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NBA와 FIBA에서 인정받은 KBL 장준혁 심판의 1,000경기 여정 ①

이재범 / 기사승인 : 2020-03-17 10:4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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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이재범 기자] 장준혁(50) 심판은 1997년 2월 2일 삼성과 SBS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KBL 심판으로 코트에 선 뒤 정확하게 23년 만인 지난 2월 2일 DB와 KGC인삼공사의 맞대결에 나서며 1,000경기를 채웠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 연속 심판상을 수상하는 등 6번이나 심판상을 거머쥐며 KBL 최고의 심판으로 인정받고 있다. 2004년과 2006년과 2007년, 2008년 등 여러 차례 NBA 서머리그를 경험하며 NBA 심판 도전 제의를 받기도 했다.


FIBA는 장준혁 심판을 전 세계 심판들을 교육하는, 총 12명밖에 없는 인스트럭터 후보로 삼고 있다. 장준혁 심판이 KBL 심판부장을 맡아 잠시 코트를 떠나있을 때 한 감독은 “빨리 코트로 돌아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빠른 심판 복귀를 바라기도 했다. KBL뿐 아니라 NBA와 FIBA까지도 심판 능력을 인정하는 장준혁 심판을 만나 KBL 최초로 1,000경기 이상 코트를 누비며 휘슬을 불어온 긴 여정을 들어보았다.


※ 본 잡지는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3월호에 개재된 기사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달성한 1,000경기 출전


Q. 심판들 가운데 처음으로 1,000경기를 넘어서 총 1,004경기(2월 13일 기준)에서 심판을 봤다. KBL 심판으로 지금까지 시간을 돌아본다면?


(잠시 생각한 뒤) 다사다난! 좋았던 일도 많았고, 안 좋았던 일도 있었다. 또, 평범하게 넘어간 적도 있고, 한 마디로 하면 다사다난했다.


Q. 안 좋았던 일은 나중에 이야기하고(장준혁 심판 웃음), 좋았던 일은 뭔가.


심판을 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시작했는데 심판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Q.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게 행복 중 하나인데 그런 의미인가?


당연하다. (KBL이)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었으면 좋겠다. 고등학교, 대학교 때부터 농구 밖에 몰랐기 때문에 이 농구장에 있는 것만으로도, 심판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Q.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오래 있어서 1,000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고 했는데 오랜 시간 이 자리를 지키는 건 그만큼 심판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는 의미다.


프로농구 원년부터 활약한 심판 중에서 현재 나 밖에 안 남았으니까 KBL에서 조금은 인정을 해주지 않았나 싶어 늘 감사하다. 심판으로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 또, 인정을 받아서 심판부장도 했다. KBL은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 되었으면 하기에 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


Q. 그걸 증명하듯 심판상도 6회나 수상했다.


운도 조금 따랐다. 다행히 10개 구단 감독님께서 (심판상을) 주셨다고 생각하니까(심판상은 10개 구단 감독과 심판위원회에서 선정) 너무 감사하고, 기분도 좋다. 그거 때문에 주위에서 좋은 시선으로 봐주시지 않았나 생각한다. 심판이라는 게 이미지도 중요한데 본의 아니게 사고를 쳐서 미국을 다녀온 뒤 이미지가 더 좋아졌다. (2004년) 서머리그에 있을 때 8개 구단 정도 감독님들께서 보고 계셨는데 그 이후 크게 어필도 하지 않으시고 인정을 해주시는 분위기였다.


Q. 예전 이보선 심판위원장은 “심판이 100%를 다 보는 건 힘들다. 얼마나 중요한 것을 놓치느냐가 문제”라고 했다. 장준혁 심판하면 2003-2004시즌 LG와 오리온스의 6강 플레이오프 3차전 오심이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당연하다. 영원히 안 따라올 수 없다. (그 경기 이야기만 나오면) 마음이 아프고, 본의 아니게 피해를 줘서 너무 미안하다. 이렇게 큰 사고를 치면 안 되겠다며 오늘도 무사히 정확한 판정만 하길 바란다.




Q. 그 경기가 끝난 뒤에도 배운 대로 정확하게 봤다고 했다. 그렇지만, NBA 등에 문의한 끝에 잘못된 판정임을 인정했다.


그 당시 정확하지 않지만 4쿼터 마지막 때였는데 바비 레이저인가 레이업을 시도했다(정확한 상황은 오리온스가 76-73으로 앞설 때 김병철이 레이저의 스크린을 받아 골밑으로 파고들었다. 조우현의 수비까지 따돌리고 시도한 레이업이 림 위에서 떨어지는 순간 레이저가 밀어 넣었다. 그 때 남은 시간은 12.5초였다. 오리온스는 득점이 취소된 후 결국 0.4초를 남기고 빅터 토마스에게 동점 3점슛을 허용했다). 볼이 림에 접지해 있을 때는 건드리면 안 된다고 배웠다. 내 노트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런데 떨어지는 볼은 (득점이 될 가능성이 없어서) 건드려도 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떨어지는 볼이라는 건 (림 위 실린더 기준에서) 볼의 중심의 1/2이 벗어나는 거다.


그 찰나의 순간이었는데 (볼이 림과) 접지가 되어 있길래 너무 자신있게 휘슬을 불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하니까 ‘나는 배운 대로 했는데 왜 그럴까’ 의문이었다. 이와 연관된 코비 브라이언트가 나오는 교육 영상도 재정위원회에서 소명을 하기 위해서 보여드렸다. 너무 궁금하고 알고 싶어서 선배 중에 한 분(여성환)에게 부탁해서 NBA에 물어봤다. ‘떨어지는 볼은 건들 수 있다’라는 간단한 답이 왔다. 그렇게 연관이 되어서, 주위의 도움을 받아 결국 NBA에 문을 두드려 서머리그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갔다.


Q. 오히려 전화위복이라고 볼 수 있다.


나에겐 전화위복이었다. 징계를 (자격정지) 2년 받았다. 재정위원회에 참석한 뒤 사무실에 있을 때 팩스 한 장이 들어오더라. 팩스를 보니까 그 날 경기 심판들 이름 사이에서 ‘장준혁 (심판) 2년’이라는 문장이 써있었다. 그만큼 좋아서 심판을 했는데 2년(자격정지)은 심판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짐 정리를 싹 해서 KBL 건물을 나서는데 눈물이 났다. 스포츠뉴스에도 나오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이화여대 병원 응급실에도 갔다. 자고 일어났는데 핑 돌아서 쓰러졌다. 구토도 계속 했다. 귀(달팽이관)에 이상이 생겼는데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하더라.


부산에 대학원을 다니고 있을 때라서 학교 수업을 듣기 위해 서울에서 부산을 왔다갔다 했다. 와이프가 ‘미련을 두지 말고 부산으로 내려가자’고 했다. 그렇게 모든 걸 다 접고 처갓집으로 내려가서 6월까지 지냈다. KBL에서 심판 워크숍에 참가하라고 했는데 더 이상 미련이 없다며 안 갔다. 심판들과도 일절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는데 그 때 KBL에 계시지 않았던 이재민 본부장님께 연락이 와서 만났다. ‘심판을 그만 볼 거냐’고 하셔서 ‘2년 징계를 받았는데 더 이상 하는 건 아닌 거 같다’며 ‘대학원에 충실하고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갈 준비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자 ‘그런 생각이면 차라리 미국에서 심판을 봐라. 미국에서 심판을 볼 기회가 있을 거’라고 하셨다. KBL 심판 교육관이셨던 테리 더햄과 이재민 본부장님께서 이야기를 하셔서 NBA 서머리그 초대를 받았다.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NBA는 NBA구나. 심판은 여기서 배워야 하는구나’라는 걸 처음 깨달았다. 그 때 서머리그에서 4경기에 들어갔는데 아마도 동양인 중 처음이었을 거다. 평가도 굉장히 좋았다. NBA 심판부장이었던 로니 넌이 그 당시 한국에 있던 제시 톰슨(KBL 심판부장 역임)을 통해 나에게 ‘미국에 와서 심판을 볼 생각이 없냐’고 편지를 썼다. 그런 줄만 알고 그냥 넘겼다.


서머리그에 2004년 7월 8일 즈음 가서 일주일 정도 있었다. 그 때 KBL 이사회를 통해 복귀가 결정되었다. 감독님들께서 서머리그를 보러 오셨을 때 테리 더햄이 ‘손님들이 왔으니까 떳떳하게 가서 인사하라’고 해서 인사를 드렸는데 감독님들께서 ‘KBL에 복귀할 거다’라고 먼저 말씀해 주셨다. 정말 다행히 복귀하게 되었다. 사실 NBA 심판을 해보고 싶은 꿈은 있었지만, 좀 더 부딪혔어야 하는데 현실에 안주했다. 한편으론 두려웠다. 로니 넌이 2010년 심판위원장에서 은퇴한 뒤 NBA 심판교육 담당관으로 KBL 심판들을 교육하러 왔다. 그 때 나에게 ‘NBDL(현재 G리그)에서 1년만 심판을 보면 NBA 심판이 될 수 있다’며 자기가 전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는 KBL에서 안 보내줬다.


Q. 주심이 1부심, 2부심과 달리 중계화면에도 많이 잡히고, 해당 경기를 주관하기 때문에 다른 심판의 오심까지 책임을 질 때도 있다. 그런 대표적인 장면이 2011년 1월 27일 모비스와 LG의 경기 때 송창용이 3점슛 라인을 밟고 버저비터를 성공해 79-78로 경기가 끝난 거다. 당시 송창용의 3점슛을 제대로 봤어야 하는 관할 구역 심판은 다른 심판이지 않나?


(내가 봐야 하는 구역이) 전혀 아니었다. 난 베이스 라인에 있었다. A심판, B심판과 함께 들어갔는데 해당 구역을 맡은 건 A심판이었다. A심판이 3점슛 라인을 밟았음에도 3점슛 시도로 손을 들었다. 그 바람에 슛이 성공하자 B심판은 3점슛 성공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A심판이 1차적으로 잘못했고, B심판은 A심판 시그널에 따라서 자신의 임무대로 3점슛을 인정한 거다. 난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주심이었고, 성급하게 판단을 내렸다. 그 때 IRS(비디오 판독)가 있었다면 비디오를 당연히 봤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징계를 받을 때 주심 장준혁으로 나갔다. 주심이 되면 욕을 좀 더 얻어먹는 거 같다(웃음).


Q. 3년 연속 심판상을 수상했던 10년 전 인터뷰에서 ‘어떻게 보면 가장 쉬울 것 같지만 가장 어려운 판정이 터치 아웃이다. 또 공격자 반칙이냐, 수비자 반칙이냐 역시 영원한 숙제’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후 10년이 지났다.


똑같다. 터치아웃이 제일 어렵다. 그 다음이 블로킹과 차징 파울, 그 다음이 골텐딩이다. 후배들에게도 물어보니까 대부분 비슷하다. 다른 심판에게도 어려운 판정 3가지를 물어보면 위 내용 중에서 2가지는 반드시 들어갈 거다. 외국심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손이 눈보다 빠르다’고 했다. 터치아웃도, 블로킹과 차징도 찰나의 움직임과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블로킹과 차징은 움직임에 따라서 심판들에겐 안 보이는 각도가 나온다. 또 다른 선수로 인해서 가려질 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거다. 그래도 결정을 해야 한다.



좋은 경쟁자였던 황현우 심판


Q. 오래 전 장준혁 심판을 떠올리면 유난히 동작이 컸다.


그때는 어렸다. 나를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또 선수 출신도 아니고, KBL에서 인정도 못 받았다. (초창기) 5~6년 동안 (시즌 평가에서) 끝에서 몇 번째였을 거다. 당시 시즌이 끝나면 심판 두 명씩 계약을 하지 않았다. 운동도 하지 않았고, 평가가 나빠서 나를 좀 어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려서 동작을 크게 하면 알아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이 있었다. 그런 뒤에 외국심판 부장님들께서 오신 뒤 인정을 받았다. 한편으론 프로농구 심판이라서 한 두 장면에선 강하게 동작을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선수들의 어필이 많거나 거친 경기라면 또 동작을 크게 해서 그런 걸 누르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지금은 줄었지만, 요즘도 가끔은 필요할 때 강하게 동작을 한다.


Q. 15년 전 즈음 매일 아침마다 다른 심판보다 1~2시간 이상 일찍 출근해서 영어공부 하는 걸 봤다. 그런데 아직도 FIBA 인스트럭터가 되기 위해 영어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영어) 초급은 항상 초급이다. 그걸 못 넘어선다. 그걸 넘어서는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항상 책 앞쪽만 보고 있다. (영어를) 안 쓰니까 (공부를) 안 하게 된다. 어떤 계기나 목표가 확실히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작년 5월까지 10월까지 인재관리육성센터에서 운영하는 영어 프로그램이 있는데 초급을 이수했다. 심판 배정에서 양해를 구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6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 수업을 들었다. 초급을 이수하면 한국외대에서 일주일에 4번씩 진행하는 중급 과정을 또 들을 수 있다. 중급 과정을 마칠 때 좋은 평가를 받으면 플로리다로 어학연수를 보내준다. 그 코스만 밟으면 영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간단한 의사소통은 할 수 있지만, 인스트럭터를 하려면 최소한의 프리젠테이션을 할 줄 알아야 해서 이런 계기를 만들어서 준비를 한다. 그 과정을 마친 이들을 보니까 영어를 잘 하더라. 나에게도 해보라고 권했다. FIBA에서 인스트럭터가 될 자질이 있다고 (나를) 인정해줬다. 이번에도 칼(융브랜드 FIBA 심판위원장)이 한국에 왔다가 가며 홍기환 심판부장과 경기본부 강태진 직원에게 ‘날 영어 아카데미에 빨리 등록 시키라’고 했다고 한다. 외국인을 만나보며 노력을 많이 했는데도 금세 안 되고, 시간이 안 나고, 핑계가 많아서 자꾸 안 하게 되었다. 이제는 옛날에 공부하던 걸 보면서 다시 공부한다. 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급하게 생각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 계획은 그렇다.


Q. 프로 원년인 1997시즌에는 막내 심판이었다. 그런데 해당시즌 챔피언결정 3차전에서 2부심으로 배정받았다. 막내 심판이 챔피언결정전에서 휘슬을 분 거라서 특이한 사례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 당시 필라가 후원하고 스포츠서울에서 주관하는 이달의 심판상(당시 스포츠신문마다 주간이나 월간 선수상 등을 시상했음)이 있었는데 공교롭게 내가 그 상을 받았다. 오해 아닌 오해도 받고, 건방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때) 물불 안 가리고 (파울이) 나오는 건 불고, 정신없이 쫓아다닌 기억이 난다. 내가 1경기 들어갔다면 황현우 심판(1,4차전 2부심)과 강민호 심판(4차전 1부심)이 더 많이 배정되었을 거다. 난 그때 인정을 못 받았다. 여자 실업팀 연습경기나 부산에서 열린 중고연맹전 같은 경기에서 심판을 봤던 나와 달리 현우는 중고연맹 공식 대회 결승까지 봤고, 배짱도 많았다. 난 그런 게 없었다.


Q. 프로 원년부터 아주 많은 심판들이 거쳐갔다. 선수들 중에선 강동희가 기억에 남는다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럼 기억에 남는 동료 심판은 누구인가?


내가 배우고 싶은 심판은 현우와 신동재 형 두 명이었다. 현우는 어려운 콜을 잘 불고, 어린 나이에도 경기를 끌고 가는 카리스마가 있어서 배우고 싶었다. 내 동기지만 내가 가지지 못한 장점을 가졌다. 나보다 KBL에 늦게 들어온 동재 형에게선 폼이나 시그널, 여유를 배우고 싶었다. 두 사람을 보며 ‘나는 왜 못하나’ 하면서 따라가려고 했다. 물론 선배님께도 많이 배웠다.


Q. 만약 황현우 심판이 계속 KBL 심판으로 활동했다면 먼저 1,000경기를 넘어섰을 거다.


무조건(그랬을 것)이다. 나보다 경기수가 꽤 많을 거다. (황현우 심판은 2014-2015시즌까지 정규경기에서 894경기에 배정받아 장준혁 심판의 868경기보다 28경기 더 많은 경기에서 휘슬을 불었다. 플레이오프와 올스타전까지 포함한 통산 경기수는 1,052경기로 장준혁 심판의 1,013경기보다 39경기 더 많았다.)


Q. 황현우 심판이 KBL 심판을 그만둔 뒤 장준혁 심판이 다른 심판들을 교육하는 자리에서 아쉬운 마음에 눈물을 보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적이) 있었다. 대한민국농구협회 심판들을 교육하는 자리였는데 이런 심판이 있었다며 우연찮게 현우 이야기가 나왔다. 애착이 가는 이야기를 할 때 눈물이 났다. 운 건 아니고 눈물을 훔쳤다. 울컥하더라. 좋은 경쟁자였고, 좋은 친구였다. 지금은 아마추어(농구협회)에 가서 열심히 하고 있다.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내가 인정하는 심판이다(웃음).


Q. 황현우 심판이 다시 아마추어 무대에서라도 심판을 본다고 했을 때 기분이 남 달랐을 거 같다.


그때 둘이서 만났다. 버스 운전 기사를 할 때였는데 ‘힘들어서 못 하겠다. 다른 일을 했으면 한다’고 했다. KBL에 심판은 아니더라도 분석이나 판독 관련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는데 원체 색깔이 강하니까 안 되었다. 협회에서 상임심판만 되면 정년이 보장되어 나보다 좋을 거다.


Q. KBL은 2015-2016시즌부터 심판 배정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그때 중간층 경력 심판들의 성장이 더딜 때, 그보다 조금 더 어린 심판들을 챔피언결정전 같은 중요한 경기에 배정했다.


그때 당시 KBL은 처음으로 심판 트라이아웃을 개최했다. 그 과정에서 나이가 있는 심판들과 체력이 떨어지거나 구설수가 있고, 이미지가 좋지 않은 심판들을 정리했다. 발전 가능성이 없는 심판도 나갔다. 그 바람에 후배들이 혜택을 봤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 (혜택을 본) 후배 심판들이 주심을 보며 실력이 많이 늘었다. 현재는 팀에서 인정하는 후배도 있다. 장단점이 있었다. 지금 보면 리빌딩이 잘 된 경우다.


Q. 정말 잘 된 건가?


(웃음). 잘 되어 가고 있다. 한편으론 리빌딩이 신구 조화가 맞물려서 되었으면 좋았을 건데 너무 급격하게 해서 안 좋은 점도 있었다. (리빌딩 직후 좋지 않은 판정이 나왔던 건) 경험이 부족해서 그랬다.


Q. 그 과정에서 이정협 심판이 2015-2016시즌 챔피언결정전 6경기 중 3차전부터 6차전까지 4경기 연속 포함 5경기에서 주심을 봤다. 최고 주목 받는 심판이었는데 이후 중요한 경기에서 많이 중용 받지 못했다.


결국은 개인 노력이다. 이정협 심판을 비롯해 이승무, 이승환 심판 등이 일정 수준에 오른 건 분명하다. 어떻게 다듬어 가느냐가 중요하다. 지금은 (특정심판이) 특별하게 많이 들어갈 수 없다. 현재 (심판마다) 경기 배정이 대동소이하다. 많이 차이가 나면 3~4경기다. 예전만큼 많이 배정이 안 되어서 안 보일 뿐이다. 이정협 심판이 상위 수준에 있고, 일정 수준을 갖춘 건 맞다.


Q. 현재 언급한 심판들이 5~6년 전 리빌딩을 할 때 중간층에 있던 심판들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여겨진다. 이들의 기량이 더 올라서야만 정말 리빌딩이 완성된다. 한 단계 더 기량을 키워서 감독들이나 팬들이 인정하는 심판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절실함, 간절함을 가지고 무조건 노력을 해야 한다. 또 하나, 유지하거나 머물러 있는 건 무조건 도태다. 단 하나라도 발전하려고 노력하고, 그런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간단한 예로 하루에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워야 한다. 머물지 않으려면 간절함과 목표가 있어야 한다. 후배들이 노력을 많이 하고 있는데 간절함을 가지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선수들도 죽기살기로 간절함을 가지고 노력하면 더 잘 하지 않나? 조금 시간이 지나면 간절함의 차이가 (심판의 역량에서도) 드러날 거다. 그러기 위해선 (더 어린 심판 중에서 잘 하는) 새로운 인물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경쟁이 된다. 머물러 있는 심판도 보인다.


# 사진_ 문복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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