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불타버린 유니폼

/ 기사승인 : 2022-03-22 16:3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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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의 『갈채와의 밀어』 다시 읽기⑱

꿈에도 그리던 배재 농구부의 유니폼을 입은 김영기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 농구에 미쳐버린 소년에게는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할지, 어머니가 어떻게 생각할지, 도무지 걱정이라곤 없었다. 머릿속이 온통 농구로 가득 차 있는데 다른 게 들어갈 자리가 있었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간 그는 늘 하던 대로 책가방을 던지자마자 어머니에게 밥을 졸랐다.

“어머니, 나 밥! 빨리 밥 줘!”
“쟤 배는 거적을 찼나? 집에 들어서기 무섭게 밥을 찾게.”
“아이 참, 운동을 해서 배고파 죽겠단 말이에요!”
“원 애두! 운동은 누가 하라는 운동이라고 이 극성이니?”
소년 김영기는 부아가 났다.
“아이 참, 밥이나 빨리 달란 말이에요!”
퉁명스런 투정이 결국 화를 불렀다. 안방에서 청천벽력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만 것이다.

“저 놈의 자식, 밥 주지 마!”
아버지다. 그날따라 일찍 귀가한 모양.
“인마, 운동은 누가 하라는 운동이기에 공부는 않고 그 짓만 해?”
잘못 걸렸다. 아버지는 안방 문을 열고 마루까지 나왔다.
“너 이리 좀 와!”
김영기는 배고픔을 싹 잊었다.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아버지 앞에 섰다.
“너, 요즘은 또 무슨 운동이냐?”
어느 안전이라고 말을 함부로 하겠는가. 입술은 잔뜩 튀어나와 모자 한두 개쯤 걸고도 남을 정도였지만 입조심을 했다.

“인마, 무슨 운동을 하느냐 말이야!”
“농구요.”
“그래? 이제 스케이트는 집어치웠니?”
“겨울이 아니잖아요.”
“그럼, 축구는 관뒀어? 마라톤도 관두고? 유도도 관두고?”
“…….”
“인마, 운동을 하려면 똑똑히 한 가지만 해야지, 밤낮 이것저것 시계불알처럼 대롱대롱이냐? 앞으로 운동 같은 거 싹 집어치워!”

아버지의 태도는 강경했다. 김영기는 슬그머니 어머니의 눈치를 살폈다. 어머니도 표정이 굳었다. ‘너 오늘 혼 좀 단단히 나 봐라.’ 하는 듯한 눈치였다. 배짱 좋은 김영기도 기가 질렸다.
“하지만, 농구만은 똑똑히 해보려는 건데요….”
“똑똑히고 뭐고 싹 집어치우란 말이야! 그 시간에 공부나 한 자 더해!”
김영기는 골이 났다.
“공부 안 할래요! 치이…, 나 운동할거란 말예요!”
그는 쏜살같이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 아버지의 노한 음성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도 쫓아 나왔다.
“영기야, 얘 영기야, 영기야!”

김영기는 돌아보지도 않고 달렸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그가 골목어귀를 돌아 큰길에 나설 때까지 따라왔다. 호기롭게 나서긴 했는데, 갈 곳이 어디겠는가. 없었다. 친구 집에는 가기 싫고,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잔돈이 손에 잡혔다. 그걸로 호떡을 몇 개 사서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먹었다. 그래도 이른 시간이었다. 학교 앞길을 지나가 보았다. 짐작했던 대로 철문은 굳게 닫히고, 수위실 창 너머 신문을 읽는 수위의 모습이 보였다. 김영기는 두어 시간 발길이 닿는 대로 이리저리 걸었다. 솟구쳤던 부아가 가라앉고 보니 어머니가 차려주는 저녁 밥상과 방안에서 기다리는 포근한 잠자리가 자꾸만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밤늦게 집에 돌아갔다. 집안은 고요했다. 불은 모두 꺼지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며 2층에 있는 제 방으로 올라갔다. 전등불을 켠 그는 깜짝 놀랐다. 방바닥에 책이 흩어져 있었다. 그는 유니폼부터 찾았다. 없었다. 유니폼이 없어졌다. 그는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어머니를 가만히 불러냈다.

“어머니, 내 유니폼?”
“그까짓 건 찾아서 뭘 해!”
어머니의 표정도 굳어 있었다. 김영기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글쎄 내 유니폼 어딨냐고요?”
“아버지가 치우셨어!”
불길한 생각이 뱀의 머리처럼 고개를 들었다. 김영기는 이내 울상이 되었다.
“아무데도 없단 말이에요. 어디다 감추셨어요?”
어머니는 한참동안 아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잠시 측은한 빛이 스쳤다. 그러나 이내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아무 말 없이 일어서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김영기는 애가 탔다.

“그것 없으면 내일부터 운동 못한단 말이에요!”
어머니의 자비에 호소할 수밖에.
“어디다 감추셨어요, 네?”
“부엌 아궁이에나 가 봐!”
“네?”
김영기는 부엌으로 뛰어 내려갔다. 아궁이를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당시 김영기의 집에는 시골에서 올라와 집안일을 거들던 아이가 함께 살았다. 그 아이가 사용하는 방문을 힘껏 두들겼다. 아이는 눈을 비비며 나왔다.
“유니폼이요? 아까요, 선생님께서 아궁이에 넣고 태워버렸어요.”

김영기는 계단 밟는 소리를 요란스럽게 내며 뛰어올라갔다. 방에 들어가서는 방문을 잠그고 이것저것 집어던지며 분풀이를 했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는 옷도 벗지 않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엎드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분해서 그런지 눈물도 나지 않았다. 아래층에서는 아무 기척도 없었다. 어른들의 결심도 굳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천천히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러자 더 참기 어려운 고통이 밀려왔다. 피곤하고 배도 고팠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은 지는 이미 오래. 그래도 이 고집쟁이 소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채로 천천히 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려는데 방문 밖에 인기척이 났다. 김영기는 벌떡 일어나 문을 노려보았다.

“영기야, 영기야.”
어머니였다. 소리 죽여 부르고 있었다.
“영기야, 자니?”
“안자요!”
“오냐. 여기 먹을 것 갖다 놓았다.”
“…….”
“어서 일어나 먹어. 내려가 몸도 씻고…….”
“…….”
“이것 먹고 자야 한다. 굶어 자면 안 돼.”
“…….”

김영기는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눈치를 살피는지 소리 없이 복도에 서 있었다. 한참 뒤에야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김영기는 풀썩 쓰러지듯 침대에 엎드렸다. 이상하게도 주체할 수 없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하염없이 울었다.

이 일이 있은 뒤로 김영기는 유니폼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유니폼을 팀 메이트인 김준규의 집에 맡겼다. 아침마다 꽤 먼 김준규의 집까지 가서 유니폼을 찾아 가지고 학교에 가곤 했다. 그러나 농구소년 김영기의 시련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또 다른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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