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프볼=강현지 기자] 2001-2002시즌은 프로농구가 6라운드 시스템으로 개편되고, 새로운 챔피언(오리온스)이 탄생하면서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킨 시기로 기억된다. 하지만 kt 송영진(38) 코치에게는 다르다. 그는 2001-2002시즌을 ‘지우고 싶은’ 시즌이라 말했다. 대학농구 최고 유망주로 꼽히며 신인 드래프트 1순위로 화려하게 프로에 입성했건만, 현실은 생각과 너무 달랐다. 그때부터였다. 롤러코스터 같은 농구사가 시작된 것은….
※본 기사는 농구전문잡지 점프볼 1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1순위의 무게
양쪽 무릎에 맹장, 허리, 손가락까지…. 부상은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선수 시절을 되돌아봤을 때 송영진이 “안 좋은 기억이 먼저 난다”라고 먼저 말문을 연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데뷔 시즌부터 왼쪽 무릎 부상으로 시름했고, 선수 생활 말미에는 척추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절이 많았어요. 제가 기억을 안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래서 인생경기가 번뜩 떠오르지가 않더라고요.” 그는 2015-2016시즌을 앞두고 조동현 감독의 코치직 제안을 받아들이며 선수로서의 인생을 접기로 결심했다. 온전치 못한 몸 상태가 그의 결정을 도왔다.
사실 송영진은 학창시절만 해도 알아주는 유망주였다. 마산고 시절에는 황진원(은퇴)과, 중앙대 시절에는 김주성(동부)과 호흡을 맞추며 이기는 농구를 즐겼다. 높이에 기동력, 득점력을 갖춘 덕분에 스포트라이트를 독식했다. 2001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창원 LG).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만 해도 당연해 보였다.
시작도 좋았다. 데뷔 상대는 2001년 11월 3일, 원주 TG삼보였다. 데뷔전부터 풀타임을 소화했다. 15득점 4리바운드 3어시스트 2스틸을 기록하며 눈도장을 남겼다. 이후 3경기에서는 펄펄 날았다. 여수 코리아텐더, 서울 SK, 울산 모비스를 상대로 평균 21점 3리바운드 3.3어시스트 기록하며 ‘역시 1순위’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송영진에게 브레이크가 걸린다. 송영진 뿐 아니라 LG 농구단 전체가 딜레마에 빠진다. 2000-2001시즌만 해도 LG는 스피드와 화력을 앞세운 농구로 리그를 제패했다. 그러나 이 장점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면서 4연승 후 6연패에 빠졌다. 순위는 어느덧 7위. 송영진도 가시방식에 앉게 됐다.
“초반에는 좋았어요. 기록이 좋았고, 관심도 많이 받았죠. 그러다 정규리그 6번째 경기에서 대구 오리온스(現 고양 오리온)를 만났어요. 마지막에 에릭 이버츠가 노마크에서 탭 슛을 시도했는데, 이게 들어가지 않았어요. 이길 수 있었던 경기를 놓치고, 그 후로도 연패를 끊지 못했죠. 그 시점이었던 것 같아요. 부담감도 커지고, 부진이 나의 잘못처럼 되어버리기 시작했죠. 이후 코리아텐더와 4대4 트레이드*도 일어났고, 자괴감에 빠졌죠. 왜냐하면 LG가 그 전 시즌에 챔피언결정전까지 갔거든요. 덕분에 제가 입단하면서 ‘강력한 우승 후보’로 언급됐죠.”
(*2001년 12월 12일, 창원 LG와 여수 코리아텐더는 외국선수를 포함한 4대4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LG는 에릭 이버츠, 말릭 에반스, 황진원, 이홍수를 코리아텐더로 보내고, 마이클 매덕스, 칼 보이드, 김병천, 김동환을 데려왔다.)
잊지 못할 스크린
28승 26패, 정규리그 5위로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LG는 인천 SK빅스(現 인천 전자랜드)를 상대로 내리 승리를 거두며 4강에 진출했다. 송영진도 1차전에서 4쿼터 3점슛 2개를 성공시키는 등 7점으로 팀 승리(87-78)를 도왔다. “정규리그 후반쯤에 무릎을 다쳤었어요. 이후 테이핑을 하고 경기에 출전했죠.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재활에 초점을 두고 테이핑을 하고 뛰었죠. 이때도 경기 종료를 얼마 안 남기고 투입됐어요. 3점슛 2개 성공시키고 이겼던 것 같아요. 그때도 몸이 좋지는 않았어요. 잠깐씩 투입되었죠.”
4강 상대는 오리온스. 송영진은 5경기 동안 평균 11.2득점 1.8리바운드 2어시스트 1.2스틸을 기록하며 이름값을 하는 듯 했다. 송영진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기 시작했다. 3순위 김승현이 독식하던 스포트라이트를 조금씩 가져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3차전 이후 분위기는 다시 역전된다. 송영진이 잊지 못한, 아니 잊고 싶은 ‘3차전 4쿼터’였다.
“4쿼터는 박빙이었어요. 오리온스 패턴이었던 것 같은데, 패스를 주고 (김)승현이가 저한테 와서 스크린을 걸더군요. 그리고는 (전)희철이 형이 나와서 슛을 던지는 거였어요. 근데 승현이가 스크린을 거는데, 저를 거의 안아버리듯이 스크린을 걸었어요. 그 슛 한 방으로 분위기가 오리온스로 넘어갔어요. 그 경기 포인트였죠. 딱 그 한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인생경기’라기보다는 언제나 아쉬움이 남을 것 같은 경기가 바로 그 경기에요.”
오리온스는 김병철, 전희철의 3점슛으로 92-84로 3차전을 이겼다. 이 경기 4쿼터 오리온의 3점슛 성공률은 60%(5개 중 3개)였다. 오리온스는 2승 1패로 시리즈를 앞서갔다. LG는 4차전 반격에 성공했지만, 5차전에서 지며 챔피언결정전 진출이 좌절됐다. 이후 오리온스는 SK를 꺾고 프랜차이즈 첫 우승을 차지했다. 김승현도 신인상과 MVP를 모두 품었다.

나의 가장 빛났던 경기
“그런 아쉬움을 날려버렸을 땐 언제였나요?”
그러자 송영진 코치는 2006-2007시즌 서울 SK와의 정규리그 마지막 맞대결을 꼽았다. 2007년 3월 4일, 슛 감이 폭발한 날이었다. 이 경기에서 29득점(2점슛 성공률 9/9, 100%)을 올리며 개인 통산 한 경기 최다득점을 새로 썼다.
이 경기를 치를 무렵, 송영진의 소속은 더 이상 LG가 아닌 KTF였다. 그 시기 KTF와 SK는 통신사 라이벌로 한참 각광을 받고 있을 무렵이었다. 기업간의 코트 위 경쟁의식도 치열했다. ‘특별한’ 승리 수당까지 주어졌다. 그래서인지 추일승 감독도 “꼭 이겨야 한다”고 요구하기도 했다. 송영진은 이에 화답했다. 승부처에 신기성(현 신한은행 감독)과 콤비 플레이를 펼치는가 하면 3점슛까지 꽂으며 SK를 떨어뜨렸다. 92-80. KTF의 승리였다.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잖아요. 지금도 선수들에게 뭐든지 빨리 겪어보라고 말해요. 사랑이든 일이든, 무엇이든요. 그래야 빨리 해쳐나갈 수 있거든요.”
신인 시절 겪었던 아픔은 ‘선수’ 송영진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부상이 잦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정작 2001년 드래프티 중 가장 늦게 은퇴한 선수는 바로 송영진이었다. 일찌감치 스타일을 바꿔 득점보다는 도움 수비, 리바운드, 팀플레이에 무게를 실었던 덕분이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도 있다. 바로 ‘믿을맨’이었다.

선수 마음 헤아리는 지도자
2015년 9월 13일, 부산 kt는 2015-2016시즌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선수’ 송영진을 떠나보내며 ‘코치’ 송영진을 맞이했다. 송영진은 2015년 2월 1일 삼성전에서 7번째로 정규리그 개인통산 600경기를 기록했고, 이후 6경기에 더 출전했다. 지도자로서 송영진은 ‘선수의 마음을 내다볼 수 있는 지도자, 선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지도자, 공정한 기회를 주는 지도자,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되겠다는 다부진 목표를 정했다.
“은퇴와 동시에 코치를 맡아서 그런지 그래도 선수들의 마음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해요. 선수의 마음을 가지고 선수들을 지도하고 싶어요. 지금도 플레잉코치 같은 마음이에요. 저도 경기에 같이 뛰면서 벤치에 앉아 있는 느낌이에요.”
유니폼을 내려놓으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선수 시절 송영진은 결코 살가운 이미지는 아니었다. 코트에서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했고, 경기 전 친분이 있는 선수일지라도 짧게 인사만 나누고 끝내곤 했다. 하지만 코치가 된 이후 달라졌다. 표정도 밝아졌고, 한결 유해졌다.
“선수 시절에는 저만의 루틴(routine)이 있었어요. 밥 먹는 것 샤워하는 것도요. 계란, 미역국은 안 먹었어요. 그런 헤픈 모습을 보여주는 게 그날 경기를 망치는 것이었어요. 지금은 일선에서 나왔으니 그런 부분들을 바꾸려고 하죠. 원래 냉혈한이 아니에요. 흥분을 잘해서 그렇지. 하하.”
# 사진_문복주 기자, KBL 제공
[저작권자ⓒ 점프볼.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