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 콤플렉스, 그리고 계란 또는 겨란

/ 기사승인 : 2022-05-03 14:3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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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의 『갈채와의 밀어』 다시 읽기㉓

청소년기의 김영기는 줄곧 체격이 작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갈채와의 밀어』에는 김영기가 작은 체격(요즘 미디어에서 ‘사이즈’나 ‘피지컬’ 등으로 표기하는)과 약한 체질과 체력 때문에 고민했다는 대목이 여러 번 나온다. 그는 몸이 작아 불리하다고,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걱정한 것 같다.


「피와 모래」라는 장(章)을 열면 61쪽에 “나는 일반선수에 비해서 약체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고민거리였다.”는 김영기의 고백이 나온다. 훗날 대한민국 농구의 전설이 될 소년의 자존감은 이토록 약했다. 자신의 자리를 배재고등학교 농구부라는 집단의 아래쪽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아직도 ‘일반선수’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연습에는 별다른 진전을 찾을 수 없었다. 초조와 아울러 회의가 물밀 듯이 일어났다. 이 약골로 운동을 해서 대성(大成)할 수 있을까? 내 키는 왜 이렇게 작을까? 이 작은 키로써 농구로 성공할 수 있을까?”

고민은 열여덟 살 소년의 가슴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이 고민은 보기에 따라 소년 김영기를 큰 선수로 키우는 자양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한 시대를 수놓은 김영기의 기술 농구는 단신(短身)의 불리함을 극복하려는 노력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건 한참 뒤의 이야기다. 이 무렵 김영기의 고민은 간단한 과제가 아니었다. ‘운동부 순회대사’ 노릇을 하던 때를 생각해서 쉽사리 입 밖에 내놓지 못했을 뿐이다.

김영기의 훈련량은 엄청났다. 근심을 간직한 채 거듭되는 훈련은 도를 지나친 면이 있었다. 소년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몸을 혹사했으므로 아침에 쉽사리 눈을 뜨기 어려웠음은 물론이다. 축 늘어진 몸으로 이부자리를 걷어차고 일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방바닥에서 몸을 떼어내는 데만도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언제부터인가 어머니가 계단을 걸어 올라와 아들을 깨우는 일이 잦아졌다.

“영기야, 영기야!”
김영기는 아직도 잠결이다.
“얘, 아직 자니? 오늘은 늦었어!”
김영기는 속으로 불평했다. ‘젠장, 학교에 가려면 아직 세 시간도 더 남았는데 늦기는….’ 어머니는 문밖에 선 채 아들을 재촉했다.
“얘, 영기야! 오늘은 훈련에 늦겠단 말이야! 얘, 영기야!”
농구에 미친 소년 아닌가. ‘훈련’에 늦겠다고 하는데 모르는 척하고 누워 있을 수는 없다.
“예, 알았어요.”

어머니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먼 잠길에서 들렸다. 김영기는 잠깐 고민했다. 그냥 자 버릴까. 그러나 농구가 좋아서 하겠다고 발버둥 치던 때를 생각하면 결국 몸을 벌떡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영기가 옷을 입고 농구화를 신을 때, 어머니는 부엌문을 열고 나와 아들에게 날계란을 내밀었다. 이 날계란은 매일 김영기의 식전 공복을 메우는 중요한 메뉴였다. 어머니는 손수 날계란 껍질을 깨서 먹기 좋게 만들어 주었다. 김영기는 “이 식전의 날계란은 어머니가 깨 주시는 게 아니면 맛이 없었다.”고 적었다. 아침나절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는 짧은 대화가 오갔다.

“얘, 그리고… 그 남산 약수터에 올라가면, 잠깐 쉬어서 약수물 좀 마셔라! 그 약수물이 사람 몸에 그렇게 좋다는구나.”
“그렇지 않아도 매일 마시는걸요. 우선 목이 말라서요.”
“그렇다고 너무 많이 마시면 몸에 해롭대. 알맞게 한 두어 모금만 마셔.”
“예, 알았어요!”

이렇게 집에서 뛰어나가 운동을 시작하는 김영기의 입 안에는 언제나 날계란의 고소한 뒷맛이 행복하게 풍기고 있었다. 『갈채와의 밀어』에는 ‘날겨란의 고수한 뒷맛’이라고 씌었다. 김영기의 책 곳곳에서 서울 방언이 보인다. 필자는 맞춤법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지만 김영기의 글을 읽으며 옛 서울말의 억양과 발음이 문득문득 그리워지기도 한다. 『갈채와의 밀어』는 문자로 고정해 둔 서울 방언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크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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