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삼성생명의 윤예빈. 출처=WKBL포토 |
1990년 봄. 젊은 기자였던 내가 훈련장이나 숙소 취재를 자주 하던 시절이다. 훈련과정이나 내용, 평소 생활을 잘 알아야 팀과 선수, 감독에 대해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후 취재를 마치면 대개 남녀실업팀이나 대학팀의 훈련장을 찾아갔다. 아무래도 기아, 삼성, 현대처럼 강한 팀의 훈련장에 자주 갔다. 미사리에 있던 산업은행의 훈련장과 마포에 있던 기업은행의 훈련장도 자주 갔다. 거기에는 스타들이 모여 있었고, 대학팀과 연습경기도 자주 했기 때문에 이야깃거리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공부(?)도 많이 했다. 남자팀의 방열, 김인건, 최인선 감독과 여자팀의 정주현, 이문규, 황유하 감독 같은 분은 기자의 질문에 아주 친절하고 깊이 있게 답변하는 지도자였다.
현대남자농구단 숙소는 도곡동에 있었다. 그곳에 가면 우리나라 남자농구 스타 절반을 만날 수 있었다. 이원우(작고), 임달식, 김성욱 등이 신선우, 박수교가 이어온 명가의 전통을 잇고 있었다. 무엇보다 ‘슛도사’ 이충희. 아직 그의 시대였다. 용산고(양문의 선생님의 부고를 접하고 황망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중대를 거쳐 기아에 입단한 허재가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지만. 1989-90농구대잔치가 이충희의 마지막 전성기였다고 생각한다. 이 시즌을 마친 뒤 이충희는 무릎 통증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 때문인지 봄에 열린 코리안리그 때는 슛 성공률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현대를 떠나 대만에 진출했다가 신생팀 LG의 감독이 되어 돌아오는 커리어의 시작 지점이었다.
내가 도곡동 현대농구단 숙소를 떠올릴 때는 언제나 후각(嗅覺)의 기억이 개입한다. 현대의 숙소에는 매캐한 향 연기에 얹힌 노린내,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이충희가 아픈 자리에 뜸을 뜨느라 생긴 냄새였다. 이충희는 인내심이 무척 강했다. 그 인내심은 ‘강원도의 힘’ 같은, 강인한 면이 있었다. 그 힘이 강원도 동송에서 태어난 소년을 아시아 최고의 슈터로 키워 주었을 것이다. 통증을 이겨내고자 하는 이충희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뜸 놓은 자리가 익다 못해 녹아내려 무릎 뼈가 허옇게 드러날 정도였다. 고통스러웠으리라. 그 고통을 잊기 위해 후배를 불러 앉히고 바둑을 두었다. 동료 선후배가 모두 “이충희 아니면 못할 일” 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앞서 말했듯 이충희는 재기하지 못했다. 농구대잔치에서 경기당 30득점을 넘나들던 그의 슛은 날카로움을 잃었다. 은퇴시즌의 경기당 득점은 5.3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충희는 수치를 넘어 농구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 위대함을 성취했다. 마지막까지 투혼을 잃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농구를 사랑했으며, 부상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나는 이 시기의 이충희를 존경한다. 그가 훗날 어떤 인간적 아쉬움을 남겼든, 지도자로서 성공했든 실패했든 한 시대의 승리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무엇보다도 이충희는 자신에게 지지 않고 제 발로 걸어서 코트를 떠났다. 불굴의 투혼이라는 점에서 이충희에 비길 존재는 절단 난 무릎으로 한국을 1982년 아시안게임 우승으로 이끈 신선우 뿐이다.
용산고-연세대를 졸업한 신선우는 1978년 무릎연골수술, 1980년엔 아예 오른쪽 발목은 물론 무릎연골을 몽땅 도려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병원 측은 ‘선수생활 절대불가’란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신선우는 기적적으로 재기했고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주전센터로 뛰어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따내는 또 하나의 기적을 창출한 뒤 그 이듬해 은퇴했다. 주전센터라고 했지만 가장 공을 많이 만지면서 경기를 만들어가는 리더였고 지휘자였다. 그의 거센 불길 같은 투지는 중국 선수들을 주눅 들게 했다. 허재는 용산고에 다니던 1981년 이병진(작고) 대기자와 인터뷰할 때 신선우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신선우의 플레이도 그렇거니와 정신력까지 흠모했을 것이다.
―커서 어떤 선수가 되고 싶니?
“신선우 같은 선수요.”
―신선우는 은퇴했는데?
“그분처럼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될래요. 아직 은퇴 안 했어요. 분명히 재기하실 거예요.”
야구 종목의 투수가 어깨와 팔꿈치 부상 때문에 고통 받듯이 농구선수는 무릎과 발목 부상 때문에 커리어를 마감하는 경우가 잦다. 임정명, 박종천 등은 무릎 때문에 절정에 도달할 기회를 얻지 못한 선수들이다. 천재가드 유재학도 무릎이 멀쩡했다면 프로시대를 누볐을지 모른다. 부상이라는 악마는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진정한 천재 선수들은 악마의 발톱을 스스로 걷어내고 일어서서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된다. 나는 여자농구 선수 가운데 두 사람을 꼽겠다. 성정아와 유영주. 알다시피 성정아는 1984년 LA올림픽 은메달의 주역이고, 유영주는 우리 여자농구의 마지막 전성기를 정은순-전주원과 함께 누린 슈퍼스타다.
성정아의 시련은 실업 1년생이던 1985년 가을에 시작됐다. 여자농구 최초로 억대 스카우트라는 찬사 속에 실업농구에 뛰어든 그는 부상 악령에 시달렸다. 1985년 9월 첫 무릎부상을 시작으로 1986년 모스크바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또 다시 무릎부상을 당해 결국 수술대에 올랐다. 1987년까지 1, 2차 수술을 받은 그는 1988년 기적 같은 재기에 성공하며 서울올림픽에 참가에 이어 농구대잔치 MVP를 차지했고, 1989년 삼성생명을 전승 우승으로 이끌며 또 다시 MVP의 영예를 누렸다.(점프볼 서민교 기자) 유영주는 발목 부상 때문에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 막 피어나는 꽃송이와 같던 그는 뜻밖의 부상으로 농구를 그만둘 위기를 맞았다.
1992년 5월 28일부터 6월 8일까지 바르셀로나올림픽 여자농구 예선이 서부도시 비고에서 열렸다. 우리 대표 팀은 부진했다. 늘 깔아보던 일본보다 못했다. 일본은 4승3패, 우리는 3승4패. 그래도 한일전의 승자는 우리였다. 계속 뒤지다가 후반 막판에 경기를 뒤집었다. 유영주가 역전골을 넣었다. 이 장면을 생생히 기억한다. 속공 기회에서 유영주가 골밑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크게 스텝을 옮기며 훅슛을 넣었다. 그냥 왼쪽에서 넣어도 됐는데, 블로킹을 의식했을 것이다. 이때 발목을 다쳤다. 선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큰 부상이었다. 유영주는 초인적인 의지로 수술과 재활을 이겨내고 아시아 여자농구를 대표하는 포워드가 됐다. 그래도 이 부상은 은퇴할 때까지 그를 괴롭혔다.
내가 부상을 실마리 삼아 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여자농구 삼성생명의 윤예빈이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보다 농구장 소식을 늦게 듣는다. 한때 기자였을 뿐이고, 그나마 훌륭한 기자도 아니었다. 그냥 농구와 농구하는 사람을 좋아했을 뿐이다. 마음속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농구를 떠나고 기자직에서도 물러난 지금은 그저 이따금 전적이나 훑어보고 중계가 있으면 더러 보는 처지다. 그러나 뛰어난 선수, 더 뛰어난 선수가 되어야 마땅한 선수의 부상 소식은 내 생각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신선우가 말했듯이, 내면의 불꽃이 살아 있는 한 부상은 선수를 굴복시키지 못한다. 오랫동안 부상 때문에 고통을 경험한 젊은 선수가 또 한 번 시련을 맞은 지금, 이 선수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할지 고민해 보았다.
이미 한 이야기지만, 나는 윤예빈을 뒤늦게 알았다. 2020년 12월 6일에 열린 삼성생명과 하나원큐의 경기였다. 그날 처음으로 윤예빈을 중심으로 경기를 관전했고, 이름을 외웠다. 나는 이렇게 밀도 높은 경기력을 발휘하는 선수를 내가 왜 몰랐는지 의아했다. 그래서 삼성생명의 임근배 감독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서 설명을 들었다. 부상으로 두 시즌을 그냥 보냈고, 그 사이 수술을 두 번이나 했고, 그럼에도 일어섰다는. 남자 선수든 여자 선수든 부상을 이겨내고 뛰어난 경기력을 회복하기는 어렵다. 젊은 유망주가 두 시즌을 허송했다면 가장 큰 폭으로 성장해야 할 시기를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24개월에 걸친 회복의 과정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윤예빈도 수많은 선수들이 그러했듯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겪었을 것이다.
윤예빈은 두 번째 무릎을 다쳤다. 첫 시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처음 다쳤을 때는 “그래, 한 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버틸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부상을 한 번 더 맞이하면 좌절감이 갑절이 된다. 수술, 재활, 복귀에 이르는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 길인지 알기에 공포감도 두 배가 된다. 불길한 상상과 이제는 안 될 거라는 근거가 희박한 예감, 백 개도 넘게 제시할 수 있는 그만두어야 할 이유들이 악마의 음성과도 같이 귓가를 울릴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농구 역사에 이름을 남긴 선수 치고 이 유혹에 몸과 마음을 맡긴 경우가 없다는 것이다.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 돌아가 왕의 자리를 되찾기 위하여 세이렌의 마성(魔性)을 이겨내야만 했던 것처럼.
재능의 문제라면, 나는 윤예빈의 재능을 보증할 수 있다. 그러나 시련을 이겨내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리를 되찾는 일은 재능과 크게 관계없다. 도곡동 현대남자농구단 숙소를 망령처럼 맴돌던 쑥연기는 이충희라는 인격의 남다름을, 그 영혼의 강인함과 농구에 대한 진심을 설명하는 징표와도 같았다. 윤예빈도 내면의 힘을 요구받을 것이다. 얼마나 진심인지, 자신을 동정하는 대신 냉정하게 추궁할 수 있는지, 얼마나 결연하게 싸울 수 있는지. 그는 젊다. 부상을 털고 돌아와도 젊을 것이다. 김화순, 최경희, 성정아와 같은 위대한 이름과 나란히 걸릴 만한 재능을 잠시 유보하는 것뿐이다. 윤예빈의 경기는 중단되었지만, 다른 것들로 내면을 채워 나갈 기회다. 보다 먼 곳까지 나아가야 할 책임이 윤예빈에게는 있다. 용기를 내기 바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을 해주고 싶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The best is yet to be.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저작권자ⓒ 점프볼.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