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센터셨어요”
“아이쿠,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 농구 못했어요”
기자의 말에 표필상(54‧200cm‧표필상 농구클럽)은 손사래부터 쳤다. 사람 좋아보이는 푸근한 인상만큼이나 겸손이 몸에 배여있는 듯 했다. 표필상의 현역 시절을 보지못한 이들은 그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도 있겠다. 정규시즌 240경기 동안 평균 11분 06초를 뛰며 1.9득점, 1.8리바운드의 기록만 놓고보면 별다를 것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플레이오프 기록이 조금 낫기는 하지만 크게 차이는 나지않는다.
하지만 표필상을 아는 이들은 그의 진가는 기록만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더불어 기록을 보려면 득점, 리바운드 같은 것 외에 경기출장수 등도 감안해야한다. 팀에 필요가 없고 공헌도가 떨어진다면 자연스레 출장수는 줄어들 것이고 현역 선수로의 생명 또한 짧을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표필상은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선수 생활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무대서 11시즌 동안 무려 240경기를 소화했다. 결코 적은 경기수가 아니다.
“여러팀을 오갔죠. 운도 좋았고 감독님들께서도 좋게 봐주셨어요”
표필상은 끊임없이 겸손했다. 하지만 이는 말도 안된다. 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 아무리 사람좋다는 평판이 자자하고 주변에서 신뢰를 받아도 결정적으로 팀 기여도가 떨어지면 가혹하다싶을 정도로 내쳐지기 일쑤다. 감독들 자신도 성적에 따라 다음 시즌 행보를 장담 할 수 없는데 못하는 선수에게 기회를 줄리는 없다. 표필상이란 선수의 사람됨을 좋게 봤을 수는 있겠지만 무엇보다 경기에서 필요하기에 함께 했음이 맞다.
선수 중에는 기록은 좋은데 거품으로 평가받는 타입이 있고 반대로 기록은 별다르게 눈에 띄지 않지만 지도자들이 선호하는 유형이 있다. 현역 시절 표필상은 후자에 해당됐다. 현란한 플레이, 두툼한 기록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잠깐을 코트에 나서도 묵묵히 궂은 일을 해주고 늘 최선을 다해서 뛰어왔다. 감독 입장에서 이보다 더 고마운 선수는 없다.
지금도 표필상은 선수 시절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 프로, 대학리그 등 시선이 집중되는 무대에는 나서지 않고 있지만 은평구라는 자신의 지역에서 유소년 지도, 동호인 농구 등에 애정을 기울이며 묵묵한 농구 외길을 걸어가는 모습이다. 오래전부터 숲 한쪽을 지켜주던 굵고 튼튼한 소나무처럼.

“동호인 농구계의 샤킬 오닐요? 꼭 그렇지도 않아요”
Q.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현재 은평구에서 농구교실을 운영하면서 은평구 농구협회 회장도 맡는 등 은평구 농구인으로 지내고있네요.(웃음) 최근에는 코로나가 심해져서 예전만큼 왕성하게 활동은 못하고있는 상황입니다. 운동하시는 분들도 그렇고, 자영업하시는 분들도 그렇고 어서 코로나 시국이 정리되서 모두가 편하게 운동하고 장사하고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Q.은평구 농구협회 회장은 어떤 일을 하시는 것인가요?
서울시 농구대회나 구대회같은 경우 주최, 주관도 하고요. 각종 대회에는 은평구 대표를 모아서 참가하기도하고 그러죠. 자격조건은 따로 없어요. 농구만 좋아하면 됩니다. 일반인, 선수 출신 가리지 않습니다. 현재 저희 은평구같은 경우는 이곳에 살고있는 프로선수 출신은 있는 것 같은데 저희 쪽에 등록되어있지는 않고요. 대학까지 농구를 했던 선수 출신은 있습니다. 과거같은 경우에는 선수 출신이 끼면 동호회 농구 판도가 달라지기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아요. 일단 프로 출신들은 잘 참여를 안하고요. 학창 시절에 농구를 했던 분들이 계시기는 하지만 요즘은 농구가 대중화가 되고 수준이 높아지면서 영향을 크게 받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선수 출신들도 2명 이상은 안된다는 규칙도 있고요. 생활체육 쪽에도 정말 잘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Q.동호회 농구계에서 샤킬 오닐로 통한다고 들었습니다. 거의 무적이실 것 같아요. 대회참가 등도 많이 하셨나요?
저는 40~50대 농구대회에 참석하고 있는데요. 꼭 그렇지도 않아요. 저도 나이가 있고 농구를 제대로 한지 오래됐잖아요. 더불어 저같은 선수 출신들이 꽤 있어요. 신동찬, 한기범, 김유택 선배님 등이 본인 나이대에 맞는 쪽에서 하고 계세요. 상황에 따라서 어쩌다 한번씩 샤킬 오닐같은 포스를 보여줄 때도 있겠지만 이제는 신체조건이나 경력 등에서 저보다 앞서는 분들도 많으시고 생활체육현장에 숨은 고수도 있는지라 마음대로 되기 힘들어요. 길거리농구 같은 경우 참여는 안하고 주최는 하고있어요.
Q.독립농구단을 창단하려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아, 정확히 말하면 같이 계신 대표님이 스포츠에 관심이 많으세요. 축구단도 운영하고 있고요. 트라이아웃을 통해 선수를 선발한 다음 현재 4부리그에 참가하고 있는 상태에요. 농구같은 경우 독립농구단을 만들어보고 싶으셔서 선수를 모집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참가인원이 적었어요. 좀 미리미리 준비했어야 했는데 늦게 시작하기도 했고 선수가 안모이더라고요. 잠시 보류중인데 10월 정도에 다시 트라이아웃을 실시할 예정에 있습니다.
Q.다른 곳에서도 독립농구단 창단 움직임이 보이고 있는데 서로 힘을 합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일단 제가 하는 것은 아니니까 대표님이 준비하시는 부분이라서 선뜻 뭐라 말씀은 못드리겠어요. 어디까지나 저는 도와주는 입장이거든요. 혹시라도 기회가 닿으면 서로 돕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도 있겠죠. 당장은 이곳부터 준비를 해야되는 입장인지라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히면 논의할 부분인 듯 싶어요.
Q.독립농구단 창단에도 조금씩 이유가 다르더라고요. 어떤 방향을 추구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저희는 농구도 중요하지만 일자리를 주자는 목적이 먼저입니다. 사람이 생활을 하려면 먹고 사는 문제가 먼저잖아요. 농구를 하고 싶은 열정도 중요하지만 저희는 다른 쪽에도 비중을 크게 두고있어요. 재활트레이닝센터가 군포에 있는데 시작한지 한 3개월 정도 됐어요. 바로 옆에 병원도 있고요. 재활트레이닝센터에 직원으로 들어가 일도 배우면서 일주일에 4번 정도 농구도 하고, 그러면서 장기적으로는 독립농구단 신분으로 실업농구리그를 가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예전 실업팀 선수들처럼 직장을 따로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농구선수로 뛴다고 보면 맞을거에요. 농구인들에게 일자리도 주고 좋아하는 농구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죠. 앞서 언급한 축구같은 경우 4부리그에서 뛰고있는 선수들은 직원으로 함께 일하고 있고 3부로 올라간 선수들은 더 잘될 수 있게 도와주고 있어요. 상황이나 환경은 다르겠지만 농구도 그런 시스템으로 자리잡았으면 좋겠어요. 더불어 꼭 저희 재활트레이닝센터에만 묶여있는게 아닌 원한다면 일을 배워서 자신과 관련된 종목의 재활트레이너로 갈수도 있는 것이고요. 개인적으로 자신이 시설을 만들 수도 있고 구단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찾아보자면 길은 많을거에요.
Q.축구같은 경우는 잘 풀리고 있네요.
그럴 수밖에 없는게, 축구는 농구보다 인원이 20배 정도는 많아요. 할 수 있는 곳도 많고 그런만큼 관련 업종도 잘되어 있어요. 축구는 1, 2, 3, 4부까지 있잖아요. 모두 다 잘 돌아가고있고요. 하지만 농구는 프로 그리고 끝이에요. 2부가 운영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모든 팀이 전부 참여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 2부지 1부에서 뛰지않는 선수들 모아놓고 훈련시키거나 1부 선수들이 잠깐씩 몸상태 점검하고 경기감각 찾는 성격이 강하잖아요. 별개의 리그라기보다는 백업이라고 보는게 맞죠. 농구도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믿어봅니다.

“여준석 아버지가 농구를 정말 잘했던 기억이 납니다”
Q.농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것인가요?
농구는 고등학교 1학년때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농구를 하게 될 줄은 저도 몰랐어요. 본래는 초등학교때 배구를 했었거든요. 그러다가 6학년때 배구부가 해체되는 바람에 이후 중학교때까지 쭉 운동을 못했어요. 그래서 일반 학생으로 돌아가서 운동하고 관련없이 지냈는데, 문제는 어릴 때부터 운동을 하다보니 공부하는 습관이나 자세가 전혀 안되어 있는거에요. 이도 저도 안되는 상황을 맞게된거죠.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아버님이 키(당시 180cm정도)도 크고 하니까 농구를 해보라고 권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오랫동안 운동을 쉬었는데 되겠어요. 몸이 안따라가더라고요. 중학교 졸업하고 그냥 허송세월만 2년보냈죠. 그렇게 2년 유급한 다음 마음 다시 잡고 농구를 시작하게 된거에요. 다행히(?) 제가 빠른 년생이라 동기들과 2년 차이까지는 안나고 1살 많은데서 그쳤네요.(웃음)
Q.부친께서 씨름을 시키려고 하셨다고 들었어요.
아버님도 체격이 좋으세요. 젊은 시절에 강원도에서 씨름을 하셨거든요. 그래서 저를 씨름을 시키시려고 하셨는데, 사실 저는 몸이 씨름할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선수시절의 저를 보면 장사체형으로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당시에는 체격이 그리 좋지않았어요. 중3때 180cm에 몸무게가 60㎏정도 나갔으니까요.
Q.처음부터 포지션은 센터셨나요?
중학교 졸업후 2년 쉬고 오니까 키가 198cm까지 자랐어요. 아무리 기본기가 없고 그런다 해도 사이즈가 워낙 좋으니까 농구부에서 받아주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처음부터 포지션은 센터를 맡게됐죠. 농구를 늦게 시작해서 후회되지 않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었는데요. 사실 저는 크게 미련이 없었어요. 농구로 대성하려는 욕심보다는 대학교가서 체육교사 자격증 따서 체육선생이나 하려는 생각이었거든요. 대학교 올라가면서부터 꾸준히 운동하고 그러면서 체격이 좋아지더라고요.
Q.농구를 하시면서 외국인선수 제외하고, 힘으로 대적이 될만한 국내 선수가 있으셨나요?
외국인선수 빼면, 음…, (서)장훈이 정도 외에는 힘으로 크게 어려운 국내 선수는 없었던 것 같아요. 장훈이야 워낙에 키도 크고 힘도 좋고 밸런스도 대단했던 선수잖아요. 장훈이는 몸싸움해보면 그냥 벽이에요. 도통 밀리지가 않아요.
Q.학창시절 ‘와, 저 선수는 정말 잘한다’고 느낀 또래가 있었을까요?
앞서도 말했듯이 제가 농구를 늦게 시작했고 관심이 높은 편도 아니었던지라 그런 것 조차 느끼지 못했어요. 타학교에 누가누가 잘한다 그런 것을 아예 모르고 살았으니까요. 같은 학년에 마산고 정재근, 군산고 이창수, 광주고 채명석 등 유명한 선수들이 있었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을 정도에요. 동아고시절 함께 농구했던 동기 중에 한명이 생각나기는 하네요. 여준석의 아버지로 유명한 여경익이에요. 신장이 195cm정도됐는데 운동신경이 좋고 몸도 빨랐어요. 대학교에 가서 잘 안풀려서 그렇지 학창시절에는 정말 유망주였어요. 여준석 보면 알잖아요. 아버지 닮아서 농구잘하는거에요.
Q.차세대 빅맨으로 나름 상당한 기대를 받았는데 국제대회에서는 조금 부진하셨어요.
어차피 저는 키밖에 없었으니까요. 외국선수들 같은 경우 신체조건도 좋고 기동성까지 있잖아요. 기술도 좋고요. 저는 일단 몸놀림이 느린지라 맞붙게되면 많이 밀릴 수밖에 없었죠.

“외국인제도로 인해 가장 피해를 많이 본 포지션은 빅맨 쪽이죠”
Q.상무 소속으로 팀을 1993~94 농구대잔치 결승까지 올려놓았어요. 당시 붙었던 연세대학교 서장훈과의 매치업은 어땠나요?
그 시절이 서장훈의 전성기였어요. 부상도 당하기 전이라 기동력까지 좋았죠. 파워든 기술이든 스피드든 어떤 쪽으로도 매치업이 힘들었어요. 거기다 키까지 많이 컸잖아요. 그리고 서장훈 혼자가 문제가 아니었어요. 당시 연세대는 팀 전체적으로 매우 강했죠. 이상민, 문경은, 우지원, 김훈 등 그때 기준으로 사이즈가 괜찮았습니다. 반면 저희 상무는 신장이 전체적으로 낮았어요. 연세대는 앞선 뒷선을 모두 경계해야 되서 많이 까다로웠죠. 저희팀에서는 저랑 이창수, 강병수 등이 골밑을 맡았는데 애로점이 많았습니다. 저희때 처음으로 방위병을 받았어요. 저도 방위에요.
Q.프로화가 되면서 가장 손해본 포지션이 국내 빅맨진이죠. 개인적으로는 반갑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요.
그건 어떻게 말할 수가 없는 부분이죠. 지금 말해봤자 한탄 밖에 안되잖아요. 그때 프로리그 만드신 분들이 생각했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봐요. 외국인선수들을 받는다고 하는 순간 어떤 포지션이 선호받을지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잖아요. 빅맨은 신경을 많이 써서 성장시켜야 하는 포지션이에요. 뭐, 물론 그때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각팀을 보면 빅맨이 없어요. ‘토종 빅맨들의 기량이 문제다’고 말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선수는 경험치를 통해 커나가는 것 아닐까요. 바꿔말해서 외국인선수를 가드나 스윙맨 쪽으로 대부분 뽑는다고 생각해봐요. 10년만 지나면 비슷한 포지션 선수들이 씨가 말라버릴걸요. 정말 타고난 천재급 선수가 아니면 선수의 성장과 경기출장시간은 비례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니까요. 다시 빅맨 쪽으로 돌아가서 얘기하자면, 지금 선수들은 아마때 센터를 봤어도 프로 올 때 쯤 해서는 4번으로 포지션 전향을 시도해요. 그래야 프로에서 살아남으니까요. 4번도 해당 포지션에 특화됐다기보다는 외곽을 오가며 슛던지고 그런식으로 준비하는 것이죠. 어차피 서장훈, 하승진급의 신체를 가진 선수가 아닌 이상 프로에서 주전센터를 맡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까요. 프로화가 된지 20년이 넘었지만 어떻게 손대기가 참 힘든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아마때 센터보던 선수는 일단 손해를 보고 시작하게되요. 프로에 가려면 자신에게 익숙한 플레이를 버리고 새로 시작해야되니까요. 처음에 프로 만들 때 10년뒤 외국인선수를 없애자는 얘기가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지켜지지 않고 있잖아요. 이대로라면 국내 빅맨은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한국농구가 국제경쟁력이라도 높아졌으면 ‘외국인선수와 함께 뛰다보니 경기력이 좋아졌구나’라고 위안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죠.

Q.프로에서의 생존을 위해 어떤 부분에 신경을 쓰고 플레이하셨을까요?
백업 빅맨으로서 제가 할 일은 5분을 뛰던 10분을 뛰던 주어진 역할만 열심히하면 되니까요. 다른 것을 요구하기보다는 잠시동안 외국인선수를 맡아달라는 것이니까, 몸으로 부딪혀가면서 수비에 전력을 쏟았죠.
Q.SBS시절 트리플 포스트의 한축으로 맹활약하셨어요. 당시 데니스 에드워즈, 리온 데릭스, 표필상의 조합이 매우 좋았다는 평가가 많아요.
그때 김인건 감독님이 잘 잡아주셨어요. 조합이 잘됐죠. 공격이야 에드워즈하고 데릭스가 하니까 저는 수비에만 신경을 기울이면 됐어요. 당시 에드워즈 유명했잖아요. 닥공(닥치고 공격), 막슛 등으로 유명했는데 대충 던지는 것 같아보여도 일단 돌파만하면 2점이었어요. 참 신기할 정도더라고요. 공격에 특화된 선수였죠. 거기에 데릭스는 빅맨임에도 불구하고 시야도 좋고 패스도 잘돌려서 트리플더블 머신, 포인트 센터 그런 식으로 불렸잖아요. 데릭스가 몸이 호리호리해서 몸싸움에 약점이 있었으니까 제가 몸싸움 위주의 수비를 대신 했어요. 몸이 탄탄한 선수와 매치업될 경우 바꿔막기를 통해 제가 막았죠. 전성기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그때 출장시간도 많았고 열정적으로 농구했던 것 같아요. 아쉬운 점이라면 팀성적이 따라주지 않은것입니다. 팀성적까지 좋았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을텐데요.
Q.트리플 포스트외에 나머지 2인은 누구였을까요?
슈터로는 김성철이 있었고 앞선 1번으로는 오성식이 주로 나왔던 것 같아요.
Q.훅슛을 종종 구사하셨고 중거리슛도 성공률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글쎄요. 슛은 많이 연습하고 많이 던지는 만큼 성공률이 올라가는 것인데 시합 때는 제가 슛던질 찬스도 거의 없고 하다보니까 시도 자체가 적었어요. 그러다보니 자신감도 떨어지고 혹시나 슛찬스가 와도 생각이 많아지게 됐던 것 같아요. 어쩌다 한번 던질 때 슛이 들어간 것이 인상에 깊게남아서 그런 이미지도 남긴 듯 싶습니다.
Q.패싱센스도 있으셨던 것으로 기억해요.
이것도 글쎄요. 못했습니다.(웃음) 방금전 말씀드렸던 것처럼 안그럴 것 같은 선수가 어쩌다 한번 성공하게되면 ‘우와! 저런 것도 할줄아네’라면서 팬들 기억에 강렬하게 남지않았나 싶습니다. 스크린걸면서 빼주는 패스는 그런데로 했는데 일반적인 패싱플레이는 제가 생각해도 별로였어요.
Q.선수 시절 별명이 궁금합니다.
그러게요. 생각해 보니 특별한 별명이 없었네요. 프로에서는 기억이 안나고요. 대학 때는 선배들이 ‘뽀삐’라고 불렀어요.
Q.뽀삐요? 강아지 뽀삐요?
네(웃음)

Q.함께 뛰어본 외국인선수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선수로는 누가 있을까요?
지랄드 워커 아, 아니 제럴드 워커요. 어찌보면 프로 초반에 뛰었던 외국인 가드 중에서 가장 기량이 좋지 않았나 싶어요. KGC인삼공사의 통합 우승에 큰 공을 세웠던 외국인 가드 키퍼 사익스라고 있었잖아요. 그 선수하고 비슷한 스타일이에요. 프로 초창기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대단한 선수가 국내무대에 들어왔던 것이죠. 개인기도 탁월하고 경기를 읽는 눈이 대단한 선수인데 팀에서 잘 이용을 못했던 것 같아요. 어디서 패스가 날아올지 몰라서 국내선수들이 잘 받아주지를 못했어요. 그러다보니 워커도 신바람이 제대로 나지않았고요. 솔직히 그런 패스를 이전까지 어떻게 받아봤겠어요. 막 예측못한 패스가 들어오니까 당황하게 되고 그랬죠. 그 신장에 덩크슛 찍어대고 개인기, 운동능력 다 되던 특급 외인이었습니다. 다음 시즌에 워커가 NBA에 도전한다고 하며 국내 무대와의 인연이 끝났는데 솔직히 말하면 안받았다고 생각됩니다. 잘하기는 하지만 팀하고 융화가 힘들었으니까요. 손발만 맞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커요.
Q.궂은 일을 주로하는라 기록은 좋지않았지만 오랫동안 선수로 코트에서 뛰셨어요.
제가 생각해도 참 아이러니해요. 감독님들이 좋게 봐주셔서 오래한 것 같아요. SBS에서 한참을 뛴 후에 LG에서 김태환 감독님하고 1년, 삼성에서 김동광 감독님하고 1년, 그리고 전자랜드에서 제이 험프리스 감독님, 박수교 감독님, 최희암 감독님 그리고 (이)호근이형까지 참 좋은 분들과 함께 했습니다.
Q.성격도 되게 좋으신 것 같은데요. 코치 제의 등 프로 지도자 제의 쪽은 추천 받지 않으셨어요?
그렇지않아도 은퇴 시즌 쯤 해서 제안을 받기는 했지만 저하고는 맞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단순히 한다는데 초점을 두면 못할 것은 없었겠죠. 하지만 무슨일을하든 객관적으로 자신을 돌아보면서 잘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게 맞는 듯 싶어요. 코치는 정말 할 일이 많은 것 같더라고요. 감독님을 잘 보필해야되고 선수들도 개인별로 체크하면서 세심하게 챙겨줘야하잖아요. 감독님이 아버지라면 코치는 삼촌 역할을 해야죠. 저의 길은 아닌 듯 싶었습니다.

“빅맨은 길게보고 키워야된다고 생각합니다”
Q.클래식 센터로 활약했던 선배 입장에서 현재 변화된 농구트랜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농구 트랜드가 변화되는 것에 대해서는 좋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더 좋은 시스템과 전략하에서 최선의 방법으로 발전하는 것 아니겠어요. 어쨌거나 국내 빅맨들이 더 빨라지고 슛이 좋아지는 것은 좋은 현상인 듯 싶어요. 다만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외국인선수들로 인해 본연의 센터 자리가 죽어가고 있잖아요. 그 부분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듯 싶어요. 학창시절부터 센터를 보던 선수는 센터가 제일 익숙하고 편하겠죠. 그러나 프로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려면 포지션을 변경해야해요. 5번을 보던 선수는 4번을, 4번으로 활약하던 선수는 외곽슛을 더욱 갈고닦아서 3.5번 혹은 3번으로 플레이하는 경우도 많죠.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그래야 살아남으니까요. 어쨌거나 어려운 문제같아요. 토종 센터가 외국인선수들과 경쟁해서 살아남으려면 사이즈 우위를 가져갈 필요가 있잖아요. 운동능력이나 기동성에서 앞서기는 사실상 힘드니까요. 그런데 그런 정도의 신체를 타고 나는 선수는 극소수인지라…, 센터는 팀의 기둥이잖아요. 장신 가드, 장신포워드도 중요하지만 일단 골밑이 안정되려면 센터가 중심을 잡아줘야죠. 더불어 어릴 때부터 센터를 고정시켜놓고 키우는 문화도 문제라고 생각해요. 어릴 때 키가 크면 센터를 봐요. 그러다가 포지션을 바꾼 선수도 꽤 있지만 적성에 맞게 성장시켜야 되지 않나싶어요. 어릴 때 크다가도 거기서 멈추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어릴 때 작았는데 이후로 커나가는 경우도 있고요. 이것저것 시켜가면서 적성을 찾고 거기에 맞게 키워야죠. 어릴 때 작아서 가드를 봤어도 크면서 체격이 좋아지면 센터로서의 가능성도 찾아볼 필요가 있지않을까요. 제가 막 대단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센터 출신이다보니 자꾸 그런 현실이 눈에 밟히네요.
Q.최근 빅맨 후배 중에 눈에 들어오는 선수가 있으실까요?
없다고 보는게 맞지 않을까요. 빅맨은 골밑에서 비벼가면서 전투를 벌이는 포지션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안하려고 하잖아요. 대부분 슛을 던지려고 하죠. 센터 포지션은 씨가 마른 것 같고요. 다들 4번이죠. 3번에 가까운 4번도 많고요. 그나마 현대모비스의 장재석, KT의 하윤기 정도가 골밑에서 싸우려는 스타일 같기는해요. 솔직히 최근에는 백업 빅맨들조차 귀해졌잖아요. 다들 장신 스윙맨이에요. 최근에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뛰었던 선배들의 경기를 다시 봤어요. 지금과는 룰도 상당 부분 다른 시대였잖아요. 신선하기도하고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들었습니다.
Q.가족 관계가 궁금합니다.
와이프하고 아들 하나, 딸하나 있습니다. 아들같은 경우 학창시절에는 농구를 하다가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어요. 빅맨 포지션을 맡았는데 생각만큼 키가 크질 못해서 성장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Q.마지막으로 여전히 농구선수 표필상을 기억하고 사랑해주시는 팬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현역 시절 인기스타까지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꾸준하고 묵묵하게 뛴 덕분인지 그런 저의 모습을 좋게 봐주시고 응원해주시던 분들도 꽤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종종 알아봐주시고 기억해주시는 팬분들 덕분에 기분 좋은 웃음을 지을 때도 한두번이 아닙니다. 농구를 했기에 그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농구 인기가 다시금 올라가고 있는 것 같은데 생활체육, 아마, 프로 모두 잘되어서 다 함께 웃고 소리치고 그런 모습을 계속 보고싶습니다. 한국농구 많이 사랑해주세요.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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