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프볼=정리 이재범 기자, 진행 최연길 해설위원] KCC 스테이시 오그먼 감독은 KBL과 인연을 맺은 NBA 출신 중 최고의 경력을 자랑한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미국 남자농구 대표팀에 선발되어 한국과 인연을 맺은 바 있으며, 1991년 애틀란타 호크스를 시작으로 2006년까지 16년 동안 NBA 선수로서 활약했다. 은퇴 후에는 덴버 너기츠, 밀워키 벅스 등에서 코치를 역임했다.
오그먼 감독은 네바다 주립대(UNLV) 재학 시절 최고의 수비수로 명성을 날리며 1990년 NCAA 우승도 경험했다.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모교 UNLV에서 오그먼 감독의 등 번호 32번이 영구결번으로 지정되고, UNLV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지난 3월 오그먼 감독을 만나 서울 올림픽과 대학 재학 시절, NBA 선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은 오그먼 감독과 주고받은 UNLV 재학 시절과 관련한 일문일답이다.
MBC스포츠+ 최연길 해설위원(이하 최)_ 지금부터는 UNLV 시절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뛰어난 선수였고, 캔사스 대학 등 여러 명문 대학에서 장학금 제의를 받았는데 UNLV를 선택한 이유는 뭔가요?
오그먼 감독(이하 오)_ 당시 제리 타캐니언 감독이 서부에서는 가장 뛰어난 감독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라스베이거스라는 도시와 팬들도 열정적이라 선택하는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최_ 감독님께서 뛰었던 U19 대표팀 감독이 캔사스 대학의 래리 브라운 감독이었는데요.
오_ 맞습니다. 래리 브라운 감독이 저에게 제의를 했습니다. 당시 브라운 감독이 수술을 받아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황에서 제가 UNLV를 선택했다는 전화를 하게 되어 미안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캔사스와 UNLV를 두고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88년 캔사스 대학이 NCAA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최_ 맞습니다. 캔사스 대학이 대니 매닝과 함께 우승을 했죠. 1990년 우승 당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모지스 스커리, 앤더슨 헌트, 데이빗 버틀러가 승부 조작에 연루된 도박사와 함께 찍힌 사진이 신문에 나기도 했죠.
오_ 그렇습니다. 굉장히 불행히도 그랬죠.
최_ 또한 다수의 부상 선수 등 어려움도 많았죠?
오_ 우승까지 쉽지 않았습니다. NCAA 규정 위반 혐의가 여러 건 있어 조사가 진행되었죠. 따라서 쉽지 않은 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기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최_ 당시 팀의 구호가 ‘ABC(Adversity Builds Characters. 고난이 기질을 만든다)’였다고 들었는데요.
오_ 그래요. 조사를 잘 하셨네요. 너무 옛날 일이네요.
최_ 근데 이 구호처럼 그렉 앤서니의 부상, NCAA 규정 위반 등 고난을 극복하고 시즌 막판 연승을 달리며 NCAA 토너먼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NCAA 토너먼트 진출 당시 우승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나요?
오_ 아니요. 우리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매 경기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임했습니다.
최_ 16강 볼 스테이트와 경기가 접전이었습니다.
오_ 당시 볼 스테이트가 강했고, 굉장히 어려운 경기였습니다.
(1라운드에서 리틀락 대학을 102-72로 꺾고, 2라운드에서 오하이오 주립대학을 76-65로 꺾은 후 볼 스테이트 대학을 69-67로 물리치고 8강(지역 결승)에 오름)
최_ 8강 경기도 화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상대였던 로욜라 메리마운트 대학도 강했습니다. 행크 게더스가 사망한 게 오히려 동기 부여가 되었고, 당시 NCAA 득점왕이던 보 킴블을 축으로 디펜딩 챔피언 미시건 대학을 149-115로 대파하기도 했죠.
오_ 매우 힘든 경기였습니다. 로욜라 메리마운트 대학도 제 고향인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대학이라 제겐 특별했습니다.
(로욜라 메리마운트 대학은 1980년 매직 존슨, 카림 압둘자바와 함께 L.A. 레이커스를 NBA 우승으로 이끈 명장 폴 웨스트헤드가 이끄는 팀으로 화끈한 공격력으로 평균 122.4득점이라는 놀라운 득점력을 보인 팀이었음. 당시 주축 멤버였고, NCAA 디비전 I 역사상 두 번째(첫번째는 제이비어 맥다니엘)로 득점왕과 리바운드왕을 동시에 차지했던 행크 게더스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졌음)
최_ 당시 로욜라 메리마운트 대학도 매우 공격적인 팀이고, UNLV도 공격적인 팀이었습니다.
오_ 그래서 많은 득점이 났습니다.
(당시 로욜라 메리마운트 대학이 기록한 평균 122.4득점은 NCAA 디비전 I 역대 한 시즌 최다 득점임. 또한 당시 득점왕 보 킴블은 35.3득점을 기록했음. 또한 킴블은 1990년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8번으로 L.A. 클리퍼스에도 지명을 받았음)
최_ 그 경기에서 33득점 11리바운드 6어시스트라는 굉장히 좋은 활약을 펼치며 동부 지역 MVP에 선정되셨죠?
오_ 그렇습니다. 그 경기는 매우 힘들었습니다. 다음 상대가 조지아 공대였는데 케니 앤더슨과 3D(데니스 스캇)이 있어 다들 조지아 공대가 이길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다음 상대가 조지타운 대학이었나요?
(UNLV는 로욜라 메리마운트 대학을 131-101로 꺾고 1987년 이후 3년 만에 다시 파이널 4에 올랐음. 오그먼은 해당 경기에서 33득점 11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MVP에 선정됨. 당시 경기 기록은 UNLV의 오그먼 33점 11리바운드 6어시스트, 헌트 30점 13어시스트, 존슨 20점 18리바운드, 앤서니 21점 8어서시트, 로욜라 메리마운트 대학의 보 킴블 42점 11리바운드, 제프 프라이어 21점 6리바운드)
최_ 아니요. 듀크 대학이었습니다.
오_ 네, 듀크 대학이었네요.
최_ 하지만 결승에서 상대적으로 듀크 대학을 쉽게 제압했습니다. NCAA 결승전 역사상 처음으로 100득점을 넘겼고, 30점차 승리도 역대 최다 점수차 승리였습니다.
오_ 우리는 더 이상 잘할 수 없을 정도로 잘했습니다. 여전히 기록이 유지되고 있고요.
(UNLV 103-73 듀크 대학
오그먼 12점 4리바운드 7어시스트 2스틸 2블록, 헌트 29점 3점슛4개, 존슨 22점 11리바운드, 앤서니 13점 6어시스트 5스틸
필 핸더슨 21점 레이트너 15점 9리바운드 5어시스트 알라 압델나비 14점 7리바운드)
최_ 그런 어려운 과정을 다 극복하고 우승했을 때 기분은 어땠나요?
오_ 정말 좋은 기분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제가 나이가 들면서 더욱 값지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정이 매우 힘들었지만, 우리가 어렸기 때문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열심히 훈련했습니다. 시간도 굉장히 길었고, 저희보다 훈련을 더 많이 한 팀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요즘 어린 선수들이 그렇게 훈련한다면 절반 이상은 그만 둘 겁니다. 어린 선수들은 그렇게 시키면 정말 이해를 하지 못할 겁니다.

오_ 네, 우리가 NCAA의 징계 가능성이 있어 이탈리아 리그에서 제의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가 UNLV로 복귀를 결정한 이후 NCAA에서 규정위반으로 징계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죠.
최_ NCAA 토너먼트 출전이 금지될 수 있는 상황이었고, UNLV가 리쿠르팅 제한 등 징계를 받을 수 있었는데 잔류를 했습니다.
오_ 우리 선수들이 똘똘 뭉쳐서 어떤 일이 있던 간에 최선을 다하자고 했습니다.
(당시 대학 최고 선수였던 래리 존슨과 오그먼, 그리고 그렉 앤서니가 잔류를 선택.)
최_ 또한 UNLV가 징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NCAA가 다른 징계 없이 감독님과 래리 존슨에게 전학을 허용했고, 많은 대학들이 전학 제의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_ 이탈리아 리그나 다른 대학의 제의가 있었지만, 타캐니언 감독과 함께 선수들이 똘똘 뭉쳐서 주변에서 무슨 이야기가 있었던 간에 함께 하자고 했습니다. 당시 NCAA의 징계 건은 타캐니언 감독이 UNLV 재임 시절이 아닌 롱비치 주립대학 재임 시절에 있었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최_ 로이드 다니엘스 리쿠르팅 문제가 아니었나요?
오_ 아니었습니다. 롱비치 주립대학 당시 문제였죠.
최_ 결국 타캐니언 감독과 UNLV 대학이 NCAA와 1990-91 시즌에는 징계를 받지 않는 대신 다음 시즌에 더 큰 징계를 받겠다는 협상을 했고, 결국 받아들여졌습니다.
오_ 우리는 NCAA와 정말 많이 싸웠습니다. NCAA 조직 내에 누군가가 정말 UNLV를 싫어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최_ 하지만 그것이 동기부여가 되어서인지 엄청난 시즌을 보냈습니다. 거의 모든 팀들을 평균 30점차로 대파했죠.
오_ 우리는 열심히 뛰었습니다. 저희는 규정 위반으로 5명이 1~2경기씩 출장정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기를 빠지는지 알 수 없었고, 경기 직전에 NCAA에서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LSU 원정경기를 떠나려 비행기에 타려 하는데 ‘이번에는 네가 출장정지야’라고 알려줘서 비행기를 타지 못했습니다. 그 경기는 전국적으로 관심이 많은 경기였는데도 말이죠.
최_ 당시 정규리그 경기 중 가장 관심이 컸던 경기가 전미 2위였던 아캔사 대학과 원정경기였습니다. 아캔사는 전년도 파이널 4팀이었고, 토드 데이, 리 메이버리, 올리버 밀러 등 향후 NBA 선수들이 버티고 있었죠.
오_ 그 경기도 힘든 경기였습니다.
(UNLV 112-105 아캔사 대학
오그먼 31점 8리바운드, 헌트 26점, 존슨 25점 14리바운드
데이 26점 10리바운드, 밀러 22점 14리바운드, 메이버리 11점 4리바운드)
최_ 결국 30승 무패로 전미 랭킹 1위를 한 번도 놓치지 않고 NCAA 토너먼트 진출을 하게 됩니다. 무패로 NCAA 토너먼트에 오른 것은 1976년 인디애나 대학 이후 처음이었어요.
오_ 대학 마지막 2년 동안 2패를 기록했습니다.

오_ 경기 전에는 선수들이 자신감이 충만하고, 그 시즌에 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준비도 잘 했습니다. 하지만 경기가 어려워지고, 결과론적으로 경기를 패했습니다. 지고 난 후 감정은 제 인생 최저였습니다.
최_ 전년도 대파했던 듀크 대학을 만났기 때문에 방심하진 않았나요?
오_ 아니었습니다. 상대가 강하게 나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최_ 전년도에 듀크 대학이 UNLV의 수비에 완전히 막혀서 수비수 7명을 두고 연습을 했을 정도였다고 하던데요.
오_ 우리도 정말 열심히 연습을 했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만큼 열심히 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최_ 경기가 접전이었지만 2점차로 아쉽게 패했습니다.
오_ 우리는 파울트러블도 많았습니다.
(듀크 대학에게 77-79 패. 앤서니 왼손 부상, 헌트 부상, 에이클스 4반칙.
헌트 29점 4리바운드, 존슨 13점 13리바운드, 앤서니 19점 5리바운드 6어시스트, 오그먼 6점 8리바운드
레이트너 28점 7리바운드, 헐리 12점 7어시스트, 그랜트 힐 11점 5리바운드 5어시스트, 브라이언 데이비스 15점 4리바운드)
최_ 그 경기는 NCAA 역사상 가장 큰 이변이기도 했고, 또한 NCAA 역사상 가장 강한 두 팀이 만난 것이기도 했습니다. 듀크 대학에는 크리스찬 레이트너, 바비 헐리, 그랜트 힐이 있었고, UNLV에는 감독님과 래리 존슨, 그렉 앤서니가 있었습니다.
오_ 우리가 패한 것이 아쉽긴 하지만 훌륭한 경기였습니다.
최_ 공교롭게도 레이트너와는 애틀랜타 호크스에서 다시 만났는데요. 당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나요?
오_ 아니요. 그와 그 경기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시절 그랜트 힐과는 당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최_ 아쉽게 우승을 하지 못하고, NBA에 진출하게 되었는데요. 드래프트 준비하는 동안 UNLV가 징계를 받고 결국 타캐니언 감독이 사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_ 당시 문제는 우리가 아닌 타캐니언 감독 개인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타캐니언 감독이 NCAA와 싸움을 하다 사임을 하게 되었죠. 이후 타캐니언 감독이 NCAA를 고소했고, 결국 재판에서 이겼습니다.
#사진_ 점프볼 DB, 오그먼 감독 트위터, 최연길 해설위원 제공
[저작권자ⓒ 점프볼.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