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프볼=손대범 기자] 레코드판이 카세트가 되고, 카세트 테잎이 CD로 바뀌고~♪, CD가 다운로드 S트리밍이 돼도! 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도 승리자인 그녀, 바로 국가대표 포인트가드 출신 전주원(44) 코치다. 현역시절 프로와 대표팀에서 숱한 영예를 안았던 전주원 코치는 올 여름도 휴식을 반납한 채 대표팀과 함께 했다. 비록 리우올림픽 출전권은 놓쳤지만 우리 대표팀은 최종예선을 준비하며 미래를 봤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현장을 함께 했던 전주원 코치로부터 ‘국가대표’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6월호에 실린 기사로 인터뷰는 올림픽 최종예선 전에 진행됐음을 알립니다.
Q. 다른 감독님들께 여쭤보면 진천은 정말 심심한 곳이라고들 하십니다. 어떠셨나요?
사실 주변에 아무 것도 없고, 농구 뿐 아니라 여러 종목 선수들과 생활을 해야 하고, 게다가 같은 일과가 반복되다보니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운동선수의 생활 자체가 평소에는 이런 답답함 자체가 있긴 하죠.
Q. 돌이켜보면 현역시절에도 줄곧 태릉에 계셨잖아요. 저는 1999년 아시아선수권대회 MVP가 되고 시드니올림픽 티켓을 땄을 때 신문기사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그때 소감으로 “기쁘긴 한데, 쫓겨날 것 같다”고 말하셨죠. 그런 생활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어요. 국가대표 코치이지만, 엄마로서는 미안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사실 지금도 딸 수빈이는 그리 좋아하진 않아요. 아직 아이니까…. 엄마가 국가대표팀 코치라는 점은 자랑스러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엄마가 빨리 나가고 오래 나가있다보니 싫어하죠. 집안 어른들께서는 “국가대표는 정말 영광스러운 자리다. 정말 힘든 자리다”라고 다독여주시지만, 아무래도 아이도 힘들겠죠. 저도 개인적으로 영광스럽지만, 엄마로서는 미안하죠. 아이에게 힘든 시간을 주고 있으니까요.
Q. 그때 1장뿐인 티켓을 일본 시즈오카에서 따냈죠. 일본에 68-65로 이겼는데 전주원 코치와 정은순 해설위원이 활약했습니다. 또 그 해 중국전에서도 17점차 대승을 거두었고요. 중국이 2-3 지역방어, 1-3-1 지역방어든 어떤 수비를 쓰든, 아무런 어려움 없이 깨부쉈던 것 같아요.
1999년 아시아선수권대회와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같은 경우는 함께 한 멤버들이 영원히 잊지 못할 그런 대회인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나 팀적으로나 경기도 잘 했거든요. 그래서 그때 멤버들이 모이면 항상 그 대회 이야기를 빼놓지 않죠. 중국은 1997년에 세대교체를 단행해 실력을 끌어올리던 시기였어요. 그래서인지 저희가 조금은 수월하게 경기를 치렀다고 생각해요. 반면 일본은 정말 버거운 상대였는데요. 1999년 대회에서는 일본이 역대 최상의 멤버로 평가됐었는데, 그래도 저나 은순 언니, (유)영주 언니 등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왔기 때문에 어떤 플레이를 하든 어려움이 안 느껴졌던 것 같아요.

Q.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준결승 때는 오른쪽 허벅지 근육파열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고생하셨죠. 그런데 1999년에도 대표팀에 뽑혔을 때는 유수종 감독께 고사의 뜻을 전했지만 또 바로 며칠 뒤 다시 입촌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국가를 위해, 대표팀을 위해 헌신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몸도 안 좋고 여러 상황이 안 좋았어요. 제가 결혼하고 바로 다음 해이기도 했어요. 선뜻 들어가지 못할 상황이었던 것은 확실했죠. 그렇지만 유수종 감독님께서도 부탁을 하셨고, 저도 선수로서 항상 가슴에 태극기를 단다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니까 포기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대표팀에서도 제 어려운 상황을 모두 이해해주셔서 저도 결국 다시 대표팀에 합류하게 됐던 것 같아요. 다행히 결과도 좋게 나왔죠.
Q. 1997년 4월 29일,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일본전에서 결승골을 만들었어요. 71-71 상황에서 김지윤 선수에게 어시스트를 해서 역전슛. 3연패를 당했던 상대에게 빚을 갚았죠. (1997년 5월 6일에는 중국을 꺾고 9년 만에 정상탈환에 성공했다. 1988년 12월 홍콩 대회 이후 첫 아시아 우승이었다.)
일본전을 아시다니! 계속 시소경기를 하고 있었어요. 정말 힘든 경기였죠. (김)지윤이도 그 경기를 기억하더라고요. 그때 지윤이는 교체되어 들어왔어요. 리바운드 후 속공 상황이었는데요. 제가 아웃렛 패스를 받았는데, 지윤이가 마침 하프라인에 있더라고요. 지윤이 스피드면 이걸 잡아서 넣겠구나 싶어서 바로 뿌려줬죠. 지윤이를 만나면 아직도 그 이야기를 해요. 자기는 언니가 주면 무조건 골만 보고 달려야겠다고 생각하더라고요. 사실 자기는 그 패스를 못 잡을 거라 생각했대요. 하지만 저는 지윤이 스피드라면 충분히 넣겠다고 생각했어요. 지윤이가 마무리를 잘 해준 덕분에 기억에 남는 장면이 만들어줬죠(웃음). 사실 맨 정신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순간적으로 그런 판단이 들었던 거죠. 개인적으로도 기억에 남는 대회였고, 시드니올림픽도 잊지 못해요. 4위는 저희에게 기적 같은 성적이었어요. 개인적으로는 트리플더블도 운 좋게 기록했고요.

Q. 이제 최종예선이에요. 한참 전주원 코치가 활약할 당시 막내였던 박정은, 이미선, 김계령이 마침내 모두 떠나게 됐습니다. 세대교체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기분이 남다를 것 같아요.
2015년 세대교체 이후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어요. 결정적일 때 뭔가 해줄 수 있는 베테랑이 없다보니 경기 내내 힘들었거든요. 선수들이야 열심히 했죠. 하지만 부족한 경험은 누구도 대신 채워줄 수가 없잖아요. 그렇지만 이미선이나 변연하 같은 선수들도 그런 것들을 겪고 왔기 때문에 베테랑이 될 수 있었어요. 지금 선수들도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아요. 아테네올림픽을 비롯해서 모든 아쉬웠던 순간 모두 겪고 성장했잖아요. 저도 국제대회 갔을 때 자괴감에 빠졌던 적이 많았어요. 희망적인 부분 하나는, 선수들이 이번에 정말 열심히 훈련해주고 있어요. 티켓 확보가 당연히 목표죠. 작년보다는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줄 것 같아요.
Q. 그나저나 은퇴한 선수들과는 따로 만나보셨나요?
심란할 거 같아서 통화나 메시지 정도로만 대화를 나누었어요.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쉬라고 했죠.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는 선수도 있었지만, 은퇴를 경험해본 입장에서 편한 것만큼이나 섭섭함과 후련함이 교차할 것 같아요. 그렇지만 더 나은 제2의 인생이 기다리고 있으니 잘 준비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Q. 앞에서 말씀하셨던 부분인데, 이런 기사가 있더라고요. 전주원, 유영주, 정은순 등 세대교체의 기수들은 노련한 경기운영 솜씨가 부족하다, 경험이 부족하다, 쓸데없는 반칙이 많다 등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1992년 아시아선수권대회 당시에 나왔던 기사입니다. 국제대회에서의 경험 부족,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1992년도면 제가 대표팀 2년차였어요. 2년차면 해봐야 뭘 하겠어요. 그때 저는 기사를 많이 보지 않았어요. 오히려 내가 부족한 건 내가 더 잘 알고 있었죠. 저는 큰 무대에서 깨져야 더 단단해졌다고 느꼈어요. 그리고는 다음번에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해보지 않고 미리 겁먹는 것보다는, 해보고 실패를 해봐야 다시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거죠.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해요. 저 역시도 그런 시간을 겪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고요.

Q. 반대로 선일여고 시절부터 한국여자농구의 차세대 주자로 꼽혀왔는데 부담도 있었을 것 같아요. 1991년에 19살의 나이로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잖아요. (당시 대표팀 정주현 감독은 “득점력과 스피드, 폭발력을 두루 갖춘 전천후 가드”라고 평가했다.)
그때는 제가 중심이 되어서 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제가 중심이 되어 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부담됐겠지만, 어릴 때였으니까…. 제게 주어진 역할에서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대표였다면 아무 것도 못했을 거예요. 늘 내가 하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성격이기에 그저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해서 했던 것 같아요. 부담은 없었죠.
Q. 그 시절 가장 롤 모델로 삼았던 선수는?
어릴 때 누구처럼 되어야겠다는 것보다, ‘저런 플레이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허재, 강동희 같은 플레이를 하고 싶었어요. 그때 저는 아저씨라고 불렀거든요. 아저씨들이 농구 보면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던 것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Q. 전주원 코치님 외에 ‘내가 봐도 참 농구를 잘한다’는 생각이 드는 국내외 선수가 있을까요?
저는 1994년 세계선수권대회에 갔을 때 브라질의 35살 선수가 있었어요. 그때 그 선수 플레이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죠. 우리나라는 대표팀 10년차면 그만 둘 때였거든요. 그런데 그 나이에 정말 잘 하더라고요. 재밌게도 언젠가 모 기자님께서 제가 그 선수를 보며 놀라워하던 기억을 떠올려주시더라고요. “그때 그런 이야기했던 것 기억 나냐, 지금 전주원 선수가 더 나이가 들어는데 잘 하고 있다”라고요(웃음). (전주원 코치가 말한 선수는 호텐샤 데 파티마 마카리였다. 1959년생으로 브라질의 전설적인 농구선수였다. 별명은 ‘THE QUEEN’이었고, 2007년에는 FIBA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 중국에 또 콩사우디라는 가드가 있었어요. 상해 출신인데 굉장히 키가 작은 선수였죠. 사실 서양 선수들은 신체적으로도 조건이 좋잖아요. 그런데 이 선수는 아시아인이고, 키가 작으면서도 농구를 정말 잘 했었던 기억이 나요.
Q. 반면 본인을 가장 잘 막았던 선수는?
국제대회에서야 다들 쟁쟁한 선수들이 나왔으니 저를 잘 막았죠. 국내에서는 성정아 언니가 기억에 남아요. 그때만 해도 다들 가드가 저를 막았으니, 신장에서 우위가 있었거든요. 반대로 성정아 언니가 저를 막았을 때 정말 당황했었어요. 어릴 때였으니 그 매치업자체가 정말 충격으로 다가왔죠. 그래서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요.

Q. 다시 대표팀 이야기로 돌아와 매듭을 지어 볼게요. 우리은행 소속 이은혜의 대표팀 발탁도 느낌이 남다를 것 같아요. 발표가 나던 날, 학생체육관에서 박성배 코치를 우연히 만났어요. 이은혜 선수 이야기를 하며서 정말 기뻐하고, 자랑스러워 하더군요.
저도 엄청 좋아했어요. 아마 감독님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은혜는 늘 열심히 해왔던 선수였거든요. 체력훈련을 해도 1등이었고요. 다만 실전에서 노력한 것 이상의 모습이 안 나왔는데, 지난 시즌에는 (이)승아가 아프면서 늘어난 기회를 잘 잡았죠. 아마도 코칭스태프가 더 기뻐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선수가 노력을 해서 올라왔다는 점은 다른 선수들에게도 동기부여가 될 것 같아요. 지금 대표팀에는 이경은 선수가 재활 중이라 실질적으로 가드라고는 이은혜와 이승아 뿐이예요. 개인적으로는 연습 때도 그렇고, 빨리 치고 나가서 밖으로 뿌려주는 패스가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슈터들이 많은 만큼 잘 맞을 것이라 기대해요.
Q. 선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런 시간이 있어야 베테랑이 될 수 있어요. 두려워하지 말고, 힘들어하지 말고 부딪쳤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거기’까지 가야 한다면, 이런 시간은 꼭 있어야 합니다. 부딪치고 이겨내야죠.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신감을 갖고 해야 해요.

#사진_문복주, 유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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