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대학교에 입학했을 당시부터 조우현은 ‘한국농구의 미래’, ‘최강의 76년생’ 등으로 불렸다. 부산 동아고 시절부터 대형 포워드로 이름을 날렸다. 중앙대 신입생이던 1995년에는 아시아청소년선수권 대회에 참가해 MVP, 베스트5, 3점슛상을 휩쓸며 11년만의 우승까지 이끌어냈다. ‘허재 이후 최고의 득점머신’이라는 말부터 ‘74서장훈, 75현주엽, 76조우현’이라는 평가까지 따라붙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워낙 기대치가 높아서 아쉬움이 남았을 뿐 프로(전체 2순위 지명)에서도 조우현은 충분히 제몫을 해냈다. 신인왕 타이틀은 3순위 출신 김성철에게 돌아갔지만 첫 시즌 대구 동양(현 고양 오리온)에서 14.4점 2리바운드 2.8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차세대 에이스로 기대를 모았다. 슈터이면서도 수준급 패스 센스와 볼 컨트롤 능력을 갖췄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창원 LG로 트레이드되어서는 ‘조조이(조성원+조우현+이버츠) 트리오’의 한축으로 활약하며 창원발 공격농구를 이끌었다.
마지막 팀이었던 전주 KCC에서의 2시즌은 조우현의 재평가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그의 농구 인생에서 의미가 깊다. 2시즌간 평균 득점이 2점에 불과할 정도로 성적 면에서는 초라했지만, 성적 외적인 면에서 팀에 끼치는 영향력이 컸다. 새로운 팀임에도 벤치에서 솔선수범하는 태도로 젊은 선수들이 많았던 팀의 분위기를 밝게 이끌어주었고, 2008-2009시즌 우승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단순히 성적이 전부가 아닌 베테랑의 품격을 보여줬다는 극찬을 받았다.
Q.어떻게 지내십니까?
농구 레슨장을 하고 있어요. 체육관을 얻어서 하는 게 아니라 야외에서 하고 있습니다. 햇빛 받고 좋은 공기 마시면서 운동을 하자는 취지로 시작한 것인데 코로나19가 터지니 오히려 장점이 되는 부분도 있네요.
Q.은퇴 후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다고 들었어요.
사실은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제물포고 A코치 제의가 들어와서 고민 끝에 결정하게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유학은 양날의 검 성격도 강해요. 정말 알차게 잘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여주기식으로 흘러가는 경우도 있어 저 개인적으로는 ‘꼭 필요한가’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국내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필수코스라는 얘기도 있지만 현장을 빨리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제물포고에서 6개월 정도 하다가 천안 성성중, 낙생고, 성남중 등을 거쳤습니다.
Q.A코치는 어떤 것인가요?
아, 중고등학교에서는 감독보다는 코치라는 호칭을 많이 써요. 감독역할을 하는 것은 맞는데 호칭만 그리 불리는 것이죠. 농구부가 있는 중고등학교 같은 경우 체육선생님이 부장을 하는경우가 많아요. 대부분 농구인들이죠. A코치한테 감독이라고 하면 부장님이라고 불리시는 분들이 소외감을 느껴서일까요. 보통은 그분들을 감독이라고 부르고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들은 A코치로 칭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에요.
Q.선수 시절 때 봤던 이미지로 보면 자상한 지도자 스타일이실 것 같아요.
하하핫…. 그런가요? 오히려 선수 시절 때는 무뚝뚝하고 어려워 보였는데 실제로 겪어보니까 다르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외모 때문에 그런지 운동하던 시절의 이미지를 강하게 보시는 분들이 많았거든요. 접근하기 힘든 페이스 때문에 선입견이 있어서 그랬는지(웃음) 지도자가 된 이후에는 ‘의외다’라는 말을 학부모님들께 종종 듣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처음에 저를 너무 어려워하는 경우를 많이 봐서 눈높이를 맞춰가며 편하게 소통하려고 노력을 했어요. 저를 아시는 분들은 제가 여성 성향도 있고 부드러운 스타일이라는 것을 잘 아세요. 딸 둘 가진 아빠로서 살다 보니 더 그런 것 같기도 해요. 개인적으로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Q.모바일 메신저 프로필을 보니 슛을 많이 던지는 것보다 좋은 자세로 정확하게 던지시는 것을 강조하시는 듯 보여요.
아무래도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까 더 신경 쓰게 되죠. 특히 어린 친구들을 지도할 때는 스텝, 자세, 몸의 밸런스 등 기본을 매우 강조하게 됩니다. 처음에 어떻게 습관을 들이고 배우느냐에 따라 향후 발전 가능성도 달라질 수 있거든요. 무슨 종목이든지 깊이라는 게 있잖아요. 기본기가 탄탄하게 받쳐줘야 이후 개인기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화려한 것만 욕심내는 친구들도 있는데, 그들이 따라 하고 싶은 스타플레이어들의 화려한 플레이도 사실은 탄탄한 기본기가 깔려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Q.이름값도 있으신데 프로팀 코치나 방송사 해설위원 제의 같은 것은 없으셨나요?
일단은 제가 그쪽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요. 그쪽 입장도 있으니까 제의를 얼마나 받았다 그런 것은 말씀드리지 않을게요. 다만 개인적으로 저는 그쪽 길은 아닌 것 같다고 판단했어요. 프로에서 제법 알려진 선수로 활약을 했다고 프로팀 지도자나 방송사 해설위원으로서도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일은 각자 특색이 있고 필요로 하는 부분, 재능의 영역이 다 다릅니다. 스타플레이어 출신이라 잘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선수였다고 못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지도자나 해설위원으로서는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죠.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철저한 준비와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확실하게 준비가 된 상태에서 발을 딛어야지 이름값만 가지고 일단 들어가서 경험을 쌓고 배워나간다? 그것은 프로로서 자세는 아닌 것 같아요. 프로팀 지도자, 방송사 해설위원 등 모두 프로의 영역이잖아요. 별다른 준비 없이 그러한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절벽을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서 욕심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Q.동아고 시절, 중앙대 저학년 시절 명성이 대단하셨어요. 역대급 기대주로 평가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솔직히 지금 얘기를 들으면 창피하기는 한데 그때는 그런 이야기도 좀 듣고 그러기는 했어요. 사실 저는 슈터 이미지가 강하기는 하지만 학창시절에는 포인트가드만 안 했지 센터, 포워드 등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다 경험하고 실제로 올어라운드 플레이어로 뛰었습니다. 본격적인 슈터수업은 대학에 들어가서 시작하게 된 케이스입니다.
Q.중앙대 1학년이던 1995년,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맹활약하면서 한국을 11년만의 우승으로 이끌고 MVP, 베스트5, 3점슛상까지 휩쓸었습니다.
이전 이후에도 열심히 안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는 정말 아무 생각 안 하고 정말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어느 정도 운도 따라줬고요. 해당 대회에 참가했을 때가 고3 겨울이었어요. 제가 대표팀에 합류를 제일 늦게 했어요. 중앙대에 먼저 들어가서 수개월 동안 훈련을 하고 그로 인해 늦게 합류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인지 군기가 바짝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경기를 뛰었던 것 같아요. 다른 친구들은 말 그대로 고등학교 분위기였는데 저는 신입생으로 대학에서 먼저 특공대 훈련을 마치고 들어온 상태인지라 마음가짐이 더 남달랐지 않나 싶어요.
Q.결승에서 만난 중국의 신장이 엄청났죠. 당시 맞붙었던 중국선수들 기억나시나요?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중국 선수들 참 크죠. 엄청난 선수층에서 추리고 추려서 뽑힌 선수들인지라 일단 사이즈에서부터 압도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희보다 훨씬 컸죠. 특히 왕즈즈는 신장이 216cm이었나? 쓱 보기에도 엄청 컸어요. 다들 아시다시피 이후 NBA도 진출했을 정도로 기량이 특출났고요. 그런 팀을 조직력으로 이겼다는 게 참 대단했던 것 같아요.
Q.다른 대학교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학교 내 군기(?)가 세던 시절이었어요.
아우, 장난 아니었죠. 앞서도 말씀 드렸지만 특공대 훈련받는 줄 알았어요. 훈련도 세고 기강도 엄격한 편이었죠. 정신적, 육체적으로 다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있는 학교만 그런 게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와 문화(?) 자체가 다 그랬습니다. 디테일하게 예를 들면서까지는 말씀 못 드리겠어요. 괜스레 당시 지도자분들을 욕되게 할까 봐요. 특정 누군가가 나쁘다기보다는 시대상이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 세대들에게 이야기하면 와닿지도 않을뿐더러 이제는 바뀌어 가고 있으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현재 지도자의 대부분은 구세대의 교육을 받고 신세대를 가르치다 보니 서로 쉽지 않은 부분도 발생하는 듯 싶어요. 저도 그러한 부분을 항상 염두에 두고 눈높이를 맞춰가려고 노력 중입니다.
Q.1~2학년때는 전력이 강하지 못하다가 3~4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송영진, 김주성 등 걸출한 후배들이 속속 들어왔어요.
그렇죠. 1~2학년 때는 굵직굵직한 선배들이 졸업을 하고 잠시 조용했다가 이후 좋은 후배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개인적으로 3학년 때는 부상 때문에 좀 힘들었고요. 4학년 들어서 강한 멤버들과 호흡을 맞춰나가며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김)주성이, (송)영진이 같이 높이와 운동능력을 겸비한 선수들이 함께 해주니 슈터로서 편하게 농구를 했죠. 슛 던지기도 편하고 플레이 자체를 여유 있게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어시스트왕을 했으니까요. 패스를 주고 잘 해결해주는 후배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장훈이 형 시절의 연세대 선배님들 느낌을 알겠더라고요(웃음).

Q.1999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2번으로 프로에 입성하셨어요. 2순위면 높은 순위이기는 하지만 중앙대 입학할 무렵만 해도 동학년 부동의 1위로 평가받았었는데, 살짝 자존심이 상하지 않으셨을까요?
순위로 말하자면 잠깐, 5초 정도 기분이 상했을까 싶기도 하지만요. 팀으로 봤을 때는 대만족이었습니다. (조)상현이는 광주 나산(현 수원 KT)에 지명되었고 저는 대구 동양에 입단했잖아요. 팀으로서는 제가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1~5순위까지는 연봉이 같거나 비슷했을 거예요. 연고지도, 숙소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상현이나 저나 각자를 필요로 하는 팀에 잘 같던 것 같습니다.
Q.당시 드래프트에서 걸출한 슈터가 줄줄이 뽑혔습니다. 1순위 조상현, 2순위 조우현, 3순위 김성철까지. 단순히 슈터로만 집중해보면 역대 최고 드래프트가 아닐까 싶어요. 각자의 차이점과 플레이 스타일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글쎄요. 제가 감히 평가하기는 조심스럽네요. 평가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려 볼게요. (김)성철이가 들으면 서운할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에 슈터하면 저하고 (조)상현이 밖에 생각이 안 들어요. 상현이 같은 경우 대표팀에서도 많이 봤지만 자신에게 온 찬스를 침착하게 성공시키는 능력이 뛰어나요. 안정감이 뛰어난 슈터라고 할 수 있죠. 단순히 슈터라는 개념에서 본다면 저는 상현이보다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고요. 대신 패스 능력, 드라이브인 등 이것저것 다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제가 낫다고 봐요. 하지만 슈터 자체를 놓고 완성도를 말한다면 당시 드래프트에서 최고는 단연 상현이라고 봅니다.
“갑자기 포인트가드를 하게 된 이유요?”
Q.두 번째 시즌을 앞두고 창원 LG로 트레이드되셨어요. 중앙대 시절 은사님도 계시고 선수 본인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동양에 있을 때는 부상도 있었고 벤치를 들락날락하다 보니까 컨디션 유지도 힘들었고, 잘 적응을 못했던 것 같아요. 심적으로 급해지는 부분도 있었고요. LG로 가게 된 것은 새로운 곳에서 기회도 받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선수로서는 좋았다고 볼 수 있죠. 김태환 감독님은 대학교 4학년 때 은사셨는데 그때도 공격적으로 농구를 펼치셨던 분이고 이미 한번 겪어봤기 때문에 함께 하는 게 편했습니다. 코트 안에서는 엄하지만, 밖에서는 따뜻하고 부드러우세요. 선수로서도 그랬지만 이후 지도자 생활을 할 때도 그분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적지 않다고 봐요. 어쨌든 그 당시에는 은사님이 불러주셔서 정말 감사했죠. 저를 필요로 해서 부르신 것이고 농구에 대한 스트레스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자연스레 플레이도 더 좋아질 수 있었고요.
Q.조성원, 에릭 이버츠라는 리그 최고의 슈팅 머신들과 함께 했어요. 당시 언론이나 팬들 사이에서 ‘조조이 트리오’라고 불렸던 기억도 납니다. 서로 호흡은 어땠나요?
감독님께서 전체적으로 공격적인 플레이를 선호하셨어요. 단순히 3점슛만 많이 쏜다기보다는 속공도 강조하셨고 수비할 때도 트랩디펜스, 스틸 시도 등 공격적으로 임할 것을 주문하시는 편이었죠. 단순한 공격농구가 아니에요. 공수에서 공격적인 플레이라고 하는 게 맞을 거예요. 당시 (조)성원형이 슛도 좋고 워낙 빨랐잖아요. 이버츠나 저도 슛이 좋고 스피드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다 보니 전체적인 팀오펜스 자체가 빠르게 돌아갔어요. 공격 시간도 짧아지고 횟수는 많아지는 등 장점이 부각됐죠.

이적 첫 시즌에는 오성식 선배님이 계셔서 조직력이 좋았어요. 하지만 감독님께서 원하시는 빠른 스타일은 잘 안 나왔어요. 당시 선배님께서 노장이다 보니까 스피드적인 부분에서 아쉬움이 있었죠. 다음 시즌부터 제가 포인트가드를 보게 되면서 빠른 농구라는 측면에서는 더 나았던 것 같아요. 물론 오성식 선배님보다 제가 1번으로서의 기량이 낫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당시 감독님께서 추구하는 농구에 맞았다는 것이죠. 앞서도 말했듯이 저, 이버츠, 성원이 형 모두 슈팅, 스피드를 갖춰 그런 색깔을 내는 게 편했어요. 제가 포인트가드를 볼 때는 성원이 형, 이버츠가 항상 함께 뛰어주고 자리도 잘 잡고 있었던지라 패스를 주기가 아주 좋았죠. 거기에 상대 수비가 두 선수에게 몰리면 제가 직접 해결하기도 하고요. 호흡이 아주 잘 맞는 삼각편대였습니다.
Q.1번을 보게 된 배경에는 포지션 정리 문제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 문제도 없다고 볼 수는 없죠. 성원이 형은 부동의 토종 에이스였고요. 당시에는 외국선수도 2명이 뛰었잖아요. 거기에 신인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송영진이라는 후배도 들어왔고요. 저희가 당시 높이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어요. 송영진 같은 높이와 스피드를 갖춘 루키는 무조건 키워야 되는 입장이었죠. 그렇게 되자 제 자리가 없어졌어요. 오성식, 조성원, 이버츠, 송영진에 또 다른 외국선수까지 베스트5가 꽉 차게 된 거죠. 시즌 초에는 주로 식스맨으로 출전했어요. 그러다가 감독님에게 면담을 요청했는데 “팀 공격이 더 빨라졌으면 좋겠는데 1번으로서 그러한 역할을 해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포지션 문제를 신경 쓸 겨를도 없었고다. 나이도 젊고 이래저래 굶주려있던 상태였거든요. 주전으로 살아남으려면 1번을 보는 쪽이 유리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죠. 경기장에 나가서는 다른 것 없었습니다. 무조건 속공을 펼치려 했죠. 공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고 빨리빨리 돌려서 스피드업을 계속 유도했습니다.

Q.질 좋은 패스를 줄 빼어난 1번, 리바운드를 잡아주고 스크린을 걸어줄 토종 빅맨이 있으면 슈터의 위력은 배가되죠. 안타깝게도 프로 생활 내내 그러한 선수들과 제대로 뛰어보지 못하셨어요. 그 조건이 충족된 KCC 시절에는 사실상 제대로 뛰지 못하셨고요.
그런 부분은 크게 생각을 하지 않았었는데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네요. 프로에서 한창 뛸 때는 신장이 큰 국내선수도, 아주 뛰어난 1번하고도 함께 해보지를 못한 것 같아요. 좋은 포인트가드와 토종 빅맨 조합. 모든 슈터라면 꿈꾸는 상황이죠. 이른바 시너지효과가 높아서 서로를 업그레이드시켜 줄 수 있는 조합이잖아요. 하지만 그런 구성은 저뿐만 아니라 정말 쉽지 않아요. 연세대 시절 이상민, 문경은, 서장훈 조합이 그랬을까요.
Q.활약에 비해 전주 팬들 사이에서 인기가 엄청났어요. 이유는 아시죠?
아, 제가 인기가 많았었나요?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요.
Q.경기에 못 나오다가 교체멤버로 첫 출전한 날이 있는데 그때 전주 팬들의 함성이 엄청났습니다. 이미 몸풀 때부터 “조우현 나온다. 조우현” 하면서 술렁거리는 분위기였죠.
(우현둥절)그…. 그랬나요? 기억이 안 납니다. 워낙 전주 팬들이 열성적인지라 함성은 많이 들었지만 저를 향해 함성이 들려 온다? 그런 것은 특별히 느껴보지 못한 것 같아요. 그때는 벤치에 있을 때가 많아서 팬들의 반응이나 그런 것들을 의식하지 못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싶네요. 팀을 옮긴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요.
Q.‘벤치의 엄마’로 불릴 정도였어요. 본래 벤치에서 감독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후배들을 잘 챙기시는 스타일이었나요?
기사는 봤던 기억이 납니다. (추)승균이 형이 코트에서 아버지 역할을 해주고 제가 벤치에서 엄마 역할을 해준다는 내용이었죠. 그 당시에는 그런 역할을 해줄 베테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당장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부터 한 거죠. 솔직히 저도 젊은 시절에는 그러지 못했어요. 젊은 선수들 같은 경우 한창 에너지가 넘치기 때문에 경기를 많이 뛰고 싶은 욕심도 강하고, 뜻대로 안 될 경우 화가 나거나 감독님에게 서운한 부분도 생기죠. 저도 그랬고요.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깨닫게 되고 내려놓는 법도 배우게 되더라고요. 당시에는 승균이 형 다음 고참이 저였기 때문에 팀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더라고요. 고참이 경기 못 뛴다고 퉁퉁 부어있으면서 분위기 망치면 그것만큼 꼴불견이 어디 있겠어요. 후배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
Q.작전타임 때 집중하는 것 외에 어떤 방식으로 벤치 분위기를 올리셨나요?
경기에서는 승균이 형이 리더 역할을 해주지만 벤치로 왔을 때 제가 할 일도 있을 것 같더라고요. 당시 KCC는 강병현, 하승진, 신명호 등 젊은 선수들이 많았잖아요. 에너지는 넘치지만 심리적으로는 쉽게 흔들릴 수 있는 나이거든요. 저는 그런 부분을 챙겨주고 싶었어요. 허재 감독님이 좀 엄한 스타일이잖아요. 경기장에서 뛸 때나 벤치로 돌아왔을 때나 젊은 선수들을 다그치는 모습을 많이 보이셨어요. 그럴 경우 젊은 선수들은 말은 못하지만 심리적으로 데미지가 쌓일 수 있어요. 제가 그랬기 때문에 알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토닥여주기도 해야죠. 그러다 보니 (강)병현이, (하)승진이 등 후배들하고 얘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그런 부분이 카메라에 많이 잡힌 것 같아요. 승진이는 피터팬, 소녀 같은 부분도 있고 럭비공같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예요. 훈련하다가 뛰쳐나가기도 하고 이래저래 민감한 성격이죠. 거기에 자유투로 인한 스트레스도 되게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자유투를 백보드를 맞춰서 쏘면 어떻겠냐고 처음 권유를 하기도 했어요. 병현이 같은 경우 기대가 커서 그런지 몰라도 감독님이 많이 혼냈어요. LG 시절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때는 감독님이 젊은 선수들을 참 많이 혼냈어요. (송)영진이라든가 (황)진원이라든가. 저 같은 경우야 대학 시절부터 워낙 이골이 나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요. 그때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병현이가 받는 스트레스를 덜어주고 싶었어요. 솔직히 저라고 왜 경기를 뛰고 싶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나이 먹고 마냥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현실을 직시해야죠.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실제로 경기를 많이 뛰는 선수처럼 몰입하게 되고 팽팽한 접전 등에서 함께 몸이 달아오르고 그러더라고요.
Q.기억에 남는 외국선수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LG에 있을 때 함께 뛰었던 테런스 블랙이 먼저 떠오릅니다. 공격적인 농구에 있어서는 한몫을 했던 선수죠. 신장이 큰 편은 아니지만 잘 달려주고 탄력도 좋고 슛도 나쁘지 않았어요. 속공 농구에 잘 어울렸던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성격도 온순해서 동료들과의 관계도 좋았어요. 그리고 KCC 시절을 떠올리면 그 타이슨 같이 생긴 선수가 있었는데…, 아이반 존슨이 기억에 남습니다. 실력은 좋았지만 컨트롤 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팀을 수시로 어렵게 했던 선수였죠.
Q.‘육각슈터’라는 별명은 마음에 드십니까? 이전에 인터뷰했던 김영만님은 ‘당랑슈터’라는 별명이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김)영만이 형은 슛 폼 때문에 붙은 별명이지만 저는 오로지 얼굴 때문에 그런 닉네임이 따라붙었잖아요. 기분이 나빠도 제가 더 나빠야죠(웃음). 제가 얼굴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편이었거든요. 말이 ‘육각슈터’지 그냥 얼굴이 육각이라는 의미고 슈터는 큰 의미 없이 따라붙은 거잖아요. 솔직히 큰 불만은 없어요. 간혹 학부모들께서 저를 기억해주시고 그러는데 거기에는 ‘육각슈터’라는 별명도 한몫하지 않았나 싶어요. 이미지라는 게 한번 각인되면 지워지지 않는 건데, 그만큼 인상적이었던 별명 같아요.
Q.기혼이신가요? 그렇다면 자녀들은 어떻게 되시고 농구를 하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딸 둘이고 큰딸은 중학교 2학년, 둘째 딸이 늦둥이라 6살이에요. 운동은 전혀 안 시키고 있습니다. 제가 워낙 운동을 하면서 고생을 많이 해서 운동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딸이 아니라 아들이라고 했어도 마찬가지였을 거에요. 공부도 잘하니까 본인들이 좋아하는 길을 가면 되는 것이죠.

기억해주시는 분들에게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덕분에 당시도 떠오릅니다. 그때 좀 더 열심히 할 걸, 그때 좀 더 잘할 걸 하는 후회도 드는 게 사실이고요. 인생이라는 것은 항상 지나고 나면 아쉬움이 남으니 할 수 있을 때 더 열심히 해야 되는 것 같아요. ‘육각슈터’로 기억해주시는 분들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코로나19 시대라 마스크를 써야 하기 때문에 알아보기가 더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알아 보고 아는 척 해주시면 살갑게 인사드리겠습니다. 이제는 농구선수 조우현보다는 레슨계의 조우현으로 기억해주세요. 선수 생활을 꿈꾸거나 그러지 않더라도 그저 농구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 많더라고요. 그분들과 오랫동안 함께하면서 즐기는 농구를 최대한 많이 퍼트리고 싶은 게 꿈입니다. 다들 농구 많이 사랑해주세요.
#글 / 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 본인, KBL 제공
◇ 필자는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농구를 사랑하던 오랜 팬으로 2002-2003년 본지에 농구 무협소설 '해동전설(海東傳說)''을 연재한 바 있으며 데일리안, 홀로스, 올레, 오마이뉴스 등 다양한 인터넷 매체에서 스포츠 객원기자로 활동한바 있다. [김종수의 농구人터뷰]를 통해 전현직 농구인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시각으로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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