 농구가 재밌어서 너무 하고 싶었다. 아버지도 하면 안 되겠냐고 말씀하셔서 농구부에 들어가게 됐다. 더 어릴 땐 유도를 3년 정도 했다.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나?
자랑하자면 잘했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는 경기 있어도 새벽까지 공부했다. 반에 60명 정도 있었는데 10 몇 등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친구들이 커닝했다고 의심해서 선생님 입회하에 혼자 재시험 본 적도 있었다. 의심받아서 울었는데 재시험에서도 비슷한 점수가 나왔다. 너무 자랑하는 것 같다(웃음). 중학교 때까진 열심히 했는데 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수업 자체를 못 따라가겠더라. 경기도 많았고, 그러다 보니 진도가 확 처졌다.
선수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대학 4학년 때 주장을 맡아 정기전에서 이겼던 게 가장 먼저 기억난다. 농구부 인기가 워낙 많을 때였고, 정기전에 따라 1년 훈련이 천당과 지옥을 오갈 때이기도 했다. 정기전에서 지는 건 곧 죽음이었다. 1997 ABC(현 아시아컵) MVP, 2002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도 기억에 남는다.
현역시절 챔피언결정전에서 SK를 꺾고 우승한 2001-2002시즌 대구 동양(현 고양 오리온)은 KBL 역사상 가장 강력한 라인업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팀으로 꼽히고 있다. 동양 시절의 우승을 돌아본다면?
우승한 건 좋았는데 개인적인 경기력은 안 좋았다. 부상 때문에 내 기량이 온전히 나오지 않았다. 오프시즌에 입은 종아리부상이 회복이 안 돼 참고 뛴 시즌이었다. 스포트라이트도 (김)승현이, 마르커스 힉스에게 집중됐다. 우승은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커리어가)꺾이는 건가?’란 생각에 만감이 교차했다. 나나 (김)병철이나 마찬가지였다. (동양은 역대 최강의 팀인가?)최강까진 아니었던 것 같다.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 물론 그땐 어느 팀과 붙어도 이길 거란 자신이 있었다.
2002 부산아시안게임, 2014 인천아시안게임 가상의 맞대결도 농구 팬들에겐 영원한 떡밥일 것 같다.
선수 면면을 봤을 땐 2002년이 이길 것 같다. (김)종규, (오)세근이도 있지만 (서)장훈이의 위력이 더 세지 않을까. 방성윤, 문경은, 이상민도 있었다. 비슷비슷할 것 같은데 당연히 내가 속해있는 2002년을 택하겠다(웃음).

나는 선수였기 때문에 정확한 구단 입장은 모른다. 구단을 운영하기 위해선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승현이는 당연히 못 옮기고, 병철이도 대체불가였다. 반면, 내 포지션은 벤치멤버로 (박)훈근이가 있었다. 셋 다 잡을 수 없고, 나는 1년 뒤 FA이기도 했다. 당시엔 서운할 수 있고, 선수라면 당연히 섭섭한 일이었지만 지금 사심 없이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다만, 건네 들은 시점이 안 좋았다. 공식발표는 아니지만 우승 납회식에서 기자들이 구단 관계자에게 들었고, 그 자리에서 친한 기자가 나에게 알려줬다. 기분이 상해서 우승여행(하와이)도 안 갔다. 나중에 한편으로는 반성도 했다. ‘내 행동이 잘못됐나? 오죽하면 나를 보낼까? 단 한마디 얘기도 안 하고?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었는데?’ 아쉬움이 남았지만 내가 좀 센 편이었다. 그래서 동양도 그렇게 결정한 게 아니었을까.
선수생활 마무리는 썩 유쾌하지 않았다. 2008년에 FA가 됐지만 결국 은퇴했는데?
벤치만 있다 경기가 끝난 날도 있었고, 2쿼터에 외국선수가 1명 뛰던 시기에는 2쿼터만 잠시 뛰기도 했다. 요즘처럼 외국선수가 1명만 뛰었으면 더 재밌게 농구했을 것 같다. 선수생활 막판에 부상이 있었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자부심을 가졌던 점이 있다. 외국선수 2명이 같이 뛰던 시절이라 나와 같은 4, 5번은 다 죽었다. 반면 2, 3번이 급부상해서 연봉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나도 3번으로 전향했던 것이다. 그걸 두고팬들은 ‘키 큰데 나와서 슛만 쏜다’라고 하셨는데 어쩔 수 없는 변화였다. 전희철의 농구가 안 되니까 팬들 사이에서 욕도 먹고 평가도 안 좋았다. SK로 온 후에는 팀 성적도 안 좋았다. 그런 경험들이 지도자 생활하는 데에 도움이 됐다. 물론 선수라면 스타플레이어로 우여곡절 없이 잘 마무리하는 걸 바랄 것이다. 그렇게 선수생활을 마친 후 지도자를 해서 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때 어려운 상황도 겪어보고, 코치도 쉽게 안 됐고, 다양한 경험을 한 게 모두 자산이 됐다. 36살에 은퇴했다. ‘말년이니까 열심히 해보자’라며 시즌을 준비해서 몸이 진짜 좋았는데 갑자기 허벅지 앞쪽 근육이 파열됐다. 은퇴가 가장 힘든 결정이었다. SK에서는 더 이상 선수생활을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영구결번을 얘기해주셨다. 마침 2군이 출범할 때여서 2군 감독도 맡을 수 있었다. 선수생활 말년에 3, 4개월 동안 너무 고민을 많이 해서 탈모약까지 먹었다.
현역 연장 제안을 한 복수의 팀도 있었다.
뛸 순 있었지만 2년을 뛰고 싶었다. 제안을 한 팀은 1년을 지켜본 후 1년 연장을 결정하겠다고 했다. 당시 기사는 ‘돈 때문에 계약 안 했다’라고 나갔지만, 그건 아니었다. 선수로서 안정적인 2년을 원했는데 그 팀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이해하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런저런 말을 듣다 보니 내가 더 초라해지고 버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SK는 그때 (김)민수를 뽑았고, 국내선수를 12명만 등록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이런 대우를 받을 바엔 접자’라고 생각했다. SK에 남느냐, 다른 일을 하느냐를 두고도 고민했다. 지금처럼 선수 출신이 방송 활동을 활발하게 하던 시절도 아니었는데 해설위원을 비롯한 방송 섭외도 많았다. 정말 고민 많이 한 끝에 2군 감독을 맡은 것이었다. 2군 감독이지만 말단 코치이기도 했다. 1, 2군 훈련을 다 하다 보니 운동화를 아침 8시 30분에 신고 밤 10시에 벗었다.

눈물이 안 날 수가 없었다. 물론 나보다 더 화려한 선수도 많았지만 나름대로 잘했는데 말년이 너무 안 좋았으니까…. KCC 때도 안 좋았지만, SK로 온 후에는 팀 성적까지 안 좋았다. 아이들이 어릴 때라 가장으로서 고민이 많았다. 벌어놓은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닌데 ‘우리 가족들을 어떻게 책임질까?’ 싶었다. 은퇴는 영광스럽게 해야 하는데 초라한 모습으로 은퇴하는 것 같았다. 이전까지의 나는 코트에 나갈 때 당당했는데 은퇴식하는 날은 굉장히 위축되는 느낌이었다. 부모님도 와계셨는데 가장으로서 창피했다.
2010-2011시즌은 운영팀장으로 치렀다.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나?
정말 열심히 일했다. 컴퓨터를 어느 정도 다룰 줄 알았기 때문에 워드, 엑셀 등 문서작업은 어려움이 없었다. 매일 출퇴근하는 게 일반인들에겐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에겐 낯선 일이었다. T타워에 처음 출근할 땐 다들 나를 쳐다봤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왜 여기로 출근하세요?”라고 물어보더라. 말이 운영팀장일 뿐 업무는 주형근 팀장이 다 했다. 그 안에서 조금 역할을 준 정도였지만 새로운 업무에 대한 재미, 보람이 있었다. ‘1경기를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구나’라는 것도 느꼈다. 그래서 선수들이 더 열심히 뛰어야 한다. 아까 말했던 가비지타임이 나오면 안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나에 대한 사람들의 대우가 달라진 부분에 자존심도 많이 상했지만 그때 맷집이 생긴 것 같다. 지금은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위치가 됐지만, 뒤에서도 일을 해봤기 때문에 지금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때로 돌아가는 게 싫거나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에겐 특별한 경험이었다. 내가 마인드를 바꾸게 된 계기도 2번 정도 있었다. 자존심에 너무 큰 상처를 받아서 그만두려고 했다. 지금까지 버텨왔던 게 무너지는 것 같았다. 먹고 살기 어려워서 일했던 건 아니었다. ‘이제 더는 못하겠다’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영구결번, 코치의 기회를 줬던 SK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싶었다. 나를 많이 신경 써주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의리를 지키고 싶은 마음으로 버티다 G리그(당시 D리그)에 다녀오게 됐다.
G리그에서 배우거나 느꼈던 부분은?
전반적인 코칭스태프 시스템이 우리나라와 달랐다. 코치들도 분업화 시켜야 된다는 걸 느꼈고, 문 감독님과 함께 할 때 접목한 것도 많았다. 패스트 드로우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패스, 커트인, 스크린 등 패턴을 넣으면 완성된 움직임이 나와서 다이어그램 만드는 속도도 빨라졌다. 미국 간 후 2개월 동안 그 프로그램만 붙잡고 있었다. 다 영어여서 익히는 데에 시간이 더 걸렸다. 요새처럼 구글로 번역이 됐다면 더 좋았을 텐데…(웃음). 내가 원래 기계를 접하면 한 번씩 다 눌러보는 성격이다. 그러다 보니 마스터했고, NBA나 대학농구에서 많이 나왔던 패턴도 넣어보며 ‘통하겠구나’라고 느꼈다.
2017-2018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했을 때 기분은 어땠나?
진짜 좋았다. 물론 문 감독님을 보좌하는 역할이었지만, 팀을 만드는 데에 있어 내 지분도 꽤 있었다. 문 감독님만큼의 감흥은 아니겠지만 정말 기뻤다. 나도 엄청 울었다.
지난 시즌이 끝난 후 갑작스럽게 감독 제안을 받았는데?
코칭스태프끼리 모여 오프시즌 훈련 계획을 짜고 있었다. 차 소리가 나서 창밖을 보니 단장님, 국장님이 오셨다. 다들 ‘골프 치고 오시는 길인가?’ 하고 있었다. 문 감독님이 인사하고 오겠다며 내려가셨는데 단장님이 올라오시더라. “이제 전희철 코치가 감독이 됐다. 자세한 건 나중에 국장이 얘기할 것”이라고 하셨다. 문 감독님도 머리가 띵하셨겠지만, 우리에게도 전혀 언질이 없었다. “올 시즌 못하면 위험하다”와 같은 얘기도 없었다. 성적이 안 좋았기 때문에 다음 시즌은 잘 준비해보자고 하던 차였다. 단장님이 잘 부탁한다고 하시는데 머리가 하얘지더라. 감독이 되면 좋아해야 하는 건데 내가 지원서를 넣어서 되거나 했던 게 아니라 기분이 진짜 안 좋았다. 잠시 후 문 감독님이 올라오셨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내가 미안해지더라. 문 감독님은 “네가 해서 다행이다”라며 쿨하게 넘어가셨다. 그래도 10년 동안 감독-코치로 함께 했던 사이이기 때문에 그날은 기분이 별로 안 좋았다.

짐 빼는 게 귀찮았다(웃음). 여자프로팀으로부터 제의를 받은 것은 맞지만, KBL에 있는 팀으로부터 구체적인 제의가 들어온 건 없었다. “전희철은 건드려도 안 움직일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여자프로팀의 제의를 받았을 때 혹하긴 했다. 연봉이 3배 이상이었으니까…. 고민한 건 사실이지만 의리를 생각했다. 그 팀에게도 “SK에서 할 일이 남은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SK는 코치, 운영팀장에 미국 연수까지 보내준 팀이다. 나를 키워준 거나 마찬가지인데 돈 조금 더 벌겠다고 팀을 나간다? 내 스타일상 못할 행동이었다. 무엇보다 영구결번이 제일 컸다. SK에서 많이 뛰지도 않았는데 영구결번이냐며 욕도 많이 들었지만, SK는 그만큼 나를 인정해줬다. 정규리그 우승(2012-2013시즌)에 이어 2017-2018시즌 챔피언결정전까지 우승하며 ‘코치로서 할 건 다 했구나’ 싶었다. 만약 그 이후 제의가 왔다면 갔을 수도 있다.
감독이 추구하는 농구를 하는 것, 선수 구성에 감독이 맞춰가는 것 중 어떤 농구가 우선일까?
선수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를 파악하는 게 우선인 것 같다. 감독으로서 철학을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철학도 없었고, 그런 걸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코치하면서 느낀 건 내가 어떤 재료를 갖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농구를 하겠다’가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선수들이 뭘 잘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장단점을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SK에 대해선 충분히 파악이 됐다. SK의 단점은 멘탈이었다. 뭉치면 강한데 흩어지면 죽는 팀이었다. 중요한 건 내 자식도 잘 모른다. 그런데 여긴 돈 받고 일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을 끊어버릴 수도 있는 곳이다. 그래서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자식은 냉철하게 판단하지 못한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재료에 대해 모른다? 그건 일을 안 한 거고, 판단을 안 내린 거다. 거창한 철학 같은 것보단 내가 가진 재료를 파악하고, 어디까지 갈 수 있는 위치라는 걸 알아야 한다. 시즌 개막하기 전 주위에서 목표를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라고 했다. 다들 우승을 목표로 한다고 하지만, 그 목표가 깨지면 받는 타격이 크다. 그래서 목표는 점점 수정할 수 있는 게 좋은 것 같다. 우리의 목표는 우승이 아니라 몸을 만드는 게 먼저였다. 이후 연습경기에서 지면 안 됐고, 지더라도 선을 지키면서 져야 했다. 그렇게 단계를 거치는 것이다. 개막 할 때 목표를 6강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정답이다. KBL에서 우선적으로 인정을 받는 게 6강이다. 애초에 목표를 너무 높게 잡으면 오히려 희망이 없어진다. 선수들에겐 짧게 짧게 성취감을 느끼게 해야 한다. 막연히 이기라고, 우승하라고 하거나 졌다고 혼내면 선수들은 아무런 재미를 못 느낀다. 단계별로 성장하는 게 중요하다.
1라운드 목표는 무엇이었나?
5승이었다. 그 정도 멤버 구성은 된다고 봤지만, 구체적은 답은 안 나왔다. 왜냐? 워니, 최준용이 얼마나 할지 모르는데 어떻게 답을 내리겠나. 김선형, 안영준, 허일영만 보면 4, 5위가 맞다. 그래서 6강은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라운드에 7승 하면서 4강까지는 갈 수 있겠다고 단장님께 말씀드렸는데 우승을 물어보시더라. “모르죠”라고 했다. 2라운드가 끝나면 목표를 수정하려고 했는데 이미 1라운드가 끝났을 때 정상권 전력이라고 했다. 내가 바꾼 게 아니라 주위에서 바꾼 거다. 2라운드에 고꾸라지면서 또 바뀌었다. 평가라는 게 그렇게 된다. 3라운드 중반쯤 선수들에게 “4강 직행해야 한다”라고 얘기했다. 철학이란 건 없다. 오늘도, 내일도 팀을 잘 만들어가는 것 아닌가. 그렇게 1주일, 1주일이 쌓이는 거다. 선수들 얼굴에서 재미없는 게 보이면 안 하는 게 낫다. 그러다 보면 다친다. 굳이 철학을 꼽자면 재미다. 즐거워야 한다. SK 선수들은 밝아서 좋다. 져도 밝아서 문제다(웃음). 시즌을 치르는 동안 경기 끝난 후 미팅은 단 한 번도 안 했다. 분위기는 이기면 당연히 좋고, 지면 안 좋다. 답 정해져 있는 걸 왜 하나. 할 이유가 없다. 선수들도, 감독이나 코치도 다 기분 안 좋고 열 받았는데 좋은 말이 나오겠나. 그러다 보면 외국선수와 싸우게 되고, 선수들도 감독한테 한 소리 듣고 툴툴거리게 되는 것이다. 1경기는 54경기 중 일부다. 시즌 전체를 평가해야 한다.
일단 감독 데뷔시즌의 정규리그는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제 플레이오프가 남았는데 앞으로는 어떤 지도자가 되고 싶나?
하루살이여서 그런 건 생각 안 해봤다. 앞으로 어떤 지도자가 되겠다는 건 없다. 아는 분 중 자수성가해서 잘 된 형님이 계시는데 초심 잃지 말라는 말씀을 많이 하신다. 자기가 직접 발로 뛰면서 모든 걸 했고, 지금도 그렇게 일하신다. 일을 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고 바뀌는 건 맞는데 변하는 사람이 많다. 나도 변하게 될 수도 있는데 좋게 변해야 하지 않겠나. 감독으로 선임될 때 ‘매년 뭔가를 업그레이드해야 된다’라고 생각했다. 내가 SK에서 몇 년 동안 있을지 모르지만 내 생각, 훈련, 회의도 계속 업그레이드가 되어야 한다. 다음 시즌 준비는 더 다양하고 디테일해야 한다. 선수들도 똑같은 훈련만 시키면 싫증 날 것이다. 의미 없이 버티라고 하는 식으로 훈련하면 안 된다. 선수들에게도 계속 새로운 뭔가를 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BONUS ONE SHOT 기이한 운동, 파격 변신
전희철 감독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몸 관리다. 은퇴 후에도 꾸준히 운동을 하며 현역 시절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는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다. 전희철 감독이 완벽한 수트핏을 갖춘 덕분에 점프볼 역대 감독 인터뷰를 통틀어 첫손에 꼽을 만한 사진도 나올 수 있었다. “(몸무게는)오히려 코치가 된 후 빠졌고, 감독이 된 후에는 더 빠진 것 같다”라는 게 전희철 감독의 설명이다. 코치 시절에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지만 최근에는 ‘기이한 운동’을 주로 하는 편이다. 전희철 감독은 “양치질하면서 스쿼트 100개를 하고, 집에 갈 땐 계단으로 올라간다. 집은 10층인데 20층까지 올라갔다가 내려간다. 이제 웨이트 트레이닝장은 귀찮아서 못 가겠더라. 핑계지만 이것까지 할 시간이 없다. 웨이트 트레이닝은 ‘안 하면 죽겠다’ 싶으면 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몸매와 더불어 현역 시절부터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 헤어스타일도 전희철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다. 팬들 사이에서 ‘레고설’이 제기될 정도지만, 사실 전희철 감독은 2013-2014시즌을 준비할 때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한 바 있다. 머리를 내렸지만, 워낙 잠깐이었던 탓에 팬들에게 알려지진 않았다. 당시 미디어가이드북에만 남아있을 뿐이다. 전희철 감독은 “머리를 세우는 게 귀찮았고, 헤어샵에서 바꿔보라는 추천도 있었다. 그런데 바꾸고 보니 어색하더라. 10명 중 2, 3명만 괜찮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전희철 감독은 또한 “미디어데이에서 우승 공약으로 헤어스타일을 바꾸겠다고 말하려다가 진짜 바꾸게 될 것 같아서 말 안 했다. 말 나온 김에 박새로이처럼 해볼까. 미쳤다는 소리 들을 것 같다”라며 웃었다.
#사진_유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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