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탈사이트 검색창에서 제 이름을 쳐보면 남자가 더 많이 나오던데요. 그렇게 남자같은 이름도 아닌데 말이에요”
농구대잔치 시절 최고의 슈터로 활약했던 이강희(52‧170cm) 현 KBL 기록판정원에게 ‘이름이 멋있다’고했더니 돌아온 대답이다. 아니라다를까 기자도 이름을 검색해보니 남자 이름이 많이 나오기는 했다. 축구선수, 영화배우, 정치인, 대학교수, 기업인, 피아니스트 등 다양한 목록이 눈에 띄었다. 여성도 다수 있었지만 남자 쪽이 더 많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성공한 이들이 많은 이름인 듯 싶기도 했다.
영화 팬들 사이에서는 2015년 개봉되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내부자들>에서 핵심인물로 나왔던 유명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도 유명하다. 하지만 농구 팬들이라면 이강희라는 이름이 언급될 때 여자농구 레전드 이강희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 분명하다.
선수생활(1988~1997년) 내내 국민은행 원클럽맨으로 활약하며 국가대표팀에서도 남다른 존재감을 뽐냈던 그녀는 ‘탱크’, ‘클러치 장인’, ‘멋진 언니’등으로 불렸다. 슈팅가드, 스윙맨 등으로 뛰기에는 신장에서 아쉬움이 남았지만 정작 경기장 내에서는 신체적 약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탄탄한 파워와 빼어난 기술에 더해 경기 흐름을 읽는 특유의 센스가 뛰어났던지라 누구를 상대로도 자신의 몫 이상을 해냈다. 배짱이 두둑해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빅샷도 종종 터트렸다. 거기에 이른바 손질이 워낙 좋아서 스틸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녀가 활약하던 당시 국민은행은 농구대잔치에서 다크호스로 평가받았다. 선수 수급 등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금융권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조직력과 돌격대 근성을 바탕으로 쟁쟁한 강호들도 까다로워했다. 단순히 중요한 순간 발목을 잡는 정도가 아닌 언제든지 우승 타이틀을 뺐어 버릴 수도 있는 강력한 복병이었다. 특히 박현숙, 이강희의 앞선은 어떤 팀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최상급 백코트 콤비로 평가받았다. 이를 입증하듯 국민은행은 두 선수가 활약하던 당시 두차례 농구대잔치 정상에 오른바 있다.
유영주 전 부산 BNK 프로농구단 감독은 “농구대잔치때 은퇴를 해서 요즘 세대들은 많이 모를수도 있겠지만 한국 여자농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뭐랄까. 나는 선머슴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정말 우당탕탕 힘들게 터프한 농구를 펼쳤는데 상대적으로 언니는 플레이가 간결하고 심플했다. 막 무리하지않는 것 같은데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주인공으로 등장했고 부진하다싶은 경기에서도 클러치샷은 언제나 도맡아 쏘는 느낌이었다. 적어도 나에 눈에 비친 언니는 농구도사같은 이미지였다”고 농구선수 이강희를 설명했다.

“빠른 은퇴요? 그 시절에는 20대 중후반만 되어도 노장이었어요”
Q.어떻게 지내세요?
30대 초반부터 KBL 기록판정원 일을 하고있어요. 저희 작은 아이 낳고 바로 시작했으니까 23년 정도 된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은 아실텐데 저희 신랑이 강성우라고 프로야구선수였어요. 당시 롯데 자이언츠 소속이었던지라 부산에서 살고있었는데 SK(현 SSG)로 트레이드되면서 인천으로 이사를 가게됐어요. 그때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시작했다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네요.
Q.은퇴를 생각보다 빨리 한 것 같아요.
그렇지도 않아요. 저같은 경우 딱 10년 채우고 은퇴했어요. 당시는 지금하고 달라요. 20대 중후반만 되어도 노장소리 듣던 시절이거든요. 그정도되면 실력이 있든 없든 후배들을 위해 슬슬 은퇴를 준비해야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어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저도 엄청 빨리 은퇴한 것 같지만 그때 상황에서는 그래도 제법 오래한거에요. 더욱이 그때는 지금처럼 체계화된 시스템도 아닌지라 30살 넘어서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갈 환경도 만들어지지 못했죠.
Q.환경이라 하시면…?
지금은 각종 웨이트시설, 부상방지 프로그램 등 선수생활을 오래 이어갈 수 있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잘 갖춰져 있잖아요. 거기에 구단의 지원도 상당하고요. 일단 프로선수가 되어서 잘만하면 일반적인 직장인들보다 돈도 훨씬 많이 벌고요. 환경도 그렇고 동기부여도 예전하고는 너무 다르죠. 지금 선수들은 상상도 하기 힘든 시대였어요. 산 같은 곳 뛰어다니고 타이어끌고 모래주머니차고…, 그런식으로 훈련했습니다. 당시 김태환 감독님이 지휘봉을 잡고 계신 시절이었는데 정말 훈련량이 엄청났어요. 물론 그렇게 혹독하게 훈련하고 견디어냈으니까 좋은 성적도 나고 그랬겠지만 저는 일찍 질리더라고요. 10년 채운 것만 해도 많이 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지금 프로농구 환경이 부럽기도 할 것 같아요.
솔직히 많이 부럽죠. 지금은 선수들에게 여러 가지면에서 동기부여가 되잖아요. 저만 그렇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즐겁다는 생각은 많이 못했어요. 경기에서 이기고 좋은 성적내면 그건 기뻤지만 그 외 훈련 등에 관해서는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마지못해 할 때도 많았습니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도 못했어요. 참고 뛰는게 미덕이고 당연한 시절이었죠. 아파서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황에서 진통 주사를 맞고 뛰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선수 수명도 자동으로 깎여나갔죠. 정말 이건 중요한 부분같아요. 어느 분야건 간에 본인이 즐거움을 느껴야 더 오래 잘 할 수 있잖아요. 그때는 그냥 끈기, 책임감 이런 마음으로 뛰는 선수들도 많지 않았나 싶어요.
Q.아마도 WKBL에서 지금 뛰었다면 훨씬 오래 선수 생활을 하셨을 것 같아요.
맞아요. 일단 프로는 돈을 많이 주잖아요.(웃음) 그때는 직장인 개념이었어요. 월급도, 보너스도 딱 은행원 정도였죠. 한창때 기량으로 지금 시대에서 체계적인 관리를 받으며 뛴다면 연봉도 몇억은 받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도 선수 생활에 더 욕심이 났을 것 같고요. 저뿐 아니라 함께 농구했던 많은 선후배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KBL 기록판정원하면서 생긴 에피소드요?”
Q.어, 그런데 WKBL이 아니라 KBL이네요?
어차피 WKBL이나 KBL이나 별반 차이없어요. 지속적으로 선수들하고 소통하고 케어해야하는 업무같으면 차이가 생길지 모르겠지만 동일한 룰안에서 기록을 체크하는 일이잖아요.
Q.기록판정원에 대해 잘 모르는 팬분들을 위해 설명 한번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농구경기에서 나오는 모든 기록을 체크하고 기록화 시킬 수 있도록 만드는 역할이죠. 녹음 역할이 가능한 소형 마이크를 입에 대고 방금 누가 득점을 시도하고 리바운드했고 실책을 범했는지 등의 말을 하면 양 옆에서 옆에 있는 기록원들이 전산, 스코어 시트 등에 입력합니다. 코트에서 이뤄지는 모든 상황을 실시간으로 말해준다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디테일하게 정리된 기록은 각 쿼터가 끝나면 기자 등 필요한 분들에게 제공되죠. 이게 되게 집중이 필요한 일이에요. 잠깐 딴생각을 하거나 움직임을 놓치게되면 큰일이 나는거잖아요. 저는 잠시 방심을 했다고 하지만 선수 개인과 팀, 더불어 나중에 자료화 되어야 되는 사항들인지라 나비효과가 엄청나죠. 상황에 따라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체크해가면서 다시 정리해야 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고요. 경기에서는 찰나의 순간에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할수도 있어요. 예를 들면 ‘속공 상황에서 가드가 패스하고 포워드가 받아서 레이업슛을 시도했는데 안들어갔어요. 그때 달려오던 같은편 센터가 리바운드를 잡아 재차 슛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상대팀 센터가 블록슛으로 쳐내버렸습니다. 그것을 처음 패스를 했던 가드가 다시 잡아서 포워드에게 패스했고 이번에는 들어갔어요.’ 어찌보면 불과 몇초만에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지만 찰나의 순간에 여러차례의 슛 시도, 어시스트, 득점, 리바운드, 블록슛 등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인지라 정신 똑바로 차려야하죠. 더불어 철저한 준비는 필수입니다. 좀처럼 그런 일은 생기지않지만 혹시 모를 컴퓨터 고장이나 기타 사고에 대비해 경기 시작 2시간 전에는 나와서 배선 상태라든지 이것저것 꼼꼼하게 체크를 하죠.
Q.현역으로 뛰던 시절에는 지금처럼 디테일한 기록 관리가 힘들었겠죠?
아무래도 지금하고는 환경 자체가 달랐으니까요. 스코어보드라고 하죠. 거기에 출전 선수들 이름이 써지면 팀 매니저가 수기로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파울 등을 기록하는 정도였어요. 지금처럼 성공률 따지고 각 선수간 비교하고 그런 정도의 디테일은 기대하기 힘들었죠. 농구 커뮤티티 등을 보면 팬들사이에서 ‘과거의 선수가 현재로 온다면 어느 정도 할까?’라는 논쟁도 종종 있는 모습인데요. 아무래도 시대가 달라서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겠지만 지금처럼 체계화된 기록이 있으면 간접비교는 어느정도 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예전 선수들은 그런 기록이 자세하게 존재하지 않아서 그저 당시 농구인들이나 팬들의 입을 통해서만 주로 평가될 수밖에 없죠. 그래서 더 예전 스타들의 기량에 대해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많이 잊혀져가고 있지않나 생각됩니다. 그래도 제 시대에는 완전 주먹구구는 아니었어요. 어느 단체에서 관리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통산 스틸, 3점슛 몇 개 돌파 등도 체크해서 시상도 해주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받고 기분 좋았었으니까요.(웃음)
Q.직접 경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록에 관한 중요한 업무인지라 아무래도 선수 출신이 하는 것이 맞겠죠?
꼭 선수 출신이 해야 된다는 법은 없지만 아무래도 농구를 직접 해본 사람이 기록을 하는 쪽이 여러 가지 면에서 나은 점이 많겠죠. 다소 진행이 느린 종목같은 경우 비선수 출신이라도 이론에 해박하면 꼼꼼한 준비와 체크를 통해서 따라갈 수 있겠지만 아시다시피 농구는 템포가 워낙 빨라요. 순간적으로 여러 가지 상황이 한꺼번에 나와버리는지라 실제 경기를 하는 선수는 물론 코칭스탭과 심판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거나 고성이 오갈 때도 있잖아요. 스피드한 움직임을 따라가는 눈에 더해 신속 정확한 판단력이 필요해요.
Q.선수들 기록을 다룬다는 점에서 에피소드같은것도 있으실 듯 해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특히 인상적인 하나가 떠오르네요. 해당 선수의 프라이버시가 있어서 이름은 밝히지않을께요. 어떤 선수가 있었는데 기록에 되게 민감해요.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 선수는 놀라울 정도였어요. 어느 날은 해당팀 매니저가 와서 저희한테 “ㅇ선수가 자신의 기록지를 봤는데 리바운드 2개가 빠진 것 같다고 한다. 확인좀 부탁드리겠다”고 말하는거에요. 깜짝 놀랐어요. 알고보니 경기를 하면서도 자신의 기록을 세고 있었던거에요. 단체 경기에서 경기에 집중하기도 모자랄텐데 그걸 속으로 체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놀라운 마음이 크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해당 영상을 보면서 하나하나 다시 되집어갔죠. 저희 기록원이 6명이거든요. 때로는 선수가 생각하는 기록과 저희의 입장이 조금씩 다를 때도 있어요. ㅇ선수가 말했던 리바운드로 예를 들면, 슛이 실패한 과정에서 여러선수가 달려들어요. 그러다가 한선수의 손이 공에 닿았다가 옆 선수가 잡아내게되요. 그러면 저희는 옆 선수에게 리바운드 기록을 줘요. 온전히 공을 캐치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때 리바운드라고 판단하죠. 하지만 그 선수는 자신의 손에 닿았으니까 본인의 기록이라고 생각했나봐요. 어떤 면에서는 이해도 되요. 선수 개인에게는 중요한 사항일 수도 있으니까요. 이후로 그 선수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조금더 신경이 갔던 것도 사실입니다.(웃음)

“가수 ‘수와진’덕분에 현재의 신랑을 만나게 됐습니다”
Q.현재의 남편은 어떻게 만나게 되신거에요?
김태환 감독님이 가수 ‘수와진’ 오빠들하고 친분이 있었어요. 근데 부산사람이기도한 수와진은 또 저희 신랑하고도 형 동생하는 사이였어요. 그러다가 95년도에 롯데 자이언츠가 두산 베어스하고 원정경기를 치르게 됐는데 수와진이 서울 올라온김에 감독님을 뵈러 찾아오게 된거죠. 현재 지금 저희 신랑을 함께 데리고요. 감독님한테 인사도 시킬겸해서요. 감독님이 본래 야구에도 관심이 많기도해서 신랑이 반가웠을거에요. 그런 인연으로 저희 국민은행 선수들도 감독님따라서 잠실로 두산과 롯데의 야구경기를 보러가기도 했고요. 그날 저녁에 회식이 있었는데 감독님이 수와진하고 신랑을 데리고 왔어요. 저와 신랑은 회식 자리에서 처음 만나게 된거죠. 감독님이 신랑한테 나이를 물었는데 저와 제 동기 (박)현숙이와 동갑이더라고요. 그렇게 안면을 트게됐는데 어쩌다보니까 결혼까지 이어지게됐네요.
Q.같은 운동선수라는 동질감도 친해지는데 영향이 있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런 부분도 있었겠죠, 나이도 같고 종목은 다르지만 서로 운동선수라는 점에서 말도 잘 통했던 것 같아요. 비시즌에 부산 한번 놀러오라고 해서 동료들이랑 해운대로 가서 함께 시간도 보내는 등 자연스럽게 친해졌던 기억이 나요.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은 참 신기해요. 어떻게 그렇게 엮이는지…, 출신지도 다른지라 제가 농구선수, 신랑이 야구선수가 아니었다면, 좀더 깊이 들어가서 제가 국민은행, 신랑이 롯데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만나기는 힘들었겠죠. 만나야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지 만나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현재하고 있는 기록판정원 일도 신랑이 트레이드가 되지않았다면 기회가 찾아왔을까 싶고요.
Q.현재 계속 프로야구 쪽에서 일하고 계시죠?
네, 현재는 KIA타이거즈 2군 배터리코치로 있어요. 선수시절에 포수였는지라 자신의 전공을 살려서 같은 포지션 후배들을 육성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신랑을 만나기 전까지는 야구에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저 재미없는 것을 다들 왜 보냐’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신랑이 몸담고있으니 자연스레 눈이 갔고 또 보다보니까 재미있더라고요. 지금은 제법 야구 팬이 다됐어요.(웃음) 이제 프로야구 시즌도 개막됐고 신랑이 속해있는 KIA타이거즈가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거물타자 나성범도 영입했고 메이저리그에서 양현종도 돌아온데다 시범경기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며 ‘제2의 이종범’소리를 듣고있는 슈퍼루키 김도영까지 가세한지라 팬들 입장에서는 보는 재미가 쏠쏠할 듯 싶어요. 더불어 저희 신랑이 배터리코치니까 포수진들이 좋은 활약을 펼쳐서 더 이상 KIA가 포수가 약하다는 소리를 안들었으면 좋겠다는 바램도 가져봅니다.

Q.아참! 카카오스토리를 보니까 전 메이저리거 박찬호, 개그맨 정승환과 사진 찍은 것을 봤어요.
아! 저희 신랑이 한화 이글스 코치로 있을 때 찍었던 사진을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박찬호 선수가 한화에 몇 년 있을 때 대전 경기를 보러갔다가 기념사진을 찍었어요. 대화도 좀 나누고 싶었지만 경기가 막 끝난 직후라 너무 바쁘셔서 사진만 찍고 헤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투머치토커에 제대로 한번 걸려보고 싶었는데요…(웃음), 개그맨 정승환 씨같은 경우는 예전에 신장병 어린이돕기 행사에서 만났어요. 자선행사식으로 해서 여자 농구선수 출신들과 개그맨들이 농구시합을 한적이 있었는데 그때 정승환씨가 그 경기에서 선수로 뛰었어요. 개그콘서트 등을 통해 워낙 유명했던 시절인지라 신기하기도해서 사진 한번 같이 찍자고 요청했었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연예인과 운동선수가 만나면 서로 신기해하는 것 같아요. ‘어! 이 사람…’ 그런 느낌을 받나봐요.
Q.자녀 분은 어떻게 되시나요? 혹시 엄마를 따라서 농구를 하는지도 궁금합니다.
딸 둘이고요. 첫째가 만 23세 둘째가 만 21세 그래요. 첫째는 1부 프로 골프선수로 활약하고있고요. 둘째는 대학교 3학년올라가요. 첫째는 168cm, 둘째는 177cm정도되요. 그렇지않아도 농구를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어요. 아이들이 어릴 때 어머니 농구대회같은 대회등이 많이 열렸어요. 저희같은 농구인 출신들이 많이 뛰었죠. 그래서 아이들 데리고 참석해서 직접 현장을 보여주고 그랬습니다. 당시 현장에서 감독, 코치하는 선후배들이 큰 아이를 보고 농구 한번 시켜보면 어떻겠냐고, 책임지고 키워주겠다고 얘기도 하고 그랬어요. 하지만 주변에서 아무리 그러면 뭐해요. 본인이 관심이 있어야죠. 안시킨게 아니고 못시켰습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4학년때쯤이었나. 당시 박세리 선수가 어린이들 당시에서 인기가 높았던 적이 있어요. 경기 중에 양말벗고 플레이하는 모습은 되게 이슈가 됐었잖아요. 큰아이가 거기에 꽂히더라고요. 아파트 근처에 골프연습장이 있어서 ‘한번 해볼래’했더니 곧잘 따라하더라고요. 골프라는 운동은 인내심, 집중력이 되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직 어릴 때인데도 지루해하지않고 끈기있게 하더라고요. 선생님께서도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해주시고해서 5학년말 그정도부터 본격적으로 시키게 됐죠. 무엇보다 본인이 원하고 관심있어 했으니까요. 운동은 아무리 신체조건, 재능 등이 좋아도 본인이 싫다고하면 못시킨다고 생각해요. 억지로해서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딸이 원하는 길이니까 부모로서 밀어줬어요.
“큰 기대없이 찾아간 자리가 인생을 바꿨습니다”
Q.농구는 어떤 계기로 시작하시게 된 것인가요?
저는 원래 용산초등학교를 다녔어요. 어느날 학교 쉬는 시간에 키큰 언니들이 복도를 왔다갔다하면서 아이들을 지명해서 부르고 있었어요. ‘무슨 일이지?’궁금해서 쳐다보고 있었더니 ‘너도 잠깐 와볼래’하면서 부르더라고요. 그리고는 ‘농구 한번 해보지 않을래?’하고 물어봤어요. 당시에는 농구가 뭔지도 잘몰랐거든요. 하지만 학교에서 육상을 하던 시절인지라 운동에 대한 두려움 그런 것은 없었어요. ‘관심있으면 한번 찾아와’라면서 종이를 한 장줬는데 거기에는 날짜, 시간하고 선일초등학교 주소가 적혀 있더라고요.
Q.아, 개인 스카웃 개념같은 것은 아니었고 공개 테스트였군요?
반반이었죠. 시즌이 끝나면 고등학교 농구부 언니들이 학교마다 돌아다니면서 직접 스카웃을 하러다니는 방식이었어요. 다만 워낙 어린아이들이었던지라 특정 누군가를 콕 찍어서 데리고온다기보다는 신체조건이나 이런저런 것 등을 보면서 다수를 선별했고 그런 친구들을 한자리에 모아서 검증절차를 거치는 것이었죠. 어리둥절하기는 했지만 일단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장소로 찾아가기는 했어요. 막상 가보고 깜짝놀랐어요. 농구 코트 3개가 있는 넓은 체육관에 아이들이 꽉 차있더라고요. 족히 200명은 넘어보였어요. 그렇게 모인 아이들을 대상으로 달리기, 패스, 드리블 등 여러 가지 항목에 걸쳐 테스트가 진행됐어요. 그렇게 최종적으로 뽑힌 친구들이 20명정도 됐는데 주말에 수영장으로 데리고가서 최종 테스트가 치러졌고 마지막으로 12명이 추려졌어요. 저는 크게 기대는 안했는데 12명 안에 뽑히게 되었고 농구를 하기위해서 5학년때 전학을 하게되면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거죠.
Q.처음에 포지션은 어떻게 되었나요?
가드였죠. 용산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만해도 저는 제가 크다고 생각했어요. 153cm정도면 당시 초등학교 5학년 여학생 키로 나쁘지 않은 편이었는데 농구를 시작하고나니까 전혀 아닌거에요. 신체조건부터 상대가 안되는 친구들이 가득하더라고요. 뽑힌 12명중 제가 9번째쯤 됐던 것 같아요. 완전 꼬꼬마였죠. 당시에는 지금처럼 1번~5번까지 디테일하게 포지션 구분이 안되던 시대에요. 가드 둘, 포워드 둘, 센터하나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저는 패스 위주로 플레이하던 가드였으니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포인트가드라고 보는게 맞을 듯 싶어요. 그러다가 학년이 올라가면서 키도 조금은 더 커지고해서 중학교때 쯤 슈팅가드라는 몸에 맞는 옷을 입게된거죠. 그때도 슈팅가드라는 명칭은 없었고 가드보면서 포워드처럼 휘젓고 다니는 역할을 했어요.
Q.그 뒤로 포지션을 쭉 이어가셨어요.
제대로 2번으로 정착한 것은 국민은행으로 가면서부터인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공격력좋은 가드로 이것저것 다 했는데 팀에 입단하니까 (박)현숙이라는, 지금의 시각으로보면 아주 뛰어난 정통 포인트가드가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저는 좀 더 공격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서로간 시너지효과도 많이 나게됐죠.

“저의 플레이 스타일요…?”
Q.당시 경기를 안본 젊은 팬들을 위해서, 선수 이강희는 어떤 플레이 스타일의 선수였는지 설명해 줄수 있으실까요? 슛좋고 잘 뛴다는 점에서 김영옥 선수와 비슷했으려나요.
그건 아닐거에요. 내외곽을 오가며 득점을 올린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부분도 있겠지만 2번으로서의 색깔은 (김)영옥이와 많이 달라요. 영옥이는 호리호리하잖아요. 그런 체형을 살려서 많이 달리고 날렵하고, 날쌘돌이같은 스타일이었죠. 저는 덩치가 좀 있었어요. 그래서 별명이 ‘탱크’였어요. 붙으면 파고 떨어지면 쏘고 그냥 좀 단순했어요. 그리고 주특기가 원드리블, 투드리블 점프슛이었어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민망하지만 나름 상당히 정확했어요.(웃음) 동작 자체가 여자선수들이 하기는 쉽지 않았어요. 나름 희소성도 있었죠. 그래서 상대 수비가 어려워했던 기억도 나요. 저를 슈터로 기억하는 팬분들도 많은데 그것도 틀리지는 않겠지만 그냥 있는 위치에서 그대로 득점하는 성향이 강했어요. 현재 외곽에 있으면 외곽슛을 쏘고 미들라인에 있으면 그대로 원드리블 점프슛을 날리고, 빈틈이 보이면 돌파해서 드라이브인을 들어가는 것이죠. 기동성같은 경우는 장단점이 함께 공존하는 유형이었어요. 지구력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순발력은 있었어요. 그래서 스틸같은 것도 곧잘 했던 것 같아요. 많이 움직인다기보다는 필요할 때 순간적으로 움직이는 유형이었던거죠.
Q.구태여 영역을 가리지않고 현재 위치에서 쉽게쉽게 득점한다는 점에서 김영만 선수가 떠오르기도하네요.
워낙에 잘했던 선수와 비교해주시니 쑥스럽기도 하지만 비슷한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그 선수도 전문 슈터라기보다는 거리를 가리지않고 되게 쉽게 득점하는 스타일이었죠. 원드리블, 투드리블 점프슛에도 능했고요. 제가 저만의 무기를 갖게된데에는 김태환 감독님 영향도 컸던 것 같아요. 감독님께서 저의 장점을 잘 알아봐주시고 적극적으로 밀어주셨거든요.
Q.학창시절에 ‘이 선수는 정말 잘한다’고 느낀 선수로는 누가 있을까요?
중고등학교때 실업농구 중계같은 것을 하면 선생님께서 한번씩 보라고 틀어주셨어요. 저희들이 노력해서 가야될 길이니까요. 그때 저의 눈을 사로잡은 선수가 있었는데 국민은행 신기화 선배였어요. 지금으로 따지면 남자프로농구 KGC 전성현 선수같다고 해야할까요? 외곽슛이 정말 정확했어요. 정말 쏘는 족족 빨려 들어갔던 것 같아요. 정말 이름처럼 신기할 정도였다니까요. 김화순 언니도 대단해보였어요. 그 언니는 뭐랄까. 농구를 정말 쉽게쉽게 한다고할까요. 막 화려하고 그런 것은 적은데 마치 물흐르듯 플레이하는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나왔던 기억이 나요.
Q.국민은행에서만 쭉 뛰고 커리어를 마치셨는데 팀에 대한 애착도 크셨을 것 같아요.
그럼요. 당시에는 트레이드도 거의 없고 입단한 팀에서 은퇴할 때까지 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때문에 팀에 들어오게되면 ‘여기서 뼈를 묻는다’고 당연스레 생각하게 되고 그만큼 애착도 강할 수 밖에 없겠죠. 가족같은 개념이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아요. 그런만큼 감독과 선수들간의 궁합도 정말 중요했죠. 아무리 선수가 잘해도 혹은 아무리 감독이 유능해도 서로 맞지않으면 기대만큼의 성적을 낼 수가 없게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정말 감독님을 잘 만난 것 같아요. 열악한 환경 속에서 팀을 추스려서 정상도 차지하고 각 선수들이 가지고있는 장점을 잘 찍어서 키워주던 분이셨죠. 제 농구인생에서 빠져서는 안될 고마운 스승님이세요.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훈련을 많이 시켜도 너무 많이 시킨다는 점이었어요. 그렇게 하셨으니까 우승도 하고 그랬겠지만, 어쩔때는 너무 힘들었어요. 시합도 치르기 전에 이미 지쳐서 들어갈때도 있었다니까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잖아요. 장단점이 다 있다고봐요.
Q.신장이 조금 작으셨는데 거기에 대한 아쉬움을 없었을까요?
왜 없었겠어요. 농구라는 스포츠는 신장이 정말 큰 영향을 차지하는지라 키 큰 선수들도 ‘조금만 더 컸으면…’하고 생각하는 종목이에요. 저는 정말 크게도 안바랬어요. 5~6cm만 더컸으면 훨씬 더 잘해서 커리어 자체가 확 바뀌었을텐데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제가 체격이 있고 힘도 좋다보니 골밑 플레이도 자주 했거든요. 그럴 때 키 큰 선수들이 막으면 아무래도 좀 버거웠어요. 기량의 차이를 떠나 키 차이가 많이 나버리면 받게 되는 압박의 강도가 달라요.
Q.클러치 상황에서 유독 강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셨어요.
김태환 감독님 얘기를 또 안할 수가 없네요. 감독님이 저를 많이 믿어주셨어요. 선수는 신뢰를 받을 때 더더욱 과감한 플레이가 가능해지거든요. 감독님께서 ‘얼마든지 하고 싶은 플레이해봐’라면서 밀어주셨기 때문에 중요한 상황에서 자신감있게 공격을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접전에서 공격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는데 벤치로 들어가서 감독님에게 엄청 혼났다고 가정해봐요. 다음부터 그 선수가 제대로 슛을 쏠 수 있을까요? 비슷한 상황이 오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 감독님의 질책 때문에 몸부터 굳어버릴 공산이 커요. 클러치 상황에 강한 선수는 혼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동료들 그리고 감독님까지 함께 서로를 믿을 때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제가 슛거리가 꽤 긴편이었어요. 감독님께서도 그러한 장점을 인정해주시고 수시로 ‘넌 슛거리가 기니까. 거리에 상관없이 찬스가 나면 망설이지말고 슛을 던져’라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러다보니 슛시도에 거침이 없었죠. 감독님이 쏘라고 하는데요. 3점슛 라인에서 두세걸음 뒤에서도 찬스다 싶으면 그냥 던져버렸어요.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설마 여기서 던지겠어?’라고 생각하다가 허를 찔려버리는 경우도 많았을거에요. 그렇게 장거리슛을 갖춘 선수로 알려지다보니 다음 플레이를 할 때도 편했어요.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저를 슛거리가 긴 선수로 인지하고 있고 저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상대가 붙으면 골밑돌파를 시도했어요. 그러다가 도움수비가 들어오면 미들슛을 던져버리고요. 하나의 확실한 장점이 부각되다보니 다른 선택지까지 함께 늘어나게 되었고 클러치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Q.운동 선수에게 부상은 정말 큰 적이잖아요. 선수 생활하시면서 부상은 없으셨을까요?
저는요. 정말 선수 생활하면서 별다른 부상이 없었어요. 잠깐씩 접질리고 그런 것은 있었겠지만 수술이 필요할 만큼의 큰 부상은 다행히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몸을 사리면서 뛰는 스타일도 아니었어요.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김태환 감독님이 어떤 분이신데요. 근성없이 대충대충 뛰다가는 큰일나요. 훈련량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그 정도 훈련을 시키시는 분이 실제 경기에서 어설픈 모습을 용납하셨겠어요. 코트에 나가면 정말 혼신을 다해 뛰어야했죠. 그랬음에도 큰 부상이 없었다는 것은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발목, 무릎, 허리 등 쌩쌩해요. 함께 선수 생활했던 선후배들 이야기 들어보면 지금도 일상 생활이 불편하고 비가 오면 관절이 시큰시큰하다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점에서 저는 정말 감사할 뿐입니다. 요즘처럼 팀 닥터나 개인 트레이너가 있는 시대도 아니고 다들 각자 알아서 몸관리하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죠.
Q.마지막으로 여전히 선수 이강희를 기억하고 사랑해주시는 팬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 여자 농구도 참 인기가 많았습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셨고 그로인해서 신나게 뛰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시절 농구를 응원해주셨던 분들도 이제는 나이를 먹어서 저희와 연배가 비슷하거나 더 많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씩 그때를 기억하시며 이강희라는 선수도 있었지라고 떠올려주시는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좋은 자리를 빌어 예전 이야기도 하고 근황도 전할 수 있어서 너무 기분 좋았던 것 같아요. 지금 하고 있는 일 열심히 하면서 농구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대한민국 농구 많이 사랑해주세요.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유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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