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철권(60‧181cm) 숭의여고 감독은 ’대한민국 농구사에서 가장 덜 알려진 슈터’로 불린다. 한팀의 에이스로, 국가대표로도 충분한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이른바 레전드 슈터들을 거론할 때 잘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약체 금융팀에서 선수 시절을 보낸 탓도 크다.
농구대잔치가 본격적으로 흥행하기 시작할 무렵에는 현대, 삼성이 리그 판도를 양분하기 시작했고 이후 기아자동차 왕조가 들어서면서 세대교체가 됐다. 한국은행, 산업은행, 기업은행 등 이른바 금융권팀들은 적지 않은 시간동안 꾸준하게 리그에서 활동해 왔지만 선수층 등에서 약세를 보이며 약체 이미지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성적이 나오지 않다 보니 그 안에서 빼어난 활약을 보여왔던 선수들도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는 평가다. 대표적 선수가 바로 최철권이다.
“후회는 하지 않지만 살짝 아쉽기는 합니다.”라는 당사자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만약 최철권이 당시 대세인 현대, 삼성에 입단했으면 현재 그의 입지는 많은 면에서 변화가 있었을 것이 확실하다. 볼을 많이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폭발적인 득점 생산이 가능한 스타일답게 이충희, 김현준 누구와도 쌍포가 가능했을 공산이 크다. 실제로 당시를 기억하는 농구대잔치 팬들은 여전히 최철권이 무명처럼 취급받는게 아쉽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다행히(?) 최철권은 자신만의 확실한 기록을 하나 가지고 있다. 1987년 전국체전에서 전북 대표로 출전해 한경기 최다 97득점을 넣으며 지금도 깨지지 않는 득점 기록을 만들어낸 것이다. 당시 상대 팀이던 부산 선발이 기록한 95득점보다 더 많은 득점으로, 마치 고대 괴수의 기록을 보는 듯 하다. 97득점은 소위 밀어준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득점이 아니다. 더욱이 당시 경기는 각 도의 자존심을 걸고 승부를 펼친 전국체전이었다. 최철권이 과소평가됐다는 평가가 과장이 아님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경기였다.
비록 엄청난 관심은 받지 못했지만 에이스 슈터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최철권의 인생스토리를 ‘농구人터뷰’가 함께 들어보았다.

“SK에서의 지도자 초창기 시절, 지금 생각해도 많이 아쉽습니다”
Q.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현재 숭의여중, 숭의여고 총감독을 맡고 있어요. 일단 주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니까요. 오전에는 수업 스케줄을 따르고 오후에는 아이들 훈련을 지도하죠. 2007년부터 인연을 맺어왔으니 상당히 오래됐네요. 그런데 참 재미있는게 제가 전북 군산 출신이거든요. 고향을 떠나온지 상당히 오래됐음에도 특유의 억양이나 말투가 잘 변하지 않더라고요. 북도는 남도랑 또 달라요. 흔히들 생각하는 ‘아따~, 거시기, 그래부러’ 등의 사투리는 대부분 남도 스타일이죠. 북도는 대체적으로 표준어에 가까우면서도 충청도 느낌도 묻어있고 그래요. 그래서 서울 분들과 얘기하면 지방 느낌이 나기는 하는데 어디 사투리인지 헛갈린다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하지만 우리끼리는 잘 알죠. 전북에서 올라온 분들하고 얘기를 나누다 보면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금세 ‘우리 고향 사람이구나’하는 것이 느껴지더라고요.
Q.숭의여중고와 인연을 맺기 전에도 지도자 생활을 하셨나요?
그렇죠. 지금 SK 전신 격인 진로농구단 초대 코치로 들어갔던 시절이 가장 먼저 기억나네요. 기업은행 군산지점에서 대리로 4년 정도 일하다가 새로이 창단되는 진로농구단과 인연이 닿아서 코치로 가게 됐던 거죠. (안)준호 형님이 감독이셨고 제가 코치로 보좌를 했고요. 아시다시피 이후 진로농구단이 SK에 인수되었고 그 과정에서도 함께 갔습니다. 선수층은 두텁지 않았지만 서장훈에 현주엽까지 있었던지라 신흥명문으로서의 기대도 컸지만 생각만큼 팀 성적이 나오지 않았고 결국 2년 만에 그만두게 됐죠. 이후에는 모교이자 임정명 선배가 감독으로 있던 고려대 코치로 갔어요. 거기서 3년 정도 함께 했습니다.
Q.프로에서도 그렇고, 대학무대도 그렇고, 지도자 인생의 초반부가 살짝 안풀렸다는 느낌이 드네요.
그런 듯 싶습니다. 어느 스포츠든 마찬가지겠지만 농구 역시도 결과 우선주의 아니겠어요. 일단 성적이 나와야 그 안에서 디테일한 장점들까지 부각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다 묻혀버린다고 볼 수 있죠. 누가 어떻게 만들어놓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결과물에 따라 그런 과정들은 미화되기도 평가절하되기도 하니까요. SK 시절만 해도 그래요. SK 첫 우승하면 다들 최인선 감독을 떠올리잖아요. 잘하셨죠. 기아 시절부터 팀 운영에 능했고 SK에서도 노하우를 살려 단시간 내에 우승을 만들어냈잖아요. 하지만 당시 준호형하고 저는 살짝 속상하기도 했어요. 진로농구단 시절부터 땅을 일구고 거름 주고 하던 작업은 우리가 다했거든요. 최인선 감독은 거기에 나무를 잘 심어 우승이라는 결과물을 보여준 것이고요.
Q.아, 조금만 더했으면 우리가 우승시킬 수 있었을텐데 그런 생각도 들었을 것 같아요.
그건 아니에요. 말을 하다 보니까 우리가 다 만들어놓고 최인선 감독이 숟가락만 들었다는 식으로 표현된 것 같아요. 최인선 감독 잘하셨습니다. 팀이 우승하려면 선수와 지도자의 궁합 거기에 여러 가지 흐름과 운대도 맞아야 되요. 최인선 감독은 이른바 정리에 능했어요. 현주엽이라는 거물을 젊은 슈터 조상현하고 트레이드하고, 당시 신입 외국인선수 중 최고로 꼽히던 로렌조 홀을 라이벌팀의 재키 존스와 과감하게 맞트레이드했잖아요. 그런 결정을 팀에서도 밀어줬고요. 이래저래 살림꾼 역할을 정말 잘했던거죠. 거기에 신인드래프트에서 발 빠르고 활동량 좋던 루키 가드 황성인도 뽑을 수 있었고요. 뭔가 풀리려면 그렇게 여러 박자가 척척 맞아떨어집니다. SK와 최인선 감독은 좋은 운명공동체였던 것이죠. 준호 형만 봐도 그래요. SK에서 그렇게 될 때만 해도 되게 능력 없는 사람 같아 보였잖아요. 하지만 이후 삼성에 가서는 확 달라졌어요. 챔피언결정전에서 서장훈을 벤치에 앉혀놓다시피하고도 팀을 우승시켰고 이후에도 꾸준히 팀전력을 유지시키며 ‘삼성=가드왕국’이라는 이미지까지 만들어냈잖아요. SK와는 궁합이 안 맞았지만 삼성과는 달랐거든요. 함부로 지도자의 능력을 평가해서는 안되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고려대 박한 감독님 덕분에 농구선수로서 성장 할 수 있었습니다”
Q.정말 대단한 선수였는데 활약만큼 안 알려졌어요.
아쿠, 과찬이십니다. 그래도 드문드문 ‘슛 하나는 쓸만했었지’하고 떠올려 주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냥 제가 지금도 안 잊혀질 만큼 엄청난 선수까지는 아니었기에 딱 그만큼만 기억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활약하던 시절에 대단한 선수들이 오죽 많았습니까. 다른 포지션 볼 것 없이 슈터만 따져도 이충희, 김현준 선배들이 있었고요. 치열했던 전국시대에서 완전히 잊혀지지 않고 이름 석자 정도 흘러가듯 남겼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Q.형 최부영 감독이 맹장으로 유명했잖아요. 지도자 최철권은 어떤 스타일일까요?
감독으로서의 길은 숭의여고에서 처음이었어요. 이전 진로, SK, 고려대 시절에는 쭉 코치를 해왔죠. 고려대를 나와 잠시 야인생활을 할 때 쯤 숭의여고 체육 교사 자리가 비어서 기회를 얻었어요. 추천을 통해 숭의여고에 체육교사 겸 감독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죠. 사실 핏줄은 어디 안가죠. 제가 형이랑 성향이 완전히 비슷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닮은 부분이 적지않게 있어요. 승부 근성, 다혈질 이런 부분에서 닮았다는 분들도 꽤 계시더라고요. 하지만 지도자 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내 성향대로만 가면 안된다는 것을 진작에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예전처럼 스파르타식으로만 해서는 통하지 않아요. 훈련성과도 높지 않고 괜스레 아이들과 거리만 멀어지죠. 변화하는 흐름에 맞춰 함께 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제가 지금 맡고 있는 숭의여고는 여학생들이기도 하고요. 지도자 최철권이 어떤 스타일이냐고 물으신다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소통에 적극적인 감독이다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Q.따님도 농구를 한다고 들었어요.
아, 근영이요? 상당히 시간이 지났는데 잊지 않고 물어봐주시네요.(웃음) 현재는 신길초등학교 코치로 있어요. 선수 생활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이즈(165cm)적인 부분에서도 불리함이 있었고 그걸 뛰어넘을 만큼 압도적으로 기량이 빼어나지도 않았고요. 근영이가 중학교 1학년 때 농구를 시작했으니까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는 조금 늦었어요. 열심히는 했지만, 구력이라고 하죠. 그 격차를 좁히는데 어려움을 겪더라고요. 학창시절에는 하루하루가 기량이 늘어가는 시기잖아요. 그때의 몇 년 차이는 성인들하고 비할게 안되요. 그러다 보니 국내에서는 격차가 줄어들 것 같지가 않아 변화를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선택한 곳이 일본이죠. 새로운 환경에서 업그레이드를 했으면 하는 마음에 일본 쇼와고등학교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갔으니 나름 힘들었을거에요. 하지만 이후 일본에서 일본어 자격증 1급을 따고 극동대에서 일본어까지 전공하는 등 당시의 경험이 이제는 스펙이 되었죠. 농구로 성공 못해도 뭔가 다른 길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생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잘한 선택 같습니다. 운동하던 친구들은 너무 한쪽 외길만 파다 보니 잘 안 풀렸을 때 다른 방향이 막혀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일반 학생들보다도 더 길이 좁아져요. 그런 면에서 당시 일본행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었죠.
Q.농구는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셨나요?
군산중학교 2학년 때 늦게 시작하게 됐어요. 신체조건이 좋은 것도 아니고 눈에 띄게 운동신경이 돋보였던 케이스도 아닌지라 일반 학생들처럼 평범하게 학교를 다녔습니다. (최)부영이형이 농구를 하고 있었는데 ‘나도 한번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그래서 형한테 말하게 됐죠. 형은 처음에 반대했어요. 너무 늦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려서 농구공을 잡게 됐습니다.
Q.처음부터 슈터 역할을 하셨을까요?
아니죠. 늦게 농구를 시작하다보니까 고등학교 때까지도 특별한 역할이나 특기가 없었어요. 기본기도 부족하고 이것저것 하기는 했는데 눈에 띄는 부분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고려대에 들어간 것이 농구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볼 수 있죠. 사실상 고려대에서 본격적으로 농구에 눈을 뜨고 슛에 강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사실 당시 제 실력으로 고려대에 입학한 것도 신기해요. 박한 감독님께서 당장의 기량보다 가능성을 높게 봐주신 듯 싶어요. 그런 점에서 농구 인생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죠. 이후에도 박감독님과의 호흡은 정말 최고였습니다. 감독님께서 선호하는 유형과 저의 플레이 스타일이 딱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Q.당시에도 고려대 멤버들은 좋았죠?
연세대와 더불어서 고려대는 늘 꾸준하잖아요. 더 좋냐 덜 좋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죠.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이충희, 임정명 등 쟁쟁한 선배들이 졸업했어요. 기라성같은 전설들과 함께 뛰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대신 이민현, 김진, 정태균 등이 있었죠. 고려대가 대대로 강력한 슈터들과 함께해왔잖아요. 박감독님도 슈터를 좋아했고요. 그런 점에서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뽑아주신 것은 물론 꾸준히 기회도 주시면서 저를 만들어주셨으니까요.
Q.어린시절 롤모델이 누구였을까요?
대부분은 롤모델을 많이 얘기하더라고요. 자신과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하거나 아니면 농구를 좋아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선배 등, 하지만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동기들 쫓아가기도 바빴던지라 롤모델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당장 하루하루가 급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또 박감독님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제 농구 인생 전체의 롤모델같은 존재라고 할까요. 기본기 부족했던 기대주를 전체적으로 디자인해서 슈터로 만들어주셨으니까요. 당장은 눈에 띄지 않아도 미래에 싹을 틔울 수 있는 그런 선수를 알아볼 수 있는 눈과 결단력 그리고 이후에 자신감 있게 성장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던 방식까지…, 저도 감독님같은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일부에서는 ‘전략이 없다’, ‘투박하다’ 등 혹평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전혀 아닙니다. 무뚝뚝한 상남자 이미지가 있어서 그렇지 충분히 섬세하고 전략적인 분이세요. 이끌어가는 방식에서 선이 굵을 뿐이죠.
Q.학창시절 라이벌이 궁금합니다.
제가 농구를 잘해서 고려대를 들어간 것도 아니고, 운 좋게 대학 무대에서 뛰며 뒤늦게 성장했던지라 딱히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선수는 없었을 것 같아요. 선배로는 김현준, 이민현 후배로는 유재학 등이 있었지만 상대 선수들 역시 저를 라이벌로 딱히 의식했을까 싶고요. 저같이 늦게 성장한 선수는 시간이 라이벌이에요. 하루하루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노력할 뿐이었죠. 늘 다른 선수들의 등을 보면서 따라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어느 순간 나란히 가고 있는 저를 발견한 순간 정말 기뻤답니다. 너무 상투적인 인터뷰인가요? 하지만 사실이에요.
“현대, 삼성 거르고 기업은행 선택한 이유요?”
Q.남들은 못가서 안달인 현대‧삼성을 제쳐두고 기업은행을 선택했어요.
현대, 삼성에서도 영입제의가 있었는데 부영이 형의 조언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어요. 당시 부영이 형이 삼성에 있었는데 저에게 ‘삼성, 현대 등은 장래가 불투명하니까 차라리 금융권팀으로 가는 것이 더 안정적이다’고 말한게 결정적이었죠. 농구선수로서의 성공만 기대하기에는 위험성이 있으니 금융권팀에 들어가서 은퇴 후의 삶까지 고려하라는 취지였어요. 실제로 김상식 등 그런 이유로 금융권 팀을 선택하는 케이스도 꽤 많았습니다.
Q.당시 선택에 대해 후회? 그런 마음은 없나요? 아무래도 이름 값에서 차이가 벌어진 이유로 작용한 부분도 있잖아요.
당시 현대, 삼성이 창단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의욕이 넘쳤어요. 특급 선수는 당연하고 어지간히 잘한다는 선수까지 싹쓸이했죠. 전력이 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죠. 다른 팀과 격이 다른 선수층을 구성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이전부터 꾸준히 전력을 유지해오던 한국은행, 기업은행, 산업은행 등 금융권팀들이 휘청거리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됐죠. 농구는 팀 스포츠잖아요. 몇몇 선수가 잘하는 것보다는 전체가 잘하는 팀이 강한 것은 당연한거죠. 나름 열심히는 했지만 전력에서 차이가 나다 보니 이기는 경기가 적었습니다. 당시에는 정신없이 뛰기만 했는데 나중에 은퇴하고 생각해보니 질문하신 사항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되더라고요. ‘현대, 삼성에서 뛰었다면 저를 더 알아주는 이들이 많았을 수도 있겠구나’하는.

“한경기 97득점, 정말 신들린 날이었죠”
Q.1987년 전국체전에서 대형사고를 쳤어요. 전북대표로 출전해 한 경기 최대 97득점을 넣었어요. 당시 부산 선발이 기록한 95득점보다 더 많은 득점입니다.
당시 한창 때라 몸 상태가 아주 좋았어요. 기량적인 부분을 떠나 체력이 탄탄했던지라 활동량도 많이 가져가고 또 그렇게 많이 뛰어도 쉽게 지치지 않았습니다. 이때를 전후로 전성기에 접어들었던 것 같아요. 88서울올림픽 대표로도 뛰었으니까요. 당시 광주에서 전국체전이 열렸는데 전북 대표로 뛰어달라고 연락이 와서 수락하고 경기에 나서게 됐어요. 고향 팀이었으니까 의욕도 있었고요. 전주고, 군산고 출신 등이 대상이었죠. 그때 1회전에서 부산 선발하고 붙게 되었고 인생 경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Q.지금도 기억이 생생하실까요?
한달 전 쯤에 농구 천재로 명성을 떨치던 허재가 대학 연맹전에서 단국대를 상대로 75득점을 넣으며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어요. 정말 엄청난 득점이었죠. 저도 당시 생각하기를 ‘어떻게 저렇게 많이 넣었지?’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사실 그 정도 득점은 밀어준다고 해서 넣을 수 있는게 아니거든요. 적정선이라는게 있잖아요. 능력을 떠나서 체력적으로도 따라가기 힘드니까요. 때문에 저도 부산 선발과의 경기 이전까지는 제가 97득점을 넣을 것으로는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어요. 어우야, 상상이 안가는 거죠. 그날 유난히 컨디션이 좋더라고요. 전반전에만 40득점 이상을 기록했어요. 그러다보니 살짝 욕심이 생겼습니다. 후반에도 비슷하게만 하면 허재 기록도 깰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가드보던 형님한테 귓속말로 ‘오늘 몸 상태가 정말 좋은데 볼 좀 밀어주세요’라고 조용히 얘기했어요. 다른 동료 3명은 몰랐을거에요.(웃음)
Q.3점슛만 18개였는데 나머지는 어떤 방식으로 득점을 올렸을까요?
하도 그날 제가 슛이 잘들어가니까 부산 선발에서 대놓고 저에게 더블팀을 붙였어요. 하지만 워낙 컨디션이 좋은 날이어서 신경이 안쓰이더라고요. 그냥 자신있게 던지면 다 들어갈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랬어요. 수비가 앞에 있건 뒤에 있건 툭툭 치던 말던 신경 안쓰고 저는 득점에만 집중했죠. 슈터들은 그런 것이 있어요. 손끝이 정말 뜨거운 날은 뭔짓을 해도 안 통해요. 그냥 림이 수박만하게 보여요. 대부분 득점은 순수한 슈팅으로 올렸어요. 3점슛, 미들슛 등 딱히 거리 안 따지고 눈앞에 림이 보이면 던지고 또 던졌어요. 그러다가 바스켓 카운트도 올리고요. 그날만큼은 슈팅의 신이 빙의한 느낌이었어요.(웃음)
Q.그때 상승세를 기업은행에서도 이어갔으면 좋았을텐데요.
그러게요.(웃음)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농구는 팀 스포츠잖아요. 현대, 삼성과 금융권 팀의 격차가 워낙 심했어요. 제가 고득점을 올린다고 팀이 이길 수 있는게 아니더라고요. 분명 슛은 많이 넣었는데 이기지를 못하니까 허탈감에 고개가 숙여지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금융권팀은 우리들끼리 서로 경쟁했던 거죠. 마치 리그가 둘로 나뉘어진 느낌까지 받았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슛감도 줄어들고 기복도 심해지더라고요. 슈터는 내가 슛을 성공시킨 만큼 팀 승리 확률이 높아질 때 신바람이 나요. 기업은행에서는 그런 부분이 아쉬웠죠.
Q.최부영 형님이 살짝 원망스럽지는 않았나요?
하하핫…, 살짝 그런 적은 있었습니다. 현대, 삼성으로 가서 쟁쟁한 선수들과 함께 뛰었으면 제 커리어 자체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형님이라고 알고 그랬겠습니까. 당시에는 농구선수들의 은퇴 후 삶이 불투명했어요. 형님도 그런 것을 많이 실감하셨겠죠. 그러다보니 동생의 은퇴 후 삶까지 고려할 수밖에 없었겠구나 싶더라고요. 당시 농구선수 출신들이 은퇴 후 은행에 가서 지점장까지 올라가는 케이스도 적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하니까요. 더불어 어린 시절이라 형님의 영향력도 적지는 않았고요. 형님이 이렇게 해라 하면 거부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사실 제가 은행에 입사 했을 때는 IMF영향으로 상황이 어려워지기도 했어요. 있는 직원들도 감축하는 분위기에서 그만둔 선배들도 생겨났고 예전처럼 장밋빛 미래는 없어졌다고 보는게 맞을 겁니다. 이래저래 타이밍이 안 좋았습니다.
Q.슈터로서 최철권은 어떤 스타일이었을까요? 빈 공간을 잘 찾아다녔다. 빨랐다 그런 것들 있잖아요.
저는 움직임을 많이 가져가는 스타일이었어요. 요새 말로 활동량이 높았죠. 정말 한시도 쉬지않고 미친 듯이 뛰어다녔어요. 오프 더 볼 무브에 특화된 슈터였습니다. 슈터는 단순히 슛만 좋아서는 안되요. 가만히 서서 기다리다 보면 수비에 막혀서 찬스가 잘 안오거든요. 한 번의 찬스를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수비수를 속이면서 머리싸움을 해야 하고…, 정말 정신없이 굴어야 수비수를 겨우 따돌리고 한번의 찬스를 가져가는게 경기중 슈터죠. 슛을 많이 던져야 슛감도 잡아가고 득점도 높아질 것 아니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공을 던지는게 문제가 아닌 발이 멈추지를 않아야 합니다. 거기에 제가 선천적으로 점프가 좋은 편이에요. 그나마 자신있는 부분이죠. 그러다 보니 정점에서 쏘기도 했지만 올라가면서 바로 슛을 시도할 때도 많았어요. 다양한 방법으로 수비수의 타이밍을 뺏는게 가능했죠. 신장이 작으면서도 경쟁력을 가져갈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Q.실력에 비해 사람들이 몰라줘서 살짝 억울하지는 않으세요?
그런 생각이 아예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 잊혀졌어요. 제가 더 잘하지 못한 이유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선수 시절에 한가닥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저만 그렇다고 생각하면 오만인거죠. 그래도 간간이 슈터로 기억해주시는 분들을 만나면 무척 반갑더라고요.
Q.최근 후배들 중에서 눈여겨보는 슈터가 있으실까요?
이런 얘기하면 건방지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슈터들만 보면 확실히 예전 선수들이 더 잘했던 것 같기는 해요. 예전에 이충희, 김현준 선배 등 주전급 슈터들을 보면 오픈찬스에서는 성공확률이 매우 높았거든요. 동료 슈터가 슛을 쏘면 리바운드 들어갈 생각을 안하고 바로 백코트할 정도였으니까요. 서로가 믿음이 강했죠. 하지만 요즘은 그 정도로 안정감을 보이는 슈터는 눈에 띄게 적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려운 슛도 중요하지만 찬스다 싶으면 여지없이 꽂아주는게 훨씬 더 중요하거든요. 물론 다양한 스킬 같은 것은 요즘 선수들이 더 낫죠. 최근 전성현이 슈터로서 뜨고 있잖아요. 저희같은 슈터 선배들은 당연히 눈여겨 볼 수밖에 없는 선수죠. 슈터로서 타이밍, 폼 등은 나무랄데 없이 좋은 것 같아요. 오픈 찬스에서 딱 잡아서 쏘는 것은 정말 빼어난데 원드리블, 투드리블 슛이 조금 아쉽더라고요. 슈터라면 수비수가 붙었을 때 드리블을 한 두번 쳐서 제친 후 쏘는 기술도 필요하거든요. 그런 정도만 보완한다면 한단계 더 업그레이드 될 것 같아요.
Q.마지막으로 여전히 농구인 최철권을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늦게 농구를 시작해 고려대를 거쳐 기업은행 선수로, 국가대표로 열심히 뛰어왔습니다.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슈터로서 족적을 남긴 것에 대해 다행으로 생각하고 당시 활약상을 기억해주시는 팬분들께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뿐입니다. 저의 남은 농구 인생은 새싹들을 길러내는데 올인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미래의 자원들을 키워내며 한국농구발전에 기여하겠습니다. 한국농구 많이 사랑해주시고 팬분들의 가정에도 다들 행복한 일 많으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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