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프볼=이재범 기자] 장준혁(50) 심판은 1997년 2월 2일 삼성과 SBS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KBL 심판으로 코트에 선 뒤 정확하게 23년 만인 지난 2월 2일 DB와 KGC인삼공사의 맞대결에 나서며 1,000경기를 채웠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 연속 심판상을 수상하는 등 6번이나 심판상을 거머쥐며 KBL 최고의 심판으로 인정받고 있다. 2004년과 2006년과 2007년, 2008년 등 여러 차례 NBA 서머리그를 경험하며 NBA 심판 도전 제의를 받기도 했다.
FIBA는 장준혁 심판을 전 세계 심판들을 교육하는, 총 12명밖에 없는 인스트럭터 후보로 삼고 있다. 장준혁 심판이 KBL 심판부장을 맡아 잠시 코트를 떠나있을 때 한 감독은 “빨리 코트로 돌아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빠른 심판 복귀를 바라기도 했다. KBL뿐 아니라 NBA와 FIBA까지도 심판 능력을 인정하는 장준혁 심판을 만나 KBL 최초로 1,000경기 이상 코트를 누비며 휘슬을 불어온 긴 여정을 들어보았다. 1편에 이어 심판부장에서 심판으로 복귀했던 남은 이야기를 들어보자.
※ 본 인터뷰는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3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Q. 2016년 1월 23일 모비스와 DB의 경기에서 종아리 부상을 당한 뒤 두 시즌 동안 심판부장에만 전념했다.
좋은 경험이었다. 심판 관리나 사람들을 만나고, 응대하는 방법에서 도움이 많이 되었다. 이재민 본부장님께서 계셨기에 FIBA 관계자들과 유대관계 등 많이 배웠다. 심판부장은 정말 하기 싫은 직종이다. 그렇지만, 심판 교육관은 하고 싶다. 교육만 하면 되니까. 교육하고 키우는 것, 선생님은 내게 숙명 같다. 다만, 선생님은 좋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잘 준비된 자가 해야 한다. 내가 나쁜 놈인 거다. (심판부장은) 책임이 따라서 굉장한 스트레스다.
심판부장을 어쩔 수 없이 떠맡아서 했지만, 책임을 져야 하기에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그래서 여유도 없이 아등바등 했다. 요구하는 건 많고, 능력은 안 되어서 내가 할 건 아니었다. 그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금 심판 보니까 너무 좋고, 행복하다. (심판부장을 하며) 조직과 심판들을 관리하고 심판들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며 상대하는 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중에는 큰 자신이 될 거다.
Q. 2018-2019시즌 SK와 DB의 시즌 개막전에서 심판으로 복귀했다.
너무 좋았다. 복귀하는 것 자체가 좋았으니까. 개막전에 넣은 건 아마도 예우 차원이지 않았을까? 또 새로운 총재님께서 오셨으니까 (개막전을) 잘 치러야 해서 홍기환 부장님께서 경험이 많은 사람을 배정하셨을 거 같다. (심판을 보는) 지금이 너무 좋고, 너무 행복하다.
Q. 심판들이 확 바뀐 계기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2008-2009시즌 박광호 심판위원장 부임이다. 비시즌에 체력훈련을 가고, 경기에 배정되지 않은 심판들은 오전 교육 후 자유롭게 시간을 보냈던 것과 달리 오후에도 웨이트 트레이닝 등으로 몸 관리를 했다.
박광호 심판위원장님과 이재민 경기본부장님 부임이 딱 그 이전과 대비된다. 박광호 위원장님은 부임 당시 우리 심판들의 이미지가 안 좋아서 그걸 개선하려고 정말 노력을 많이 하셨다. 정말 우리를 힘들게 하셨다. 통제를 많이 하셨는데 그게 밑바탕에 있어서 지금과 같은 시스템이 갖춰졌다. 박광호 위원장님께서 오셨을 때 개인적인 부탁을 드렸다. 애플 노트북하고 심판 교육을 위한 (경기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사달라고 했더니 딱 사주셨다. 그걸로 경기영상을 쪼개서 심판들에게 보여주고, 보여주고, 또 보여줬다. NBA에서 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처음으로 만들어서 심판들을 교육시켰다. 그게 밑바탕이 되어서 지금까지 교육 프로그램을 이어오고 있다. 오후에는 당연히 운동한다.
이재민 본부장님은 (심판) 앱 구축과 FIBA와 관계, 통계 프로그램 같은 시설을 강화했다. 그건 잘 하셨다. 이 두 분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지금 김동광 본부장님은 믿고 응원해주신다. ‘뒤에서 막아줄 테니까 소신껏 (판정을) 하라’고 하신다. 색깔이 있다. 박광호 위원장님은 기초, 이재민 본부장은 전문성을 강화하고, 김동광 본부장님은 또 심판들을 많이 이해해주신다.

Q. 지방에서 경기가 끝난 뒤 기차에서 심판과 마주친 적이 있는데 해당 경기를 보고 있더라. 경기가 끝난 뒤 심판들은 다음 경기 배정까지 어떤 일정을 소화하는지 궁금하다.
내가 심판부장을 할 때 (심판들에게) 요구한 건 간단했다. 자기 경기 분석은 경기 끝나고 바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방 경기에 갔다면 3심이 다 같이 보면서 자기 눈이 아닌 다른 시선으로 보라고 했다. 그 보고서가 아침 9시, 10시까지 들어와야 한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래서 기차에서 경기를 보고 있었을 거다. 심판부장은 (그날 경기에서 나온) 특이사항을 앱에 올려서 공유를 한다. 수도권과 지방에 배정되었던 심판은 각각 출근 시간을 달리 하지만, 다음날 오후에는 운동을 한다. 배정이 안 된 심판 중 분석조가 있어서 저녁에 경기를 보고 분석한다. 결국은 경기가 없을 때만 잠깐씩 여가 생활을 한다.
Q. 프로농구 초창기 심판들은 경기에 배정되지 않았을 때 굉장히 여유로웠는데 지금은 너무 힘든 거 아닌가?
음···. 그래도 홍기환 부장님께서 오신 뒤 좋아진 편이다. 내가 부장일 땐 (평일에는) 모든 심판들이 남아서 경기를 봤다. 지금은 당직인 분석조가 있어서 조금 더 여유가 생겼다. 난 다같이 봐야 일관성이 생긴다고 여겨서 함께 경기를 보게 했다. 후배들이 원망도 많이 했다. 자기 생활도 못하고, 집에 아이가 있는 가장은 오로지 와이프에게 육아를 맡겨야 했다. 그래서 한 후배가 와서 ‘이렇게는 심판을 정말 못하겠다’고 하더라. 아침 10시까지 출근해서 퇴근이 10시니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홍기환 부장님께서 오셨을 때 먼저 이야기를 했다. 지금은 조금 좋아진 거다.
Q. 원망을 많이 들었겠다.
왜냐하면 난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웃음). 좋아하는 심판을 보는데 먹을 거 주고, 운동도 시켜주고, 월급도 주는데 뭘 그렇게 하소연 하나 싶었다. 후배들 마음을 잘 몰랐던 거다. 후배들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지금은) 후배들에게 맞춰간다. 교육 시간에도 정말 아닌 건 아니라며 나서지만, 후배들의 의견을 들어주면서 따라간다. 이제는 뒤에서 지켜보며 묻어서 가고, 연차가 낮은 후배들을 키우는 게 내 역할 같다(웃음).
Q. KBL에서 WKBL로 자리를 옮긴 박선영 심판은 “‘저 심판 괜찮은 심판이구나’ 한 마디만 해주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했다. 장준혁 심판은 앞으로 어떤 심판으로 기억되고 싶나?
그냥 평범하게 장준혁 심판(이면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거 같다. 그냥 장준혁 심판. 심판은 원래 노출이 안 되고, 돋보이지 않는 게 제일 좋은 거다. 거기서 만족한다. 튀려고 하면 절대 아닌 거 같고, ‘아, 장준혁 심판’, ‘어, 장준혁 심판이었네’ 이런 거면 된다.
BONUS ONE SHOT | 마지막으로 남긴 한 마디
장준혁 심판과 인터뷰를 마친 뒤 조금 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장준혁 심판은 화제를 가족으로 돌리며 “가족들에게 미안하다”고 입을 뗐다. 이어 “아내는 내가 하는 일에 전혀 관여를 하지 않는다. 이제는 면역이 되었을 거다”며 “심판이 된 뒤 KBL에서 보내줘서 가족여행을 한 번 갔다. 그 외에는 본가인 대구와 처가가 있는 부산 외에는 아무 곳도 여행을 가보지 못했다. 오늘(2월 13일)은 둘째 졸업식인데 못 갔다. 0점짜리 아빠”라고 했다. 매일 아침 몸무게를 재며 그 변화에 따라 식단 관리까지 하는 장준혁 심판이지만, 가정에는 그만큼 소홀했다. 장준혁 심판이 KBL 최고의 심판으로 인정받는 긴 시간 동안 가족들의 지지와 희생이 있었다.

# 사진_ 문복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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