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프볼=민준구 기자] 무적함대가 13년 만에 비상했다.
세계 농구인들의 대축제 2019 국제농구연맹(FIBA) 중국농구월드컵이 스페인의 정상 탈환으로 모두 마무리됐다. 최초 3연패를 노리던 미국의 좌절, 더불어 유럽의 강세가 두드러진 이번 월드컵은 어쩌면 세계 농구의 판도가 흔들렸음을 알렸다.
▲ 종이 호랑이가 아닌 진짜 호랑이였던 스페인
월드컵 개막 전, 스페인에 대한 평가는 그리 높지 않았다. 파우 가솔, 후안 카를로스 나바로, 호세 칼데론 등 2000년대 유럽을 제패했던 황금세대가 은퇴했고 그들의 마지막 유산은 마크 가솔과 루디 페르난데스, 리키 루비오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스페인을 향한 우려의 시선은 쉽게 걷히지 않았다. C조 예선에서 전승을 거뒀지만 튀니지 전(101-62)을 제외하면 대부분 패배 위기를 맞이했다. 푸에르토리코 전(73-63)은 3쿼터 대공세가 성공을 거두며 간신히 승리했고 이란 전(73-65) 역시 4쿼터에 승리를 확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단단해졌다. 가솔과 루비오가 중심을 잡았고 세르히오 율과 빅터 클래버가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해내며 이탈리아와 세르비아를 연파할 수 있었다. 한 번 흐름을 탄 그들에게 있어 다음의 적은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호주와의 4강전에서 2차 연장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지만 큰 경기에서의 경험은 그들을 승리로 이끌었다.
어쩌면 스페인에 있어 아르헨티나와의 결승은 앞서 치른 모든 경기들보다 더 쉬웠을 것이다. 스페인은 아르헨티나 특유의 팀플레이보다 더 정교한 패스를 자랑했고 압도적인 마무리 능력을 과시했다. 루비오와 가솔이 파쿤도 캄파쪼, 루이스 스콜라보다 월등했다는 것 역시 정상을 차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2006 일본세계농구선수권대회 우승 이후 스페인은 월드컵과는 그리 좋은 인연을 맺지 못했다. 올림픽에선 매번 드림팀과 접전을 펼칠 정도로 호적수였지만 월드컵은 매 순간 이변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13년 만에 오른 결승 무대에서 스페인은 다시 한 번 네이스미스 트로피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미국을 중심으로 돌아간 농구의 판도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재증명한 것과도 같다.

▲ 최약체 미국이 낳은 뻔한 결과
이번 월드컵의 최대 관심사는 미국의 최초 3연패 도전과 그 앞을 가로막을 그리스와 세르비아의 도전이었다. 스페인과 프랑스, 아르헨티나 등 과거의 강호들이 대부분 약해진 상황에서 새로운 라이벌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결과적으로 우승후보로 평가된 미국은 물론 그리스, 세르비아는 4강 무대조차 밟지 못한 채 탈락의 길을 걸었다.
미국은 2002 미국세계농구선수권대회 이후 역대 최약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FIBA 룰에 익숙한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고 과거 코비 브라이언트, 르브론 제임스, 카멜로 앤서니, 드웨인 웨이드, 케빈 듀란트 등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슈퍼스타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부상자들로 인해 강제로 12인 명단이 확정된 아쉬움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상비군에 확실한 슈퍼스타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중국에 들어서기 전 이미 호주와의 평가전에서 패하며 불안감이 더 커졌고 그들의 행보는 가시밭길이 될 거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예상은 곧 적중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예선에서 고전한 뒤 토너먼트에서 실력을 발휘해 정상을 차지해왔다(압도적이었던 1990년대 제외). 이번에도 같았다. 터키와의 경기에서 패배 직전까지 몰렸지만 크리스 미들턴의 자유투로 간신히 승리했다.
그러나 제 기량을 발휘해야 할 토너먼트에서 미국은 곧바로 탈락의 쓴맛을 봐야 했다. 루디 고베어가 버틴 프랑스의 장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이후 세르비아와의 순위결정전에선 1쿼터에 7득점에 그치는 수모를 겪으며 힘없이 패하고 말았다. 7-8위 결정전으로 떨어진 미국은 이미 역대 최악의 성적표를 예약해야 했다.
미국의 조기 탈락은 충격적이었지만 그만큼 세계 농구가 발전하고 있음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물론 미국의 전력이 약하다고 하지만 전원 NBA 리거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불어 그렉 포포비치 감독을 중심으로 한 호화 코치진이 있었기에 ‘미국 침몰’은 단순히 약해서 졌다고 할 수는 없다. 어쩌면 내년에 열릴 도쿄올림픽에선 지금과는 180도 다른 전력으로 나설 수 있다. 농구 팬들 역시 그 부분을 바라고 있다.

▲ 일찍 고개 숙인 세르비아·그리스
미국의 유이한 대항마가 될 거라고 평가된 세르비아와 그리스는 4강권에도 진입하지 못하며 일찍 짐을 싸고 말았다. 월드컵 정상을 향한 철저한 준비에도 본 무대는 차원이 달랐다. 특히 그리스는 2라운드조차 뚫지 못한 채 토너먼트 무대는 밟아보지도 못했다.
먼저 세르비아를 살펴보자. 믿는 구석이었던 니콜라 요키치의 영향력 제로는 세르비아에 치명적이었다. 눈에 보이는 스탯은 나쁘지 않았다. 8경기 출전, 평균 11.5득점 7.5리바운드 4.8어시스트로 평범한 기록을 냈다. NBA에서 선보인 요키치의 다재다능함은 월드컵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보그단 보그다노비치의 원맨쇼는 세르비아의 희망이었다. 네마냐 비엘리차와 쌍포를 이루며 골밑 전력의 공백까지 메꿨고 경기당 22.9득점을 기록하며 세계 최정상급 스코어러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보그다노비치의 손에 모든 걸 맡길 수는 없었다. 세르비아는 스페인과 아르헨티나에 연달아 패하며 조기 탈락하고 말았다. 미국과의 순위결정전을 승리로 장식했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그리스는 이번 대회에서 가장 큰 실망을 안긴 팀이다. NBA MVP 야니스 아데토쿤보의 존재로 우승후보로 평가됐지만 큰 오산이었다. 그리스의 전력은 아데토쿤보가 전부였다. 그렇다고 아데토쿤보가 위력적이었던 것 역시 아니었다. 상대의 집중 수비에 막혔고 NBA보다 전체적인 범위가 타이트한 FIBA 무대에서 아데토쿤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3전 전승이 예상된 예선에서 그리스는 브라질에 일격을 맞았다. 단순한 1패가 아니었다. 성적이 누적된 채 올라간 2라운드에서 그리스는 미국 전의 대패(53-69)로 탈락 위기를 맞이했다. 체코 전에서 12점차 이상으로 승리해야만 극적인 8강 진출이 가능했으나 아데토쿤보의 퇴장과 함께 84-77, 7점차 승리에 그치며 고개를 숙였다.
기대를 모았던 우승후보들의 연쇄 탈락은 월드컵의 재미를 다소 반감시키는 요소로 작용했다. 물론 이번 월드컵 최대의 신데렐라인 체코와 폴란드의 질주로 예상외의 재미를 줬지만 NBA 스타들의 좌절은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 충격적이었던 아시아·아프리카 총 11개 팀의 전멸
농구라는 스포츠는 야구, 축구, 배구와 달리 피지컬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크다. 직접 몸을 부딪쳐야 하며 림과 몸이 가까운 만큼 득점할 수 있는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동안 세계 농구의 변방이었던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이번만큼은 다르다며 힘차게 나아갔다.
기대감도 분명했다. 중국은 100억원 이상의 비용을 투자했고 이란 역시 유럽 팀과의 경쟁에서 결코 밀리지 않았다. 피지컬에선 압도적이지만 멘탈에서 큰 약점을 보였던 아프리카 역시 외국인 코치는 물론 NBA 리거들의 대거 참가로 다크호스로 불렸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이번 월드컵에 참가한 아시아 및 아프리카 소속은 총 11개 팀. 그중에서 단 1팀도 2라운드 진출에 성공하지 못했다. 개최국이자 역대급 편파 판정으로 지원을 받았던 중국 역시 폴란드와 베네수엘라를 넘지 못한 채 순위결정전으로 추락했다. 대이변을 만들 것처럼 기대했던 나이지리아는 조쉬 오코기, 치메지 메투, 알-파룩 아미누, 엑페 우도 등 전현직 NBA 리거들이 나섰지만 2라운드 진출은 꿈으로 마무리됐다.
미국과 유럽 및 아메리카의 전력이 예전 같지 않았던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런만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도 한 자리 정도는 빼앗길 가능성이 충분했다. 하나, 현실은 냉혹했고 큰 수준차가 여전히 존재함을 드러냈다. 이란과 나이지리아는 유럽과 아메리카를 상대로 단 1승조차 거두지 못했음에도 어부지리 올림픽 진출에 성공했다.
희망을 본 아프리카에 비해 아시아의 현실은 처참했다. 환경과 조건을 탓했던 그들은 이제 어떤 변명거리도 찾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당장 티켓 수를 줄인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 아시아의 입장에선 인종과 선천적인 피지컬의 차이, 또 현대농구의 흐름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 거북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한 월드컵이었다.

▲ 월드컵은 올림픽의 들러리?
세계 농구인들의 대축제가 되어야 할 월드컵은 현존하는 농구 대회 중 최상위권에 속하지 못하고 있다. 축구에서 월드컵이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반면 농구는 월드컵보다 올림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번 월드컵이 올림픽의 예선이었다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 각 대륙별 최상위 성적을 낸 8개 팀들은 일찌감치 2020 도쿄올림픽 진출권을 획득했고 차순위 성적에 따라 내년 6월에 진행될 최종예선에 참가할 예정이다.
※ 2020 도쿄올림픽 진출 확정국_미국, 아르헨티나, 스페인, 프랑스, 호주, 이란, 나이지리아, 일본
월드컵의 권위가 그리 높지 않은 건 다른 측면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은 과거부터 올림픽에 최정예 전력을 내보냈다. 반면 세계농구선수권대회 및 월드컵에는 1.5~2군 전력을 내보내며 올림픽을 준비하는 하나의 단계로 여겼다. 이번 월드컵에 참가한 미국 역시 슈퍼 스타들의 대거 불참으로 최약체라는 평가를 받아야 했다. 2010, 2014 대회에선 그나마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7위라는 역대 최악의 성적으로 짐을 쌌다.
축구에선 프로 시즌을 준비한다는 이유로 월드컵에 불참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만큼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으며 선수들은 전 세계인들이 지켜보고 있는 만큼 자국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온몸을 불태운다. 그러나 농구에선 NBA 시즌을 준비하기 위해 월드컵에 불참하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되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농구에서의 월드컵은 지금처럼 그저 그런 국제대회의 하나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세계농구선수권대회에서 월드컵으로 명칭 변경을 한 지 이제 5년이 지났다. 갓 태어난 신생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농구월드컵은 앞으로의 성장에 큰 힘을 쏟아야 한다.
한편 4년 후 열릴 월드컵은 일본과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3개국이 공동 개최할 예정이다.
▲ 2019 FIBA 중국농구월드컵 최종 순위
우승_스페인/MVP 리키 루비오
준우승_아르헨티나
3위_프랑스
4위_호주
5위_세르비아
6위_체코
7위_미국
8위_폴란드
9위_리투아니아
10위_이탈리아
11위_그리스
12위_러시아
13위_브라질
14위_베네수엘라
15위_푸에르토리코
16위_도미니카 공화국
17위_나이지리아
18위_독일
19위_뉴질랜드
20위_튀니지
21위_캐나다
22위_터키
23위_이란
24위_중국
25위_몬테네그로
26위_대한민국
27위_앙골라
28위_요르단
29위_코트디부아르
30위_세네갈
31위_일본
32위_필리핀
# 사진_FIBA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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