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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씨의 손길에 둘러싸인 농구예선의 히어로 김영기 선수.' (경향신문 1964년 10월 5일자 6면) |
김영기가 요코하마 프리올림픽에서 기록한 총득점은 경향신문의 1964년 10월 5일자 7면 인터뷰, 조선일보의 10월 6일자 3면 박스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보도에 따르면 김영기는 9경기에서 197점을 기록하였다. 경기당 21.9득점이다. 김영기가 출전한 여러 국제대회 가운데, 그의 개인득점 기록을 모두 확인할 수 있는 대회는 두 차례 올림픽(멜버른과 도쿄)과 요코하마 프리올림픽이다. 매 경기 김영기의 득점기록을 보도한 신문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한 시대를 지배한 위대한 선수가 세계를 상대로 싸운 결과를 확인하고 그 눈부신 기량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경기 현장을 취재하는 미디어의 기록과 숫자에 대한 책임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증명된다.
숫자를 대하는 미디어의 태도는 우리나라에서 프로스포츠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뒤 매우 진지해졌다고 본다. 나는 축구전문기자인 김덕기 선배, 농구전문기자인 이병진 선배들에게서 스포츠에 있어 숫자의 의미와 가치, 필수불가결함을 배웠다. 그러나 한 번도 그 분들처럼 철두철미하고 치열해 보지는 못했다. 아주 불행한 일이지만 나는 인간과 영감(靈感), 숙명, 혼(魂)과 의지 같은 추상적인 것들에 자주 이끌렸다. 아무튼 현대 스포츠는 틀림없이 숫자와 관련이 있다. 골프나 야구 같은 종목에서 숫자를 빼면 뭐가 남겠는가? 숫자는 선수의 경기력을 보여주는 지표로서 매우 신뢰할 수 있다. 물론 정량평가의 약점이나 맹점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대한민국 남자농구의 올림픽 본선 진출을 계기로 김영기에 주목한 기사가 폭발적으로 여러 신문을 장식하고 있다. 10월 5일자 경향신문 7면의 인터뷰 기사 대문은 ‘세계의 얼굴’, 기사 제목은 ‘조금만 더 컸더라면’이다. 같은 신문 6면에는 ‘요코하마에 빛 남긴 동양굴지(東洋屈指)의 호프’라는 제목 아래 큼직한 사진이 한 장 실렸다. 사진설명은 ‘아가씨의 손길에 둘러싸인 농구예선의 히어로 김영기 선수. 한국의 본선 진출이 확정되자 그는 수많은 국내외 팬으로부터 수급(首級-으뜸. 필자 주) 공로자로서 환성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클로즈업’이라는 대문을 건 조선일보의 10월 6일자 3면 인물난(欄)에는 ‘이 사람이 김영기 선수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먼저 경향신문의 인터뷰 기사를 보자.
本選진출로 이끈 金永基 선수 5分間 인터뷰
요코하마 농구예선 리그에서 한국을 본선으로 이끈 사나이는 김영기였다. 키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세계 베스트멤버로 손색이 없다는 전문가들의 평이 이를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여러 번 국제무대에서 싸워보았습니다. 그러나 올림픽 대회에 나가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사실과 차이가 있다. 이미 기술한 대로 김영기는 멜버른올림픽에 출전했고, 도쿄올림픽은 그의 두 번째 올림픽 무대였다.-필자 주) 앞으로도 힘껏 싸우겠습니다.”
본사 기자와 단독으로 만난 김 선수는 이렇게 다짐했다. 이번 리그에서 농구만능선수라고 전문가들의 주목을 끈 김영기 선수는 197점을 얻어 개인득점에서도 단연 수위였다.
“첫날 대 쿠바 게임에서 저는 옆구리와 왼쪽무릎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김영일 군도 눈에 부상을 입고…. 아무튼 전반 게임을 저는 문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된 채 이를 악물고 싸웠습니다. 아마추어 스포츠 선수들이 왜 그렇게 러프한 플레이를 하면서까지 상대선수들을 골탕 먹이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직도 몸의 컨디션이 정상이 못 된다는 김영기 선수는 “본선 진출로 선수들의 정신상태가 갑자기 풀려 이런 창피를 당하게 되었다.”고 파이널 게임에서 대패당한 분이 삭지 않은 채 의미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본선에 진출한 것은 코치와 동료선수들의 굳게 뭉친 팀워크 그리고 동료들의 뜨거운 성원 때문이었다고 겸손을 보이며 “2m에 가까운 장신 선수들이 가로막고 있으면 앞이 캄캄하더군요. 그런대로 우리 선수들은 연일 격전을 한 뒤라 피로에 몰렸고. 스태미나와 테크닉 그리고 신장 면에서 모두 뒤떨어진 것은 숨길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태극기를 손에 들고 연일 목이 터져라 성원해준 교포들의 뜨거운 동포애 때문이라고 할지…. 본선에 진출하게 된 것은 기쁠 뿐입니다.”
집에서는 외아들로 태어났고 직장(企銀)에서는 모범행원으로 그리고 코트에서는 공방에서 뛰어난 플레이어로 갈채를 받는 김영기 선수.
“참 많이 배웠고 동남아 선수들의 비할 바 없이 폭넓은 시야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제가 키가 작다고 열등의식을 갖진 않습니다. 생각한들 소용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 키가 큰 선수들을 맞아 잘 싸울 수 있나 하는 생각으로 저의 마음은 가득 찼습니다.” (후략)
조선일보의 ‘클로즈업’ 기사는 작은 제목 세 줄로 김영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름 석 자 世界에 떨친 ‘東洋 第一’
個人得點 第2位…中學 2學年부터 籠球 시작
‘키 작은 天才’…妙技로 長身을 꺾어
내용을 조금 읽어보자
“이번 요코하마 예선에서 가장 우수한 선수를 고른다면 나는 한국의 김영기 선수를 들겠습니다.”
“나의 견해로는 한국의 김영기 선수가 이번 예선전에서 최고의 선수라고 확신합니다.”
도쿄올림픽 출전자격을 얻기 위한 요코하마 농구예선대회가 끝난 4일, 오스트레일리아 팀의 코치 넬러 씨와 캐나다 팀의 인골드슨 코치는 이렇게 입을 모아 김영기 선수를 격찬했다. 이미 해외원정을 통해 아시아 제일이라고 알려졌던 우리의 젊은 자랑 김영기 선수는 이번 요코하마 예선을 통해 세계적인 플레이어로 각광을 받았다. (중략)
1m78- 농구선수로서는 동양인으로도 비교적 작은 키에 속하는 그가 2m가 넘는 장신의 외국선수들 틈바구니를 뚫고 교묘한 드라이브 인을 감행할 때, 그리고 깨끗하게 집어던지는 중거리 슛이 바스켓을 빠져 내릴 때, 관중들은 넋을 잃고 그에게 그저 박수와 함성만을 보냈다. (후략)
이때가 김영기 농구의 전성기 아니었을까? 그의 영광의 시간들. 대한민국 남자농구는 1969년과 1970년에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와 아시아경기대회를 잇달아 석권하면서 비로소 아시아 정상으로 발돋움한다. 이 영광의 순간을 함께 한 선수들은 김영일, 김인건, 이인표, 신동파, 유희형 등이다. 김영기는 한 시대를 수놓은 이들 전설들의 등장에 앞서 선지자이거나 예언자처럼 기틀을 다진 존재, 우리 농구의 가능성을 증명한 천재로서 우뚝하다. 조금 과장하자면, 김영기는 우리가 살아온 한 시대에 의미를 부여한 아이콘으로서 지도자적 위치에 도달한 스포츠 영웅이 아닐까. 내가 이런 생각을 굳혔을 때는 경향신문의 1964년 10월 8일자 1면 ‘여적(餘滴)’ 난에 실린 글을 읽은 다음이다.
올림픽 붐은 농구예선에서 열을 올리기 시작했었다. 어디를 가나 농구예선전의 그 중계방송 이야기였다. 멕시코 팀에 한 점 차로 패배하였을 때는 직장에서 잠시 일손들을 멈추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재미있는 것은 라디오의 중계방송을 듣던 시민들의 여론이었다.
시장 길가에 있는 라디오방 스피커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제각기 관전평(?) 한 마디씩 했다. 아마추어 팬들의 평은 물론 유치했지만 무언가 마음을 찌르는 데가 있었다. 한국인은 절대로 외국인들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신념이 그들의 공통적인 견해였다.
“스포츠는 세계적인 수준이에요. 남들은 돈을 물처럼 쓰면서 선수들을 훈련시키지만 우리는 어디 그렇습니까? 그래도 곧잘 하거든요.”
“스포츠뿐만 아니라 노래도 잘 불러요. 김시스터즈니 김치캐츠니 해서 미국의 흥행가(興行街)에서 한판 단단히 붙고 있거든요.”
농구 이야기가 연예계로 비약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학생 차림의 청년이 한마디 한다.
“불란서(프랑스-필자 주)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탄 것도 한국인 아닙니까? 그리고 지금 『순교자(殉敎者)』라는 소설이 미국 독서계를 휩쓸고 있는데 그 작가 역시 한국인(김은국-필자 주)이거든요.”
소박한 민족우월론이 설왕설래하고 있을 때 실직자처럼 보이는 남루한 중년 신사 하나가 못을 박았다.
“옳은 말씀이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못하는 것이 정치 아니겠소.”
좌중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천만에… 정치도 남한테 지지 않아요. 그렇게 엉터리없이 정치를 하면서도 그들은 굶어죽지 않고 누구보다도 잘 살거든요. 그게 다 재주지요. 외국 같으면 아마 그런 정치가들은 모두 쫓겨났을 텐데, 그러고서도 큰소리는 혼자 치는 것을 보면 어디 보통 솜씨입니까?”
갑자기 좌중은 조용해졌다. 무엇인가 제각각 설움들이 복받쳐 올라왔던 모양이다. 단순한 농이 아니라, 뼈가 있는 말들이었다. 농구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 화제의 대부분은 정치로써 결론을 맺는다. 정치의 빈곤, 지도자의 빈곤… 거의 숙명적인 과제인 것 같다. 모 출판사에서 나온 현대위인선집에는 처칠, 드골, 네루, 막사이사이, 맥아더의 회고록들이 나온다. 그것을 읽어가며 느낀 것은 역시 한국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가의 역량이라고 생각되었다. 연예계나 체육계의 위인들은 더러 있다. 과연 김영기만큼이라도 국민들의 칭찬과 신뢰를 받는 정치가가 우리 주변에 있을 것인가?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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