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인이 말하는 시대별 여자대표팀 아이콘

편집부 / 기사승인 : 2015-09-28 19: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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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편집부] 여자농구는 최근 참가했던 2015 FIBA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지난해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이미선, 변연하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들이 떠났기 때문이다. 이들에 앞서 우리 여자농구에는 국제대회에서도 찬사를 받아온 전설들이 많았다. 그래서 과거로 시계를 돌려봤다. 여자농구의 전설들로부터 시대를 지배해온 ‘아이콘’들을 추천받았다.


※ 본 기사는 월간 점프볼 2015년 8월호에 실린 기사임을 밝힙니다.





김평옥이 기억하는 아이콘
박신자 1941년생, 176cm, 센터, 상업은행


지난 7월 6일 속초에서는 박신자 여사의 이름을 딴 2015 우리은행 박신자컵 서머리그가 개최됐다. 자신의 이름을 딴 대회가 열린다는 것만으로도 박신자 여사가 여자농구에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박신자는 여자농구 1세대 스타 플레이어였고, 여자농구를 세계에 알린 인물이다. 숙명여중·여고를 졸업한 박신자는 실업팀 상업은행(現 우리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상업은행을 정상으로 이끈 것은 물론, 국제대회에서 더욱 빛났다. 1967년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제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에서 박신자가 이끈 한국은 준우승을 차지했고, 박신자는 MVP로 선정됐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하기 힘든 결과다. 1964년 세계선수권에서 베스트5에 선정되는가 하면, 1967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선 일본을 누르고 우승도 차지했다. 박신자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9년 세계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아시아인 최초로 헌액됐다. 센터로서는 작은 신장인 176cm에 불과했지만, 명석한 두뇌플레이로 서양의 장신선수들과도 대등한 플레이를 펼쳤다. 1967년 11월 2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그의 은퇴경기에는 7,000여명의 팬이 운집해 대스타의 고별전을 지켜보기도 했다. 1967년 은퇴한 박신자는 1982년 신용보증기금의 창단 감독을 맡기도 했다.


“뭐든 잘 했던 올-어라운드 플레이어”


박신자 씨는 포지션은 센터였지만, 외곽슛도 굉장히 좋았다. 그땐 3점슛 라인이 없었는데, 3점슛 라인 근처에서 던지는 슛이 굉장히 정확했다. 박신자 씨는 올-어라운드 플레이어였다. 득점, 패스, 리바운드 등 못하는 게 없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그때 여자농구 수준은 정말 높았다. 아시아에선 독보적이었고, 미국, 소련, 브라질 같은 강팀들과도 큰 차이가 안 났다. 그런 팀들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신장은 작았지만, 기술이나 스피드가 상당히 좋았다. 당시에는 여자농구 인기도 엄청났다. 남자농구보다 더 인기가 많았고, 특히 박신자 씨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전 국민들이 다 아는 스타였다. 상업은행에서 뛰었는데, 그때가 바로 상업은행 전성시대였다. 상업은행이 우승을 하면 은행 예금고가 올라갈 정도였다. 평소에는 장난기가 많았던 걸로 기억난다.


방신실이 기억하는 아이콘
강현숙 1955년생, 172cm, 가드, 외환은행


방신실 WKBL 경기력향상위원은 70년대의 아이콘으로 강현숙(60)을 꼽았다. 강현숙은 1970년대 탁월한 실력과 미모로 한국여자농구를 대표한 스타다. 1972년 청소년대표팀으로 첫 태극마크를 단 뒤 1980년 은퇴할 때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한국 농구팬들의 로망인 ‘장신가드’의 시초다. 172cm의 신장을 갖춘 강현숙은 70년대 장신 가드로 불렸다. 국가대표팀 야전사령관으로서 1979년 세계여자농구선수권에서 한국의 준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이때 대표팀은 세계최강 미국을 제압하는 기염을 토했다. 은퇴 직전 대회인 1980년 아시아선수권에서는 중국을 30점차로 격파했다. 포인트가드 부문에서 1979년, 1980년 세계여자농구 베스트5에 선발되는 등 실력을 인정받았다. 가드지만 득점력도 탁월했다. 과거 3점슛이 기록되지 않았지만 한 경기 43점을 기록했다. 왼손, 오른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등 기술에서도 빠지지 않았다. 또한 경기뿐만 아니라 팀을 이끄는 리더십도 갖췄다. 국가대표팀에서 3년간 주장을 맡았다.


“대중들이 찾은 농구 스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농구 인기가 많을 때인데 언니의 팬들이 굉장히 많았다. 운동도 잘하는데 굉장히 미인이지 않은가. 포인트가드로서 슛과 어시스트 모두 좋았다. 당시 3점슛이 없을 때라 기록이 안됐지만, 언니의 슛 거리는 굉장히 길었다. 경기에 들어가면 승부욕도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니와는 소속팀, 대표팀에서 같이 운동했는데, 훈련이 4시 시작이면 언니는 일찍 가서 준비를 이미 마치고 있었다. 대표팀에서 매사에 정확하고 열심히 해서 오히려 후배들이 ‘고지식하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성실하고 솔선수범해 후배들이 따라오게 했다는 말이다. 언니가 대표팀 주장일 때는 주말마다 후배들에게 간식을 사다 주며 챙기기도 했다. 항상 무교동에서 파이를 사서 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아일보 기자이던 형부와 연애 시절 돌아오는 길에 매번 파이를 사와 선수들에게 간식으로 준 거였다. 언니는 과거에도, 지금도 여자농구에 관심이 많다. 시즌이 시작하면 항상 6개 구단 체육관을 찾아 경기를 본다. 언니의 열의는 늘 우리를 감동시켰다.




강현숙이 기억하는 아이콘
박찬숙 1959년생, 188cm, 센터, 태평양화학


70년대 대표 포인트가드 강현숙이 기억하는 여자농구의 아이콘은 자신과 콤비를 이뤘던 명센터 박찬숙(56)이었다. 박찬숙은 1970~80년대 여자농구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였다. 190cm의 센터였던 박찬숙은 1975년 고등학교 1학년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선발됐고, 1984년 LA올림픽 은메달을 따내며 여자농구를 세계에 알렸다. 당시 박찬숙은 세계적인 선수였다. 1979년 한국이 세계선수권 준우승을 차지하고, 올림픽 은메달을 따낼 수 있었던 것은 장신의 서양선수들과 맞설 수 있는 박찬숙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찬숙은 큰 키는 물론 기동력과 기술을 두루 겸비한 선수였다. 70년대에는 여자농구의 인기가 대단했다. 농구의 메카였던 장충체육관이 꽉 들어찰 정도로 사람이 많았고, 남자농구보다 오히려 여자농구가 더 인기가 많았다. 박찬숙은 그 여자농구 인기의 중심에 있던 선수다. 그녀의 소속팀은 태평양화학이었고, 홍영순과 홍혜란 등 숭의여고 선배들과 함께 태평양화학의 ‘무적함대’ 시대를 이끈 바 있다.


“눈빛만 봐도 호흡이 맞던 동료”


박찬숙과는 국가대표팀에서 오랫동안 호흡을 맞췄다.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동료였다. 박찬숙은 큰 키에도 신체 밸런스가 잘 잡혀 있었다. 포스트에서 피벗뿐만 아니라 리바운드, 슈팅, 피딩 능력을 고르게 갖추고 있었다. 197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가 기억난다.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렸는데, 3층까지 꽉 찰 정도로 관중이 많았다. 첫 경기를 캐나다와 했는데 우리가 지고 말았다. 국내에서 하는 경기인데, 첫 경기를 지니까 얼마나 부담이 컸겠나. 내가 주장이었는데, 앞으로 남은 경기를 잘 하자고 선수들을 다독였다. 결국 선수들이 단결이 돼서 남은 경기를 모두 이겼다. 그때 승점 차이로 미국이 우승을 하고 우리가 준우승을 했다. 특히 미국과의 경기가 기억나는데, 찬숙이와의 호흡이 좋았다. 그때 내가 오버헤드 패스를 즐겨 했는데, 찬숙이가 받으면 득점을 하거나 자유투를 잘 얻어냈다. 그때 그 플레이로 찬숙이가 5번 연속 득점을 했다. 상대 수비수가 당하면서도 계속 득점을 주더라. 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열심히 뛰었는데, 정말 신나게 했던 기억이 난다. 미국을 이겼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나와 찬숙이가 포인트가드, 센터로 대회 베스트5에도 선정이 됐다.




정미라가 기억하는 아이콘
조영란 1957년생, 186cm, 포워드, 상업은행


중고농구연맹 정미라 이사가 추천한 아이콘은 1970~80년대를 주름잡은 파워포워드, 조영란(58)이었다. 뛰어난 탄력과 승부근성, 슈팅능력을 앞세워 여자농구계를 이끌었다. 1975년 콜롬비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만 17세에 국가대표로 선발된 조영란은 체격조건이 좋은 서양선수들과의 몸싸움을 즐기며 대표팀에서 없어선 안 될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더불어 1970~80년대 여자선수들에게서 보기 드문 원핸드슛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기도 했다. 또한 조영란은 한국이 잠실실내체육관 개장을 기념해 개최한 197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박찬숙과 함께 골밑을 책임지며 한국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1981년 미국으로 농구유학을 떠난 조영란은 이후 이탈리아 프로팀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한동안 일신상의 이유로 대표팀에서 제외됐던 조영란은 오랜 공백을 깨고 대표팀에 복귀, 1984년 LA올림픽에 출전해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어느 팀이든 필요로 하는 선수”


내가 지도자가 되고 보니 (조)영란이는 어느 팀이든 필요로 하는 스타일의 선수였다. 큰 신장과 탄력으로 골밑에서 궂은일을 도맡았고, 원핸드슛도 인상적이었다. 지금 뛰고 있는 선수와 비교하자면, 곽주영(신한은행)과 슛 동작이 비슷했다. 또한 몸매는 호리호리했지만, 유럽선수들과의 몸싸움도 버텨낼 정도의 힘과 정신력도 갖고 있는 파워포워드였다. (박)찬숙이와 같은 화려함이 없어 언론의 주목을 덜 받았지만, 영란이 역시 당시 대표팀 전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선수였다. 여자대표팀은 1975년에 나를 비롯해 찬숙이, 영란이 등 20살도 안 된 젊은 선수들을 대거 발탁하며 세대교체에 나섰다. 당시만 해도 대표 선발이 지금보다 합리적이었고, 선수 폭도 넓어서 우려의 목소리는 많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성장한 후인 197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것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다. 우리들은 태릉선수촌에서 기상시간보다 1시간 빠른 5시 30분에 일어나 훈련을 했고, 외박을 받아도 나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땀을 흘렸다. 우리들이 1979년 세계선수권대회 준우승을 합작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김영옥과 이종애가 기억하는 아이콘
정은순 1971년생, 185cm, 센터, 삼성


1980년대 박찬숙, 성정아의 뒤를 이어 대형 센터가 등장했다. 바로 인성여고 출신의 정은순(44)이다. 185cm의 큰 키를 갖고 있던 정은순은 인성여고 1학년 시절 국가대표에 차출돼 화제를 모았다. 당시 정은순은 박찬숙이 가지고 있던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 기록을 1달 앞당겼을 정도로 여자농구의 유망주였다. 그만큼 고등학생임에도 원숙한 기량을 자랑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삼성에 입단한 정은순은 농구대잔치에서 득점 2위, 리바운드 1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을 만큼 독보적인 활약을 펼쳤고, 삼성은 정은순의 영입으로 단숨에 여자농구 최강팀으로 자리매김 했다. 정은순은 탁월한 피벗과 슈팅, 리바운드, 블록슛, 패스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는 센터플레이의 교과서였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는 4강 진출 신화를 일궈내기도 했다. 이밖에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금메달도 목에 걸었다. 프로에서는 4차례 우승, 정규리그 MVP 3회, 득점상 1회, 리바운드상 2회, 블록상 1회를 수상한바 있다. 정은순은 수많은 후배들이 우상으로 꼽을 만큼 여자농구에서 존경받는 선수로 남아 있다.


“넘기 힘들었던 라이벌”


우리 시절에는 정은순 언니가 최고였다. 센터 중에선 독보적인 선수였다. 슛도 좋고, 패스도 좋고, 농구를 똑똑하게 했다. 아쉽게도 국가대표에선 언니랑 함께 뛰어본 적이 없다. 만약 같이 뛰었으면 정말 쉽게 농구를 했을 것 같다. 언니가 있던 삼성과 내가 있던 현대는 잘 알다시피 라이벌 팀이었다. 우리 땐 늘 현대가 삼성에 졌는데, 경기를 하면 싸우는 일도 많았다. (전)주원 언니 같은 경우는 은순 언니랑 대표팀에서도 만나니까 잘 싸우진 않았는데, 난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웃음). 그땐 언니가 워낙 잘 하니까 우리 입장에선 언니 성질을 건드릴 수밖에 없었다. 언니가 일부러 발도 걸기도 하고 여우같이 했던 기억이 난다. 팬들끼리도 신경전이 치열했다. 언니를 건들면 우리한테 욕을 하기도 했다. 언니가 은퇴를 하고 나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나보고 코트에선 여우같고 악착같다고 생각했는데, 밖에서 보니 왜 이렇게 순해 보이냐고 했던 게 기억이 난다. 시드니올림픽 때도 언니의 플레이가 기억난다. 포스트에서 정말 영리하게 플레이 했고, 언니 덕에 4강에 갈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언니가 있을 땐 삼성에 늘 졌는데, 언니가 은퇴하고 나서 2002년에 삼성을 꺾고 마침내 우승을 했던 기억이 있다. -김영옥


“지는 것을 정말 싫어했다”



같은 포지션이라 그런지 박찬숙 선배와 정은순 언니, 정선민 언니가 떠오른다. 그중 정은순 언니를 대표팀 아이콘으로 꼽고 싶다. 언니는 포스트 플레이를 굉장히 영리하게 했다. 언니와 시드니올림픽에 가서 같이 뛰어 봤는데, 외국선수와 경기해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은순 언니는 외국선수를 두고 1대1이 가능한 정도였다. 포스트 플레이를 할 때 수비가 안 붙으면 슛을 던졌고, 안에서 몸싸움도 자유롭게 했다. 대표팀에서 언니와 방을 같이 썼는데, 내가 어리고 학교 후배라서 그랬는지, 다른 선수들보다 더 잘해줬다. 언니가 후배들을 잘 챙겨주지만 카리스마가 있어 엄청 무서웠다. 운동하는 것도 생활하는 것도 똑 부러졌다. 지는 것을 정말 싫어했다. 예를 들어 경기에서 한 번 맞으면 두 번 때릴 정도의 승부욕이 있었다. 국내에서도 외국에서도 똑같았다. -이종애




정은순이 기억하는 아이콘
전주원 1972년생, 176cm, 가드, 신한은행


한국여자농구 역사를 통틀어 포인트가드 계보를 논한다면, 전주원(43)은 결코 빼놓아선 안 될 인물이다. 고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90년 선일여고를 한 해 동안 전승으로 이끌며 주목을 끈 전주원은 당시 1억 5,000만원이라는 거액을 받으며 현대증권에 입단했다. 노련한 경기운영과 공격력, 리바운드 가담 등 다재다능한 능력을 지닌 전주원은 이후 한국여자대표팀과 여자프로농구를 오가며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만 20세에 성인국가대표로 선발된 후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대회, 올림픽 등 굵직굵직한 국제대회에서 한국 가드진을 이끈 전주원은 2000 시드니올림픽 쿠바와의 예선전에서 올림픽 역대 2번째 트리플 더블(10득점 10리바운드 11어시스트)을 기록, 화제를 모았다. 전주원의 활약 속에 한국은 8강이라는 목표를 넘어 4강에 진출하는 기적을 연출했다. 전주원은 WKBL 출범 후 10차례나 어시스트 1위를 차지하는 등 프로무대에서도 녹슬지 않은 기량을 선보였고, 국내 프로스포츠 사상 최초로 두 차례 영구결번을 가진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선배 충고 받아들인 대인배”


(전)주원이는 실업이나 프로에서 같은 팀이 된 적이 없지만, 시즌이 끝나면 항상 함께 대표팀에서 호흡을 맞췄다. 사실상 팀 동료나 마찬가지인 사이였다. 주원이는 어릴 때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서 혼낸 선배가 없었지만, 나는 달랐다. 주원이가 대담해보이지만, ‘기분파’라서 소극적인 모습도 종종 보였다. 그래서 대표팀 시절 크게 나무란 적이 있는데, 그 충고를 새겨듣고 금세 자신의 실수를 만회했다. 그 모습을 보며 ‘크게 될 선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주원이와는 9년 동안 대표팀에서 호흡을 맞췄는데, 아무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시드니올림픽이었다. 주원이가 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줬지만, 나는 주원이가 부진했던 브라질과의 4강전이 기억에 남는다. 주원이가 동메달이 걸린 것에 부담을 느껴서인지 제 기량을 못 보여줬다. 나 역시 이전까지 몸싸움을 너무 많이 해서 엉덩이 근육이 파열된 상태였고, 3명이나 5반칙 퇴장을 당해 충분히 이길 수 있던 경기를 놓쳤다. 그 경기만 잡았다면 연금을 받을 수 있었는데(웃음).


# 사진 문복주 기자,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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