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고 싶었던 농구인 집안의 장남, 여준형
농구선수 출신 아버지(여경익 씨)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농구를 접했던 여준형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동생 여준석과 농구 클럽을 찾았다. 또래에 비해 키가 큰 편이라 쉽게 골을 넣고 두각을 나타내며 자연스레 농구선수의 꿈을 키웠다. 이후 아버지를 설득해 6학년 중순부터 농구를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배재중학교로 진학했다.
“처음에는 팀에 형들이 워낙 많아서 경기에 못 뛸 줄 알았지만 운좋게도 여러 사건들이 겹쳐 1학년인 제가 경기에 나서게 됐죠. 경기에 나서는 것만으로도 좋았지만 팀 성적은 바닥이었어요. 이겨본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상대에 매번 깨졌죠(웃음)”.
팀은 최약체였지만 여준형은 경기 감각을 쌓으며 발전을 거듭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될 무렵, 키가 195cm까지 훌쩍 자라 자신감도 활활 타올랐다. 여준형의 잠재력을 눈여겨본 당시 삼일상고 강혁 코치는 전학을 권유했고, 명문 팀의 러브콜에 전학을 결심했다.
“저학년 때 경기를 많이 뛰고 경험도 많이 쌓았지만 승리에 목말라 있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는 키도 훌쩍 자라서 해볼 만하겠다 싶었는데 어느 순간 제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마침 삼일상고에서 러브콜을 보내 주셔서 큰 고민 끝에 전학을 결정했죠”.

여준형은 삼일중학교로 전학하면서 1년간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다. 부상 시기가 겹쳐 재활에 힘 쏟을 수 있었고, 고등학교 진학 후의 대회 출전도 문제없었다. 여준형은 강팀에서의 분위기를 체감하며 기대를 한껏 부풀렸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 당시 삼일상고가 엄청 강했어요. 최하위권 팀에서 전국 최강 팀으로 가니까 감회가 새로웠죠. 선수층이 워낙 두꺼워서 경기는 많이 못 뛰었지만 승부욕도 생기고 동기부여도 상당했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하)윤기형이나 (이)현중이 덕분에 우승을 했거든요. 정말 기뻤지만 찜찜한 기분도 있었던 것 같아요. 팀의 우승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존심도 상했던 기억이 있어요”.
하윤기(현 KT)와 이현중(데이비슨대) 등의 맹활약으로 여준형의 입지는 점차 줄어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 정강이 피로골절 부상까지 당하며 슬럼프가 찾아왔다. 이에 농구 선배이자 아버지 여경익 씨는 반전을 모색하고자 여준형에게 용산고로 전학을 권유했다.
당시 용산고는 삼일상고에 비해 객관적 전력에서 뒤졌지만 박인웅(현 중앙대)을 포함하여 뛰어난 선수들이 다수 포진돼있었다. 용산고는 장기적인 플랜을 기반으로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팀이었기에 여준형의 마음을 흔들기 충분했다. 여준형은 새로운 동기부여를 얻기 위해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택했다.

“용산고로 전학 가고 얼마 되지 않아 이세범 선생님이 오셨어요. (이세범) 선생님은 저를 엄청 믿어주셨고 정말 많은 부분을 가르쳐 주셨죠. 돌이켜 보면 선생님과의 만남이 고려대로 진학할 수 있었던 이유이자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던 것 같아요. 스승님께 믿음을 받는다는 거 자체가 얼마나 감사하고 값진 일인지 깨달았어요”.
이세범 코치는 팀에 새로운 에너지를 주입했다. 학년에 관계없이 선수 개인의 기량만으로 스타팅 라인업을 꾸렸고, 여준형과 박인웅 등이 2학년이었음에도 경기에 나섰다. 자연스레 선수 간의 동기부여는 더 강해졌고, 팀의 끈끈함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여준형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대회 16강 전주고와 맞대결을 펼쳤다. 당시 전주고의 멤버가 워낙 화려했기에 대다수가 용산고의 열세를 점쳤다. 이때 이세범 코치가 선수들을 불러 모아 자신 없냐고 물었다. 여준형은 자신 있다고 했지만 불안함을 감출 순 없었다. 이두원(현 고려대)이나 신동혁(현 연세대) 등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용산고는 1, 2학년 만으로 경기에 나섰다. 당시 컨디션이 가장 좋은 선수들로 구성을 하다 보니 저학년들로만 엔트리를 꾸리게 되었다. 용산고는 결국 반전을 거듭한 끝에 대어 전주고를 잡는 데 성공했다. 여준형, 박인웅, 김태완(현 고려대), 유기상(현 연세대) 등 저학년들의 반란이었다. 여준형의 인생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속 시원한 승리였다.
기분 좋게 2학년을 마친 여준형이었지만 3학년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여준석 등의 맹활약에 팀 내 역할도 줄어들었고, 연령별 대표팀 선발에서도 고배를 마셨다. 동생이 대표팀에 간 동안 남은 멤버들끼리 잘해보자고 뭉쳤지만 이마저도 실패했다. 대회 16강에서 친정팀 삼일상고를 만나 고개를 숙였다.
“삼일상고에 지고 하루 종일 울었어요. 한동안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그때는 어떻게든 졸업 전에 삼일상고를 잡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왕중왕전 하루 전날 무릎이 이상했거든요. 그래도 마지막 대회였으니까 참고 뛰었어요. 그러다 4강에서 삼일상고를 만났죠. 전반 때까지 10점 차 이상으로 이기고 있어서 쉬어도 됐는데 괜히 욕심부리다가 십자인대가 끊어졌어요. 아쉬운 고등학생 마무리였죠(웃음)”.

“너무 감사하게도 고려대에 진학할 수 있었죠. 하지만 저는 경기에 자주 나서지 못하는 선수였어요. 1학년 때는 거의 못 뛰었고, 2학년 때도 별반 다를 건 없었죠. 2학년 때는 무릎 연골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고, 이후에도 코로나로 인해 대회도 줄어들어서 힘들었던 것 같아요”.
대학교에 입학한 뒤 만족스러운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올해를 앞두고 주장을 맡으며 절치부심했다. 근 몇 년간 연세대에 고배를 마셨던 고려대는 여준석, 박정환 등의 가세와 문정현, 박무빈 등의 맹활약으로 리그 1위에 올랐다. 독보적인 경기력으로 절대 1강 체제를 굳히고 있다.
그러나 여준형의 활약에는 아쉬움이 따랐다. 프리시즌 때부터 남다른 마음가짐으로 훈련에 임했던 그에게 주희정 감독은 기대감을 나타내기도 했으나 시즌을 거듭할수록 여준형의 경기력은 떨어졌다. 그의 부진에 출전 시간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주장을 맡으면서 정말 잘해보고 싶었는데 시즌 중반부터 슬럼프가 왔던 것 같아요. 아직 보여드린 것이 없기에 저에 대한 평가도 당연히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당연히 아쉬움은 있지만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기보다는 남은 시간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언제든 팀에서 필요로 하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이렇게 마무리하기에는 대학 4년이 너무 아쉽죠”.
그는 이어 “동생은 2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한국 농구 인재라고 생각해요. 동생과는 다른 대우에 많은 분들이 자존심이 상하지 않냐고 하시지만 저는 그렇게 느끼지 않거든요. 아직 저희는 젊고 농구 인생은 결정 난 게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저도 빛을 볼 날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동생은 한국을 대표하는 농구 스타, 저는 언제든 팀에서 필요로 하고 오래 살아남는 선수. 멋지지 않나요?(웃음)”라고 말했다.
고려대 주장 여준형은 후회 없는 대학 졸업을 위해 MBC배 우승을 목표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쓴맛이 가득했던 여준형이 프로행을 앞둔 농구 인생에서 달콤함을 맛볼 수 있을지 주목해보자.
# 사진_ 점프볼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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