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은퇴하고 일주일만에 국가대표 감독 됐죠”

김종수 / 기사승인 : 2022-02-01 01:3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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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22)] '열혈남아' 김동광

 

‘10대때 시작한 농구를 70대에도!’ 농구의 길을 걸었던 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행보일 것이다. 자신이 선택했던 분야에서 평생 무엇인가를 하는 것 만큼 행복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치않다.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또래보다 월등히 실력이 좋아야하고, 선수가 되어서도 잘하는 이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경쟁해서 이겨내야 살아남을수 있다. 그렇게 10여년 정도만 견디어내도 보통 성공한 농구 인생이라고 한다.


선수 은퇴 이후 가장 빛나는 코스 중 하나는 지도자의 길이다. 특히 10개 자리 밖에 없는 프로팀 감독이 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선수 시절 혹은 아마무대에서부터 인지도를 쌓아나간 인물중 극소수에게만 기회가 주어진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프로 감독의 자리는 희소성만큼 이나 차갑기 그지없는 얼음 의자다.


제 아무리 타 무대에서 이름을 날리고 선수 시절 명성을 쌓았어도 팀 성적이 부진하다 싶으면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 자기 자신만 잘하면 되는 선수 시절과 달리 책임져야 할 이가 한둘이 아닌지라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한때 명장 소리를 들으며 여러 곳에서 러브콜이 쏟아지다가도 삽시간에 관심이 식어버리며 잊혀져버리기 일쑤다. 독이든 성배라는 말이 괜스레 나온게 아니다. 비단 프로무대 뿐만이 아닌 대학무대, 고교감독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구를 했던 이라면 학원스포츠쪽에서라도 지도자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아예 농구 쪽에서 일을 찾지못하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른 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도 적지않기 때문이다. 힘들어도 괴로워도 ‘농구밥을 먹을 때가 행복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그런점에서 농구인 김동광(70‧184cm)은 행복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70대에 접어선 지금까지도 농구계를 떠나지않고 현역 농구인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은행 프랜차이즈 스타, 국가대표팀 핵심전력으로 한시대를 풍미한후 선수 생활을 마치기 무섭게 바레인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2년 9개월 동안 역임한다.


그뒤에도 김동광은 일복(?)이 터지며 지금까지 쉬지않고 있다. 실업팀 코치, 실업팀 감독, 프로팀 감독, 국가대표팀 코치, 국가대표팀 감독 등 굵직한 지도자 자리에서 모두 지휘봉을 잡아봤다. 어디 그뿐인가. 지도자 생활을 하지 않을 때는 해설자로 꾸준하게 팬들과 소통했고 KBL에서 기술위원, 경기이사, 경기위원장, 심판위원장, 경기본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KBA에서 이사를 거쳐 경기력향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선수, 지도자, 해설자, 행정가에 이르기까지 김동광만큼 공백없이 꾸준하게 농구계에서 전천후로 존재감을 드러냈던 이가 얼마나될까 싶을 정도로 자신의 농구 경력을 빽빽하게 채워나가고 있다. 그가 거쳐온 길은 단순히 본인이 하고싶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누군가 그를 필요로하고 써줘야만이 가능하다. 농구인 김동광이 어떤 인물이며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를 새삼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Q.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KBA에서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매번 바쁜 것도 아니고 요새는 시간적인 여유가 많이 생겼습니다. 늘 해오던 데로 헬스는 꾸준히 하고있고 골프도 치고있고, 그렇게 지내고있죠. 아, 지금은(인터뷰가 진행되던 1월 28일 기준) 와이프하고 속초에 내려와있어요. 바람도 쐴겸 한번씩 함께 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바쁠 때 신경을 많이 못쓰고 살았는데, 이럴 때라도 함께 하는 시간을 늘려봐야죠.(웃음) 최고의 동반자이자 가장 가까운 벗이에요.

Q.대한민국농구협회 경기력향상위원장은 어떤 일을 하는 자리인가요?
엊그제도 올라갔다왔는데, 뭐라고 설명하는게 좋을까. 쉽게 말하면 대표선수를 뽑는거에요. 국가대표, 청소년대표, 유소년대표 등 대한민국을 대표해 국제대회에 나갈 인재들을 선정하는 것이죠. 전‧현 프로감독, 상무감독 등 위원들이 있어요. 국제대회 등이 있을 때 함께 상의하고 의견을 모아서 최적의 대표팀을 구성할 수 있도록 머리를 맞대고 있습니다. 평소에도 다양한 선수들을 상대로 컨디션, 몸상태 등을 유심히 보고있죠. 물론 그렇게해도 이런저런 상황이 맞물리면서 여러모로 어려울 때도 있고요.

Q.1983년에 은퇴하셨는데 이후로도 거의 쉬지를 않으셨어요. 찾아주는 곳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유능하시다는 증거같아요.
제가 딱히 특별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만의 철학을 가지고 꾸준히 일해왔는데 좋게 봐주신 분들이 많으신 것 같아요. 무슨 일을 하건간에 열심히 하려고 노력은 했죠. 거기에 운도 좀 따랐고 타이밍도 잘 맞지않았나 싶어요. 이러저래 고마운 일이죠. 농구인이 농구관련 일을 오래할 수 있다는 것은요.

Q.개인적으로 지도자, 해설가, 행정가 중 어떤 쪽이 가장 체질에 맞으신가요?
고민할 것도 없이 지도자죠. 해온 세월이 얼마인데요. 지도자가 첫 번째고 해설가, 행정가 순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의 시간이 말해준다고 봅니다. 사람은 많이한만큼 경험도 쌓이고 자신감도 생기는 법이죠. 그렇다고 다른 쪽이 체질에 안맞는다는 것은 아니고요.(웃음) 워낙에 젊은 시절부터 지도자 생활을 쭉 해오다보니까 몸에 박힌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Q.여전히 에너지가 넘치시고 건강하신 것 같아요. 어디 아프신데는 없으시죠? 보이는 모습으로는 어지간한 젊은이들한테도 여전히 안밀리실 것 같아요.
허허헛…, 아직까지는 여러모로 쓸만합니다. 특히 헬스같은 경우는 습관이 되어서 며칠만 운동을 안해도 근육이 풀려서 뻑뻑하고 그래요. 꾸준히 운동은 쉬지 않고 있죠. 지금 사는 아파트 단지내에서도 헬스장이 잘 되어 있어요.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일주일에 닷새 이상은 나가는 편이에요.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현역때 무리를 해서 그런지 무릎이 조금 안좋아요. 무리를 하다보면 무릎에 물이 찰 때도 있어요. 그러면 병원에 가서 물을 빼기도하고 그러죠. 하지만 보강운동을 해서 많이 좋아졌어요. 이래저래 나이에 비해서는 건강하고 힘도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의 첫만남요? 그냥 덤덤했어요”

Q.이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위원장님께서 자라시던 시절에는 혼혈에 대한 차별이 꽤 있었습니다.

어후…, 차별 정도겠어요. 지금이야 혼혈을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지만 저 어릴 때는 그런 것 일체 없었어요. 받아들인다? 이해한다? 그런 것은 기대하지도 않았고요. 다르다는 이유로 이유없는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다반사였죠. 지금이야 혼혈이라고 부르지 당시에는 튀기라고 했어요. 어른들에게도 좋지않은 시선을 받고 학생들끼리는 괴롭힘이나 놀림이 말도 못했습니다

Q.어릴 때부터 싸움을 잘하셔서 놀리는 친구는 거의 없었다면서요.
이유없이 놀림당하는 것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정말 싫었죠. 하지만 홀어머니에게서 가난하게 자라던 저는 다른 부분에서 방패가 없었어요. 방법이 있나요. 강해지는 수밖에. 마음 강하게 먹고 다니고, 싸움도 물러서지 않고 곧잘 했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어요. 어머님도 그런 부분 때문에 엄하게 키우셨고요. 어디가서 놀림받고 징징짜면서 집에 돌아오면 더 혼났어요. 그런 것 때문에라도 밖에서 시비가 붙으면 싸워서 이기고 돌아가야 했죠. 그때 많이 강해졌던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 그런 교육방식 때문에 강하게 성장하고 이렇게라도 살 수 있게 된 것은 맞아요. 하지만 너무 엄하셔서 학창 시절에는 어머님에 대한 정이 별로 없었어요. 속깊은 마음과 정을 느끼는데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어요. 나중에 저도 부모가 되어 자식을 키우다보니까 새삼 솟구쳐오는 것도 있고요. 어쨌거나 중학교 올라가면서 농구를 시작하게 됐는데 이후로는 앞에서 대놓고 놀리는 경우가 거의 없어졌죠. 운동부의 장점중 하나인데 후배가 어디서 당하고 오면 선배들이 가만히 안있죠. 괜히 놀렸다가 선배들에게 혼날까봐 그랬는지 운동을 하면서부터는 면전에서 놀림받았던 기억이 잘 생각이 안나요.

 

 

Q.30년 만에 외국에서 아버님과 첫 만남을 가졌다고 들었습니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편지 등으로 서로 근황 정도는 주고 받았어요. 사진을 통해 얼굴도 알고 있었죠. 그러다가, 그때가 언제지. 1984년인가 85년인가, 한창 이산가족찾기가 뜨거웠던 때에요. 저는 선수를 은퇴하고 바레인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었어요. 마침 아버지가 쿠웨이트에서 근무를 하고 계셨어요. 군정보국 계통에.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쿠웨이트 농구 시합장을 갔는데 한국인 농구 감독이 거기 있는거에요. 김윤씨라고. 그 양반에게 아버지가 “혹시 김동광이라고 아느냐”고 물어보니까 지금 바레인에 와있다고 알려줬고 마침 그때가 라마단 기간이라 시간이 되어서 넘어오셔서 만남이 성사된거죠.

Q.막 원망스럽고 그러지는 않으셨어요?
담담했어요. 원망도 없고 그렇다고 가슴 벅찬 감동 그런 것도 없고, ‘이분이 아버지구나’하는 정도뿐이었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얼굴은 사진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공항으로 마중나가서 헬로하면서 서로 인사 주고받고 그랬습니다. 이미 그때는 저도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살던 때이니까 더 담담했을 수도 있겠다싶어요. 어쨌거나 집으로 모시고가서 와이프가 차려준 밥 대접하고 술한잔 따라드리고 그러면서 30년을 풀었죠.(웃음) 아버지가 ‘함께 미국가서 살자’고 권하더라고요. ‘NO’라고 대답했습니다. 한국에서 노력해서 국가대표도 하고 지도자로서도 발을 내딛고있는데 낯선 곳에 가서 다시 시작할 필요는 없었죠.

Q.당시는 영어를 배우기 좋은 환경도 아니었잖아요. 독학하신 건가요?
아버지를 만났을 때도 막 아주 잘하는 수준은 아니었어요. 속깊은 얘기까지는 못했어도 어느정도 기본적인 대화는 거의 된 것 같아요. 사실 학창시절 내내 운동만했는데 제대로 공부할 기회나 있었겠어요. 어쨌거나 바레인에 감독으로 가는데 아예 모르고 갈 수는 없잖아요. 당시에 정철 카세트라고 있었어요. 그걸로 나름대로는 공부를 좀 하고 바레인으로 들어갔죠. 물론 영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은 아닌지라 그것 조금했다고 당장 귀가 확 뚫리고 입이 트이는 것은 아니였지만 그 다음부터는 몸으로 부딪히고 시행착오 겪고 그러면서 나아간거죠. 사람은 닥치면 다 하게되어있어요.

 

 

“김동광 농구의 시작은 웨이트 트레이닝입니다”

Q.농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말하자면 간단하게 시작했어요. 본래 초등학교때 야구를 했어요. 그래서 당연히 중학교에서도 야구를 하려고 마음 먹고 있었죠. 그래서 상인천중학교를 가려고 시험을 쳤는데 떨어져버렸어요. 다행히 2차에 송도중학교에 붙었는데 거기는 또 우수한 성적으로 붙은거에요. 거기가 우수반, 일반반이 있는데 송도고등학교까지 포함해서 6년동안 우수반에만 있었어요. 생각해보면 송도하고 잘맞았나 싶어요. 중학교 입학에서 운동장에서 농구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고 전규삼 선생님이 부르는거에요. 옆에서 함께있던 문영환이란 친구까지 같이. 참고로 그 친구도 혼혈이에요. 선생님이 “너희들, 농구 한번 해볼래?” 물어보셨고 별생각없이 “알겠습니다”했던게 농구와 인연을 맺게된 동기죠. 아마도 저나 그 친구나 둘다 혼혈이라서 나중에 신체조건이 더 좋아질 것이다는 기대도 있지 않았나싶어요.

Q.송도중학교 고 전규삼 감독의 초창기 제자셨어요. 어떤 분이셨나요?
그분에 대해서 나쁜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실제로 그만큼 훌륭한 분이세요. 아버지없이 자랐던 저에게는 부정을 느끼게 해준 분이기도 하죠. 제자들을 항상 마음으로 대하셨고 그만큼 다들 잘 따랐습니다. 항상 수첩에 제자들 학업성적 기록해 놓으시면서 공부도 신경써주시고 시간나실 때 철봉, 수영 등도 가르쳐주셨어요. 참 많은 것을 선생님에게 배울 수 있었어요. 참스승이라는 말이 정말 잘어울리는 분이셨죠. 당시만해도 운동부 안에서 폭력이 만연하던 시기잖아요. 선생님은 그런 것을 많이 싫어하셨어요. 하지만 선배들은 수시로 우리를 때렸고 선생님까지 알게되면 시끄러워질까봐 감추기 바빴죠. 그러다가 밝혀진게된 동기가, 맞다 맞다 안되겠다싶어서 우리 학년들이 도망을 가버렸어요. 그때가 중학교 3학년때에요. 이상함을 느낀 선생님이 엉덩이를 까보라고해서 확인해보니 다들 온통 멍투성이였어요. 그때부터 고등학생들이 중학생들 못때리게 조치를 내리셔서 안맞게됐던 기억도 납니다.

Q.처음으로 맡게된 포지션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시에는 지금처럼 디테일한 포지션 구분이 없었어요. 가드 둘, 포워드 둘, 센터 하나 그런식이 많았죠. 그래도 성향을 보자면 2번이라고 보는게 맞을거에요.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거의 2번으로 플레이한 것 같아요. 그러다가 고려대학교에 가서 본격적으로 1번의 플레이를 하게된거죠. 패스능력이 되고 그러니까 선배들이 1번이 맞다고 밀어줬어요.

Q.가드 신장이 184cm면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히 경쟁력이 있었을 것 같아요.
키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178cm정도였는데 대학에 가서 좀 더 커서 184cm까지 됐어요. 신장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는데 그것보다는 웨이트가 가져온 변화가 많았어요.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슬림한 체형이었는데 이후 웨이트 트레이닝을 알게되면서 몸이 많이 바뀌게 됐어요. 1972년에 청소년대표를 했는데 그 즈음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에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태릉선수촌에 들어가게 되면서부터 몸이 제대로 강해지기 시작한 것 같아요. 칼로리높은 음식먹고 웨이트 트레이닝 제대로하고 그러니까 근육이 붙고 힘이 세졌어요. 몸싸움 하나 만큼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감도 생기더라고요. 그러다보니까 국제대회 등에서도 눈에 더 띄었죠.

 

 

Q.학창시절 함께 농구한 선수 중 “와, 저선수는 정말 잘한다”고 느낀 상대가 있을까요?
동기중에서는 그런 선수는 없었어요. 다들 고만고만할 때니까요. 선배들 중에서는 좀 있었죠. 2년 선배로 연세대학교에서 활약했던 최경덕씨와 김동원씨가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김동원씨는 지금 인도네시아에 있는 것으로 알고있어요. 당시 최경덕씨가 1번 김동원씨가 2번으로 아주 호흡이 좋았어요. 최경덕씨는 파워풀했고 김동원씨는 테크닉이 돋보였는데 후배 입장에서 많이 따라하고 싶더라고요. 대표팀에서도 최경덕씨를 따라서 웨이트 트레이닝장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어요. 당시는 웨이트 트레이닝의 중요성이 부각이 안되던 시기에요. 저같은 경우는 효과를 제대로 보고있기에 그 매력에 빠져있었지만 상당수 선배들같은 경우 일부러 멀리하는 경우까지 있었을 정도니까요. 신동파 그런 분들은 가벼운 무게도 잘 안들었어요. 슛 안들어간다고. 하지만 저나 최경덕씨는 고중량도 거침없이 들면서 힘을 키웠습니다. 뭐가 좋다 나쁘다는 아니에요. 각자 본인에게 맞는 몸관리가 있을거에요. 저는 기본적으로 몸을 강하게 만들어서 파워풀하게 코트를 휘젓는 플레이가 좋더라고요. 김동원씨 같은 경우는 나중에 기업은행에서 제가 1번 그 선배가 2번을 보면서 호흡을 맞췄습니다. 제 기준으로보면 그 두선배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Q.위원장님은 당시 어떤 스타일의 1번이었을까요? 요즘 시대 선수중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한 선수가 있을까요? 혹시 양동근 현대모비스 코치가 그래도 비슷했을까요?
양동근도 힘있게 플레이했던 선수이기는 하지만 동근이보다는 리바운드 등 골밑플레이를 훨씬 많이하던 스타일이죠. 내외곽을 가리지않고 여기저기 다 참견하고 다녔으니까요.(웃음) 올어라운드 플레이어라는 말도 많이 들었고요. 기업은행 다닐 때는 리바운드 1위, 어시스트 1위, 득점 3위 막 그랬어요. 얼추보면 허재랑 비슷했는데 그보다 어시스트는 더 많았을 것 같아요. 머리 스타일이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지금봐도 한 마리 야생마같지 않나요?(웃음)

Q.파워풀한 스타일은 국제경기에서 더욱 빛이 났을 것 같아요.
그런 면도 있었습니다. 웨이트에 신경을 안쓰는 국내 선수가 많았던 때인지라 피지컬 좋은 외국선수들과 부딪히면 힘겨워했어요. 저같은 경우 몸싸움에 자신이 있어서 외국선수랑 충돌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죠. 국제경기에서도 자신감이 떨어지지 않았고요. 실제로 필리핀에 프로농구가 생겼을 때도 저한테 프로포즈가 오고 그랬어요. 그때는 기업은행에 다닐 때니까 팀에서 ‘조금 더 있다 가라’고 해서 못가게 됐죠.

 

 

“은행원 인생…, 지점을 한번도 못나가보고 끝나버린거죠”

Q.기업은행 시절 간판스타로 활약하며 인기가 높았습니다. 어느 정도였나요?

그럼요. 지금 생각해보면 오빠부대의 시초가 아닐까 싶기도해요. 팬레터도 많이 받았고, 경기끝나고 버스타려고 하면 여학생들이 손에 봉봉 오렌지 쥬스 하나 손에 들고 ‘오빠 드세요’하고 손에 건네줬던 기억도 납니다. 당시 학생들 주머니 사정 생각하면 그것도 엄청 큰거죠. 제 경기 신문기사들을 스크랩해서 선물로 준 팬들도 계셨어요. 기업은행 연수원에서 신입 여직원들 400~500명 정도 모아놓고 교육하는데 그 자리 강단에 올라갔던 적도 있습니다. 당시 기업은행측에서 원하는 것을 물어보니까 ‘김동광 선수 얼굴 보고싶다’고 했었나봐요.(웃음)

Q.다소 선수 은퇴가 빨랐다는 얘기도 있어요.
그때는 선수 수명이 길지않던 시절이에요. 이미 우리 동기들은 거의 그만뒀던 시기였고 오히려 저는 대표선수도 겸하느라고 오래했어요. 그때는 운동선수라고 따로 돈을 받지는 않았고 기업은행 직원들하고 똑같이 월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운동을 오래하면 할수록 진급만 늦어져요. 현장에 나와서 일을 배워야 진급에 반영이 될 것 아니에요.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적당히 멈춰야됐죠.

Q.선수 은퇴 후 2년 9개월 동안 바레인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으셨어요. 낯선 곳에서 힘든 것은 없었을까요?
그렇죠.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거죠. 제가 1983년 1월 20일에 은퇴를 했어요. 앞서도 얘기했듯이 미래를 위해서 은행원으로서의 삶을 준비해야했죠. 그런데 바레인 측에서 국가대표 감독직 제의가 들어와서 27일에 현지로 넘어갔어요. 결국은 지점을 한번도 못나가보고 거기서 은행원 생활은 끝이 났죠. 농구인으로 살아갈 운명이었나봐요. 당시 바레인은 약팀이었어요. 국제대회에서 만나면 상대도 안됐죠. 그런데 바레인 선수들이 저를 좋게 봤어요. 본인들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저를 지목했어요. 초이스했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인지 조건도 좋았어요. 그때 아랍쪽에 간 국내지도자들이 1600불 정도 받았는데 저는 2500불에 나갔습니다.

Q.이때의 경험이 향후 농구인생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 같기도해요.
막 은퇴했을 때라서 힘이 넘쳤어요. 바레인 선수들도 대표팀 기준에서보면 걸음마 단계였고요. 서로 초보였으니까 같이 배워나갔던거죠. 가르치는 노하우는 부족했을지 몰라도 몸놀림이 남아있던 시절이어서 직접 시범보이면서 실기로 가르쳤던 기억이 납니다. 바레인 국가대표팀 운영은 소집, 훈련, 경기일정 다 합쳐도 1년에 3개월정도였어요. 나머지 시간은 각팀 경기보러다니고 선수들 기량체크하고 다른일들을 했지만 그래도 여유가 있었죠. 어차피 누가 가르쳐줄 사람도 없으니까 책보고 전술구상하고 독학으로 이것저것 하면서 공부도 많이 됐어요. 훗날 지도자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튼튼한 경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단테 존스요? 친화력은 정말 좋은 선수였습니다”

Q.삼성시절, 주희정 트레이드, 강혁, 이규섭 지명으로 강팀의 초석을 마련하셨어요.
양경민과 김승기를 나래(현 DB)에 주고 주희정과 강병수를 받았어요. 당시에는 우리가 조금 손해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결과적으로 양팀다 필요한 자원을 받아서 윈윈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삼성에는 가드가 필요했어요. 김승기는 잘하기는 했지만 전형적인 2번이에요. 당시 간판스타인 문경은을 살려주고 그럴 필요가 있었는데 그런 부분에서 애로가 있었죠. 더욱이 둘이 동기인데 사이도 별로 좋지 않았어요. 트레이드가 필요했어요. 이후 주희정, 강혁의 1,2번 라인에 백업으로 김희선까지 자리잡으면서 어느 팀에도 뒤지지 않는 앞선이 만들어진거죠.

Q.첫 시즌에 파워포워드로서 역할이 좋았던 이규섭이 슈터 스타일로 바뀐 것에 대해 아쉬움의 목소리도 컸어요.
이규섭이 센터 출신이잖아요. 그런데 당시는 외국인선수가 2명이 뛰던 시절이에요. 이규섭이 잘하기는 하지만 외국인선수를 막을 정도의 웨이트는 아니었습니다. 고심을 좀 했는데 슛도 좋고해서 3번으로 정착하는게 낫다고 판단되더라고요. 3번으로 뛰면서 좋은 슈팅력을 살리고 매치업 상대가 자신보다 작거나 힘이 약하면 미스매치를 이용해 골밑에서 활약하고 그랬던거죠.

Q.외인드래프트에서 전체 10순위로 뽑은 아티머스 맥클래리가 그야말로 대박을 쳤어요. 당초 어느 정도 기대하셨던 것 일까요?
당시 미국에 있던 스카우터가 추천을 해준 선수에요. 그래서 현지에서 플레이를 유심히 지켜봤는데 의구심이 많이 들더라고요. 추천이 들어온 만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어쨌거나 당시 대부분 팀은 1순위가 장신 센터에요. 근데 10순위에 걸려버리니까 원하는 장신 자원은 바닥이 나버리고 결국 단신으로 분류되던 맥클래리를 지명하게된거죠. 하지만 이게 웬걸, 국내에 들어와서 플레이하는 것을 보니 포스트에서의 존재감이 상당하더라고요. 현지에서는 몰라도 국내에서는 잘 통하겠구나 싶었죠. 거기에 다른 팀에서 계약을 포기한 무스타파 호프를 2라운드에서 지명했어요. 둘이 골밑을 잘 지켜줬고 결과적으로 통합우승했잖아요. 뽑기도 잘뽑았고 조합도 좋았던 것 같아요.

Q.문경은과 우지원의 트레이드 배경이 궁금합니다.
그게(웃음) 지금도 문경은하고 가끔 그때 얘기를 하기도해요. 사실 난 문경은을 보내고 싶지가 않았어요. 당시 언론에는 제가 문경은의 수비를 못마땅하게 여겨서 우지원하고 바꿨다고도 기사가 나갔었는데, 아니 그런 식으로 따지면 우지원은 얼마나 수비가 좋았나요? 문경은보다 좋았을지는 모르겠지만 트레이드를 할만큼의 격차는 아니었다는거죠. 문경은은 그냥 슈터가 아니에요. 타짜같은 선수지. 승부처에서 클러치슛도 잘넣는 이른바 대포죠. 그런 슈터를 어떤 감독이 싫어하겠어요. 존재자체로 든든한데…. 이전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하고 MVP에 대한 욕심이 있었나봐요. 아쉬움이 컸는지 저한테 불만을 표시하길래 “얌마! 그걸 내가 주냐? 기자들이 뽑는거지. 나는 거기서 아무 힘도 없어”라고 말했던 기억도 나요. 그뒤에 문경은이 트레이드 요청을 요구하더라고요. 다른 팀보다 우리팀에 필요한 전력이잖아요. “너는 우리팀에도 필요하다. 더불어 너는 삼성의 간판스타인데 여기 가만히만 있으면 은퇴 후에 감독도 할 수 있고 그런데 감정적으로 행동하지말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는데도 계속해서 조르는거에요. 심지어 하와이로 보너스 여행을 갔는데 거기서도 따라다니면서 보내달라는거에요. 그쯤되면 어쩌겠어요. ‘이미 마음이 떠났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억지로 붙잡고 있어봤자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 같더라고요. 문경은 혼자 그 난리를 친 것은 아닌 듯 싶고 누군가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Q.두번째 SBS시절 단테 존스 영입 배경이 궁금합니다.
아르헨티나 득점왕 출신 조 번이 있었는데 성실하기는 했지만 뭔가 우리팀하고는 잘 안맞았어요.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부상을 입어서 새로운 카드를 물색해야됐죠. 그러던중 단테 존스라는 굉장한 선수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ABA 득점왕을 하고있었고 프로필을 보니까 NBA 출신인데다 화려하더라고요. 그래서 ‘여기까지 올까’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일단 러브콜을 보냈지만 아니라다를까 거절당했어요. 안되겠다 싶었는데 그때 장신 외국인선수 주니어 버로가 존스와 친분이 있다고 자신이 나서더라고요. 그리고 버로와의 통화 이후에 존스를 데려올 수 있게된거죠.

Q.단테 존스 열풍이 정말 대단했어요.
말해 무엇해요. 기량은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연습경기를 가지는데 와우 점프가 엄청나더라고요. 당시 코치로 함께하던 이상범, 김상식에게 ‘쟤 뭐냐? 마약먹고 경기 뛰는 것 아니냐’라는 우스갯소리도 했던 기억도 납니다. 운동능력이나 테크닉이 국내에 올 수준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문제가 좀 있었어요. 공격력은 좋았는데 수비를 안해요. 자기가 35점 넣으면 뭐해요. 상대팀 찰스 민랜드한테 38점을 헌납해버리는데, 그래서 결국 4강에서 KCC에게 발목이 잡혔잖아요. 정규리그에서 연승행진도 하고 저는 무조건 결승은 갈줄 알았어요. 아무튼 미운 스타일은 아니에요. 성격이 능글능글해서 팬서비스는 물론이거니와 동료들에게도 잘했어요. 웃으면서 농담도 하고 소소한 선물같은 것도 나눠주고, 말 그대로 처세왕이었죠. 그 친구가 경기중에 교체되는 것을 싫어했어요. 어쩔 때는 교체하려고 하면 ‘싫다고 더 뛰겠다’고 신호를 보내요. 우리가 또 그런 꼴은 못보죠. 단호하게 교체해버리니까 혼자 구시렁구시렁대면서 천천히 걸어나오길래 선수들에게 “야, 저 녀석에게 아무도 말 걸지마”라고 지시해버렸어요. 보통 선수들같으면 경기내내 화가 나있던가 시무룩할텐데 존스는 달라요. 잠시 의기소침해있다가도 한 5분 정도 지나면 벤치에서 열심히 동료들을 응원해요. 그리고 또 나가라면 씩씩하게 웃으면서 코트로 뛰어가고요. 저도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게 만들었던 친구죠.

Q.삼성 감독으로 2번째 들어오셨을 때 60살이 넘은 나이 때문에 우려의 목소리도 컸는데, 그때 ‘나이가 뭐’하면서 명언을 남기셨어요.
허헛…, 지금도 같은 생각이지만 진짜로 나이가 뭐 어때서요. 치매걸린 것도 아니고 건강하고 사고력 좋으면 되는데, 단순히 나이 먹었다로 문제가 되는 것은 좀 아니지 않나요? 오히려 산전수전 겪어가면서 오랜시간 농구를 접해왔으니 젊은 감독들보다 더 노련하고 그런 부분도 많단 말이에요. NBA봐요. 나이먹은 노감독들도 얼마든지 잘하고 있잖아요. 여기에는 단장보다 감독이 나이가 많으면 껄끄러울 수도 있다는 부분도 있다고 보는데 무슨 상관이 있을까싶어요. 일단 직책이 있으면 나이를 떠나 거기에 맞게 대우하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한참 후배가 단장을 해도 저는 단장님하면서 깍듯하게 대합니다. 그게 맞는거죠. 요새 젊은 감독이 트랜드이기는 한데 때로는 지나치게 빨리 지휘봉을 잡는게 독이 되는 경우도 적지않아요. 다양한 감독 밑에서 코치수업을 하게되면 그분들의 장단점을 흡수해서 내공을 탄탄하게 쌓을 수 있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잖아요. 위기에 약하고 임기응변에도 문제가 생기죠. 더 클 수 있는 지도자가 너무 이른 실패로 꺾이는 경우는 안타깝더라고요.

Q.농구외적인 부분에서도 기본을 중시하는 스타일로 알고있어요.
프로라고 다 자유스러울 수는 없죠. 기본에는 엄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부러 엄하게 사람을 대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지켜야 될 사항들은 칼같습니다. 일례로 삼성에 2번째 갔을 때 아침 식사시간을 보니까 제각각 따로따로인거에요. 아니 단체 스포츠에서 식사시간마저 엉망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때 시간을 정해서 그 시간에 함께 식사를 하도록 지시하는 것부터 팀정비를 시작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요?”


Q.강성이시지만 필요할 때는 무척 냉정하셨습니다.

지도자잖아요. 경기하다보면 울컥하는 순간이 많지만 자제할줄을 알아야죠. 예를 들어 심판 판정이 이상하면 처음에는 강하게 항의를 해요. 그러다가 심판 표정이 변하게되면 ‘오케이’하고 돌아서야되요. 거기서 계속 그러면 결국 불이익은 우리팀이 받잖아요. 적당히 해야죠. 선수들 질책할 때도 화가났다고 감정적으로 이말저말 막 뱉어버리면 그 선수한테도 좋을게 하나도 없어요. 선수도 사람인데 인격적으로 모독당하고 그러면 경기력이 좋아질 수 있겠어요. 화는 났어도 내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를 정확하게 전달하는게 먼저죠. 화내는게 목적이 아니잖아요. 그 선수에게 잘못된 점을 찍어주는게 포인트지. 막 순간적으로 꼭지가 돌아서 자신도 주체를 못하게되고 그러는 것은 지도자로서 안되는 행동이죠. 물론 저도 사람인지라 늘 그렇게 이성적이었다고는 말못하겠어요. 다만 그러려고 나름 노력을 했던거죠.

Q.보수적일 것이다는 선입견과 달리 외국인선수들과도 편하게 지내시고 쿨할 때는 무척 쿨하다고 알고있어요.
우리와는 문화가 다르잖아요. 낯선 곳에 와서 이곳 문화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친구들에게 유교 스타일로 대하면 뭐하겠어요. 트러블만 많이 생기지. 저는 서로간 조절과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외국인선수들을 우리 식으로 막 조일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대접할 필요까지도 없는거죠. 한발씩 함께 양보하고 맞춰나가는게 팀플레이잖아요. 그래서 외국인선수가 새로오면 쉬는날 이태원에 가서 맥주도 한잔하면서 얘기도 많이 나누고 그랬어요. 대화를 많이하다보면 그간 이해를 못했던 것도 풀리게되고 그러는거죠. 단 사적으로는 편하게 지내도 경기나 훈련 때는 예외없이 엄격하려고 했어요.

Q.아드님이 농구를 했지만 선수로서 대성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로서 혹은 인생의 선배로서 길을 잘 제시한 것 같아요.
대학교때 십자인대가 한번 끊어졌고 이후 프로에 왔는데 십대인자가 두 번이나 더 끊어졌어요. 거기서 선수생활은 끝나게 됐지만 농구에 대한 열정은 큰 친구라 지도자의 길도 있다고 말을 해줬어요. 지금은 고등학교에서 코치로 있지만 거기서 만족하지않고 프로무대 감독까지 할 수 있다는 마인드로 열심히 했으면 좋겠어요. 선수인생과 지도자 인생은 또 다르니까요. 선수생활을 잘했다 못했다로 가르고 싶지는 않아요. 아들이라는 점을 떠나서도 농구를 많이 좋아하는 것은 인정하니까 앞으로 남은 인생은 본인이 잘 풀어나가야겠죠. 딱히 특별하게 제시한 것은 없어요. 코치로서 감독잘 보좌하고, 감독이 놓치는 것 있으면 잘 체크하는 등 기본적인 것들만 얘기해줬어요.

Q.위원장님을 보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게됩니다. 철학적인 질문같지만 나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이가 들수록 연륜이 쌓인다고 할까요.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쉬워집니다. 무조건 이기려고만하지않고 져줄 때는 적당히 져주는 것도 알게되고요. 하지만 주관은 뚜렷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관을 정확히 가지고가는 가운데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주변도 둘러보는 방법을 배워가는 것? 저도 70이 넘었지만 배울 것 투성이인지라 조금 어려운 질문같네요.(웃음)

Q.마지막으로 선수 김동광, 지도자 김동광을 기억하고 사랑해주신 팬분들에게 인사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여전히 기억하고 사랑해주시는 팬분들께도 항상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제가 이 나이까지 농구인으로 있을 수 있는 것도 팬분들의 관심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앞으로도 프로농구, 아마농구 모두 사랑해주세요. 팬분들의 사랑이 클수록 대한민국 농구는 더더욱 발전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희 농구인들도 많이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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