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고의 팀](2)1997-1998 챔피언 대전 현대 다이넷

손대범 / 기사승인 : 2016-05-20 06: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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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손대범 기자] 점프볼 창간 16주년 기획, 역대 최고의 팀을 알아보는 두 번째 시간. 이번 주인공은 준비된 챔피언, 1997-1998 시즌 챔피언 대전 현대 다이넷이다.


1997-1998시즌은 프로농구 역사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즌이었다. 프로농구 인기를 주도했던 이상민이 데뷔했고, 실업무대를 호령했던 기아 왕조가 저물기 시작한 시즌이었다. 또한 194cm의 단신 선수 조니 맥도웰이 데뷔해 외국선수 선발의 ‘기준’을 새롭게 했다. 이 가운데 신선우 감독의 대전 현대는 3년 연속 정규리그 우승과 2년 연속 챔피언결정전 우승의 발판을 마련했다.



리빌딩 대성공


“질 거라는 생각이 잘 안 들었어요. 항상 자신감이 있었죠. 실제로도 많이 이겼고요. 즐겁게 농구했습니다.”


1997-1998시즌에 대해 묻자 조성원(현 수원대 감독)은 옅은 미소를 띠었다. 조성원은 1997년 봄, 현대가 맞은 새 식구 중 한 명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온’ 식구들이었다. 이상민(현 삼성 감독)과 김재훈(현 모비스 코치), 조성원은 상무에서 제대해 현대로 복귀했다. 여기에 한양대 출신의 신인 추승균(현 KCC 감독)도 가세했다. 전문가들은 프로원년(7승 14패, 7위)과는 확 달라진 현대 전력을 두고 ‘우승후보’라는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유도훈(현 전자랜드 감독)과 정진영, 임근배(현 여자농구 삼성생명 감독) 등으로 힘겹게 치렀던 현대였다. 그러나 원년을 치르는 동안 그리 큰 부담은 갖지 않았다도 한다. “신선우 감독님도 그랬고, 성적에 큰 부담은 갖지 말자고 했던 시기였죠. 조금만 기다리면 기다리던 선수들이 합류할테니까요. 게다가 어쩌다보니 라이벌이었던 삼성(8위)보다는 성적이 잘 나와서 다행인 면도 있었죠(웃음).” 임근배의 말이다. 그렇다. 어떻게 보면 현대는 오늘날 프로팀들이 보이는 ‘리빌딩’ 방식의 모범답안을 제시했던 팀이었다. 신선우 감독은 김재훈, 조성원, 이상민을 동반입대 시켰다. 동시에 군대 문제를 해결하면 그만큼 동시에 전력을 키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니 말이다. 일각에서는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가 있는 만큼 적응에 시간이 걸리지 않겠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조)성원이 형과는 홍대부고 시절부터 가깝게 지냈던 사이였어요. 서로 장점과 단점을 잘 알고 있었죠. 또 상무에서도 함께 하면서 프로에 가면 어떻게 할 지도 많이 생각했었습니다. 게다가 선배들도 뒤에서 잘 이끌어주셨어요. 격려도 많이 해주셨고요.” 이상민의 말이다. 외국선수 선발도 잘 됐다.


특히 2라운드에서 선발한 맥도웰이 ‘히트 상품’이었다. 임근배는 “저는 그 자리에 없어서 잘 몰랐는데, 나중에 듣기로는 맥도웰이 (드래프트 당시) 우리의 주력 선수는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애초 신 감독님이 생각해둔 선수가 있었는데 다른 구단이 먼저 선발하면서 맥도웰을 뽑았는데, 기대 이상의 활약이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맥도웰. 그는 ‘기대 이상’이 아니라 ‘역대급’ 활약을 보였다. 1997-1998시즌에 데뷔해 2003-2004시즌까지 KBL에서 여섯 시즌을 뛰었다. 애런 헤인즈가 등장하기 전까지, 맥도웰은 외국선수와 관련한 역대 기록은 모두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여전히 맥도웰만큼 승률이 좋은 선수는 많이 찾아볼 수 없다. 임근배는 맥도웰의 첫 인상을 이렇게 기억했다.


“농구 참 잘 못하게 보였는데(웃음), 전지훈련 때도 그렇고 센스가 있더라고요. 이(상민)감독과도 잘 맞았죠.”


이상민도 마찬가지. “정말 영리했어요. 센스가 있었죠. 우리말도 잘 알아들어서 찬스가 날 때면 제 뒤로 살짝 와서 속삭였죠. 픽앤롤 플레이가 잘 통했어요.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픽앤롤 수비가 정교하진 않았거든요. 지역방어가 없었던 탓도 있지만, 서로 찬스가 많이 만들어졌죠.”그 시즌 이상민은 6.2어시스트로 2위였고, 맥도웰은 27.2득점으로 5위였다. 맥도웰의 야투성공률은 63.8%로 2위(1위 레지 타운젠드, 67.7%)였다. “맥도웰은 ‘탱크’였어요. 힘이 엄청나서 키가 작은데도 찬스를 잘 잡았죠. 게다가 스크린이나 패스도 좋았습니다. 골치 아픈 선수였죠.” 당시 기아의 감독이었던 최인선 감독의 말이다. (제이 웹과 맥도웰은 23.3개의 리바운드를 잡았다.)


현대의 강점은 또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속공이다. 리바운드 이후 속공이 기가 막혔다. 맥도웰, 이상민, 조성원, 추승균 모두 볼을 다루는 실력이 좋았고, 패스에 대한 감각이 있었다. 상대 실책이 나올 때도 마찬가지. 어김없이 이상민의 날카로운 아웃렛 패스가 뻗어나갔다. 마무리는 조성원과 추승균의 몫이었다. “편했죠. 패스가 입맛에 맞게 딱딱 왔으니까. 자리만 찾아가면 패스가 왔어요.” 조성원의 말이다. 현대는 그 시즌 45경기에서 294개의 속공을 기록했다. 속공 부문 최하위 삼성(119개)보다 150개가 많았다(리바운드도 1위였다).



승승장구 다이넷


현대는 기대 이상의 경기력을 뽐냈다. 디펜딩 챔피언 기아와의 개막전에서 90-87로 이겼는데, 이 경기부터 맥도웰의 괴력이 화제가 됐다. 맥도웰은 이날 35득점 14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이상민은 어시스트 9개를 보탰다. 현대는 1라운드를 7승 2패로 마쳤다. 승률은 라운드를 거듭할 수록 높아졌다. 11월 23일 SK전 승리 이후 11연승을 달렸다. 2005년 안양 SBS(현 KGC인삼공사)가 2005년 15연승으로 이 기록을 넘기까지 11연승은 한동안 프로농구 역대 최다연승 기록으로 남아있었다. (2001년 SK가 11연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12연승을 달성하진 못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앞을 가로막은 팀이 바로 현대의 DNA를 물려받은 KCC였다.) 사실 위기도 있었다. 3라운드는 3승 6패였다. 1998년 1월 4일 기아 전은 77-100으로 완패했고, 13일 뒤 LG전은 수비에 막혀 72점 밖에 넣지 못했다. 많은 팀들이 이상민-맥도웰 효과를 최소화하기 위한 작전을 들고 나오던 시점이었다. 때마침 이상민도 힘에 부친 듯 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상민 역시 프로무대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상민은 1997-1998시즌에 평균 35분 51초를 뛰었는데, 이는 국내선수 중 3위였다. 현대의 국내 선수 중 평균 출전시간이 30분을 넘긴 선수는 당시 이상민이 유일했다. 신선우 감독은 유도훈의 출전시간을 늘리고 역할을 분배하면서 위기를 극복해갔다. 또, 현대는 전체적으로도 선수 활용의 폭이 넓었다. 신인 추승균도 라운드를 거듭할수록 활약이 눈에 띄었다. 추승균이 20+득점을 기록한 날, 현대는 5승 2패를 기록했다.


현대가 우승 축포를 쏘아 올린 건 정규리그 종료까지 10일 여 앞둔 1998년 2월 24일이었다. 대전 홈경기장에서 SBS를 91-88로 따돌리면서 우승을 결정지었다. 맥도웰의 자유투로 따낸 짜릿한 역전승이었다. “걱정이나 부담은 없었어요. 사실 시즌 개막할 때 우승을 하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지만, 그래도 자신감은 있었죠. '하던 대로 열심히만 하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상민의 말이다.



플레이오프에서 맞은 위기


그러나 현대의 우승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4강 플레이오프는 간단히 끝났다. 정규리그 5위였던 동양은 전희철(현 SK 코치)과 김병철(현 오리온 코치), 키넌 조던 등을 앞세워 현대에 대적했지만, 현대는 3경기 만에 시리즈를 끝내버렸다. 1~2차전에서 추승균이 내리 20+득점을 올리면서 공헌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 대구에서 열린 3차전에서는 동양이 26-15로 앞서면서 시작했지만 뒷심에 밀리면서 결국 시리즈를 내줬다. 이날 현대가 2~3쿼터에 올린 점수는 무려 56점. 반면 동양은 동시간 동안 31점에 묶이면서 무너졌다. 대망의 챔피언결정전 상대는 기아였다.


기아는 대우와 LG를 차례로 꺾고 올라왔다. 체력적으로 불리할 것이라 봤지만, ‘기술 농구’로 대변되던 디펜딩 챔피언의 저력은 대단했다. 허재가 슬슬 ‘점화’하는 동안, 김영만(현 동부 감독)이 선봉에 서서 형들을 이끌었다. 외국선수 클리프 리드도 만만치 않았다. 수비가 좋은 LG는 버나드 블런트가 활약했지만, 블런트가 막힐 때는 답이 없었다. 기아는 4강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기아를 80-67로 제압하면서 2년 연속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성공했다.


‘패기’와 ‘노련미’의 대결로 압축된 챔프전. 예상을 뒤엎고 기아가 1~2차전을 각각 9점차로 이기면서 현대를 코너로 몰아 넣었다. 허재는 1차전에서 29득점을 올렸다. 이미 이때 손등이 골절된 상태였다. 득점도 득점이지만, 수비를 몰아 넣은 후 빼주는 패스가 일품이었다. 리드도 맥도웰과의 자존심 경쟁에서 밀리지 않았다. 저스틴 피닉스의 공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3차전은 현대가 가져갔다. 95-93. 짜릿한 승리였다. 현대 출신 선수들은 “이 경기마저 내줬다면 챔피언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 입을 모았다. 그 정도로 중요한 승리였다. 조성원은 그 중심에 섰다. 4쿼터 29초를 남기고 중요한 자유투 2개를 모두 놓쳐 ‘지옥행’ 열차를 탔던 조성원이었지만, 종료 7.6초를 남기고 다시 찾아온 3점슛 찬스에서는 직전의 실수를 만회했다. 덕분에 현대는 대어 사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시리즈는 7차전까지 갔다. 각자의 적진에서 2승씩을 챙긴 채 잠실실내체육관에서 맞은 5차전. 허재와 김영만, 강동희가 51점을 합작하는 활약 끝에 기아는 86-84로 승리를 거두었다. 1쿼터 12점차, 2쿼터 한때 21점차까지 밀렸던 승부를 뒤집은 경기였다. 맥도웰과 이상민, 조성원이 풀타임을 소화하는 승부수를 띄웠던 신선우 감독이었지만, ‘왼손의 투혼’을 이기진 못했다. 일각에서는 점수차가 벌어졌을 때 방심한 것이 패배의 원인이라고 꼬집었다. 그래서일까? 6,7차전에 임하는 현대 선수들의 집중력은 남달랐다. 6차전은 맥도웰의 30득점 13리바운드 활약이 팀의 완승(90-79)을 주도했다. 더 이상의 방심은 없었다. 7차전도 현대는 페이스를 잃지 않았다. 12,576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허재(15득점 13어시스트)는 마지막까지 기아를 끌고갔지만 한계를 넘지 못했다. 이날 현대에서는 3명이 20+득점을 올렸다. 조성원은 후반에만 21점을 집중시켰다. 그가 4쿼터에 내리 터트린 3점슛이 길고 긴 명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현대는 그렇게 통합 우승을 결정지었다. 비록 우승했지만 챔피언결정전 MVP 트로피는 허재에게 돌아갔다. 시리즈 내내 갖가지 부상에도 불구하고 투혼을 보인 허재였다. 우승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이상민과 조성원은 그러나 “허재 형이 받을 만 했다”고 입을 모았다. 적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현대는 그 뒤로 강세를 이어갔다. 맥도웰은 최고의 외국선수로 거듭나며 타 팀의 ‘경계대상 1호’가 됐다. 많은 팀들은 외국선수 선발에 있어 ‘맥도웰 같은’ 선수를 우선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한편 맥도웰은 “우리 아이들에게 아빠 사진을 보여줘도 안 믿는다. ‘저게 아빠 맞느냐’고 되물을 정도다. 결국 내가 받은 트로피와 비디오를 보여줘야 했다”고 하소연 했다. 이 이야기를 임근배 감독에게 전하자 껄껄 웃으며 “그 친구도 어느덧 그럴 나이가 됐네”라 말했다.)


이-조-추 트리오의 성장도 이어졌다. 덕분에 1998-1999시즌의 현대는 더 위력적이고, 더 정교한 팀으로 올라섰다. 바야흐로 '왕조'의 시작이었다.





BONUS ONE SHOT | 왕조 뒤에는 노력파 있었다.


이상민은 대학시절부터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선수였다. 조성원과 추승균도 ‘좋은 선수’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결코 ‘전설’로 남을 정도의 스포트라이트는 아니었다. 둘과 함께 뛴 선수들은 두 선수의 '성공' 뒤에는 노력이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유도훈 감독은 언젠가 추승균의 성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매년 기술이 하나씩 늘어나는 선수들이 있어요. 추승균 감독이 그랬죠. 처음에 추 감독은 몸이 말랐어요. 그런데 외국선수들 수비를 하면서 고생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에 주력하더군요. 공격도 발전했죠. 예전에는 달리고, 수비에 집중하는 선수 정도로 인식됐죠. 맥도웰, 조성원에게서 나오는 볼을 잡아서 처리했던 선수였는데, 언젠가부터 포스트업 공격도 하고, 페이더웨이 점프슛도 잘 넣고 슛거리도 늘어나더라고요. 나중에는 2대2 플레이도 주도하더군요. 그런 부분은 후배들이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상민은 조성원에 대해 말했다. “형은 저와 같은 홍대부고 출신이에요. 처음에는 잘 하는 선수가 아니었는데 열심히 하다 보니 변신에 성공했어요. 형이 운동하는 걸 따라서 해봤는데 정말 못 따라갈 정도였어요. 그만큼 노력하는 선수였다는 증거겠죠.” 이-조-추 트리오는 그렇게 정상에서 성공의 축배를 들었다.



투표참여자
손대범, 한필상, 곽현, 김선아, 최연길(이상 점프볼), 김태환, 김동광, 현주엽, 정용검(이상 MBC 스포츠 플러스 해설 및 캐스터), 조성원, 김기웅(이상 KBS N 스포츠 해설위원 및 캐스터), 박상준(SBS 스포츠 캐스터), 조현일, 이재범(이상 월간 루키 기자), 김우석, 손동환(이상 바스켓 코리아 기자), 박상혁(더 바스켓 기자), 노주환, 류동혁(이상 스포츠조선 기자), 최용석, 정지욱(이상 스포츠동아 기자), 이웅희(스포츠서울 기자, KBL 인터넷중계 해설위원), 김동찬(연합뉴스 기자), 박세운(CBS 노컷뉴스 기자), 박지혁(뉴시스 기자), 우충원, 서정환(OSEN 기자), 서민교(MK스포츠 기자), 김진성, 최창환(마이데일리 기자), 주건범(네이버 스포츠), 이선영(다음 미디어), 이동환(팟캐스트 '버저비터' 운영자), 김승현(해설위원)


사진_문복주 기자, KBL제공


영상 및 편집_김남승 기자, 박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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