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프볼=최연길 칼럼니스트] 故 잭 램지(Jack Ramsay) 박사는 미 프로농구(NBA)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감독 중 한 명이었다. 램지는 1977년 당초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전력이 열세였던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의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인디애나 페이서스, 필라델피아 76ers 등 여러 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NBA 역사상 가장 훌륭한 감독 10인에 뽑히기도 했다.
※ 본 기사는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5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미국에서는 언제나 잭 램지를 언급할 때 잭 램지 감독이 아닌 잭 램지 박사라고 칭한다. 그가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단장뿐 아니라 해설가로도 폭넓은 활동을 했기 때문에 단지 감독이라고 칭하지 않고, 박사라는 타이틀로 부른다.
또한 램지는 단장으로 우승을 차지하고 NBA 우승도 차지했으며 NCAA에서는 파이널 4에도 올랐다. 램지는 1961년 세인트조셉 대학을 NCAA 토너먼트 파이널 4에 올려놓았고 1967년 윌트 채임벌린, 핼 그리어 등을 이끌고 단장으로 NBA 우승을 경험했다. 또한 1977년에는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단장과 감독으로 우승한 경우는 보스턴 셀틱스의 레드 아워백, LA 레이커스와 마이애미 히트를 우승으로 이끈 팻 라일리,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감독 겸 단장으로 우승을 차지한 그렉 포포비치가 있다. 하지만 단장으로 먼저 우승을 차지하고 이후, 감독으로 우승한 경우는 램지가 처음이다. 또한 NBA 우승과 NCAA 파이널 4를 동시에 달성한 인물도 램지가 처음이었다. (훗날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 캔자스 대학을 우승시킨 래리 브라운이 그 업적을 이어받았다.)
이런 업적 덕분에 램지는 1992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2006년에는 농구 명예의 전당 초대 헌액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램지가 이런 놀라운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만의 농구 철학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램지는 그의 저서 「감독의 예술(The Coach’s Art)」에서 자신만의 철학을 공유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농구 감독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임무는 철학을 정하는 것이다. 다른 그 무엇보다 자신만의 철학을 결정해야 한다.
* 코치의 스타일은 진화한다.
* 어느 스포츠에서도 기술이 뛰어난 선수들 없이 우승할 수는 없다. 열정이 재능을 대신할 수 없다. 동기부여가 높은 선수들이라도 재능이 부족하면 제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해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동기부여가 부족하지만 기술이 뛰어난 선수는 좋은 코칭을 받고 팀의 스타일에 맞는 기술을 발휘하는 법을 배우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 벤치 선수들은 적은 시간을 뛰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역할이 주전보다 덜 중요하지는 않다.
* 기본기가 부족하다면 제 아무리 지상 최고의 정신자세(attitude)를 지녔어도 승리할 수 없다.
* 각 선수에게 달성할 수 있는 목표를 세워주는 것이 좋은 코칭의 기본이다. 코치는 선수들에게 연습과 경기에서 어떤 부분을 기대하는지 확실히 알려주어야 한다.
* 나는 패배를 싫어한다. 하지만 일단 경기가 끝나면 다음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이전 경기는 잊어버려야 한다.
그의 이런 철학은 사위이자 어시스턴트 코치였던 짐 오브라이언과 릭 애들먼 그리고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소년이던 에릭 스포엘스트라에 의해 잘 계승 발전되고 있다.
기본을 강조했던 감독
잭 램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기본기(fundamental)’이다. 그는 언제나 기본기를 강조했고, 이를 통해 수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램지가 대학 감독을 지낼 때도, NBA 구단의 단장을 맡았을 때도, NBA 감독이 되었을 때도, NBA 해설가로 활동할 때도 언제나 가장 강조했던 것은 기본기였다. 그런 기본기를 강조한 철학이 있었기에 램지는 역대 최고의 감독과 가장 존경받는 감독이 될 수 있었다. 그가 강조했던 12가지 코칭 원칙에 대해 알아보자.
잭 램지 박사의 12가지 코칭 원칙
1. 농구는 다른 모든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기본기를 실행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2. 코치는 선생님이다. 그리고 그 선생님의 과목은 기본기다.
3. 최후의 목표는 최상의 컨디션을 가진 선수들이 있는 팀에서 이룰 수 있다.
4. 가장 훌륭한 선수들조차도 여전히 발전할 여지가 있다.
5. 가장 훌륭한 선수들조차도 코칭을 받아들이고, 팀을 위한 훈련과 규칙을 받아들인다.
6. 승리는 좋은 공격보다는 좋은 수비와 연관 있다.
7. 실전 상황에서의 훈련은 팀 성공에 필수 요소다.
8. 팀플레이를 하는 팀은 실력이 더 좋아도 개인플레이를 하는 팀을 꺾는다.
9. 개인 성취에 물리적인 한계는 없다.
10. 경기가 훨씬 더 정교해져도 코칭은 더 간단해지는 것이 좋다.
11. 침착하고 기민하게 경기상황의 변화를 예측하는 코치가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끌어낼 수 있다.
12. 패배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 팀이 놀라운 승리를 이룰 수 있다.
이 중 실제 사례로 나타난 원칙이 있다. 바로 1977년 강호 필라델피아를 꺾고 우승한 포틀랜드다. 당시 필라델피아는 당대 최고 슈퍼스타인 줄리어스 어빙(201cm), 올스타 파워포워드 조지 맥키니스(203cm), 덕 콜린스(198cm), 월드 B. 프리(188cm) 등 슈퍼스타들이 즐비한 팀이었다. 이에 맞서는 포틀랜드는 모리스 루카스(206cm), 빌 월튼(211cm), 라이오넬 홀린스(191cm)가 있었지만 이름값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많은 전문가들 아니, 절대 다수 전문가들은 필라델피아의 손쉬운 승리를 예상했다. 필라델피아가 홈에서 열린 1, 2차전을 가져갔을 때만 해도 전문가들의 말이 맞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램지 감독은 필라델피아의 이기적인 플레이와 1대1에 의존한 단조로운 공격을 패싱 게임과 강력한 수비로 맞서며 3차전부터 내리 4판을 따내고 우승했다. 역대 최고의 업셋이었다. 말 그래도 팀플레이를 하는 팀이 개인플레이를 하는 팀을 물리친 것이다.
1977년을 달군 ‘블레이저매니아’
1976년 램지가 포틀랜드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포틀랜드는 형편없는 팀이었다. 1970년 창단한 포틀랜드는 램지가 부임하기 이전까지 플레이오프는커녕 승률 5할도 달성하지 못했던 약체였다. 하지만 램지가 부임하면서 포틀랜드는 180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포틀랜드 최고 스타는 1974년 1라운드 전체 1번으로 지명한 211cm의 장신 센터 빌 월튼이었다. UCLA 시절 NCAA 무대를 평정했던 월튼은 슈퍼스타가 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2년차까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월튼은 대학 때 라이벌이던 톰 벌리슨에게 밀려 올 루키팀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2년차까지도 올스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램지를 만난 월튼은 달라졌다. 1976-1977시즌 월튼은 경기당 18.6득점(야투성공률 52.8%), 14.4리바운드, 3.8어시스트, 3.2블록을 기록하며 당당히 올스타에 선발되었고 리바운드와 블록 1위도 차지했다. 월튼과 함께 팀을 이끈 선수는 블루컬러 포워드 모리스 루카스였다. NBA는 1976년에 ABA와 합병하면서 ABA 선수들을 대상으로 드래프트를 진행한 바 있다. 그때 포틀랜드가 운좋게 건진 선수가 바로 루카스였다. 그는 20.2득점 11.4리바운드 2.9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월튼과 골밑을 책임졌다.
개막 이후 8경기에서 7승 1패로 상승세를 탄 포틀랜드는 시즌 중후반 잠시 흔들리기도 했지만 49승 33패로 태평양 지구 2위, 서부 컨퍼런스 3위를 차지하며 플레이오프에 올랐다. 전 시즌 37승 45패로 태평양 지구 최하위였던 성적에서 일취월장한 모습이었다. 포틀랜드가 달라진 중심에는 잭 램지 감독과 월튼이 있었다. 램지는 경기당 111.7득점이라는 화끈한 공격 농구를 주도하며 변화를 주었다. 물론 램지의 철학대로 개인플레이가 아닌 팀플레이 위주의 공격이었다. 당시 포틀랜드는 20득점 이상 올린 선수는 모리스 루카스 한 명이었고 15득점 이상 올린 선수도 루카스와 월튼 뿐이었다. 하지만 10득점 이상 올리는 선수가 6명이나 되었고 경기당 어시스트를 5개 이상 기록한 선수는 없었지만, 3개 이상 기록한 선수가 4명이었고 루카스도 2.9개를 기록했다.
블레이저스가 좋은 성적을 거두자 오레곤 州의 작은 도시 포틀랜드 시민들은 열광하기 시작했고 홈구장 메모리얼 콜리시움은 관중들로 가득 찼다. 포틀랜드가 피닉스 선즈를 꺾고 파이널에 오르게 되었을 때 무려 1만 명이 넘는 팬들이 오전 1시 30분에 힐스브로 공항에 모여 홈으로 돌아오는 블레이저스 선수들을 기다렸을 정도다. 이들은 공항에서 락 밴드 ‘퀸(Queen)’의 ‘We Will Rock You’와 포틀랜드 지역에서 인기가 높았던 ‘Rip City Rhapsody’를 부르며 선수단을 환영했다. 이때부터 언론들은 포틀랜드 팬들을 ‘블레이저매니아(Blazermania)’라 불렀다. 포틀랜드는 홈팬들의 열성적인 응원 덕에 정규시즌 홈에서 35승 6패, 플레이오프에서 홈 10전 전승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었다.
최강의 적을 넘다
1977년 파이널에서 포틀랜드가 만난 상대는 앞서 언급한 필라델피아였다. 필라델피아는 두 건의 트레이드로 전력이 몰라보게 좋아진 상태였다. 뉴저지 네츠와의 트레이드로는 줄리어스 어빙이라는 당대 최고 스타를 영입했고, 덴버 너게츠로부터는 ABA 간판 파워포워드 조지 맥키니스를 받아들였다. 그 외 전력도 훌륭했다. 대릴 도킨스(211cm), 콜드웰 존스(211cm) 등 장신 센터와 헨리 비비(185cm), 조 브라이언트(206cm), 마이크 던리비(191cm) 등도 있었다. 흥미롭게도 비비, 브라이언트, 던리비의 아들들은 훗날 같은 시기에 NBA 선수로 뛰게 된다. 바로 마이크 비비, 코비 브라이언트, 마이크 던리비 주니어다.
초호화 라인업을 구축한 필라델피아는 정규시즌에서 50승 32패를 기록하며 대서양 지구 1위, 동부 컨퍼런스 1위를 차지했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디펜딩 챔피언 보스턴 셀틱스를 4승 3패로 제압한 필라델피아는 동부 컨퍼런스 결승에서 모세스 말론, 루디 톰자노비치, 캘빈 머피가 포진한 휴스턴 로케츠를 4승 2패로 제압하며 1967년 이후 10년 만에 다시 정상에 도전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10년 전 필라델피아가 우승할 당시 단장은 램지였다. 램지는 포틀랜드를 부임 첫 해에 파이널에 올려놓으며 친정과의 운명적 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거의 모든 전문가들과 팬들은 필라델피아의 우승을 의심치 않았다. 필라델피아가 홈에서 열린 1차전과 2차전을 107-101, 107-89로 가져갔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블레이저매니아’가 버티는 포틀랜드 홈은 원정팀의 무덤이었다. 램지 감독은 수비에서는 풀코트 트랩디펜스를, 공격에서는 여러 선수가 공을 만지는 패싱 게임을 통해 반전을 꾀했다. 포틀랜드는 홈에서 열린 3차전에서 무려 5명의 선수가 15득점 이상을 올리는 고른 활약을 펼치며 129-107, 22점차 대승을 거두고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기세가 오른 포틀랜드는 4차전마저 130-98, 32점차 완승을 거둬 시리즈 균형을 2승 2패로 맞췄다. 필라델피아는 기세가 오른 포틀랜드를 제어하지 못했다. 일단 루카스가 시리즈 내내 맥키니스를 압도했다. 루카스가 경기당 19.7득점, 10.7리바운드를 기록한 반면 맥키니스는 13득점, 9.3리바운드에 야투성공률은 38.8%에 그쳤다. 골밑에서는 빌 월튼이 18.5득점, 19리바운드, 5.2어시스트, 3.7블록으로 필라델피아 센터진을 궤멸시켰다. 이렇게 되자 밥 그로스(198cm)마저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았던 대스타 어빙을 상대로 분투했다. 17.3득점 5.7리바운드를 기록한 것이다. 물론 어빙도 경기당 30.3득점, 6.8리바운드, 5어시스트로 놀라운 활약을 펼쳤지만 5, 6차전에서는 그로스도 25득점, 24득점을 올리며 선전했다.
기세가 오른 포틀랜드는 적지에서 열린 5차전마저 110-104로 잡았다. 그리고 6차전은 포틀랜드의 홈에서 열렸다. 포틀랜드의 상승세는 대단했고 경기 분위기는 초반부터 포틀랜드 쪽으로 넘어온 듯 했다. 하지만 어빙을 앞세운 필라델피아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필라델피아는 경기 종료를 앞두고 동점 기회를 3번이나 잡았다. 하지만 3차례 모두 동점에 실패했고, 결국 포틀랜드가 사상 최초로 1, 2차전을 패하고도 내리 4판을 따내며 우승한 NBA 최초의 팀이 되었다. 경기 후 “농구는 5명이 하는 경기입니다”라며 말문을 연 어빙은 “포틀랜드는 농구가 고안된 개념 그대로 플레이했습니다. 우리는 훌륭한 1대1 능력을 지녔지만 포틀랜드는 하나의 팀처럼 플레이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팀이 승리를 거뒀습니다”라고 패배를 시인했다.
대학 감독, 단장 그리고 해설
1925년 2월 21일 미국 펜실베니아州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램지는 어퍼 다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세인트조셉 대학에 입학해 야구와 농구 선수로 활약했다. 2차 세계대전에 미해군으로 참전했던 램지는 전쟁이 끝난 후 고등학교 감독을 지내다 1955년 모교인 세인트조셉 대학의 농구 감독으로 부임했다. 세인트조셉 대학은 빌라노바, 템플, 라셀, 펜실베니아 대학과 함께 소위 ‘필라델피아 빅 5’라 불리는 리그의 약체팀이었다.
램지가 부임한 세인트조셉 대학은 1955-1956시즌에 23승 6패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빅 5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같은 시즌에 세인트조셉은 NIT(National Invitational Tournament)에 초청을 받아 개교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쾌거도 이뤘다. 이후 세인트조셉 대학은 미들 애틀랜틱 컨퍼런스에서 5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고 빅 5 우승도 6차례 더 거뒀다. 또한 램지는 세인트조셉 대학을 10차례 포스트시즌에 올려놓았고 1961년에는 개교 이후 처음이자 유일한 파이널 4 진출을 일궈내기도 했다.
이후 램지는 1966-1967시즌 필라델피아 76ers의 단장으로 부임했고 윌트 채임벌린, 쳇 워커, 핼 그리어, 월리 존스 등을 앞세워 정규리그에서 68승 13패라는 역대 최고 승률(이후 깨짐)을 기록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잠시 필라델피아의 감독을 맡기도 했던 램지는 이후 버팔로 브레이브스, 포틀랜드,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감독을 지니며 통산 864승(783패)를 기록해 당시 기준 역대 최다승 2위(레드 아워백에 이어)에 오르기도 했다.
감독에서 은퇴 후 램지는 필라델피아와 마이애미 히트의 해설가로 활동했고, ESPN 라디오에서도 NBA와 NCAA 해설을 맡아 주옥같은 해설을 전해주기도 했다. 램지의 라디오 해설은 AFKN 라디오를 통해 필자도 즐겨 들었고 많은 영감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농구계에 큰 영향을 미친 램지는 지난 2014년 4월 28일 향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업적과 정신은 농구계에 그대로 남아 여전히 많은 농구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잭 램지(JACK RAMSAY) 프로필
1925년 2월 21일 필라델피아 출생
2014년 4월 28일 향년 89세로 별세
1961년 세인트조셉스 대학을 파이널 4로 견인
1967년 필라델피아 76ers 단장으로 우승
1977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감독으로 우승
NBA 통산 864승 783패(승률 .525)
NBA 플레이오프 통산 44승 58패(승률 .431)
1992년 명예의 전장 헌액
2006년 대학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96년 NBA 50주년 기념 위대한 감독 10인 선정
[저작권자ⓒ 점프볼.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