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프볼=이재범 기자] 2000년대 들어 대학농구는 홈앤드어웨이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꾸준하게 나왔다. 그리고 긴 논의 끝에 2010년, 대학농구리그가 출범했다. 대학 선수들은 본교나 상대 학교에 가서 경기를 가지며 미리 프로와 같은 방식의 리그 운영을 경험했다. 홈 경기에서는 재학생들의 응원을 받으며 힘을 얻었다. 그렇게 대학농구리그 초창기 코트를 누볐던 선수들이 어느덧 프로농구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는 오래 전 기억으로 남은 이들의 대학 시절을 소환한다.
※ 본 글은 점프볼 3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중앙대 전승우승 주역 장재석
중앙대는 2010년 대학농구리그에서 22전승(2013년부터 팀당 16경기로 바뀜)을 거둔 뒤 플레이오프에서도 3승을 추가하며 25전승으로 통합 우승했다. 아마추어 무대에 불고 있는 ‘목표는 전승 우승’의 시초다. 중앙대는 당시 평균 96.7점을 올리고 75.8점만 내준, 공수에서 더 할 나위없이 완벽한 팀이었다. 96.7점은 대학농구리그 팀 최다 득점으로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
중앙대의 중심이었던 오세근(KGC인삼공사)은 정규리그 10경기만 출전했다. 국가대표 차출 등으로 절반 이상 자리를 비운 탓이다. 오세근이 빠진 자리를 채운 선수는 장재석(오리온)이다. 장재석은 2010년 대학농구리그에서 22경기, 평균 25분 52초를 뛰며 14.7점 8.4리바운드 2.0스틸 2.0블록을 기록했다. 장재석은 중앙대의 25전승을 언급하자 “그때 오세근 형이 10경기 뛰고, 제가 다 뛰었다. 전승 우승은 제가 한 거다(웃음). 물론 플레이오프 같은 중요한 경기에서 세근이 형이 잘 했다”고 입을 열었다. 이어 “정규리그에선 세근이 형이 뛸 필요도 없었다. 그게 또 나름 함준후(오리온) 형, 김선형(SK) 형 등 우리들만의 자존심이었다”며 “’세근이 형이 없는데 우리가 져? 그럼 세근이 형 때문에 이긴다고 할 거 아냐?’ 선형이 형과 준후 형이 이런 말을 하면서 저에게 ‘네가 잘 해서 세근이 형이 없어도 우리가 이긴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엄청 많이 가르쳐주고 신경을 썼다”고 기억했다.
장재석은 자신의 대학시절을 “언터처블(untouchable)”이란 한 마디로 요약했다. 그리곤 “그때는 요즘과 달리 국내선수가 스쿱샷을 던지거나 플로터를 많이 안 쐈다. 그래서 제가 평균 19분을 뛰면서 블록을 4개씩이나 했다. 왜 19분을 뛰었나 하면 19분 만에 경기가 끝났기 때문이다. 고려대와 연세대, 경희대를 빼면 거의 15분 만에 20점, 30점씩 (점수 차이가) 벌어졌다 그래서 출전시간이 길지 않았다. 대학 때 많이 뛰었어야 하는데 생각보다 많이 안 뛰었다. 그래서 언터처블이다”고 설명했다.
장재석은 2012년 대학농구리그에서 21경기 평균 27분 34초씩 출전해 역대 블록 1위인 평균 3.71개(2위 김종규 3.68개)를 기록했다. 블록을 4개씩 했다는 건 2010년이 아닌 2012년을 말하는 것이다. 다만, 해당 시즌 출전시간이 20분 미만이었던 경우는 4경기이며, 30분 이상 출전한 건 8경기다. 당시 10경기 연속 블록 2개 이상을 기록하기도 했다. 또 대학리그에서 한 경기 8+블록은 총 7번 나왔는데, 이중 유일하게 두 번 기록한 선수가 장재석이다. 블록에 관해선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기록을 남긴 건 사실이다.

최초의 트리플더블러 김시래
명지대는 대학농구리그 출범 후 조선대와 더불어 단 한 번도 플레이오프에 오르지 못한 팀이다. 팀당 16경기 체제로 바뀐 2013년부터 명지대는 홀수 해에 승률 30% 미만, 짝수 해에 5승(승률 31.3%, 5승 11패)을 반복 중이다. 꼴찌를 하는 건 아니지만 이제는 약체 팀 이미지로 굳어졌다. 그렇지만, 대학농구리그 초창기에는 만만치 않았다. 2010년과 2011년에는 9승 13패로 승률 40.9%를 기록했다. 이때 주축으로 활약한 선수가 김시래(LG)다.
김시래 하면 평균 22.0점 8.0리바운드 10.3어시스트 3.3스틸로 맹활약해 ‘시래대잔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2011년 농구대잔치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김시래는 그보다 앞선 2010년 6월 28일 단국대와 맞대결에서 10점 10리바운드 1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대학농구리그 첫 트리플더블을 작성해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새겼다. 당시 경기는 단국대 천안캠퍼스가 아닌 죽전캠퍼스에서 열린데다 라이벌이었던 김명진(전 KT)을 상대로 기록을 세워 더욱 의미 있었다. 2012년 1월 KBL 국내선수 드래프트 1순위에 지명된 김시래는 “대학농구리그는 좋은 추억이고, 하위권 대학에게는 (기량을) 많이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명지대가 솔직히 결선 토너먼트에 진출하기 쉽지 않은데 대학농구리그에선 모든 팀과 한 번씩 번갈아 가며 붙는 게 괜찮았다”며 “대학농구리그가 아니었다면 1순위에 안 뽑혔을 거다. 대학농구리그가 생겨서 제 기량을 좀 더 보여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1순위가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1순위가 쉽지 않았을 거다”고 떠올렸다.
김시래는 최초의 트리플더블을 언급하자 “그 경기 내용이 정확하게 생각나지 않지만, 그 상황이 기억난다. 최초 트리플더블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서 기억에 남고, 그런 타이틀을 가져서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며 “부상 복귀 후 얼마 안 지났을 때다. 그 뒤로 경기력이 더 좋아져서 자신감을 얻었다”고 했다. 김시래는 트리플더블을 작성한 직후 “얼떨떨하다”며 “죽기살기로 경기를 했다”고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참고로 성인무대에서 트리플더블이 나온 건 1996년 이상민(삼성 감독) 이후 14년 만에 처음이다. 더불어 당시 대학농구 최초의 트리플더블로 알려졌지만, 공식 기록을 전산화 한 이후 허재(전 국가대표 감독)가 이상민보다 앞서 중앙대 시절에 트리플더블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시래는 대학 4학년이었던 2011년 대학농구리그에서 평균 16.6점 5.9리바운드 7.6어시스트 2.4스틸을 기록했다. 대학농구리그 역사상 평균 어시스트를 7개 이상 기록한 선수도 김시래가 유일하다. 3학년 때 최초의 트리플더블을 작성한 뒤 4학년 때 어시스트 능력을 뽐낸 김시래의 활약은 결국 ‘시래대잔치’로 연결했다. 김시래 이후 대학농구리그 트리플더블은 총 7회(플레이오프 제외) 나왔다.

한 경기 최다 55점의 주인공 함준후
대학농구리그가 출범할 때 상명대가 2부 대학에서 1부 대학으로 합류했다. 2009년 창단한 상명대는 2부 대학에서 한 수 위 기량을 뽐냈다고 해도 1부 대학과 기량에서 차이가 난 건 분명했다. 이는 성적에서도 드러난다. 2010년에는 1승(21패), 2011년에는 2승(20패), 2012년에는 3승(19패)에 그쳤다. 상명대는 이상윤 전 감독이 부임한 이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기 시작하며 비로소 약팀 이미지를 벗고 중위권 전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상명대는 전력이 약해 대학농구리그 초창기에는 기록의 희생양이 될 때가 많았다. 김현민(KT)은 “상명대와 경기에서 기록이 좋은 선수들이 많을 거다. 오세근의 쿼드러플 더블(14점 18리바운드 13어시스트 10블록)도 상명대를 상대로 기록했다”고 했다. 함준후 역시 2010년 9월 16일 상명대와 맞대결에서 55점을 올리며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을 세웠다. 오세근의 쿼드러플 더블이 나온 경기이기도 하다.
함준후는 “제가 득점을 많이 하면서 선수들이 공격을 밀어줬다(1Q 8점, 2Q 10점, 3Q 14점, 4Q 23점). 상명대가 1부로 승격한 첫 해였다. 지금과 달리 2부 전력이 조금 남아 있었다”며 “당시 손가락 수술 후 복귀한 뒤 운동량이 적었다. 그런 경기에선 4학년을 많이 출전시키지 않았는데 운동을 겸해서 출전시간을 많이 줬다. 절 막는 선수의 신장이 작고, 더블팀을 들어오지도 않았다”고 55점을 올린 경기를 기억했다. 이어 “재미있는 추억이다. 득점을 조금 더 많이 할 수 있었는데 운동이 안 되어 있어서 아쉬웠다. 쉬운 슛 기회를 몇 개 놓쳤다”며 “기본 체력이 부족해서 4쿼터에 체력이 떨어졌다”고 덧붙였다.
함준후는 당시 40분 모두 출전해 2점슛 37개 중 25개를 성공했고, 자유투로 5점(7개 시도)을 추가했지만, 3점슛을 8개 던져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다. 3점슛 감각이 조금만 더 좋았다면 60점도 넘겼을 것이다. 4학년 한 해만 대학농구리그를 경험한 함준후는 “지금은 대학농구리그가 활성화 되었지만, 그때는 지금과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단일대회가 열리는 지방에서 경기를 했던 것과 달리 학교에서 경기를 하거나 다른 학교에 가서 경기를 해서 재미있었다”라며 “우리는 속공과 트랜지션 오펜스에 능했다. 대학농구나 아마추어를 보면 속공을 잘 하는 팀의 전력이 좋다고 생각한다. 수비를 성공한 뒤 공격으로 넘어가는 게 월등하게 빨라서 이기는 경기를 많이 했다”고 대학농구리그를 뛰어본 소감을 전했다.
함준후는 “프로에 와서 많이 발전하지 못했다. 농구가 늘어갈 시기가 있었는데 부상으로 길게 쉬어서 아쉽다”며 대학 시절 활약을 프로까지 이어나가지 못한 걸 아쉬워하면서도 “대학 때는 운동 능력이 좋아서 그걸 바탕으로 농구를 했다. 속공 처리를 잘 했다. 큰 선수가 붙으면 제치고 파고 들어갔고, 작은 선수가 수비하면 골밑으로 끌고 가서 해결을 했다. 활동량이 많았다. 부상 부위도 없었고, 운동능력이 지금보다 좋아서 수월하게 농구를 했다”고 자신의 대학 시절을 떠올렸다.
# 사진_점프볼 DB(문복주, 한필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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